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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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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7 卷 第 2 號 2 0 0 6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7, No. 2, Page 189~203, 2 0 0 6

누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죽였는가

李 炳 郁

*

Who Killed the Catcher in the Rye

Byung-Wook Lee, M.D.*

머 리 말

현대 미국의 작가 샐린저가 1951년에 발표하여 일약 유 명해진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미 고전이 된지 오래된 작품으로, 당시만 해도 사회적 논란을 크게 불러일으킨 문 제작이었다. 어린 청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본 어른들의 위선 적이고도 타락한 세계는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충 분하다. 한 편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보면 일종의 심 리적 성장통이라 할만하다. 샐린저는 청소년기에 겪을 수밖 에 없는 통과의례적인 마음의 상처와 혼란을 묘사하면서 부 도덕한 이 세상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과 희망을 잃 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종 의 성장소설에 속한다. 그리고 서구문학 전통에서 이러한 성 장소설은 하나의 독창적인 분야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특징 이다. 그러나 엄밀한 시각으로 본다면 샐린저의 소설에 대 한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는 매우 편향적일 수도 있다. [호 밀밭의 파수꾼]을 능가하는 탁월한 성장소설은 얼마든지 있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샐린저의 작품이 계속 주 목받는 배경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법도 하다. 본 저자 가 이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화해를 거부하고 모든 기존의 가치관을 거부한 채 세상을 등지고 살아온 작가 자신의 삶 자체가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한 채, 세상에 나오 지도 않으면서 사악하고 위험한 세상에 대해 이러니 저러 니 말하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물 론 그것은 작가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전 파된 상호 모순된 메시지는 사랑과 미움의 통합이나 화해

가 아니라 미분화된 적개심과 분노, 그리고 환멸감을 재확 인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성장소설이라 고 간주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위선과 악에 물든 어른들 로 인하여 위험에 처한 이 세상을 호밀밭에 비유한다면, 순 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를 그러한 악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 는 파수꾼은 과연 누구이며, 또한 그 역할은 제대로 이루어 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샐린저의 삶과 작품세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삶은 철저히 가려져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 체의 외부 접촉 없이 은둔 생활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어쩌 면 기괴한 그의 삶의 방식이 대중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 하는지도 모른다. 샐린저는 1919년 뉴욕 맨하탄에서 육류 수입상을 하던 부유한 유태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 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냉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는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항상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 자신의 정체성 확립에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 다. 샐린저는 어머니의 과잉보호 속에 자랐으며, 유대식 전 통에 따라 바르 미츠바 의식이 치러진 13세가 되기 이전까 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고 한다(Salinger M 2000). 카톨릭신자였던 어머니는 결혼하는 동시에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이름도 미리암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과 잉보호로 그로 하여금 숨 막히는듯한 질식감을 느끼게 만들 었다. 단적인 예로 어머니는 그가 24세가 될 때까지 등교 하는 길에 함께 동행할 정도였다.

그는 뉴욕 웨스트사이드 구역의 공립학교에 다니다 사립 학교로 전학했으나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해본 적이 별로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v- er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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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어머니의 과잉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펜실베이니아의 군사학교에 입학했던 시 절뿐이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바로 소설에서 그토록 끔찍 스러웠던 학교로 묘사되고 있는 펜시 고등학교의 모델이 되 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과는 달리 샐린저는 군사학 교 생활에 매우 만족하였으며 그것도 본인이 자청하여 입 학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는 펜싱부 주장으로 활동하면서 운 동에도 열심이었으며 또한 집을 떠나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만족한 생활을 보낸 곳이 바로 군사학교였다. 그는 이후에 뉴욕대학에 입학하지만 중도 탈락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장래에 자신의 육류사업을 아들이 이어받을 것 으로 기대했다. 한 때는 아버지의 지시로 육류사업에 관한 견문을 넓히고자 유럽을 방문하여 비인에 잠시 머물기도 했 지만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기 직전에 뉴욕으로 돌아 왔다. 그는 현지 도살장을 목격한 이후로는 고기에 대한 혐 오감이 극도로 심해져 육식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한 듯하다. 이러한 경 험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시 인간 도살장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 수용소 방문에서 겪은 극도의 혐오감으로 이어져 일 생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데 일조했음직도 하다. 어쨌 든 그 후로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을 여지없이 저버리고 작 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는 귀국한 후에 펜실베이니아의 한 대학에 들어갔지만 역시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당시 그를 지도한 교 수의 말에 의하면, 샐린저는 대학 역사상 최악의 영문학도 였다고 한다. 그 후 그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 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명문대학에 다니지 않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3, 40년대 미국 명문대에서는 실제 로 유대인의 입학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었을 만큼 반 유대주의 감정은 생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샐린저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맞서 명문대를 기피한 것이다. 1939년 컬 럼비아대학 문학반에 들어간 그는 버넷트 교수의 지도를 받 으면서 비로소 작가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 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과 사귀면서 서로 뜨 거운 열정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녀가 희극배우 출신 찰리 채플린과 전격적으로 결혼하는 바람에 한동안 실의에 빠지 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군대에 징집되어 제 2 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됨으로써 그런 실의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전장의 참혹한 현실 앞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는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억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발지 전투 등에 모두 참여하면서 수많은 전우들이 죽어가는 장면

