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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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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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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역사와 문화

1학년 융복합기초과목

이 충 호

(2)

에도막부의 확립

(江戸幕府の確立)

(3)

1.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2.다이묘(大名)의 통제

3.조정(朝廷)・사원(寺社)의 통제

학습내용

(4)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1598년 천하통일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으로 세상을 떠남.

●히데요시의 후계자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는 겨우 6살.

→정치는 고다이로(五大老)와 고부교(五奉行)에 의해 행해짐

→그 중에서 고다이로의 필두(筆頭)였던

도구가와 이에야스(徳川家 康)

가 대두해 간다.

●도요토미정권(豊臣政権)에 대항한 이에야스(家康)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고부교(五奉行) 중의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가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의 모반을 구실로 제다이묘(諸大名)를 이끌고 관동으로 향한 틈을 타서 병사를 일으킴.

(5)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동군(東軍)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해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서군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해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600년 두 진영으로 나뉘어 천하를 겨루는 결전(天下分け目の決戦)이라고 하는 “세키가하라의 전투(関ヶ原の戦い)”가 발생

●이에야스가 교묘히 전략을 사용하여 고하야가와(小早川) 등이 배신하여, 동 군이 승리

●패한 미쓰나리는 처형되고, 서군 다이묘들은 영지가 몰수되는 “개역(改易)”

이나 영지를 삭감하는 “감봉(減封)”의 처분을 받음.

(6)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이에야스는 전국의 다이묘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

→1603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무사의 정점인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将 軍)에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연다.

●그러나, 이것으로 에도막부(江戸幕府)에 의한 지배체제가 완성된 것이 아님

→오사카성(大坂城)에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秀頼)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이 되고 겨우 2년 후인 1605년에 아 히데타다(秀忠)에게 장군의 지위를 물려준다.

→이는 도쿠가와집안이 대대로 장군을 이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이 후 현재 시즈오카현이 있는 순뿌(駿府)에 은거했지만,

오고쇼(大御

所)

라고 칭하며, 이어서 정치상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7)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오사카성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권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에 군림하는 도요토미집안의 존재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

→히데요리가 새롭게 만든 교토의 호코지(方広寺)의 종(釣鐘)에 새겨진 작은 문자를 문제 삼음.

→나라의 평화를 바라는 「국가안강(国家安康)」이라는 문자에 대해서 이에야스 는 「이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을 분단한 것이다.」라고 시비를 걸게 됨.

(8)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용서를 구해 온 도요토미 집안에 요구

・히데요리가 도쿠카와의 신하가 될 것

・어머니를 인질로 보낼 것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퇴거할 것

→도요토미측은 이를 거부하고 오사카성에서 병사를 일으킴

●이에야스는 1614년 겨울과 다음 해 여름에 2번에 걸쳐 오사카성을 공략

→오사카 후유노 진・나쓰노 진(大坂 冬の陣・夏の陣)

→압도적인 병력의 막부군에 의해 오사카성은 함락되고 히데요리는 자결

●도요토미 집안의 멸망으로 인해 명실공히 도쿠카와 집안이 일본을 지배하게 됨.

(9)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참을성이 많은 이에야스의 성격

세키카하라의 전투 이후 도요토미집안을 멸망시키기까지 15년이 걸림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이 되어도 당시의 교토의 공가(公家)들 사이에는 히 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관백(関白)이 되어, 쇼군 히데타다(秀忠)와 함께 정치 를 하는 공동정권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음. 아니면 도쿠카와집안이 도요토 미집안에 정권을 돌려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음.

●1611년에 성장한 히데요리가 이에야스에게 인사를 가는데, 이 때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훌륭히 성장한 모습을 보고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결심

(10)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성립

●이에야스는 오사카나쓰노진(大坂夏の陣)에서 승리한 후, 원호(元号)를

나(元和, げんな)

로 바꿀 것을 조정에 부탁

→천황이 교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호를 바꾼 것은 「여기서 시대가 완전 히 바뀌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볼 수 있다.

→겐나(元和)라는 원호는 최종적으로 도쿠카와집안이 승리해서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는 승리선언과 같은

(11)

다이묘(大名)의 통제

●에도막부가 특히 힘을 쏟은 것이 다이묘의 통제이다.

