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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海港 貿易의 發展方案에 관한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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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鎭海港 貿易의 發展方案에 관한 硏究*

A Study on the Development Plan of Jinhae Port

강용수**1)

목 차

Ⅰ. 序言

Ⅱ. 鎭海港의 發展過程 1. 진해항의 연혁 2. 진해항의 발전

Ⅲ. 鎭海港 貿易의 變遷 1. 조선시대의 진해항 무역 2. 일제시대의 진해항 무역 3. 진해항 무역의 현황

Ⅳ. 鎭海港 貿易의 發展方案 1. 신항만과 연계기능 강화

2. 무역항과 군항의 보완기능 강화 3. 연안 화물수송의 활성화 4. 지역 수출산업기지와의 연계성 5. 도로, 교통망의 확충 및 정비 6. 항만서비스기능 강화

7. 항만 마케팅 활동 강화 8. 국제해양관광산업 개발 9. 해양환경의 보호 10. 시민 친수공간 강화

Ⅴ. 結言

Key Words: Jinhae, Jinhae Port, Development of Jinhae Port, Trade of Jinhae Port Abstract

For a long time ago, Jinhae port was a point of strategic importance and important spot of trade. In 21st century, the new port is being under the construction in Jinhae to develope as a center ports of the North Asia. Because there was a huge increase in trade in this area. Accordingly, Jinhae port's importance with a new ports is getting higher as a advance base of exportation and barter. Therefore, the Jinhae port will contribute to the economic growth of Korea as well as a naval port. Since Cho-Sun dynasty, Jinhae port, which is the first opening port of Korea, has taken charge of the important role as a boundary gate and when we were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Jinhae port developed as a base of navy and advanced as a naval port rather than port for trade with Japan. Because of a natural advantage of topography.

These days, even if Jinhae port is not activated yet as a trade port, it is centtally located at the seashore which mutually links Masan free trade area, Changwon industrial complex and neighboring industrial area. Therefore Jinhae port is expected to be a center port of north asia and be a hub of developing industry followed the construction of new ports and developing industrial areas.

In Korea, the importance of port is getting higher because not only Korea has high trade dependence in economic structure but also 99.7% of exportation and importation are circulated at port. Especially, the construction of Jinhae new port, which firstly aimed at developing ports itself and around ports, is going to do an leading role of th accumulation of wealth for the country and the region around the ports. Therefore, for the Jinhae port's new development with the construction of new Jinhae ports, various plans should be drawed up.

* 이 논문은 2004년 창원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창원대학교 경상대학 무역학과 교수, 055)279-7362

(2)

Ⅰ. 序 言

진해항은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대외무역의 중심지였다. 특히 오늘날 진해시 웅 천동 제포(薺浦: 乃而浦)는 조선 초기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하자 군사기지로 설정하여 수 군만호(水軍萬戶)를 두어 왜적을 방어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태종 7년(1407) 선린정 책의 일환으로 개항장으로 지정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최초의 국제 무역항이 되었다.

또한 진해항은 구한말 군항(軍港)으로 개발된 이후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지이었을 뿐 만 아니라 일제시대이후 국제무역항(행암항)으로써 그 역할을 다하여 왔다.

특히 21세기 동북아시대를 맞아 이 지역의 항만물동량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동북아 물류중심항(허브항)으로서 새로운 면모로 발전하게 될 신항만이 건설되고 있다. 이에 신항만과 더불어 진해항은 우리나라 수출 및 항만․물류의 전진기지로서 그 중요성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따라서 진해항이 이제 군항(軍港)으로서 뿐만 아니라 향후 무역항으로서 국가 산업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진해항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 는 의미에서 항만의 발전과정과 무역사적 변천 및 그 발전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Ⅱ. 鎭海港의 發展過程

1. 진해항의 연혁

진해항은 신라시대 웅지현(熊只縣)이었으나, 신라 35대 경덕왕때 웅신현(熊神縣)으로 개명되었다1).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문종 2년(1452) 웅신현과 완포현(莞浦縣) 그리 고 천읍부곡(川邑部曲, 현 웅동지방)을 통합하여 웅천현(熊川縣)으로 개편하였다. 그 후 웅천현은 중종 5년(1510)에 웅천도호부(熊川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중종 7년(1512)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2).

조선은 고려의 지방제도를 그대로 답습해 오다가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비로소 지방제도의 일대 정리를 단행하였다. 먼저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로 나누었다. 이는 고 려의 5도양계(五道兩界)가 변천, 발달된 것으로 고종 32년(1895) 23부제(府制)가 도입되 기까지 그 본질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3).

1) 三國史記 卷第34 雜誌 第3 地理條, 「熊神縣 本熊只縣 景德王, 改名 今因之」

2) 新增東國與地腃賢 第32卷 熊川縣條, 「今上五年 平倭冠 仍陞爲 都護府 尋復爲縣 3) 內務部, 地方行政區域發展史, 1979, pp. 66~79.

(3)

1894년(甲午年) 갑신개혁(甲午改革)에 따라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 제 98호 에 의해 지방관제는 23부제(336군)로 개편되면서, 경상도에는 진주부(晋州府, 21郡), 동 래부(東萊府, 10郡), 대구부(大邱府, 23郡), 안동부(安東府, 16郡) 등 4부 70군으로 개편되 었으며. 당시 진해군이란 군명(郡名)은 현재 창원군의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등의 지 역이었으며, 현재의 진해시 지역은 당시 웅천군에 속하였다4).

그러나 23부제(府制)는 불과 1년 2개월만에 폐지되고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해 다시 13도제(道制, 8府, 1牧, 331郡)로 개편되었다. 이때 경상도가 남북양도(南北兩 道)로 분할됨에 따라 경상남도(진주)와 경상북도(대구)로 나누어졌다.5) 당시 경상남도는 1부 29군으로 도청소재지는 진주(晋州)였고 부(府)는 동래부(東萊府) 1개였다. 이때도 현 재의 진해시는 웅천군(熊川郡)이였으며 당시 진해군은 역시 진동지역이었다.

그후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8호로 창원군(昌原郡)은 창원부(昌原府)로 승격되었고, 1908년 9월 14일 칙령 제69호로 경상남도 진해군과 웅천군을 폐하여 창원부에 통합하 였다. 그리고 1910년 10월1일 총독부령에 의해 창원부를 마산부로 바꾸었다.