들을 목격해야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소속 부대원의 75%

가 전사한 경우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유창한 독일어 실력이 인정받아 첩보부대원으로 활동했으며 전쟁포로들의 심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연합군 최초로 유대인 수용소에 진입한 것이었다. 생지옥과 도 같은 현장을 직접 목격한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으 로 결국 군병원에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비록 단기간에 회복되긴 했지만 그 후 행동은 상식적으 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기소했던 젊은 나 치 관료 여성인 실비아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귀환했기 때문 이다. 유대교 신자인 부모의 반대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유 대인을 학살한 장본인인 독일 나치 출신 여성을 아내로 맞 아들인 그의 행동은 확실히 상식적인 판단을 뒤엎은 것이 분 명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이미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실 비아는 수개월도 안 되어 미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독일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후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 꾼]을 발표하여 일약 문단의 총아로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명성을 얻자마자 곧바로 세상의 평판을 뒤로 한 채 뉴 햄프셔의 한적한 마을로 이주하여 은 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클레어 더글러스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으나 그 후로는 반세기가 넘도록 작품 발표뿐 아 니라 세상과의 접촉도 일체 끊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 홀든의 모습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모 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냉담하고 권위적이며 무 관심한 아버지, 간섭과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의 모습은 속 물주의적 부모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좋게 말하면 현실지향 적 부모라 할 수 있지만 통제와 간섭을 거부하는 아들의 입 장에서 본다면 매우 세속적인 욕망에 물든 불순세력의 전형 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따라서 홀든은 그러한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집과 학교를 떠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게 집과 학교는 둘도 없는 지옥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것은 의존과 독립 사이에 갈등을 겪으며 고민하는 십대들 의 화두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샐린저 역시 그 러한 갈등에 방황했을 것이다. 그가 꿈꾼 세상은 악에 물들 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인 깨끗한 세상이었겠지만 그런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로 현실에 서 그가 마주친 인간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 들을 감추기에 급급한 속물근성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며 부인할 수 없는 현

실이라는 점을 그는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박적이면

서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작

품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가장 적합한 단어들을 고르고 선

택하는 작업에만 수십 년의 세월을 바치고 있는 샐린저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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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이야말로 강박증의 한 전형으로 보인다.

샐린저는 1951년에 발표한 [호밀밭의 파수꾼] 이후 이렇 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60년대 초에 [프래니와 주우이], [목수여 대들보를 올려라] 등의 소설과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이외에는 1965년 이후 전혀 작품을 발 표한 적이 없으며 1974년 이후에는 일체의 외부 접촉마저 끊고 철저한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잃어버린 세대에 속하는 토마스 울프는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 토록 짧은 기간에 4편의 대작들을 남긴 점에 비하면 샐린저 는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Wenke (1991)는 샐린저의 소설에 나타난 글라스 일가 사람들의 특이한 심리 상태에 주목했다. 특히 그가 주목한 단편소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성적인 좌절과 혐오뿐 아 니라 속물적인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한 젊은 남 성의 절망적인 최후가 매우 충격적이다(Salinger 1948). 바 나나로 가득 메워진 구멍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바나나를 모 두 먹어치운 다음에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바 나나피시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성적인 연상을 불러일으 키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속에서 헤엄칠 때의 모습은 보통 물고기와 비슷하지만 일단 구멍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갑 자기 돌변하여 돼지처럼 바나나를 파먹기 시작하는 바나나 피시의 행동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성적인 혐오감은 물론 자궁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과도 관련이 있 어 보인다. 물론 일부 평자들은 바나나피시의 정체를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부인 뮤리엘이 잠든 침대 옆에서 총기로 자살하는 시모어 글래스의 모습 은 구멍과 바나나 사이의 조화에 실패한 바나나피시 그 자 체였다는 점에서 샐린저 자신의 핵심적인 갈등구조를 반영 하는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샐린저가 묘사한 글래스 일가의 인물들은 한결같 이 일상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이러한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가족 배경을 처음부터 새롭게 재창조하려는 시도뿐 아니라 기존의 고루한 가치관에 도전하고 전복시키 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소 설속의 등장인물 프래니와 그녀의 오빠 주우이, 그리고 시 모어와 버디 등을 통하여 샐린저는 자신만의 독특한 메시지 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프래니는 지적으로 매우 뛰어난 조숙한 소녀지만 천박하고 타락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 기도문을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외우면서 영적으로 순결한 상 태에 도달되고자 무척 애쓰지만 결국에는 정신적으로 무너 지고 만다. 오빠 주우이는 그런 누이동생을 치유시키기 위 한 노력의 일환으로 주기도문의 암송이 일종의 자기중심적 인 기만적 행위임을 지적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치유법을 통

하여 그녀를 돕고자 하는데, 이 또한 일종의 구원환상을 드 러낸 것으로 보인다.

Seitzman(1966)은 프래니의 정신병적 붕괴를 그녀의 남 근 선망과 관련된 갈등의 결과로 보았다. 특히 시모어와 버 디가 모든 세속적인 지식들로부터 단절하고 보다 궁극적인 지혜의 상태로 들어갈 것을 요구하는 잘못된 인도를 그녀에 게 가함으로써 그녀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Seitzman(1969)은 그녀에 대한 오빠 주우이의 치료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소설에서 작가는 오빠의 매 우 미숙하고 비판적인 개입이 그녀의 우울증을 더욱 악화 시킨 결과를 낳았으며 프래니 역시 그의 치료가 일종의 사 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동정적인 오빠의 도 움으로 평온 상태에 도달될 수 있었음을 주장하면서 마치 주 우이의 성공적인 치료 사례보고를 읽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녀 자신의 내면적 공격성과 나르 시시즘, 자아 이상 및 어머니와의 결합, 선불교적 이상, 정 신분석과 정신치료의 차이점 등에 관한 부분을 다루는 가운 데 매우 일관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당성도 결여된 주장들 을 펼친 것으로 평가했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샐린저는 프래니와 주우이 남매를 통하여 그 자신의 누이동생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구를 본의 아니게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어 린 여성들에 대한 그의 과도한 관심과 유혹은 그러한 심증 을 더욱 뒷받침한다. 물론 찰리 채플린 역시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로 인해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결과로 어린 미 성년의 소녀들에 특히 매혹되기 쉬운 약점을 드러내 보였 지만 샐린저는 그런 점에서 일시적인 연적이었던 채플린과 유사한 갈등구조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샐린저는 자신의 실체를 공개하기 매우 꺼렸기 때문에 그

에 관한 전기 역시 매우 드물고 내용도 부정확하기 쉽다. 단

적인 예로 전기작가 Hamilton(1988)이 그에 관한 전기를

출판하려 하자 샐린저는 그 책의 출판에 반대하며 법정에 제

소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서한 내용들을 수정 발표하는 조

건으로 어렵게 출판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왜곡된 내

용을 기반으로 한만큼 그 신뢰도는 자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Alexander(2000)는 샐린저의 베일에 싸인 삶의 실

체를 밝히기 위해 은밀한 추적을 시도하지만 진정으로 그

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도 못하며 동시에 그에 대한 진정

한 이해에도 실패한 듯하다. 단순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

는 자료들의 나열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만을 자극할 뿐이

다. 이 같은 저널리즘의 흥밋거리 제공 차원에서 샐린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작품을 통하여 그를 이해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샐린저에 대한 여러 의혹과