●에도시대에 장군 직속의 무가(武家)로 1만석 이상의 영지가 주어진 것을 다이묘(大名) 라고 하고, 다이묘는 전국에 약 이백수십 집안이 있었다.

●각각의 다이묘는 장군과의 관계와 집안의 격(格) 등에 의해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신판(親藩)…도구카와씨 일족의 다이묘

후다이(譜代)…세키가하라의 전투(関ヶ原の戦い)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따르던 다이묘 도자마(外様)…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 도쿠가와 집안을 따른 다이묘

●신판(親藩)과 후다이(譜代)는 에도(江戸)의 주변이나 전국의 요지에, 도자마(外様)는 에 도에서 멀리 떨어진 원격지에 배치되었다.

(12)

다이묘(大名)의 통제

●전국의 다이묘의 감시와 장군가(将軍家)의 혈연의 유지 등을 목적으로 도쿠가와성(徳 川姓)을 쓰는 것이 허용된 고산케(御三家)를 오와리(尾張), 기이(紀伊), 미토(水戸)에 배

●다이묘가 영지를 지배하는 조직을 “번(藩)”이라고 하고, 번(藩)을 막부가 지배하는 원 리를 “막번체제(幕藩体制)”라고 한다.

●막부는 1615년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을 내고, 다이묘들이 가지는 성(城)의 수도 제한

→이 명령은 다이묘가 사는 성 이외의 성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 다이묘들이 많은 성을 가지고, 필요 이상의 전력(戦力)을 소유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다이묘의 행동을 단속하는 법전인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ぶけしょはっと)를 제정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애는 「성을 마음대로 수리해서는 안된다.」「막부의 허가 없이 다이묘들끼리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 등이 정해져 있음.

(13)

다이묘(大名)의 통제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개정하여,

참근교대 (参勤交代)

의 제도를 더함

→이것으로 인해 다이묘들은 1년마다 에도와 영지(領地)를 왕복하고, 영지에 돌 아갈 때에는 인질로서 자신의 처자식을 에도에 남기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참근교대는 전국의 다이묘를 에도막부에 따르게 하는 엄격한 규율

→다이묘들에게는 다이묘행렬의 여비에, 에도에서의 생활비 큰 부담이 되었 다.

●도쿠카와집안은 이에야스(家康)부터 3대쇼군 이에미쓰(家光)에 걸쳐서 제도 를 정비하고, 막부의 지위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14)

조정(朝廷)・사원(寺社)의 통제

●에도막부의 정치조직은 이에미쓰 무렵까지 정비가 진행되어 장군 밑에 3명 에서 6명의

로주(老中)

가 중심이 되어 정무(政務)를 행함

●로주(老中)를 보좌하는 와카토시요리(若年寄)는 장군 직속의 무사로, 하시모 토(旗本)와 고케닌(御家人)에 관한 정무를 취급

●지방에는 장군 직속의 조직으로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를 둠

→교토쇼시다이는 조정(朝廷)과 서국(西国)의 다이묘를 감시하기 위한 설치한 것.

(15)

조정(朝廷)・사원(寺社)의 통제

●에도막부는 1615년 조정(朝廷)과 공가(公家)에 대한 통제법(統制法)인

추나라비니쿠게쇼핫토(禁中並公家諸法度, きんちゅうならびに くげしょはっと)

를 제정.

→「천황은 학문을 제일로 한다.」등으로 천황의 권한을 연호(年号)나 달력(暦) 의 제정 등 형식적인 것으로 제한.

→이 긴추나라비니쿠게쇼핫도(禁中並公家諸法度)는 역사상 처음으로 무사가 정한 법에 의해 천황의 행동을 규정한 것

(16)

조정(朝廷)・사원(寺社)의 통제

●사원과 신사(寺社)에 대해서도 장군 직속의 조직으로서

지샤부교(寺社 奉行)

를 설치하고, “사원법도(寺院法度)”를 내리고, 전국의 사원과 신사를 관 리하고 종교통제를 행했다.

