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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 유골 5000여년전 것 일제가 단군신화로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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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북측은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서 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장식 등 을 발견했으며, 감정결과 유골은 5011 년전에 살았던 단군과 그 부인인 것으 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석회암지 대로 유골이 화석화해 오랫동안 보존 됐다는 설명도 있었다. 북측은 이듬해 10월 단군무덤이 발굴된 현장에서 200여m 위쪽에 단군릉을 개건(改建) 했다.

발굴된 무덤형태 고구려식

복원은 불가능했다. 발굴된 무덤의 형태가 고구려식이어서 고구려때 이 장한 것으로 추정돼 당초 단군할아버 지가 묻혔던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없 었기 때문이다. 북측은 고구려식 무덤 에서 연대측정 결과 5000년된 유골이 나왔으니 이는 분명 고구려이전의 인 물이며, 왕의 소지품이 나온 것으로 미뤄 왕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북측 은 나아가 단군릉이 평양에 존재했다 는 근거를 댄다.

고려사와 조선시대 기록에서 평양

의 단군릉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1530년에 완성된‘신증 동 국여지승람’에“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을 내세우는 것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숙종과 영 조때 강동의 단군묘 수리-보수 기록 이 적혀있고, 정조 때 평안감사에게

“강동사또가 봄가을로 단군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 이 나온다며 자신들이 발굴한 것이 분 명 단군릉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 골의 주인공이 단군할아버지라는 논 리인 것이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보수기록

단군릉의 모양은 중국 지린성 지안 현에 있는 장군총을 본 따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장군총이 7단인 것과 달리 단군릉 은 이보다 크기가 3배 되며 9층 계단 식 돌각담무덤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변의 길이가 50m, 높이는 22m 규 모로 축조됐다. 여기에 쓰인 화강암 돌은 1994년에 개건됨을 기념해 1994 개로 짜 맞추었다고 한다. 네 모서리

마다 무서운 표정을 한 돌호랑이 수호 상이 있고, 그 앞마다 고조선의 상징 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을 높이 7m의 크기로 세웠다. 산 아래부터 능앞 제 단까지는 279단의 화강암 돌계단으로 이루어졌다. 돌계단 중간쯤 선돌 모양 을 본뜬 돌기둥을 세워 대문을 표시했 다. 대문에 들어서면 작은 광장이 나

오고 왼쪽엔 단군릉개건기념비(높이 8m)가, 오른쪽엔 단군릉수축비(높이 1.9m)가 있다. 개건기념비는 뒷면에 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노동당 총비 서의 찬양시가 새겨져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단군릉수축비. 이 비석은 일제시대인 1936년 뜻있는 사 람들이 전국에서 돈을 모아 세운 것으

로, 일제의 억압에 맞서는 민족정신 의 상징이 됐다. 일제는 그러나 단군 정신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세력을 결 집한다는 데 위기감을 갖고 이를 땅 에 묻었는데 단군릉 개건과 함께 북 측이 발굴해 다시 세웠다. 훼손이 심 각한 상태여서 북측은 유리관안에 모 셔두고 있다.

크기 장군총의 3배 달해

작은 광장에서부터 가파르게 능으 로 연결된 계단 양쪽에는 공민왕릉의 문신석과 무신석을 본 따 단군의 네 아 들과 여덟 명의 측근 신하상을 만들어 세웠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면 거대 한 재단이 있고, 역시 거대한 능을 돌 아 뒤편쪽으로 가면 무덤으로 들어가 는 문이 있다. 군복을 입은 안내원들이 상시 보초를 서는 문을 통과해‘ㄷ’자 형으로 걸어들어가면 정면 맞은편 벽 에 단군할아버지의 초상이 걸려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붉은색 두개의 관이 있다. 오른쪽이 단군왕검이고, 왼쪽이 부인의 유골을 모신 관이다. 이곳은 영 구보존해 공개되지 않고, 평양시 김일 성광장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실물크

기의 모형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유골까지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북 측을 향해“단군할아버지가 정말 실 존인물이냐”는 남측방문객들의 질문 은 공허하게만 들렸다.