물의가 빚어지고 왜곡된 전기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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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아가레트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출판함으로써 해밀턴 등에 의해 왜곡 묘사된 부분들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아버지의 명성을 등에 업고 유명 세를 누리려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을 받기도 하지만 샐린저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는 점 에서 그녀의 증언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왜 호밀밭의 파수꾼인가

[호밀밭의 파수꾼]은 반세기가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꾸준 히 팔리는 소설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추천도서로 지정될 정도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그러나 한 때는 미국의 학부모들이 거센 반발을 보이며 전 국적으로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할 만큼 사회적으로 큰 물의 를 빚기도 했으며 실제로 지역에 따라서는 판매금지를 당 하기도 했다. 페이지마다 나오는 매우 공격적이며 불경스러 운 욕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소동은 오히려 이 소설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대결구도를 더욱 증 폭시킨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시대적 상황과 맞 물려 매우 강력한 기폭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청소년의 저항문화가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파급되는 결과를 초 래했으며 특히 저항가수들의 반항적 메시지들로 인하여 그 영향력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니고 오늘날에 이 르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골리앗을 상대로 하는 다윗의 싸움 과도 같은 이러한 투쟁의 불씨를 낳은 샐린저의 소설들은 그 러나 이미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에서 보듯이 처 음에는 너무도 허무적인 메시지를 통해 전파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바나나피시 중독자들을 낳기도 했던 이 소설은 [호 밀밭의 파수꾼]이 보인 돌풍을 미리 예고하는 전조가 되었 던 작품이기도 하다.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사회는 역설적으로 역사상 유 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 그러한 자신감은 곧바로 한국전쟁과 월남 전 개입으로 이어졌지만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그 런 끔찍한 전쟁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 보 인 것이다. 기득권층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론에 대하여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대신한 희생양이 될 뜻이 없 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반전운동은 그렇게 해서 기득권세 력 및 성인들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운동과 맞물려 촉발 된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장벽에 대한 젊은이들의 절망감 과 좌절감 및 두려움은 곧바로 히피문화로 이어졌으며, 수십

만의 젊은이들이 무조건 짐을 꾸려 부모와 함께 있던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주인공 홀든처럼 무작정 길 을 떠나 서부로 향했던 것이다. 우드스톡 아니면 히피의 메 카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지 친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다수는 시 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던 기득권층 의 일부로 흡수되어 버렸다. 젊은 시절 한순간의 해프닝으 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거창한 집단적 문화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남긴 여파는 실로 지대한 것 이었다. 비록 손쉽게 드러나지 않는 흔적이긴 하지만, 준비 된 기름밭에 성냥불을 내던진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았다. 이 소설은 부모를 포함한 기성사회에 불만을 품은 청소년층에서 마치 자신의 부정적 성향을 정당화시키는 교 리문답책이나 지침서처럼 우상시 되었다. 1980년 12월 존 레논을 암살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밝힌 암살 동기는 호 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한 홀든 콜필드처럼 자신도 이 세상의 거짓과 가식에 도전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암살 현장에 서 체포된 그의 손에는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이 들려있었으며 이후 이 작품은 미국 내 수많은 암살 조 직원들 사이에 바이블과도 같은 필독서로 꼽힐 정도로 인기 를 끌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숨 막히는 기성세대의 기존 가 치관에 도전하는 수많은 청소년층은 물론 이들을 선도하는 록 가수들 사이에서도 이 소설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런 점에서 샐린저의 소설은 월남전을 기폭제로 하여 수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히피문화와 반전운동에 나서게 만든 선 도적 역할을 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공 교롭게도 샐린저 자신도 60년대 이후부터 모든 공식 활동을 등진 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간 은둔생활로 일관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라 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샐린저는 월남전에 대하여 강한 반 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소설에 대하여 저자가 갖는 개인적 느낌은 한마디로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물론 대중소설은 아니지만 심오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 관된 메시지도 없으며 변증법적 자기 성찰과 발전과정도 보 이지 않는다. 다만 과도기적 반항심에 가득 찬 십대 청소년 의 정신적 방황과 혼란된 모습을 상당히 예리하고 재치 있 는 문체로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찬사를 받을만하다고 본다.

특히 위선적인 어른들의 실체를 꿰뚫어보는 날카롭고 예리

한 작가의 시선은 매우 분석적일뿐만 아니라 주인공 마음속

에 내재된 적대적 공격성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소 냉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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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만 그러나 상당히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샐린저는 의미 전달보다는 오히려 표현 스타 일에 치중한 작가인 듯싶다. 다시 말해서 십대 청소년이 겪 는 고민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어른들의 위선적인 행 태를 폭로하는데 치중한 일종의 고발소설 비슷한 것이다. 그 러한 도발적인 폭로와 고발이 성인들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찬 수많은 청소년들에게는 마치 구원자와도 같은 존재로 비 쳐질 수도 있으며, 이런 점들이 오늘날에 와서 왜 그토록 수 많은 십대들이 그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자극, 선동하는 매 우 거칠고 난폭한 메시지들로 넘쳐나는 펑크 록 가수들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 에서 Rosenblum 등(1999)은 청소년기야말로 외관상으로 만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발달 공간으로 대다수의 성인들에 게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시기라고 하면서, 주로 위니코트와 에릭슨의 입장에 기초하여 청소년과 대중문화 특히 대중음 악을 통한 청소년의 표현방식을 탐색한 바 있다. 샐린저에 게 열광하는 수많은 독자들과 지지자들이 그에게 보낸 편 지들에는 베일에 가린 신비스런 구도자를 향한 숭배와 흠모 의 정이 가득하다(Kubica와 Hochman 2002).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에 대한 Maynard(1999)의 전이적 환상이 실제 로 어떻게 파국을 맞았는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많은 사람 들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샐린저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끝내 부모와 화해하지 않는 다. 작가는 주인공 홀든을 통하여 자신의 개인적 신념을 전 파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모 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오히려 매우 유아적인 선악의 이분 법적 구도만을 재확인시킨 듯하다. 클라인 식으로 말하면 편 집성 입장에 머문 채 우울 입장으로 진행하지 못한 상태, 다 시 말해서 사랑과 미움의 통합적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 로 소설이 마무리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크다. 따라서 진정 한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미완의 성장소설이 되 고 말았지만 그 후 샐린저는 오랜 세월 자발적인 은둔생활 로 들어가면서 단어 공부에 열중한 채 일종의 대하소설 [글 래스一家 연대기]를 완성시킨다고 예고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보다 진전된 성장소설이 나오나 했지만 그런 기대는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십 년간 그는 입만 다문 것 이 아니라 글쓰기도 중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세기가 지 난 지금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은 샐린저의 유일한 장편소 설로 남아있다. 물론 샐린저는 괴짜이긴 하지만 매우 불행 한 천재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를 계 속 얻고 있지만 그 자신의 개인적 삶은 매우 불행하고 병 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샐린저의 정신병리