●막부는 종파(宗派)마다 본산(本山)이 말사(末寺)를 통제하는

본말제도(本 末制度)

를 확립하고, 전국의 사원(寺社)에 막부의 통제가 미치도록 함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에도막부는 이전보다 강력하게 사원과 신사를 지배

(17)

크리스트교금지와 쇄국

(キリスト教禁止と鎖国)

(18)

1.무역의 통제

2.시마바라(島原)의 난과 쇄국(鎖国) 3.4개의 창(窓)

학습내용

(19)

무역의 통제

●일본과 외국과의 관계

・에도막부를 열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明)과 조선(朝鮮), 동남아시아 와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필리핀(ルソン), 베트남(ベトナム), 캄보디아(カンボジア) 등과 무역을 하기 위해, 주인장(朱印状)을 상인과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발급하고, 막부공인의 무 역선인 주인선(朱印船)을 파견함.

●주인선(朱印船) 무역으로 수출된 것은 은(銀)과 동(銅), 철(鉄) 등의 광산물자 와 공예품이고, 수입품은 중국의 생사(生糸)와 견직물(絹織物), 남방으로부터 상아(象牙)와 사탕(砂糖)

(20)

무역의 통제

●네덜란드(オランダ)와 영국(イギリス) 등 유럽으로부터도 배가 내항.

→그 중에서도 최대의 무역상대는 마카오를 근거지로 한 포르투갈

●스페인 포르투갈로부터는 그리스도교(キリスト教)의 포교를 위한 선교사들 이 왔다.

→이에야스는 무역의 이익을 위해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도래와 포교를 묵인

●이에야스가 그리스도교 포교를 묵인한 결과, 그리스도교는 각지에 전파되어 신자가 급증

→1605년경에는 그리스도교도가 전국에 약 70만명에 달함.

●증대하는 그리스도교도에 불안을 느낀 이에야스는 1612년 막부직할지에 리스도교의 금지령(禁教令)을 내림

●이어서 다음해에 금지령을 전국으로 넓혀, 신자에게 개종(改宗)을 강요하고, 교회당을 부수고, 선교사를 국외로 추방함.

(21)

무역의 통제

●막부는 무역도 제한하게 되어, 1616년 유럽선의 내항을 히라도(平戸)와 나가 사키에 한정

●3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는 더욱더 무역의 제한과 금교(禁教)를 추진하고,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도항을 모두 금지시킴.

●당초에는 적극적인 무역정책을 행하고 있던 에도막부였지만, 증대하는

그리 스도교도의 위협

에 불안을 느껴, 무역을 통제하게 됨.

→경제적인 이유를 생각하면 해외와의 무역을 하고 싶었지만, 사회통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역을 통제.

(22)

시마바라(島原)의 난과 쇄국(鎖国)

●전국시대, 나가사키의 시마바라(島原)와 구마모토(熊本)의 아마구사(天草)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기리시탄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라고 불리는 아리마 하루 노부(有馬晴信)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領地)였다. 그리고 영지의 민중들도 대부분 그리스도교도였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들어 그리스도교를 배제하는 기운이 높아지자, 새롭게 영 주가 된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는 그리스도교도를 탄압하고, 영지의 민 중들에게 가혹한 중세(重税)를 가하게 된다.

(23)

시마바라(島原)의 난과 쇄국(鎖国)

●1637년 시마바라(島原)의 난, 시마바라(島原)・아마구사(天草) 잇키(一揆)가 발생

→시마바라・아마구사 지방의 기리시탄농민(キリシタン農民)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重税)에 대한 반발과 그리스도교 용인을 요구한 잇키.

→리더는 아마구사 시로 도키사다(天草四郎時貞)라고 하는 16세의 그리스도 교도였다.

●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의 끝에 위치한 하라성(原城)에 농성한 잇키군(一揆 軍)은 총 38000명에 달했다.

●막부는 규슈의 여러 번을 중심으로 12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서나 잇키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강한 단결로 격렬하게 저항→잇키가 진압된 것은 약 3개월후로, 잇키군의 희생자는 3만명 이상이었다.