한편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진해만에 군항(軍港)을 건설코져 하였다6). 그리 하여 1909년 6월 30일에 진해만 시설 조사위원을 임명하고, 1910년 4월 1일 군항시설공 사(軍港施設工事)를 개시(開始)하므로써 당시 웅천군의 조그마한 농어촌이 진해라는 새 로운 이름의 군항도시로 기틀을 잡게 되었다7).

특히 진해항은 세계3대 양항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즉 태평양 방어의 오스트레일리아 의 시드니, 대서양 방어의 영국의 포츠머스, 동북아시아 방어로서 한국의 진해항을 꼽 고 있다. 한국의 군항인 진해항과 영국의 군항인 포츠머스(portsmouth)港과의 그 유사 점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8).

4) 鎭海란 지명은 본래 현 창원군 진동지역으로써 고려시대 鎭海縣이었으나, 조선시대 인조 5년 (1627)에는 창원에, 인조 7년(1629)에는 함안에 합쳐졌다가 인조 17년(1639)에 다시 鎭海縣이 되었다. 그후 고종 32년(1895)에 鎭海郡(현 창원군 진동지역)이 되었고, 1908년 당시 진해군과 웅천군이 창원부에 통합되었다.(규장각 도서(17455) 鎭海縣邑誌 및 규장각 도서(10856) 慶尙南 道 鎭海郡邑誌 參照)

5) 경상도는 중종 14년(1519)에 경상도의 사무가 번잡하다 하여 좌·우도로 나누었다. 죽 낙동강 이동(以東)은 좌도(左道)라하고, 이서(以西)는 우도(右道)라 하였다가 이 해에 다시 「폐가 되는 바가 많다」하여 한도로 합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로가 통하지 않으므로 또 다시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한 도로 합하였고 선 조 28년(1595)에도 역시 좌․우도로 나누었다가 그 다음해에 다시 합하는 등 일시적인 분도 (分道)가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여말(麗末)의 지방제도(행정구역)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6) 昌原淃案Ⅰ(1906년), 議政府 訓令 第31號, 第33號, 第42號, 第43號, 第45號 등 參照 7) 平井斌夫, 馬山と鎭海彎, 濱田新聞店, 1911, pp. 159~186 參照

8) 大韓軍港誌編纂會, 大韓軍港誌, 1954, pp.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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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항과 포츠머스항과의 비교

진 해 항 포츠머스 항

① 大韓海峽에 있어 日本을 바라본다. ① 英國海峽에 있어 프랑스를 넘어다 본다.

② 軍港 鎭海는 巨濟島가 灣을 형성했다. ② 軍港 “포츠머스”는 와이트(wight)島가 만을 형성 했다.

③ 軍港 東쪽 入口에 加德島가 防波堤로 되어 있다.

③ 軍港 東部에 하일링(Hayling) 島가 防波 堤로 되어 있다.

④ 東은 滄海, 西는 蝗害로 되어있다. ④ 東은 北海, 西는 大西洋으로 되어 있다.

⑤ 灣은 西北深入部에 馬山港이 있어 沿海航路 의 要衝에 해당한다.

⑤ 灣의西北深部에 “사우담프톤"항이 있어 要衝에 해당한다.

⑥ 灣의 南岸 巨濟島, 北岸에 長承浦가 있다. ⑥ 灣의 南岸 와이트島, 北方에 “코웨스 (cowes)港이 있다.

자료: 大韓軍港誌編纂會, 大韓軍港誌, 1954, pp. 53~54.

진해항은 군항으로서의 행정편의를 위해 1912년 도령(道令)에 의하여 마산부(馬山府) 진해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그후 1914년 3월 1일 창원군 진해면으로 개편되었 다. 다시 진해면은 1931년 4월 1일 읍(邑)으로 승격되어 창원군 진해읍이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광복을 맞이하자 한국해군의 요람지로서 해양경비대가 발 족되었고 해외귀환동포와 인접주민들의 대거입주로 1950년 시(市) 승격을 추진하던 중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동란을 계기로 육·해·공군의 교육기관인 사관학교가 집결되고 병참기지로서 군사시설이 확장되어 군항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1955년 9월 1 일 시(市)로 승격, 창원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진해시가 탄생되었다.

이와같이 세계 제일의 군항(軍港)9)이요, 한국해군의 요람지인 진해는 광복후 해군 통 제부를 비롯한 군항 도시로서 성장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산업화 과정에서 임해 공업도시와 관광도시 그리고 동북아 물류중심의 신항만 건설에 따른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제고 되고 있어 향후 성장의 귀추가 주목 되고 있다.

2. 진해항의 발전

진해항은 북위 35도 6분 39초, 동경 128도 41분 59초 지점을 중심으로 한 반경 1,500m 원호내(圓弧內)의 해면(海面)을 항계(港界)로 하는 1종항이다. 진해항은 구항(舊 港, 束川港)인 어항과 신항(제4 비료공장을 배경으로 한 항만)인 공업항(工業港)으로 구 별되며 항만의 남쪽에 거제도, 동쪽으로는 웅천반도와 가덕도가 가로 막고 있으며, 서 쪽은 구산반도와 고성반도 등이 가로 막고 있는 항만으로, 항내는 광활하고 깊으며 또 한 풍파가 거의 없는 천혜의 양항이다10).

9) 杉山萬太, 鎭海, 朝鮮鎭海印刷社, 1912, p. 57 參照

(5)

진해항은 1911년 세관 신축 및 설비비로 23,459圓 22錢(사무비 불포함)을 투입하여 폭원(幅圓) 약 4.54m, 연장 약 74.6m의 돌제(突堤)와 그 선단(先端)에 폭원 약 3.6m, 길 이 약 54.5m의 목조잔교(木造棧橋)의 축조 및 세관청사를 신축 했다.