한 천재적인 괴짜 소설가에 대하여 정상과 비정상 또는 정신병리를 논한다는 것 자체에 불쾌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유명인이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차 별화한다는 것은 공정한 태도가 아니다. 모든 평가의 대상 이 되는 기회를 차단시키며 그를 보호하고자 하는 독자들 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그의 성장을 가로막은 어머니의 과 잉보호적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이미 90을 바라보는 노작 가에 대한 예의 차원이라면 몰라도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드러낸 점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외적인 평가 대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 차 원이 아니라 보다 전문적인 차원의 평가를 위한 것이기 때 문에 정당한 시도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매우 제한적인 자료에 근거한 것이기에 작가 자신의 본질적인 실체와는 상 당히 벗어난 내용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분석적 시도가 재 능 있는 한 작가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 히려 그의 작품과 생애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일 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샐린저의 특이한 행동방식은 그의 매우 특이한 심리적 배 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가 보인 가장 특이한 현상학적 모습 은 우선 사회적 철폐이다. 극도의 대인기피증은 그가 지닌 피해의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준다. 어떻게 보면 자 폐적인 양상도 보인다. 그가 보인 매우 특이한 관심 분야도 단순한 개인적 취향으로 보기 어렵다. 성에 대한 두려움, 특 히 여성의 몸에 대한 두려움, 벌레 공포증, 채식주의와 육 류 기피증, 자기 소변 마시기, 열반과 깨달음에 대한 열망,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둔감성, 타인들로부터 끝없 는 관심과 찬사를 듣기 원하는 나르시시즘적 과대사고, 자 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이용하고 배신하는 착취성, 어 린 소녀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 아이들에 대한 구원환상, 그 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판 기피증이다. 타인의 비판 에 견딜 수 없는 자존심의 수준, 완전벽과 결벽증을 동반한 강박적 사고,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집필 작업, 등등 이루 헤 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제들을 드러내 보인다.

자신의 배설물을 마시는 행동은 물론 동양적 민속요법을

모방한 것이겠지만 그러한 행위는 분석적 의미로 본다면 일

종의 강박적 종교의식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퇴행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동시에 극단적인 나르시시

즘적 행동일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 및 그와 관련된 모든

분비물과 배설물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죄의식 형성 이전의

유아적 단계에 나타나는 매우 원초적 욕망을 행동화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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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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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도 모른다. 샐린저는 육식을 기피하고 채식을 고집했는 데 그러한 집착도 마찬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에게 고 기라는 단어는 곧바로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일종의 고기에 대한 심리적 거부반응이라 할 수 있는데, 아버지의 평생 직 업이 육류사업이었으며 비록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그것 은 매우 천한 직업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한 때 아버지의 지시로 그가 마지못해 동부유럽에 갈 때만 해도 육류사업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가축 도살의 현 장을 목격한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도저히 견딜 수 가 없었으며 그 후로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리고 얼마가지 않아 전쟁에 참전하면서 그는 공교롭게도 유 대인 수용소의 처참한 모습을 최초로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 가 상상도 못하던 끔찍스런 인간 도살장에서 수많은 시신 들을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한 후로는 정신적 충격을 이기 지 못해 결국 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가축과 인간 모두의 고기 태우는 냄새에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는 홀로코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것은 일종의 번제(燔祭)의식으로 제물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행사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육식을 금하 는 동양종교 및 섭생법에 심취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육 신을 거부하고 오로지 영적인 추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선불 교, 힌두교, 요가 및 명상의 추구는 자신의 불결한 유대적 기원을 거부하기 위한 몸짓일 수 있다.

그의 강박적인 글쓰기는 결코 완결을 볼 수 없다는데 비 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 하고 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완성된 작품을 발표한 적이 단 한 편도 없다. 마치 플로베르처럼 완벽한 단어 선정에 그토 록 많은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소설을 완성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작품을 통하여 어차피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은밀한 치부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가 지닌 뿌리 깊은 의혹과 피해의식은 그러한 자기 노출을 극 도로 회피하도록 만들었을 것 같다. 따라서 그는 글쓰기는 계속하지만 완성을 추구할 수 없으며 설사 완성된 작품도 공 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글쓰기 작업은 오로지 자신만 을 위한 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오랜 기간 [호밀밭의 파 수꾼]을 능가하는 후속편이 나올 것을 학수고대 했지만 그 런 기대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샐린저의 여성들

샐린저의 약점은 남성성 확립의 실패와 여성 친화적인 태 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외부생활과 단절된 상 태로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여성관계는 지속적으로 이어나

가고 있다. 결국 그가 단절한 세계는 남성들과의 관계이며 여성들에게만큼은 그 문호를 열어놓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든 여성들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물론 그 의 삶에서 최초의 이성 관계는 자신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 관계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간섭과 통제가 심했던 어 머니는 그에게 매우 양가적인 감정을 심어주었을 뿐이다. 샐 린저에게 최초의 이성으로 다가온 여성은 극작가 유진 오닐 의 딸 우나였다. 1941년 그는 우나 오닐과 데이트를 하면 서 그녀에게 매일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나 우나가 찰 리 채플린과 결혼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을 맺고 말았다.

