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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의₩식₩주’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한다. 그것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초가 되 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직도 아프리카 오지에서 살고 있는 소수 원시 부족민들은 옷을 입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며, 더운 나라에서는‘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먹는 것은 어떠한가.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는 무엇 이든 먹어야 산다. 그 중에서도 사람은 먹지 않고 살 수가 없다. 종교인들이 단식이나 금 식을 하기도 하지만 한시적일 뿐이다. 먹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네 조상님 들은 쌀 한톨 버리는 것도 죄악시 했었다.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자란 나는 먹는 음식 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라왔다. 그 때문에 음식이 남아서 버려지는 것을 그냥 마 음 편히 보고 있질 못해서 밖에 나가 식사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울화병이 생기곤 한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우리네 생활은 어떠했는가. 마을에서 잔치가 있는 날이면 온 마을 이 축제인냥 들떠서 먹을 것에 둘러앉곤 했었다. 빈대떡 한 장 돼지고기 한 점을 먹어도 소중하고 황송해 했었는데... 무엇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먹거리는 특히 과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다. 요즈음의 우리네 사회는 흔하고 사치스런 음식 때문에 여러 가지 중병을 앓고 있다. ‘과식이 만병의 근원이다’고 했지만 잘 먹고 너무 많이 먹어서 병에 걸린 사 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모두가 잘 먹고 산다고 생각 할 수는 없 는 일이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생활이 넉넉지 않았으니 나눔이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였다.
적은 비용으로 모자라지 않게 나눌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늘 궁리하고 사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친정어머님이 왜 그리도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 었는지를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작은 투자로 많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음식뿐이라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엄마는 그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했던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일만이 아니였던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네들 사이에 오가던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 그것은 음식을 먹는 일보다 더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탕수육 아줌마
권오분 자유기고가
일이였다. 그 때 가난했었던 사람들은 모두 형편이 넉넉해졌지만 지금도 나를 만나면 엄 마가 만들어 주셨던 옛날 음식이 그립고, 그 때가 너무 좋았었다고들 칭찬을 아끼지 않는 다. 그들은 우리보다는 더 잘 살았던 사람들이였는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나라가 예전보다 부자가 되었어도‘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라는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제는 수치로 엄청나게 나아졌지만 여전히 배고프고 외로운 이웃은 끝 없이 많기만 하다. 사회에서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지만 그들은 먼 훗날이나 지금에나 내 어린 날의 이웃들처럼 행복하게 추억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내 별명은‘탕수육 아줌마’였었다. 어느 날 이웃에 마실을 갔었는 데 그 집은 우리 아이 또래의 애들이 있는 집이였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탕수육을 사 달라 고 졸랐다. 20여년 전이였는데도 탕수육 한 접시에 1만 2천원이였고 그들도 나도 그 돈을 주고 중국집에 주문해 먹을 형편들은 아니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탕수육을 좋아한 다. 어른도 예외는 아니지만 어른들은 돈이 없으면 먹고 싶은 것을 참을 수는 있다.
우리가 중국집에 탕수육을 주문한 셈을 치고 1만 2천원어치 돼지고기를 샀다. 살코기 는 가격이 싸기 때문에 꽤 많은 고기를 살 수 있었다. 고기를 썰고 양념한 것을 몽땅 튀 겨서 탕수육을 만들었다. 조리 방법을 배워서 소스도 만들었다. 고기에 밑간을 했기 때 문에 중국요리집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이 있었다. 우유팩을 깨끗하게 씻어서 말려 둔 것에 소스를 가득 담고, 튀긴 고기를 신문지에 싸서 들고 갔다. 큰 접시를 빌려 달라고 말하고, 접시에 튀긴 고기를 담고 소스를 부었다. 당근과 배추와 양파가 알맞게 익어서 투명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아이들 먹게 하려고 아낄 것 같아서 한꺼번에 소스를 부어서 온 식구가 넉넉히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우유팩은 보온성이 뛰어나서 철가방 아저씨가 배달해 준 것보다 더 뜨거웠다.
지금과는 달리 그 때는 한 지붕 아래 다섯 가구가 살고 있는 집도 있어서 일곱 집을 나누어 줄 수가 있었다. 푸짐한 탕수육을 따끈하고 바삭하게 먹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나 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탕수육을 먹을 일이 생기면 언제나 많이 만들었다. 한 접시 값으로 우리와 일곱 집이 먹을 수 있으 니 상당히 많이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아무리 유능한 사업가라 하더라도 700%를 남기 는 사업가는 없을 거라며 걸핏하면 큰 소릴 치곤했다.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내 경제 이 론을 이해할 수 없다고들 한다.
기름은 열을 가하면 쉽게 산화되기 때문에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한다. 나는 집에서 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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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만들기를 자주 하는 편이다. 일류 일식집도 3-4번만 튀기고 새기름을 쓰는 집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집에서 튀겨 주곤 한다. 무엇보다 밖에서 튀김을 사 먹을만한 돈이 없었다. 몇 번 튀겨서 동네잔치를 하고 나면 기름을 모았다가 양잿물을 섞어서 빨래 비누를 만들어 사용했다. 가루비누가 편리하긴 하지만 가격이 비싸고 수질 오염의 주범이라는 걸 알고 있는 터여서 친구와 합작으로 비누를 만들어 나누어 썼다.
나의 건강 요리인 튀김들은 신선하고 맛도 있고 이집 저집이 가족끼리 화목한 시간을 가 질 수 있었다. 물론 기름으로 재활용 비누를 만들어 비누값도 절약하고, 수질 오염도 줄 이는데 한몫했다. 일석몇조인지 답을 정할 수가 없을 지경이였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 르는 사이에 내 이름이 누구 엄마가 아닌‘탕수육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남편과 동네 길을 걷고 있으면 아이들이‘아줌마!’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뛰어 와서 인사를 했다. 바깥나들이를 잘 하지 않는 것을 아는 남편은 낮에 집에서 뭘 하기에 애들 한테 인기가 그리도 좋으냐고 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중학교에 가고 나니 탕수육을 만드 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지금은 탕수육 먹고 싶다고 조르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랑은 언 제나 줄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젊은 엄마들에게 말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의 손맛을 기억 속에 입력 시킬 수 있도록 몇 가지 특별식을 집 에서 만들어 먹이라고.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맛을 기억해 내는 일은 삶을 얼마 나 소중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나이가 들어서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엄 마의 손맛을 추억하듯 바삭한 오분표 탕수육 맛을 추억하며 어른이 되어서 회상할 수 있 다면, 나는 참으로 귀한‘마음의 씨앗’을 사람들 가슴에 심어 놓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