1916년에는 공사비 1,347圓(사무비 포함) 연장 약 101m의 가호안(假護岸) 및 석장(石 墻) 축조 등을 했다. 또한 1922년에는 재래 잔교가 부식, 파손되었기 때문에 항만유지 및 설비비 15,460圓을 투입, 남측(南側) 43.6m 떨어져 있는 장소에 높이와 폭원(幅圓) 각 7.27m, 연장 49m의 석축돌제를 축조하고 그 끝머리에 폭원(幅圓) 3.6m, 연장 21.8m의 방 부액을 사용한 목조 잔교를 가설했으며 그 앞머리에 폭원(幅圓) 3.6m, 연장 5.15m의 계 단을 설치하였고, 그 밖에 노천하치장(露天荷置場)을 위해서 세관 구내·선거(船渠)로 이용 해온 일부 면정 306평 5합을 매립하여 호안석장(護岸石墻) 및 배수구를 축조하였다.

그 후 진해선의 개통에 대비하기 위해 1924년 해륙연락 설비공사를 하여 1925년 5월 31일에 준공을 보았다. 이 공사의 공사비 내역을 보면 사무비가 13,048圓 27錢이고 공 사비가 95,218圓 17錢 5厘로 도합 108,266圓 44錢 5厘이다. 이밖에 부대공사비(附帶工事 費)로 2,523圓 96錢 8厘가 소요되었다11).

특히 진해항은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1962~1971) 중에 현대적 항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즉 제1차 계획기간(1962~1966년)에는 총 7억 7,880만원을 투자해서 호벽(岸 壁) 및 물량장(物揚場, 120미터, 3억 6,500만원), 護岸(호안 450미터, 가호안 1,185미터:

7,900만원)공사와 진입도로(15,000미터: 200만원), 신설공사 및 조사설계(1식: 690만원) 및 지질조사(1식: 1억 1,750만원) 등을 실시하고 기타(1식: 2,640만원) 및 준설(18만 7,000㎥: 1억 8,200만원)공사 등을 각각 시행했다.

제2차 계획기간(1967~1971)에는 총 5,740만원을 투자하여 암초제거(174만㎥: 1,900만 원)공사를 비릇하여 부두도로포장(1,000m: 2,150만원)과 부두 및 호안복구(토석, 1,242㎥, 석추 54㎥: 390만원) 공사 그리고 방파제복구(75m: 500만원) 및 준설(21,000㎥: 800만원) 공사 등을 각각 시행했다12).

2002년 현재 진해항의 항만시설 현황을 보면, 제1부두는 안벽길이가 558m이며, 2만 톤급 1선석과 1천톤급 4선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료원료 및 대두 등을 취급하고 있 다. 그리고 제2부두는 안벽길이가 725m로서 2만톤급 3선석과 1천톤급 1선석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모래, 농산물 및 철재 등을 취급하고 있다. 또한 물양장은 123m로서 소형 선의 계류장소로 되어 있고 화물은 취급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10) 海運港灣廳, 港灣建設史, 1978, p. 737.

11) 海運港灣廳, 上揭書, p. 248.

12) 海運港灣廳, 韓國海運港灣史, 1980, p. 963.

(6)

진해항의 항만시설 현황

(2002년말 현재) 부두명 안벽길이 접안능력 연 간

하역능력 야적장 취급화물 비 고

1,293m

(123m) 9척 2,825천톤 137,000㎡

제1부두 558m 20천톤×1척

1천톤×4척 1,179천톤 15,000㎡ 화공원료, 대두 제2부두 735m 20천톤×3척

1천톤×1척 1,646천톤 122,000㎡ 모래,농산물 철재, 원목 물양장 (123m) 소형선 - - 어선계류

※ ( )안은 물양장

자료 : 마산지방해양수산청,「경남해양수산 중장기 발전계획」, 2003. 3, p.14

Ⅲ. 鎭海港 貿易의 變遷

1. 조선시대의 진해항 무역

진해항(진해시 제포)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지이며, 조선 초기 대외무역의 중심지였다.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을 외교의 양대 지주로 삼았던 조선은 무질서한 왜적의 도래 (渡來)를 막고 왜인과의 교역질서를 바로 잡기위해 태종 7년(1407)에 우리나라 동남해 안의 관문인 제포를 개항지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진해항은 조선조 초기 대일무역의 중 심지가 되었다.13)

고려말부터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는 왜구의 침탈이 잦았다. 왜적의 침략(侵掠)이 격심해지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고려 충정왕 2년(1350)부터이다. 쓰시마(對馬)·이끼 (臺岐)·마쯔우라(松浦)의 삼도(三島)를 중심으로 주로 서일본(西日本)의 해적에 의하여 구성된 왜구는 보통 20~30척의 선단(船團)을 지어, 그 인원수가 수백에 달하였다. 이들 왜구는 연해지방에 침입하여 쌀과 콩 등의 곡물과 직물 등 생활필수품을 약탈하고 때 로는 지방민을 납치해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왜구의 활동이 충정왕 2년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였으나, 공민왕 21년(1372) 부터는 더욱 격화되기 시작하여 우왕 이후 여말(麗末)에 이르러서는 치열한 양상을 띠 고 전개 되었다. 즉 여말(麗末)에 와서는 보통 100척 이상의 선박과 수백명의 인원으로 13) 강용수, 진해항 무역의 사적고찰, 계간 진해, 1990.겨울호, p.108.

(7)

구성되어 약탈·살인·방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여말(麗末)에 왜구가 치열해진 원 인은 대내적으로 여말(麗末)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들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같은 시기에 있어서 일본의 정치적 혼란을 들 수 있다.

고려왕조를 계승한 조선은 곧 일본의 왜구금지(倭冠禁止)에 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조선태조(朝鮮太祖)는 즉위년(1392)에 증각(憎覺)을 파견하여 족리막부(足利幕府)와 교섭 하고 왜구금지를 강력히 요구하였다14). 그리하여 수년 후에는 정식으로 교린관계가 성 립됨으로써 무역활동이 점차 활발해졌다15).

또한 태조는 왜구회유책(倭冠懷柔策)으로 왜구의 수령(首領)이나 왜구와 관계가 있는 서일본(西日本)의 호족(豪族)에게 명예직의 벼슬을 주고 무역을 허가하여 회유내지 선 린책을 실시한 결과 많은 왜구(倭寇)들이 귀순(歸順)하였고 사송왜인(使送倭人: 通信, 朝 見의 名目으로 渡來한 日本人)이나, 흥리왜인(興利倭人: 일본상인)의 수는 격증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본인이 무질서하게 도래(渡來)함에 따라 접대에 따른 재정부담의 증대는 물론이고 그들 중에는 평화적 통교(通交)를 가장(假裝)하여 내왕(來往)한 후 때로는 해 적행위까지 하게 됨으로써 왜인의 도래(渡來)나 사송선(使送船)의 파견을 제한하게 되 었다16).