그는 한 때 헐리우드로 가서 작가로 성공하여 채플린에 맞 서 경쟁을 벌여볼 생각까지 할 만큼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 다. 오닐의 성은 물론 애란계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애란계 였던 어머니에 대한 미련이 반영되었음 직하다. 현재 그와 동거를 계속하고 있는 세 번째 부인의 성도 그녀와 같은 오 닐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추론이 단순한 억측에 불과한 것 이 아니란 점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샐린저는 독일 항복 이후에도 6개월간 탈나치 사업의 일 환으로 근무한다는 조건에 동의했는데 자신이 직접 기소했 던 젊은 나치 관료 실비아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데리고 왔 다. 그의 결정은 부모의 허락을 전혀 받지도 않은 것이었으 며 유대교 가정인 가족들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전범재판의 법정에 설 위기에 몰렸던 당시의 실비 아 입장에서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샐린저가 일종의 구 원자로 비쳐졌겠지만 그러나 수개월 만에 결혼생활은 파탄 이 나고 실비아는 독일로 돌아가 버렸다. 배신감에 사로잡 힌 그는 그 후 실비아를 타액을 의미하는 살리바라고 호칭 하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1972년 독일에 살던 실비아로부터 편지가 왔으나 그의 딸 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샐린저는 편지를 제대로 뜯어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샐린저는 한 여성과 단절한 것일 뿐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 와도 단절을 선언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Salinger M 2000).

그러나 그는 이미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한 직후부터 그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1953년에 그는 뉴욕 을 떠나 뉴햄프셔주의 호젓한 마을 코니쉬로 이주해 버린 것이다. 그곳에는 여러 유명인사들이 살고 있지만 샐린저는 전혀 그들과도 개인적인 접촉 없이 두문불출하며 살고 있 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1955년 클레어 더글라스와 결혼했 다. 그녀 역시 래드클리프 학교를 중도 탈락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미 1950년에 이들의 첫 만남이 있었고 당시 클레

어의 나이는 불과 16세로 샐린저는 31세였다. 그들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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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매가 태어났는데 마아가레트와 매튜가 그들이다. 딸은

후에 작가가 되었고 아들은 영화배우가 되었다. 배우 매트 샐린저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들 가족은 샐린저의 고립 된 생활습관 탓으로 거의 대인접촉 없이 지냈다고 한다. 마 아가레트에 의하면, 그녀의 어머니조차 샐린저와 함께 사는 것이 수월치가 않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샐린저의 은둔적 생활뿐 아니라 간섭이 심하고 더 나아가 지나치게 딸에게 신 경을 쓰는 그의 태도 때문에 소외감 및 질투심마저 느꼈다 는 것이다. 그러나 샐린저는 소설 속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 과 실제 인물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도 드러 났는데 일례로 자신의 딸의 이름을 피비로 부르기 원했다 는 점에서 그런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피비는 소설의 주인 공 홀든이 가장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평 소에 의술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더욱 선호했던 샐린저 는 심지어 딸이 오랜 기간 아플 때조차 의사에게 데려가기 를 거부했다고 한다. 클레어의 고백에 따르면, 어찌나 괴로 웠던지 갓난아기인 마아가레트와 함께 동반자살까지 생각했 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살던 집에 불을 지를 생각도 했다고 한다. 샐린저는 그의 아내가 친구들이나 가족들을 만나는 것도 금지시켰으며 특히 여성의 몸을 두려워하여 클레어가 임신한 모습에 질겁을 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부부간에 성관계도 기피하면서 하루 일과를 거의 대 부분 자신의 서재에서 보내기 일수였다고 한다. 결국 이들 부부는 1965년 이혼하고 말았다. 클레어는 현재 융 학파의 분석가가 되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으나 모녀간에도 서로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딸 마아가레 트는 그런 어머니에 대하여“끔찍스런 할멈” 이라 부른다.

샐린저의 나이 53세 때인 1972년에는 18세의 작가 지망 생 조이스 메이너드와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그녀는 샐린 저의 딸 마아가레트보다 불과 두 살 위였을 뿐이다. 그러나 샐린저는 잡지에 실린 그녀의 글을 보고 직접 격려의 편지 를 보냈으며 유명작가의 서한을 받아든 그녀는 즉석에서 답 장을 보내고 다니던 대학도 포기한 채 당장 짐을 꾸려 그의 집을 방문했으며 그들은 곧바로 동거에 들어갔다. 이는 마 치 작가와 독자 사이에 표출된 상호 전이적 관계의 행동화 처럼 보인다. 딸 같은 여학생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비쳤던 샐린저도 그렇고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고통 받았던 메 이너드 역시 그에게 강한 전이적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보 인다. 따라서 샐린저는 그녀의 글에 매료된 것뿐 아니라 잡 지 표지에 실린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에 더욱 이끌렸을 수 있다. 그녀의 사진이 게재되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편지를 보냈을까 의심스럽다. 그는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연예인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눈에 띄는 여배우가 있으면 즉석에서 편지

를 띄워 접촉을 시도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배우 옥 센버그는 그의 편지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며 일레인 조이 스는 잠시 그와 관계를 유지했지만 결국 유대계 극작가 닐 사이먼과 결혼해 버렸다.

어쨌든 메이너드는 약 10개월간 샐린저의 집에 머물렀는 데, 그들은 이례적으로 아기를 갖기 원했지만 그녀의 성적 인 결함 때문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샐린저 는 그녀를 성 치료 전문가에게 데리고 갔지만 별다른 효과 가 없자 그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샐린저와 동 거를 계속하고 싶어 했으나 마음이 바뀐 샐린저가 두 번 다 시 아이를 키울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그의 곁을 떠났으며 그 후 그녀는 다른 남성과 결혼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샐린저와의 서신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그 러나 25년이 흐른 뒤에 그녀는 갑자기 그 서한들을 경매에 부쳤는데, 당시 여론은 유명작가의 이름을 팔아먹는 파렴치 한 행위로 그녀를 비난하고 힘없는 노작가에 대해 매우 동 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샐린저는 이미 그녀에게 자신을 이용 하지 말라는 경고를 던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뉴요커 지는 만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하느님 감사합니다. 조이스 메이너드가 빌 클린 턴을 만나지 않은 것을.”결국 샐린저의 입장을 딱하게 여 긴 한 사업가가 1999년에 거액의 돈을 들여 그것을 사서 샐린저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샐린저와의 경험을 소재로 저서를 출판함으로써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 다. 그녀 자신은 스스로 변명하기를, 샐린저와 헤어진 후 25 년이 지난 시점에 그녀는 자신의 딸이 18세가 되면서 그녀 자신이 그 나이 때 어떠했는가를 회고하고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샐린저가 그녀를 유혹한 것은 거의 페 도필리아에 가까운 행동이었다고 비난했다(Maynard 1999).

