Falkland戰爭과 大英帝國
한 경 대 학 교
교수 김병일
1. 전략적 요충지 포클랜드 제도
포클랜드 제도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대립
군사 전략가인 A.마한은 저서 “해상권력사론” 에서 “씨파워 (sea power) 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해군력” 과 상선 그리고
“항구” 를 거론하고있다.
영국은 그 해상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국력이 쇠퇴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식만지를 포기했다.
이 와중에도 지브롤터, 홍콩, 희망봉등의 초크 포인트(해상 교통의 요충지)들을 유지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인것도
이 “씨파워”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대립
만약 파나마 운하가 어떤이유로든 지나갈 수 없게 되면,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상선들이 포클랜드를 거쳐야 한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에서 도망친 독일 동양함대와
이들에 맞서 매복 작전을 펼친 영국 함대 사이에 서 해전이 일어났다.
(포클랜드 해전)
1982년에는 세로운 포클랜드 분쟁의 조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친미국가인 아르헨티나와, 몰락일로를 걷고있는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에
두 나라가 휩싸이고 있었다.
포클랜드인가 말비나스인가?
포클랜드 인가 말비나스 인가?
• 아르헨티나가 ‘말비나스’라고 부르는 이 섬은 1690년 영국의 존 스트롱이 처 음으로 상륙한 기록이 있다. 1764년 프랑스 왕국의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 이 처음으로 정착민을 데려와 살게 했다. 이 후, 섬에 정착했던 프랑스 정착 민들은1766년에 이 섬의 권리를 스페인에게 판다. 그 후 50년간 영국과 스 페인은 이 섬의 일부를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
• 1766년에 영국인들은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영국 정착촌 을 세웠고 프랑스 정착촌을 넘겨받은 스페인과 영국이1771년 전쟁을 벌일 뻔하기도 했으나, 영국은1774년, 스페인은 1811년에 각각 경제적인 이유로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한 이후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이 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했다.
포클랜드 아르헨티나가 점령
• 1833년 영국은 해적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변 해역의 안전보장을 위해 서 전함을 보내서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점유한다.
• 이때 영국이 아르헨티나 식민자들을 내쫓았다는 주장이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 소스에서 영국 측이 오 히려 식민자들에게 남을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
• 그 후 100여 년 동안 영국이 이 섬을 지배한다.
1973년 아르헨티나가 이 섬에 대해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고, 평화 적인 해결을 권고한 유엔의 결의에 따라1973년부터 영국과 협상을 시작했 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서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토 문 제 해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 선언한다. 이로써 영국 과 갈등을 겪는다.
영국의 입장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총리 마거릿 대처는 아르헨티나에게 포클랜 드 섬을 빼앗기자 발빠르게 움직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국의 편에 서도록 종용했다.
미국의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아주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들었으며 심 지어는 아르헨티나를 국가가 아닌 테러단체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칠레의피노체트 역시 자국의 영공을 영국 군대에 개방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정책이 포틀랜드 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이 당시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은해병대 코만도 소속 수십 명에 불 과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분쟁 발발 즉시포로가 되었다.
*동영상 자료 시청
영국의 당시 사회분위기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했 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은아르헨티나에 의 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한다.
유엔총회는 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을 결의했 고, 이에 따라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회담을 시작하
였다
이후1982년 2월까지 꾸준히 협상이 지속됐으나, 영국으로서는 이 협상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고,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협상이 진행되 고 있지 않고 있다며, 협상이 신속히 진행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
머나먼 포클랜드 제도
전면전 양상을 갖추는 양군
아르헨티나의 입장
당시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와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를 극복하려고 외국자본의 도입이 이루어졌지만 이자율이 급상승하고, 기업 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은 극심해졌다.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신 자유주의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외채는 더더욱 불어 났다.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으며, 경제 상황은 악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고,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
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
아르헨티나의 입장
이러한 내부적 요인으로 전쟁으로 국내의 단결을 꾀할 필요성과 함께, 포클랜드 제 도의 영국군은 소수여서 기습으로 손쉽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점이 작용했다.
한편,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인 아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 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 무엇보다 영국이 몇 해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진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영국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아르헨티나의 작전 개시 직전의 포클랜도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이 존재하지 않았다.
의료진조차 아르헨티나 본국으로 가서야 영국으로가는 비행기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요소들은 아르헨티나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