(24)

시마바라(島原)의 난과 쇄국(鎖国)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저항의 격렬함은 막부에 큰 충격을 주어, 이후 철저하게

그리스도교를 배제

하게 됨

●시마바라의 난 2년 후, 막부는 포르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하고, 일본에서 포르 투칼인을 추방함.

●1641년 네덜란드인의 무역활동에도 제한을 가하여, 네덜란드상관을

데지 마(出島)

로 옮기고, 다른 곳으로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

●이리하여 막부는 포르투칼인뿐만 아니라, 서양인 전체에 통제를 가하게 됨.

→이처럼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하여 에도막부는 외국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제한.

→이 “

쇄국체제(鎖国体制)

”은 이후 막말까지 이어짐

(25)

시마바라(島原)의 난과 쇄국(鎖国)

●그리스도교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라는 종파가 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주 로 카톨릭,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임.

●카톨릭 국가는 포교(布教)를 행하고, 이에 동반하여 무역을 행하고 있었음. 즉 무역 과 포교가 분리될 수 없었고, 선교사들이 먼저 와서 포교를 하고, 무역상인을 데려와서 무역을 하는 형태였음.

●한편, 프로테스탄트국가인 네덜란드의 경우,

동인도회사(東インド会社)

고 하는 회사의 상인이 와서, 그들은 포교를 하지 않고, 무역만 하였다.

→막부는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이나 스 페인은 추방하고, 무역을 포교를 하지 않는 네덜란드와 행하려고 했다.

(26)

4개의 창(窓)

데지마(出島)

는 쇄국체제의 에도시대에 포르투칼인이나 네덜란드인을 수용하고, 무역을 행함.

→외국인들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제한되고, 또 일본인도 여기에 허가없이 들어 가는 것이 금지된 특별한 지역이었다.

●당시, 수입품의 주력은

사탕

→외국에서 들여오는 대량의 사탕을 이용하여, 카스테라를 비롯해 다양한 과자 를 만듬

●포르투갈에서 전해졌다고 하는 카스테라는 나가사키에서 계속 만들어져 에도 시대에 나가사키의 명상품이 되었다.

(27)

4개의 창(窓)

●맥주도 이 시기에 데지마에 전해졌다고 한다.

●유리제품 등을 수입할 때 부서지지 않도록 클로버를 말린 것을 함께 넣었는 데, 이로 인해 일본에 클로버가 일본에 전래됨.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이 즐기던 당구도 전래

→데지마에는 쇄국체제의 시대에도 다양한 외국으로부터의 문물과 문화가 수 입되었다.

(28)

4개의 창(窓)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중국

과의 무역도 행해졌다.

→1688년에는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청(清)의 상인들을 모아 새롭게 만든 매립 지에 거주시킴

→청나라 상인들의 거주지를 토진야시키(唐人屋敷)라고 함.

●에도시대, 일본에는 나가사키를 비롯하여, 쓰시마(対馬)・가고시마(鹿児島)・마 쓰마에(松前)의 외국과의 무역창구가 4개 있었다.

(29)

4개의 창(窓)

●조선과는 쓰시마를 매개로 하여 에도시대를 통해 교류를 이어갔다.

●국서를 교환하는 유일한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조선으로부터는 조선통신사(朝鮮通 信使)가 왕래했다.

→에도까지 행렬을 만들어 이동안 통신사들은 에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볼 수 있는 외국인이고,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외국의 문화였다.

●가고시마(鹿児島)의 사쓰마번(薩摩藩)은 류큐(琉球)와 교역을 행하고 있었다.

→1609년, 사쓰마번은 막부의 허가 아래 류큐를 침공

→패배한 류큐는 실질적으로 사쓰마번의 지배하에 놓임

→명(明)과 청(清)과도 무역을 하고 있던 류큐로부터 사쓰마번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 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30)

4개의 창(窓)

●에조치(蝦夷地)의 남단을 지배하고 있던 마쓰마에번(松前藩)은, 아이누인들 과의 교역을 독점적으로 행하고, 연어(鮭)와 다시마(昆布), 모피(毛皮) 등을 손 에 넣었다.

→에도시대는 쇄국체제였지만, 실제 일본은 4개의 무역창구를 통해서 외국문 화와 외국인과 접촉하고 있었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