그것은 어쩌면 노작가의 유혹에 넘어간 조숙한 작가 지망생 이 그에게 버림받은 후에 겪은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고 나 름대로의 심리적 평형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도 있 겠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샐린저의 세 번째 부인은 간호사 출신의 콜린 오닐이다.

그녀는 샐린저보다 40년이나 연하이지만 매우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며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마지

막으로 선택한 부인은 그에게 최초로 상처를 입혔던 우나 오

닐과 같은 성이었다. 이 또한 우연의 일치일까? 뿐만 아니

라 오닐은 애란계 성이기도 하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유

대적 기원을 거부하고 애란계 어머니를 대신할 인물에 집

착하는 것일까? 그의 첫 번째 부인이 독일인이었고 두 번

째 부인은 영국 출신이었으며 세 번째 부인이 애란계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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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배우자 선택의 기준에 관여한 무의식적 동기는 과연 무 엇이었을까? 채플린의 경우는 자신의 어머니가 일찍 정신병 에 걸려 일생을 병원생활로 마감함으로써 어머니로부터 버 림받은 마음의 상처를 어린 처녀들로부터 보상받고자 수많 은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샐린저는 자신의 정체성 혼란에 관 련된 문제로 배우자들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는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자식도 낳았지만 성을 혐오했다. 반면 에 그는 어린 소녀들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여고생들과 의 펜팔을 즐겼다. 또한 TV에 나오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들에게 편지를 보내 관심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다른 모든 남성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특히 나 이 어린 소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이러한 특성들 은 분명히 자신의 부모와의 경험에서 비롯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샐린저의 정체성 혼란

샐린저는 유대인도 아니고 애란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앵 글로 색슨계는 물론 아니다. 그는 단지 미국의 유명 작가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의 규 정에는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유대인으로 간 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란 현실은 유대교를 믿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간주하며 성장했을 것이다. 유대교에서 중요한 의식으로 간 주되는 바르 미츠바를 치른 이후에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 가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 켈트계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십 대 초반의 샐린저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자신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더욱이 반 유대 감정이 공공연하게 성행하던 시기에 그러한 분위기를 실제로 경험했던 어린 샐린저 입장에서는 더욱 큰 혼란을 겪 었음직 하다. 이후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문 제가 항상 꼬리표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는 역설적 혼란과 방황의 시기로 간 주된다. 수천 년 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원조라 할 수 있 는 수메르 왕국의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요즘 젊은 이들은 참으로 버릇이 없다”는 구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오랜 시대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세대 간의 차이는 여전히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다. 청소년기는 아이도 아니고 어 른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냐 아니면 의존이냐 하는 문제가 가장 큰 화두가 되는 시기이기도 하 다. 그런 점에서 Blos(1962)는 청소년기 역설(adolescent paradox)이라는 말을 썼다. 그는 에릭슨과 마찬가지로 청 소년기에 심각한 정신적 방황을 몸소 경험했기에 청소년문

제에 따스한 공감대를 지니고 있던 분석가였다. Erikson (1956)은 정체성의 혼란이 청소년기에 해결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했지만 그 역시 자신이 직접 그러한 정체 성의 위기를 겪었던 인물이었기에 청소년 문제에 남다른 이 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에릭슨의 어머니는 유대계 여 성으로 스칸디나비아계 떠돌이 남성과의 사이에서 에릭슨을 낳았지만 이내 버림을 받고 결국 유대인 소아과의사 홈부르 거와 결혼했던 것이다. 계부는 에릭슨의 적극적인 후원자였 지만 에릭슨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유대인 계부 성인 홈부르 거를 버리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좇아 자신의 성 과 이름을 스칸디나비아식인 에릭 에릭슨으로 바꾼 것이다.

정체성의 개념이 에릭슨에게서 나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병욱 2001).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샐린저 자신의 회고담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출신 성분을 완 전히 현실과는 정반대로 바꿔버렸다. 홀든의 아버지는 애란 계 변호사로 원래 카톨릭 신자였지만 결혼과 더불어 자신 의 종교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 르지 않은가. 샐린저는 자신의 어머니에 해당되는 사실을 소 설 속에서는 홀든의 아버지로 살짝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 는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의 유대적 기원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에도 문학서클 모임에서 항상 뒷자리에 홀로 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가 겪은 소외감 은 동료들의 노골적인 따돌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 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의혹이 크게 자리 잡고 있 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반감과 실의, 분노와 좌절, 의혹과 자부심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그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그가 보인 집과 학교에 대한 반항심은 일상적인 십대 청소 년들이 보이는 행동에 비해 매우 유별난 것이었다. 그는 군 사학교를 지원하여 남성적인 강인함을 얻고자 했지만 뜻대 로 되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이름 없는 대학들만을 전전하 며 학업을 이어 나갔다. 유대인에 대해 차별적인 입학을 허 용했던 당시의 미국 명문대 방침에 저항하여 그는 오히려 아이비 리그에 다니지 않는 자신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했 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샐린저가 자신의 유대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육류사업 견학차 유럽