대일통교무역(對日通交貿易)에 통제가 가해지기 시작한 것은 태종초기이다. 이대 흥 리왜선(興利倭船)을 대상으로 도박처(到泊處: 浦所)를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

薺浦)의 2포에만 한정하고 또한 행장제도(行狀制度: 渡航證明書)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은 이때 회유, 교린책의 일환으로 일본상선에 대하여 최초로 무역항을 지정하 였다. 태종 7년(1407)에 동래 부산포(東來富山浦: 現, 釜山鎭)와 웅천 내이포(熊川 乃而 浦: 薺浦, 現 鎭海市)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점차 일본선박의 도래(渡來)가 증가됨에 따 라 이들 두 포구(浦口)로써는 도박(到泊)이 불가능하게 되자, 태종 18년(1418)부터 울산 의 염포(鹽浦)와 고성의 가배량(加背梁)까지도 개항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조선 태종 때의 4포 개항(開港)인 것이다17).

그러나 계속해서 왜구의 폐단이 발생됨으로써 왜구의 근원지를 대마도를 보고 왜구 의 발본색원책으로 세종 원년(1419년)6월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己酉 東征)을 단행케 하였다. 즉 삼남(三南)의 병선(兵船) 2백 27척, 병사 1만 7천여명으로써 마산포(馬山浦)를 떠나 대마도로 진격하였다18).

이 원정의 결과 대마도와의 통교는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마도민들은 다 14) 金柄夏, 李朝前期對日貿易硏究, 韓國硏究院, 1969, p. 1.

15) 震檀學會, 韓國史(近世前期篇), 乙酉文化社, 1962, pp. 135~136.

16) 李鉉淙, 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 韓國硏究院, 1964, p. 1.

17) 태종(太宗) 18년(1418)에 상왜도박처(商倭到泊處)로서 개항된 가배량(加背梁)은 세종(世宗) 5년 (1423) 이전에 폐쇄된 것으로 추측된다.

18) 震檀學會, 韓國史(近世前期篇), 乙酉文化社, 1962, p. 138.

(8)

시금 생필품의 부족으로 생활유지에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막부장군(幕府將 軍)인 국왕(國王)의 사절과 대마도주가 수차에 걸쳐 사죄하고 교역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므로 세종 8년에 부산포(富山浦), 제포(薺浦), 염포(鹽浦) 등 3포를 다시 개항하였 19). 이것이 조선 세종때의 3포개항이다.

3포개항 후 왜선(倭船)의 내왕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이에 대한 접대의 번노(煩勞)와 국용(國用)의 소모가 더욱 심하여졌기 때문에 무역회수를 제한하지 않으면 재정상 압박 을 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를 제한하기 위하여 세종 25년(1443년, 癸亥年) 2월 21일 3포의 왜인 거주 및 출입항을 통제하기 위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이 계해조약 (癸亥條約)이다.20)

계해조약은 통신사 변효문(卞孝文) 등이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과 새견선(歲遺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으로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해마다 조선에 물자를 얻기 위해 파견되는 새견선(歲遺船)은 50척으로 한다.

② 대마도주에게 내리는 새사미(歲賜米)를 쌀·콩 합쳐서 200석으로 한다.

③ 일본인이 3포에 머무는 일수는 20일로 한정한다.

④ 출입하는 왜인은 도서(圖書: 입국증명서)를 발행하여 주어 휴대하게 한다.

⑤ 3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제포에 30명, 부산포에 20명, 염포에 10명 도합 60명으 로 한정한다.21)

한편 당시 왜국과의 무역품을 살펴보면 수입품(進上品)은 금(金), 은(銀), 동(銅), 철 (鐵), 약재(藥材), 유황(硫黃) 등이었고 수출품(回賜品)은 쌀·콩·면(綿)·포(布)·마포(麻布) 등이었다.

3포개항과 더불어 왜인과의 통상조건은 3포에 한해서 왜선(倭船)의 출입을 허가한 것 과 호시(互市: 무역) 조어(釣魚)가 끝나면 왜인들은 즉시 돌아가도록 한 것이 원칙이었 다. 그러나 그 중에는 돌아가지 않고 영주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 계해조약(癸亥條約)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居留民)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부산포(富山浦)에 약 350명, 제포(薺浦)에 약 1500명, 염포(鹽浦)에 약 120명 등 모두 2000여명의 일본인이 상주하고 있었다22).

조정에서는 이와 같이 늘어가는 일본인의 통제에 부심(腐心)하게 되었고, 대마도주에 19) 邊太燮, 韓國史通論, 三英社, 1986, p. 305.

20) 진해시사편찬위원회, 진해시사(산업경제편 제7장 무역, 강용수), p. 765.

21) 中村榮孝, 日韓關係史の硏究(上卷), p. 179.

22) 항거왜(恒居倭)의 거주가 허용된 후 각포(各浦) 항거왜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 (世宗) 18년에 그 수를 장기거주자 60명으로 한정하고 수외초과인원을 송환키로 하였으나 그 것이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 표에서 보듯이 부산포와 제포(薺浦)의 항거왜는 언제나 정수(定 數) 60호를 초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포와 제포에는 왜인(倭人)의 사찰과 승려도 있었다.