어쨌든 북측은 단군릉 개건으로

‘역사현장’을 만들어 내 후세에 전하 려 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 면 이곳은 단군할아버지가 묻힌 곳으 로 기정사실화할 것이다. 그쯤되면

단군할아버지가 역사속 실존인물이 냐는 논란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 다. 유골이 있는 분을 신화적 존재라 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할아버지에 대한 북측 의 고고학적 발굴을 남북 양측이 머 리를 맞대고 연구하는 일은 마땅히

‘역사적 사명’이라는 견해가 많다.

대박산 단군릉/박영순기자

feature 17

2003년 10월22일 수요일

feature

16 2003년 10월 22일 수요일

지난 3일 개천절남북공동행사 남북 참가자들이 단군릉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북측 피바다가극단의 축하공연을 보고 있다. 정면 위쪽 하얀 건축물이 높이 22m짜리 단군릉이다. 계단 양쪽 8개 석상은 단군왕검을 모신 8명의 충신을 상징한다. 계단을 올라서 면 네아들의 석상이 양측에 2개씩 세워져 있다.

단군릉 앞 양옆을 지키는 단군의 네아들 부루, 부소, 부우, 부요의 석상(위부터).

평양 숭령전(崇靈殿)에 모셔진 단군왕검의 초상.

평양특별시에서 북동쪽으로 차를 타고 40분가량 탁 트인 강 동군 평야를 가로질러 달리면 대박산이 나온다. 평야로 발을 내린 쪽은 산세가 아기자기한 게 멀리서 보기에 소담스럽기 까지 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등성을 따라 시선을 흘려보 내다 보면 순간 산기슭에 자리잡은 거대한 흰색 피라미드를 만나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북측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곳 이‘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의 뼈가 묻힌 곳이다. 지난 3 일 개천절남북공동행사가 진행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단군 릉을 둘러보고 북측 역사학자의 견해도 들었다. /편집자주

단군릉앞 화강암 제단에 마련된 제사음식들. 예로부터 생고기를 사용한 관습 때문에 잉어 와 돼지고지 덩이가 모두 익히지 않은 상태이다.

북한한 역역사사학학계계는는 단단군군왕왕검검을을 역역사사적적 실실존존인인물물로로 선선언언 한

한 상상태태이이다다.. 지지난난 22일일 평평양양 인인민민문문화화궁궁전전에에서서 열열린린 제제 22차차 단단군군 및및 고고조조선선에에 관관한한 남남북북공공동동학학술술토토론론회회에에 발발표표 자

자로로 나나선선 북북측측 역역사사학학계계의의 거거두두 김김일일성성종종합합대대학학 김김유유철철 ((6622··역역사사학학))교교수수를를 따따로로 만만나나 견견해해를를 들들었었다다..

-단군릉의 유골이 단군할아버지라는 근거는.

▶단단군군릉릉으으로로 전전해해진진 무무덤덤에에서서 유유골골이이 나나왔왔다다.. 물물론론 뼈뼈 에

에 단단군군왕왕검검이이라라고고 써써있있는는 것것은은 아아니니지지만만 연연대대측측정정결결과과 55001111±±226677년년 된된 유유골골이이었었다다..

-무덤 형식은 고구려식이었는데.

▶고고구구려려 사사람람들들이이 이이장장하하면면서서 고고구구려려식식으으로로 꾸꾸민민 것것으으 로

로 본본다다..

-이것만으로 단군할아버지라고 보기엔 부족하지 않나.

▶ 장장 지지 연연 선선 생생 의의 위위 암암 문문 집집 에에 일

일 본본 놈놈 들들 이이 강강 동동 의의 단단 군군 릉릉 을을 도

도굴굴했했다다는는 기기록록이이 있있다다.. 도도굴굴 당

당시시 무무덤덤안안에에 선선인인((仙仙人人))으으로로 묘

묘사사된된 장장수수가가 있있었었다다는는 기기록록 이

이 있있다다.. 발발굴굴당당시시 도도굴굴범범들들이이 벽

벽화화를를 모모두두 깎깎아아버버려려 확확인인할할 수

수 없없었었지지만만,, 단단군군릉릉으으로로 전전해해 져

져오오는는 무무덤덤안안 벽벽화화속속에에 선선인인 으

으로로 묘묘사사된된 인인물물은은 단단군군일일 수수 밖

밖에에 없없다다..