에 파견되어 실무를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 유럽의 어

느 도살장을 방문하여 가축들을 도살하는 끔찍한 장면을 목

격한 후에는 고기를 먹기 힘들어했으며 이런 경험은 후에

그의 식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욱 큰

충격은 수 년 후에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가 목격했던 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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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인간 도살장에서 비롯되었다. 어쨌든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자신의 진로를 육류사업이 아 니라 문학 쪽으로 급선회하기로 작심한 듯하다. 그가 귀국 한 직후에 독일군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군대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 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했던 유 타 해변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후 에 발지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장 면들을 직접 목격해야만 했다. 독일로 진군하는 도중에는 헤 밍웨이를 만나기도 했다. 샐린저는 그의 독일어 실력이 인 정받아 첩보부대에 근무하게 되면서 주로 전쟁포로들을 심 문하는 일을 맡았으며, 또한 유대인 수용소에 가장 최초로 진입한 군인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당시의 끔찍스런 정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너는 결코 그렇게 고기 타는 냄새를 도저 히 사람의 코로 맡을 순 없을 거다. 어떻게 해서든 너는 오 래 살아야 한다.”결국 이런 경험이 그로 하여금 극심한 두 려움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는 독일이 항 복한 이후에 전쟁신경증(오늘날의 관점에 의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으로 수 주간 병원에 입원하여 정신 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에 자신의 이러한 끔찍스런 전쟁 경험을 토대로 수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도 했다. 그러나 유대인 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비치지 않았다. 유대인에 관한 화제는 그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의 딸이 전하는 모습은 이와는 매우 다르다. 샐린 저의 전쟁공포증에 대하여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매우 비 겁하고 용기가 없는 인물인 것처럼 비쳐진 점을 애석해하면 서, 오히려 샐린저는 자신의 군대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 겼다고 항변하고, 일반인들의 추측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그 렇게 우울한 인간이 아님을 강조했다(Salinger M 2000). 물 론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변호하는 태도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당시 샐린저가 상상키 어려운 충격적인 경험으로 인 해 정신적 타격을 입은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충격에서 헤 어난 샐린저는 군병원을 퇴원한 후에 탈 나치 사업에 참여 하면서 자신이 법정에 기소했던 젊고 아름다운 독일 나치관 료 출신의 여성 실비아 플라트와 결혼한 것이다. 그는 동족 의 원수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인 셈이다. 동시에 그는 원 수를 사랑으로 구원한 셈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 처럼 놀라운 결정은 유대인 아버지 솔로몬에게는 매우 충

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유대인과 결혼한 어머니 역 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샐린저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 정으로 부모의 허를 찌른 셈이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방식 의 보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오래가지 못 했다.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실비아가 결국 독일로 떠 나버린 것이다. 부모에 대한 그의 복수는 그 후 오랜 세월 이 흐른 뒤에까지 지속되었는데 유대교 및 기독교와 단절하 고 동양종교에 기울어진 점과 아버지의 장례식에 불참한 사 실 등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샐린저는 아버지의 존재를 철저히 거부했다. 아버 지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인의 피에 대해서도 그는 강한 거부 감을 보였다. 아버지와의 건전한 동일시를 거부한 그로서는 이미 아버지 노릇을 적절히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어른다움 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은 결코 말처럼 손쉬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어른으로 산 다는 것은 사랑을 베풀고 희생을 감수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 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혜남(2006)은 건강한 어른이란 양심과 죄책감을 느끼고, 후회하는 능력과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즐거움을 추구하고 즐길 수 있 음은 물론 고통에 맞서 싸워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더욱 중요한 일은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 또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며, 인생이란 완벽할 수 없음을 알고 더 나 아가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샐린저는 90을 바 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어른이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유대인 아버지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그는 어머니 쪽의 피

를 이어받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떳떳하게 기를 펴고 살

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 솔

로몬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사업도 물려

받기 거부하고, 유대교를 버리고 선불교와 힌두교, 요가 등

에 심취했다.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

았던 것은 그의 뿌리 깊은 반감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50대인 그는 딸 같은 18세 소녀

조이스 메이너드와 함께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 진정으로 동양적 철학의 근본을 이해했더라면 부모공경

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부친의 마지막 가는

길에 동참은 했을 법하다. 속물적인 부모로 대표되는 혼탁

한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실망과 좌절은 이해할 수 있다. 다

만 세상에 대한 긍정 없이 부정으로만 일관하는 그의 태도

는 홀로서기에 실패한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

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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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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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샐린저의 은둔생활

샐린저가 계속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의 매우 특이한 은둔생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진 작가의 정체에 대하여 사람들은 더욱 큰 흥미 를 갖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와 같은 유대계 작가 들 가운데 노먼 메일러, 존 업다이크 등은 샐린저의 작품에 대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일만한 내용 이 아니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샐린저 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대중매 체의 속성도 평범한 일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 라서 그의 기이한 삶의 방식은 항상 대중매체의 관심을 유 발시킨다. 일체의 인터뷰도 거부하는 그의 태도는 그럴수록 더욱 큰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샐린저의 일상은 비밀에 싸여 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채 식 위주의 간단한 식사 후엔 곧바로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거기서 보낸다고 한다. 그가 그 안에 서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명상이나 요가를 한다고 도 하고 단어공부나 집필을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창 작활동을 계속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세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데 이름은 없고 각각 번호를 붙 여 부른다고 한다. 또한 그는 바닥에서 천정에 닿을 정도로 많은 금고들을 쌓아놓고 있는데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원 고들이 들어 있으며, 금고마다 일일이“출판 예정” 또는“편 집 예정” 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고 한다. 자신이 열반에 들 때를 염두에 둔 행동이라고 한다. 샐린저 자신은 아마 스스 로 열반에 든 이후에도 집필 활동을 계속하리라고 믿는 모 양이다.

샐린저는 동양식 섭생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 및 대체의학, 그리고 선불교에도 오랜 기간 관심을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선불교의 대가로 알려진 스즈키 박사를 만났으며 힌두교에 대한 공부도 열심이었다 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들은 특히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로 이어지는 깨달음의 필요성을 강조한 다는 점에서 샐린저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었음직 하다. 그 러나 그의 딸 마아가레트는 샐린저가 요가난다의 저서를 읽 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 다. 왜냐하면 요가난다는 결혼생활과 같은 속세에 머물면서 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에 대해 강조했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샐린저와 클레어 부부는 작은 힌두 사원을 자주 찾아 요가 수행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크