3포에 거주한 왜인(倭人)의 수

(9)

대하여 누차 그들의 귀환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다. 항거 왜인(恒居倭人)의 수호(數戶)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세력이 커져 부산포(富山浦)의 왜인 들은 목책(木柵)을 치고 자위(自衛)까지 함으로써 우리 관원(官員)들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또한 그들은 교만하며 명령을 위반하고 제재에 대한 불복을 하는 등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중종(中宗)때에 와서 조정에서는 새로운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중종 5년(1500)에 정부는 대마도주 소오(宗貞盛)에게 통고하여 그들의 철퇴를 요구하 고 또 일본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함으로써 그들의 불평이 날로 늘어갔다. 그 결과 3포의 일본인들은 대마도 일본인들의 내원(來援)을 얻어 대마도 소오씨(宗氏)의 군사를 중심으로 4~5천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제포(薺浦) 및 부산포(富山浦)가 함락당 하고 웅천(熊川)의 방비(防備)장병이 격파되었다23). 즉 이 왜란으로 부산포 첨사 김세균 (富山浦 僉使 金世均)이 죽었으며, 군민(軍民)의 피살자가 272명, 불탄 가옥이 796채나 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절도사 황형(前節度使 黃衡), 전방어사 유담년 (前防禦使 柳聃年)으로 하여금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삼고, 안윤덕(安 潤德)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기용하는 한편,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이 병조판서를 겸 하게 하여 왜란을 평정케 하였다. 따라서 왜인들은 조선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大敗)하 고 이와 더불어 일본인 거류민도 추방되었다24).

이와 같이 중종5년(1510년) 4월에 3포에서 발생한 왜인들의 폭동을 소위 3포왜란이라 한다. 이 난(亂)으로 말미암아 조․일(朝·日)간 통교가 중단되자 일본의 족리막부(足利幕 府)가 다시 수교를 간청하여 오므로 계해조약(癸亥條約)을 개정하여 새로이 중종 7년 (1512)에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였다25). 즉 3포왜란이 있은 후 조정에서는 3포를 폐 쇄하고 왜인과의 통교를 단절함에 따라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된 대마도주는 족리막부(足利 幕府)를 통해 교역을 간청해왔다. 본래 조선은 대마도와의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 으나 그곳은 물자가 궁핍하여 일방적으로 조선에 의존해 왔고 또 조선에 인접한 왜구(倭 寇)의 근거지인 까닭에 그것을 무마하는 광복정책(海防政策)의 일환으로써의 의미가 있었 으므로 전일(前日)의 반민(叛民)을 처벌하고 그 적도(賊徒)의 수급(首級)을 사형(死刑)에 처 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를 확인한 후에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였다26).

부산포(富山浦) 제포(薺浦) 염포(鹽浦)

세종 18년 39명 253명 96명

세조 12년 330명(110호) 1,200명(300호) 120명(36호)

성종 원년 350명(88호) 1,731명(308호) 128명(34호)

성종 25년 383명(74호)

승려 5명(寺院 3)

741명(204호)

승려 40명(寺院 10) 152명(51호)

자료 : 「世宗實錄」卷 71, (世宗 18年 3月, 乙未), 「成宗實錄」卷 295, 25年 10月, 庚辰.

23) 中宗實錄 卷11, 中宗 5年 4月, 癸巳條.

24) 李弘植, 國史大辭典, 一中堂, 1978, p. 682.

25) 中宗實錄 卷16, 中宗 7年 8月 辛酉條, 壬戌條 參照.

(10)

계해조약(癸亥條約)을 폐기하고 새로 체결한 임신조약(壬申條約)은 보다 더 왜인에 대한 제한을 엄격히 하였다. 즉, 왜인의 3포 거주를 금하였으며 또한 3포 중에서 제포 (薺浦)만을 개항하고 종전의 새견선(歲遺船)과 새사미(歲賜米)를 반(半)으로 감하여 교역 을 허락한 조약이다.

특히 3포개항 당시 일본으로 수출된 물품은 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저포 (苧布) 등 생활필수품과 나전(螺鈿), 도자기(陶瓷器), 화문석(花紋席) 등의 공예품, 그리 고 대장경(大藏經), 불교서적(儒敎書籍), 사서(史書), 범종(梵鐘), 불상(佛像) 등의 문화재 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일본의 문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가져온 동(銅), 석 (鍚), 유황(硫黃) 등 우리나라에 나지 않은 광산물과 약재(藥材), 향료(香料) 등 양반(兩 班)들의 사치품이었다27).

이와 같이 중종 5년(1510년) 3포 항거왜(恒居倭)의 난동사건이 일어나자 중종 7년(1512) 8월에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여 무역항을 제포(薺浦: 乃而浦) 1개항으로 한정하였으 나, 그 후 일본인의 꾸준한 교섭으로 중종 16년(1512) 에는 부산포를 다시 개항하게 되었 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가끔 일본인 난동사건이 벌어졌다. 즉, 임신조약(壬申條約)이 성립 되고 32년이 지난 중종 39년(1544)에는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인하여 대일교통 및 교역이 또 다시 두절되자 명종 2년(1547)에 왜국왕사(倭國王使)와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정미조약(丁未條約)이 성립되었다. 이는 임신조약(壬申條約)보다 왜인에 대한 제한 이 더 많았다28). 특히 정미조약(丁未條約)은 부산포 1개항으로 한정하여 개항함에 따라 이후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부산포(釜山浦)가 유일한 대일무역항으로 되었던 것이다.

2. 일제시대의 진해항 무역

진해항은 구한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군항으로 건설되었다29). 1910년 한일합병 후 진해군항(鎭海軍港)의 보호라는 군사적 목적에서 마산항이 폐쇄(무역은 허 가를 받아 수출입)되었고, 그로인해 진해항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즉 1911년부터 마 산항을 대신해 진해항(행암항)이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군항(軍港)으로 건설된 진해항의 무역을 보면 개항당시인 1912년 수출 이 약 4만 2천여圓으로 이는 당시 마산항 무역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나 1917년에는 진해항의 수출액이 55만여圓으로 1912년에 비하여 약 13배가 증가한 것

26) 李弘植, 國史大辭典, 一中堂, 1978, p. 1275.

27) 李基白, 韓國史新論, 一潮閣, 1976, p. 231.

28) 明宗實錄, 卷5, 明宗 2年 2月 乙未條.

29) 昌原港案Ⅰ(1906년) 議政府 訓令 第31號, 第33號, 第42號, 第43號, 第45號 等 參照.

(11)

이다. 그리고 이를 마산항과 비교하면 약 4배가량 더 많은 양의 수출이 이루어 졌다.