-실존인물이라 확신하나.

▶우우리리도도 발발굴굴이이전전까까지지는는 실실존존인인물물이이 아아닐닐 것것이이라라고고 생생 각

각했했다다.. 신신화화적적,, 전전설설적적 인인물물로로 생생각각했했었었는는데데 뼈뼈 연연대대측측 정

정치치를를 통통해해 이이제제는는 확확고고해해졌졌다다..

-남측은 DNA분석이나 전자스핀법외에 다른 연대측정법을 시 도하자는데.

▶단단군군유유골골자자체체는는 이이제제 영영구구보보존존돼돼 할할 수수 없없다다.. 동동시시대대 것

것으으로로 보보이이는는 다다른른 뼈뼈들들은은 할할 수수 있있지지만만……..

-단군설화를 지어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일일본본사사람람들들이이 고고려려시시대대 일일연연이이 몽몽고고가가 침침입입했했을을때때 민

민족족성성을을 고고양양시시키키고고 구구심심점점을을 만만들들기기 위위해해 의의도도적적으으 로

로 ((단단군군설설화화를를))꾸꾸며며낸낸 것것이이라라고고 말말했했다다.. 하하지지만만 이이는는 좋

좋게게 보보면면 무무지지에에서서 비비롯롯된된 것것이이고고,, 냉냉정정하하게게 보보면면 단단 군

군으으로로부부터터 시시작작된된 우우리리역역사사를를 깎깎아아 내내리리려려는는 의의도도인인 것

것이이다다..

-환웅이 내려왔다는 태백산의 지명이 여러 곳인데.

▶강강원원도도 태태백백산산도도 있있고고,, 일일연연은은 묘묘향향산산이이 태태백백산산이이라라 했

했는는데데 나나는는 단단군군의의 무무덤덤이이 발발견견된된 대대박박산산을을 태태백백산산으으로로 본

본다다.. ‘‘대대박박’’은은 밝밝다다는는 뜻뜻이이고고 태태백백도도 조조선선 음음으으로로는는 밝밝 다

다는는 뜻뜻이이다다.. 무무덤덤이이 있있다다는는 것것은은 그그 분분의의 고고향향이이라라는는 뜻뜻 이

이 아아니니겠겠는는가가..

-단군설화를 다룬 한단고기, 규원사화를 북측은 어떻게 보 는지.

▶한한단단고고기기는는 위위서서라라는는 말말이이 있있는는데데,, 우우리리가가 보보기기에에도도 후

후세세에에 누누군군가가 손손을을 댄댄 것것 같같다다.. 그그러러나나 사사료료에에서서 제제쳐쳐두두 진

진 않않는는다다.. 손손댄댄 것것을을 가가려려내내는는 연연구구를를 하하고고 있있다다.. 그그러러 나

나 규규원원사사화화는는 의의미미가가 있있다다고고 본본다다.. 예예를를 들들어어 규규원원사사화화 에

에 나나온온 관관직직 이이름름이이 삼삼국국지지위위지지 동동이이전전에에 나나오오는는 것것과과 일

일치치한한다다.. 이이렇렇게게 다다른른 사사료료를를 통통해해 객객관관적적으으로로 논논증증하하 는

는 작작업업을을 하하고고 있있다다..

-단군할아버지를 신화적 존재로만 인식하는 측에 한 말씀.

▶고고고고학학적적 발발굴굴이이 이이루루어어진진 이이상상 단단군군을을 실실제제 인인물물차차원원 에

에서서 연연구구해해야야 한한다다.. 일일본본사사람람처처럼럼 신신화화적적 인인물물로로 생생각각할할 것

것이이 아아니니라라 재재음음미미하하고고 그그런런 높높이이에에서서 연연구구를를 해해보보라라..

/박영순기자

interview

“단군릉 유골 5000여년전 것 일제가 단군신화로 훼손”

김유철 김일성대학 교수

“단군 할아버지는 실존인물”

일제가 민족혼을 없애기 위해 땅에 묻었던 단군릉 수축비(왼쪽). 단군릉 아랫계단 입구의 높 이 10m짜리 선돌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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