리스천 사이언스나 에드가 케이시의 가르침 등에 몰두하고 비정통적인 동종요법이나 비타민 요법, 동양 침술 등에 심 취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순물을 제거하는 구토법, 자 신의 소변 마시기, 방언(glossolalia) 배우기, 빌헬름 라이 히의 오르곤 상자 속에 앉아 있기 등, 특이한 섭생법에 몰 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배우자와 거의 성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실질적으로는 포로나 마찬가지 인 것처럼 간주하고 친구나 아내로서 대하지도 않았다고 한 다. 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는 여지없이 세상을 등진 인 물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회고에 의 하면, 성자처럼 살아가는 아버지의 고립된 생활태도 때문에 자신의 어린 시절은 마치 한 편의 악몽과도 같은 것으로 표 현한다. 그것은 그녀의 회고록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Dream Catcher]란 그야말로 꿈을 잡으려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 이다. 그녀는 자신이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소설을 읽으면 서 특히 절벽 끝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절벽 밑으로 떨어 지지 않도록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파수꾼이 되고자 한다는 대목에서 자신이 느낀 첫 반응은 분노 그 자체였다는 것이 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여 놀랐으며 실제로 몇 차례 절벽 근처에 가서 뛰어놀 때 샐린저는 누구 도 붙잡아주려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반문하기를, 어디서 자라는가가 문제이며 더욱 큰 문제는 왜 아이들이 위험한 절벽 근처에서 놀도록 허용하는가라고 했 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아버지의 일탈된 생활철학 때문에 희생당한 것으로 보았다(Salinger M 2000).

샐린저는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 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지 만 그를 모델로 한 영화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킨젤라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꿈의 구장]일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작가 샐린저를 찾는 주인공의 역할이 영화에 서는 흑인배우 제임스 얼 존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 [파 인딩 포레스터]에서 대본가 마이크 리치는 샐린저를 은둔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영화에서 천 재적인 은둔 작가 포레스터는“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꿈에서 멀어져 간다.”

고 말한다. 실제로 샐린저 자신이 이런 주장에 얼마나 수긍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

기도 하다. 대중적인 성공은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순

수한 삶의 목적과 전혀 다른 길로 이끌기 십상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성공에 대한 두려움은 어머니를 소유하고 아버

지를 제거하려든 이유 때문에 그에 대한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한다는 고전적인 거세공포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또한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서 어린 소년 오

스카가 더 이상 어른이 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성장을 멈

(11)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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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려했다는 점도 거세공포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

다. 샐린저 역시 자신의 성장을 스스로 멈춘 아이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한 채 자기만의 전지전능한 세계 안에 안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가 매우 명석하고 조 숙한 홀든은 정신적으로 미숙한 오스카에 훨씬 뒤진다. 오 스카는 자신의 아버지가 처형된 이후에 성장을 계속하기로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우침이 바로 진정한 성 장이라고 본다. 물론 샐린저의 오랜 침묵은 그 자신의 선택 이고 또한 누구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식을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침묵은 경우에 따라 매우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 지만 영구적인 침묵은 일종의 책임 회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Segal(1987)은 나치의 만행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던 국제정신분학회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녀 스스로 핵무기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부당한 현실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이며 정당한 권리 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러한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 는 지식인은 진정한 지식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며 더 나아가 세상으로부터도 지식인 대우를 받거나 그 어떤 혜택 을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샐린저의 은둔생활은 그런 의 미에서 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며 매 우 큰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자신 은 개인적으로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이 나름대로의 굳은 신 념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객관적으로 냉철히 따지고 본다면 그는 대중적인 인기나 명성과 완전히 자신을 단절하고 사는 입장이 아니기에 매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샐린저의 구원환상

호밀밭의 파수꾼이 맡은 역할은 위험한 절벽 아래로 아이 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위험에 처한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구원하겠다는 의지의 표 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샐린저 자신의 분신이기도한 홀든 콜 필드의 여정을 살펴보면 출발부터 모순에 가득 차 있다. 우 선 그는 집과 학교 모두에서 안주할 수 없었다. 어린 누이 동생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를 따뜻하게 이해하고 받아주는 지지자가 없었다. 모두가 그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사람들 뿐이다. 집과 학교 사이에서 그가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은 현 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그는 무작정 집을 나 서게 되고 길거리를 배회한다. 길에서 마주친 인간들은 한 결같이 그에게 실망과 상처만을 주었다. 결국 그는 집으로 향하지만 상처투성이의 정신은 치유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가 있을 곳은 과연 정신병원인가. 집과 학교는 그를 받아 주지 못하는 것인가. 집과 학교를 떠난 그에게 길거리는 매 우 위험으로 가득 찬 세계일뿐이다. 그는 그러한 위험을 인 식하고 순진무구한 어린 누이동생을 걱정한다. 따라서 그의 일차적인 목표는 강압적인 집과 학교를 벗어나 자유를 만끽 하는 것이었지만 위험에 가득 찬 세상을 직접 체험하고 그 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누이동생을 지켜주고자 하는 소 망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만한 힘과 실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힘 을 키워나갈 용기가 부족했다. 모든 일은 말로서만 되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딸 마아가레트 샐린저가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히치콕의 영화 [새]에서처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새떼들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들을 보 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시도하는 주인공의 적극적인 모습이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샐린저가 인식하고 있던 아이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때묻 지 않은 천진무구한 동심의 세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도 천진무구한 고전적 인식론에 기초한 것이다. 동심의 세 계는 우리가 외관상으로만 알고 있듯이 그렇게 순수하기만 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샐린저와 유사한 완벽주의적 강 박증은 불결함과 오염된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그러한 두려움은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또 다른 측면에 불

과하다. 반동형성의 방어기제는 그러한 이중성의 어떤 단면

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이론 가운데 가장

강력한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유아성욕설이

었다. 티없이 맑고 천사처럼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를 더

럽고 불결한 성으로 오염시켰다는 점이 프로이트의 가장 큰

오점으로 지적된 것이다. 샐린저가 믿고 싶은 환상도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동기를 거쳐 청소년기

에 이르러 가장 먼저 직면해야하는 세계는 성인사회의 오염

된 세상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샐린저처럼 피해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반드시 극복하고 통과해 나가야만 할 세상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

이다. 그러한 통과에는 물론 충만한 가족애와 환경적 지지

뿐 아니라 스스로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통과 절차에

서 무릎 꿇는 청소년은 결국 신경증적 문제에 봉착하고 더

나아가 정신병적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과거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곤경에 처한

청소년들은 흔히들 자신의 혼란과 고통을 타인의 탓으로 돌

리기 쉽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방어기제인 분리와 투사의

기제가 동원되면 모든 세상을 선과 악, 흑과 백, 독과 약, 적

과 동지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치우치고 동시에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들이 부모의 탓이나 모든 성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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