일제시대 전기의 진해항무역

(단위: 圓)

연도 수출 수입 합계

1912 42,363 270,699 313,061

1913 104,605 256,739 361,344

1914 71,091 249,510 320,601

1915 85,033 205,623 290,656

1916 207,297 199,347 406,644

1917 554,192 246,177 800,369

1918 1,874,949 552,976 2,427,925

1919 1,112,670 545,073 1,657,743

1920 698,867 648,824 1,347,691

1921 505,840 639,039 1,114,879

1922 409,429 563,360 972,789

자료: 조선 총독부, 조선 무역표 및 기타 통계자료에 의함.

일제시대 후기의 진해항 무역

(단위: 圓)

연도 수출액 수입액

대일수출 기타수출 대일 수입 기타수입 합계

1923 109,514 - 109,414 1,042,356 236 1,042,592 1,152,106 1924 65,943 - 65,943 587,004 308 587,312 653,255 1925 58,939 - 58,939 217,430 53,726 217,430 276,369 1926 61,001 - 61,001 719,109 163 719,272 665,234 1927 45,744 - 45,744 268,380 113 26,849 314,237 1928 84,659 - 84,659 660,857 183 661,040 745,699 1929 41,398 - 41,398 313,765 305 314,070 355,468 1930 22,705 - 22,705 263,682 195 263,877 286,582 1931 14,757 - 14,757 237,883 167 238,050 267,564 1932 47,866 - 47,866 264,015 178 264,193 312,059 1933 15,889 - 15,889 234,968 124 235,092 250,981 1934 29,808 - 29,808 398,085 184 398,269 428,077 1935 366,346 - 366,346 569,527 273 569,800 936,146 1936 72,515 - 72,515 737,004 149 737,153 809,668 1937 7,633 - 7,633 393,063 347 393,410 401,043 1938 5,470 - 5,470 444,777 542 445,310 450,789 1939 2,311 - 4,263 731,612 393 732,005 736,268 자료: 조선 총독부, 조선 무역표 및 기타 통계자료에 의함.

(12)

한편 진해항의 수입액의 경우는 1912년 27만여圓이던 것이 점차 감소하여 1917년에 는 24만여圓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일제 36년 기간 중 후반기로 접어든 1923년 진해 항의 무역은 수출액이 약 11만圓을 차지하고, 수입액은 104만여圓에 달하였다. 이 기간 의 주요 수출품은 미곡류(米穀類)와 건어류(乾魚類), 금광(金鑛)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 고, 총 수출액에서 각각 41%, 20%, 30%를 점하였으며, 주요 수입품은 석탄, 시멘트, 목 재, 소포우편물(小包郵便物) 등이었다. 또한 1930년 진해항의 대일수출은 점차 줄어들어 수출액은 2만여圓이었고, 수입액은 26만여圓을 차지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정미(精米) 가 18,871圓으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주요 수입품으로는 원유(原油) 및 중유(重油), 신 재(薪材), 면직물(綿織物), 모직물(毛織物), 소맥분(小麥粉) 등의 순이다.

그리고 일제말기에 접어들어 진해항의 무역은 더욱 줄어들었다. 즉, 1939년 진해항의 수출액은 4천여圓이고, 수입액은 73만여圓이다. 수출입 구조상에서 보면 무역역조 현상 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진해항의 무역은 1923년에 비해 1939년에는 수출이 약 27배 나 감소되었고, 수입은 약 1.3배 감소하였다.

3. 진해항 무역의 현황

군항(軍港)인 진해항은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나고 광복을 맞이하자 해외귀환동포와 인 접주민들의 대거입주와 한국해군의 요람지로서 해양경비대가 발족되고, 1950년 市 승격을 추진하던 중 6·25동란으로 중단 되었다. 그러나 동란을 계기로 육·해·공군의 교육기관인 사관학교가 집결되고 병참기지로서 군사시설이 확장되었다. 이와 같이 진해항이 군항도시 로 발전함에 따라 1955년 9월 1일 시(市)로 승격함으로써 창원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진해시의 수출현황을 보면 1968년 1만8천4달러를 기록하였고, 1970년에는 1백99만8천 5백51달러로써, 1968년의 수출액 보다 1백10배가 넘는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1971년 에는 전년도의 수출 보다 1.5배 증가한 3백10만8천3백60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또한 1978년도 진해시 수출실적은 2천8백17만3천달러였다. 이를 산업별로 보면 기계 부문이 4백21만7천 달러로써, 총 수출액의 15%를 차지하였으며, 화학부문은 2천3백48 만9천달러로써 총 수출액의 83%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기타부문이 1.6%인 46만7천달러 로 구성되었다. 한편, 업체별로 보면 진해화학이 49.1%인 1천3백84만 달러를 차지하였 고, 그다음이 한국프라스틱으로 총수출액의 33.8%인 9백52만 9천달러의 수출실적을 기 록하였다. 그 밖에 영화공업이 8.7%인 2백43만9천달러, 진해전자가 5.1%인 1백43만6천 달러, 동방유량이 1.7%인 46만 7천달러, 화산공업이 0.9%인 26만달러, 대동프라스틱이 0.4%인 12만달러, 신흥공업이 0.3%인 8만 2천달러의 순으로 나타났다.

(13)

진해시 연도별 수출 실적(1968~1980)

(단위:1,000달러)

연도 합계 기계 부문 화학 부문 기타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8 886 1,999 3,108

3,275 9,516 19,776 28,173 32,896 65,512

1,113 950 2,149 4,217 4,437 4,898

1,645 8,420 17,519 23,489 28,459 51,926

517 146 108 467 - 8,688 자료: 진해시, 진해시 통계연보(각연도).

한편 1980년도 진해시 수출실적은 6천4백51만2천달러였다. 이를 산업별로 보면 기계 부문이 4백 89만 8천달러로써 총수출액의 7.5%를 차지하였으며, 화학부문은 5천1백92 만6천달러로써 총수출액의 79.2%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기타부문은 13.3%인 8백68만8 천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한편 업체 수출실적을 보면 진해화학이 63.17%인 4 천1백38만3천달러를 차지하였고, 그 다음이 한국프라스틱으로 총수출액의 16.07%인 1 천53만1천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동방유량이 13.26%인 8백68만8천달 러, 영화공업이 5,42%인 3백55만달러, 진해파츠가 0.85%인 55만8천달러, 진해전자가 0.69%인 44만9천달러 신흥공업이 0.34%인 22만 1천달러, 회산공업이 0.18%인 12만달 러, 대동프라스틱이 0.02%인 1만2천달러의 순으로 나타났다.

1985년도 진해시의 수출실적은 7천7백41만9천달러이다. 1985년도 업체별 수출현황을 보면 진해화학의 복합 비료가 4천9백만달러, 한국프라스틱의 P.V.C 제품이 2천 1백만 달러, 영화공업의 땜납이 3백만달러, 신흥공업의 용접기가 2만달러, 진해전자의 전자제 품이 3백만달러등이다.

그리고 1988년도 수출시적은 9천1백89만달러로 이를 업종별로 살펴보면 진해화학이 5천4백49만5천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고, 금속업체인 성신공업이 6백94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나나내었다. 1988년도 진해시 관내 수출회사는 11개 업체로서 화학부문 2개 업체, 전자부문, 4개 업체, 수산물 가공업 3개 업체, 기계부문 1개 업체, 금속 부문이 1 개 업체 등이다. 1989년 진해시 수출은 9천1백45만1천 달러이다. 이중 공산풍의 수출이 77%인 7천53만8천달러이고 수산물 수출이 23%인 2천91만3천달러를 차지하였다.

(14)

1980년대의 진해시 수출 현황

(단위:1,000달러)

연도 합계 공산품 수산품 기타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34,000 39,397 52,766 72,235 77,419 69,155 78,848 91,890 91,451

39,397 52,766 72,235 77,419 69,155 72,738 73,166 70,538

6,110 18,724 20,913 자료 : 진해시, 진해통계연보 (각 연도별)

: 경남신문사, 경남연감 (각 연도별)

총 공산품 수출중 중화학공업제품이 5천8백30만8천 달러이며, 경공업 제품은 1천2백 23만 달러다. 특히 중화학 제품이 5천 1백 66만달러이고, 전자전기제품이 6백59만3천 달러이며, 기계제품이 5만5천 달러이다. 그리고 경공업제품은 합성수지가 1천2백23만다 럴 수출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진해항 수출입 현황

(단위 : 1,000달러, %) 수 출 수 입

년도 금액 증가율 년도 금액 증가율

1989 54,927 - 1989 109,525 -

1990 41,463 -24.5 1990 125,866 14.9 1991 14,371 -65.3 1991 104,702 -16.8 1992 43,476 202.5 1992 137,203 31.0 1993 56,987 31.1 1993 168,347 22.7 1994 46,191 -18.9 1994 173,456 3.0 1995 54,822 18.7 1995 152,774 -11.9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1-11)

62,250 219,834 280,780 291,205 270,950 270,769 496,740 481,573 608,010

13.5 253.1

27.7 3.7

-7 -0.1 83.5 -3.1 42.3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1-11)

213,465 254,922 267,633 378,017 182,635 94,128 125,623 261,817 160,173

39.7 19.4 5.0 41.2 -51.7 -48.5 33.5 108.4 -35.2 자료: 한국무역협회 경남지부.

(15)

1990년대 이후 진해항의 수출현황을 보면 1990년대 초반에는 서서히 증대하여오다가 1997년부터 급격한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2002년의 경우 수출증가율이 83.5%

로서 급격한 경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수입의 경우 증가율이 증가 혹은 감소 등을 반복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는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진해항을 통한 2003년 품목별 수출 현황을 보면 수송기계가 가장 많은 수출액을 기록하 였고, 그 다음이 석유화학제품, 농산물, 비철금속제품, 철강제품, 플라스틱제품의 순으로 나 타나 있다. 그리고 2003년 품목별 수입현황을 보면 무기류가 가장 많은 수입액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농산물, 임산물, 산업기계, 철강제품 등의 순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진해항을 통한 2003년 국가별 수출현황을 보면 이탈리아로의 수출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이 마샬군도, 싱가포르, 라이베리아 그리스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2003년 수입의 경우는 미국, 필리핀, 러시아 연방, 캐내다, 중국 등의 순으로 나타나 있다.

진해항의 품목별 수출현황 진해항의 품목별 수입현황

(천달러, %) (천달러, %)

품목명 2002 2003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수송기계 석유화학제품 농산물 비철금속제품 철강제품 플라스틱제품 비금속제품 제지원료및종이제품 임산물

정밀화학제품 운동및취미오락기구 수산물

기계요소공구및금형 기초산업기계 산업용전자제품

합계

489,596 1,937 2,254 856 92 23 585 444 252 79 0 1 0 0 0 496,740

85.6 -22.1 29.9 383.9 13.0 96.4 -24.1 168.6 -56.0 211.8 - - - - - 83.5

470,940 3,381 2,441 1,725 1,311 529 518 488 171 33 24 8 3 1 1 481.573

-3.8 74.5 8.3 101.5 1,318.3 2,250.1 -11.5 10 -31.9 -58.3 - 1,124.2 - - - -3.1

품목명 2002 2003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무기류 농산물 임산물 산업기계 철강제품 광물성연료 비금속광물 석유화학제품 정밀화학제품 요업제품 수송기계 수산물 플라스틱제품 기타화학공업제품 기계요소공구및금형 기초산업기계

합 계

4,192 77,890 29,114 0 0 176 2,528 1,416 550 6,272 0 0 0 201 0 0 125.623

-76.7 20.3 760.4 - - 626.3 42.4 -60.6 -54.7 2,046.2 - - - -65.0 - - 33.5

128,678 85,020 31,669 4,001 3,011 2,643 2,316 2,248 896 698 356 166 91 18 4 2 261.817

2,969.7 9.2 8.8 1,333,583.7 - 1,405.6 -8.4 58.8 62.9 -88.9 - - - -90.9 - - 52.0

(16)

진해항의 국가별 수출현황 진해항의 국가별 수입현황

(천달러, %) (천달러, %)

국가명 2002 2003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이탈리아 마샬군도 싱가포르 라이베리아 그리스 몰타 사이프러스 필리핀 일본 대만 중국 러시아연방 방글라데시 안티가 바부다 바하마 덴마크 영국 파나마 터키 키타국

합계

101,300 55,500 8 77,954 - - 173,962 5,684 1,105 - 11 344 - - - 80,700 - - 171 - 496,740

- 162.4 - 71.3 -100.0 -100.0 - 9.1 -9.7 - -29.1 -18.9 - -100.0 -100.0 - -100.0 -100.0 -99.7 -100.0 83.5

161,058 92,291 79,905 53,431 30,500 26,758 26,511 7,704 1,339 1,089 902 85 0 - - - - - - - 481,573

59.0 66.3 1,010,203.7 -31.5 - - -84.8 35.6 21.2 - 7,887.1 -75.2 - - - -100.0 - - -100.0 - -3.1

국가명 2002 2003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미국 필리핀 러시아연방 캐나다 중국 뉴질랜드 이탈리아 독일 일본 프랑스 이스라엘 호주 인도네시아 덴마크 싱가포르 핀란드 노르웨이 베트남 기타국

합계

51,904 32,721 9,101 6,075 2,370 7,494 - 4,371 8,197 - - 333 - - - - 2,853 201 - - 125,623

1.1 17.7 167.5 4,964.2 108.0 - - -5.6 92.3 -100.0 - -47.5 - - - - - -14.9 -100.0 -100.0 33.5

178,651 37,183 10,506 8,425 7,973 6,108 4,262 3,097 2,769 2,248 332 158 97 5 3 0 - - - - 261,817

244.2 13.6 15.4 38.7 236.4 -18.5 - -29.2 -66.2 - - -52.7 - - - - -100.0 -100.0 - - 52.0 자료 : 한국무역협회경남지부.

Ⅳ. 鎭海港 貿易의 發展方案

1. 신항만과 연계기능 강화

동북아 물류중심화를 위한 진해 신항만은 2005년 12월에 3선석이 개장, 이후 연차적 으로 2011년까지 30선석을 개발할 예정이다. 이에 중심항만인 신항만과 인접한 진해항 은 그 보조항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2. 무역항과 군항의 보완기능 강화

진해항은 우리나라 제1의 군항으로서 천혜의 요새이다. 지금까지 군항의 보호라는 측 면이 강조되면서 무역항이면서도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미비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진

(17)

해 신항만이 동북아 허브항으로 육성됨에 따라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될 수 있도 록 보완적 또는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 연안 화물수송의 활성화

연안운송은 수송비 측면에서 도로운송이나 철도운송에 비해 과세나 운임, 다량의 화 물 운송상 경제성30)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피하는 이유는 하주들이 화물의 운송 시간 단축 등 즉시성에 더 치중하여 도로운송을 이용함으로써 추가로 부담되는 비용을 기꺼이 지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연안운송으로 더 소요되는 시간이 도로운송에 더 지출되는 비용보다 효과측면에서 만족도가 낮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국가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도로와 철도의 혼잡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연안운송에 일정 물동량을 분담하는 것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으므로 국내항만간의 상호연계성과 인접항만간의 합리적인 기능분담에 의한 유기적 항만체제를 구축하여 운송 비용의 절감을 꾀할수 있는 연안화물수송체계를 활성화 시켜야 할 것이다.

4. 지역 수출산업기지와의 연계성

마산 자유무역지역, 창원공단 등 지역수출산업 기지와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마천공 업지역 등 인근 지역산업을 수출 산업화하여 근거리 무역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5. 도로, 교통망의 확충 및 정비

진해항이 무역항으로서의 항만활성화를 위해서는 광역교통망구축을 위한 연결도로, 접속도로, 순환도로 등 체계적인 교통시설이 확충되어야 한다. 특히 진해-창원(마창대 교)간의 접속도로와 진해(부산)-가덕도(연육교)간의 연결도로, 남해안 고속도로와의 연결 도로 그리고 인접 항만간의 도로 교통망이 확충 또는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도로들은 단순한 지역간 연결도로가 아닌 진해-마산만 일대 광역교통망 의 일환으로 고속화된 순환도로로서의 기능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30) 전일수, 환동해권 해운환경변화와 포항항 발전방향, 포항국제심포지엄‘94종합보고서, 1994.

pp.187-202

(18)

6. 항만서비스기능 강화

항만활동은 부두, 안벽, 항로, 하역시설 등의 항만시설과 선박의 접안과 하역 등 항만 고유의 활동을 수행하는 서비스재이다. 항만서비스는 여타 물리적 재화와는 달리 무형 성, 이질성, 소멸성, 비분리성 등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선사(船社)나 하주 등 항만을 이용하는 고객이 불편함이 없도록 입출항 절차에서부터 금융 및 보험에 이르기 까지 항만서비스기능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7. 항만 마케팅 활동 강화

항만마케팅이란 항만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고객이 실제로 항만을 이용하도록 함으 로써 당해 항만당국이나 운영업체가 설정해 놓은 목표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필 요한 모든 활동을 이끌고 조직화하는 관리기능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같이 경쟁이 심화되는 환경 하에서 마케팅활동은 항만경영상 매우 중요한 핵 심활동 중의 하나가 된다.31)

진해항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국내외 화물 환경과 관련된 최근 정보는 물론, 항만이용 을 위한 선박입출항 동향 등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관련업체 및 기관에 제공하며, 지역권 하주들의 항만이용에 대한 효율적인 홍보체제가 갖추어 지속적인 항 만 마케팅활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8. 국제해양관광산업 개발

미래학자 헬마칸(Herman Kahn)은 “향후 21세기에는 관광․여가산업이 세계에서 가 장 규모가 크고 유망한 산업으로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실제로 관광산 업은 굴뚝 없는 무공해 수출산업으로 외화가득율이 높고 부가가치가 높으며 국가적 차 원에서 전략적으로 집중 육성해야 할 중요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32)

진해시가 보유하고 있는 천혜의 관광자원 즉 해양공원, 벚꽃과 군항제, 아름다운 바 다와 해안선, 웅천 도요지, 안골왜성 등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이를 상품화하기 위한 마 케팅 활동과 관광정보의 네트워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31) 허윤수, 부산항 활성화를 위한 마케팅 및 주체별 역할에 관한 연구, 부산발전연구원, p.4 32) Markus Schwaninger. "Forecasting Leisure and Tourism scenario projection for 2000-2020."

Touurism Management. 19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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