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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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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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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가진 사고(思考)의 역사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과 그 의미를 밝혀보려는 노력만큼 연원 이 깊은 화두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수많은 논객들의 다양한 시도와 연구 노력에도 불구하 고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더욱 미궁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 또는 정의에 대한 질문보다는 지금 몇 시인가 라는, 사용에 관한 질문에 더 익숙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1)의 직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누 군가 묻지 않을 때—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그 안에서 그것을 잘 알고—인지하고—살아가지만 문득 그러한 질문에 봉착할 때(의식하게 될 때)면 도무지 그 개념을 정의 내릴 수 없음에 당황하 게 된다. 그것은 시간의 정의란 지금 몇 시인가라는 일상적 발화 행위 안에 들어 있는 공리적 개념에 그대로 순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러셀은 “시간에 대해 몇 가지 탐구를 시작하자마자 우리 는 반드시 절망적 혼란에 빠져들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엘리아 학파의 논객 제논(Zenon, B.C. 490~430)은 “활시위를 벗어나 시공을 날고 있 는 화살은 어느 시점(時點) 또는 어떤 현재에 있어서도 언제나 여전히 정지하고 있다.”라고 하였 다. 그것은 이 모든 현상이 현재에 일어나고 있지만, 그 현재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바늘 끝보다도 더 첨예한 한 순간—즉 정지하고 있는 시간 또는 무시간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 현재라는 것에는 자체의 성질상 어떤 변화나 움직임, 또는 시간의 경과라고는 아무 것도 포함되 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우리는 단지 궤변으로만 받아들일 것인가? 문제를 시간인식 에 한정하여 볼 때 그의 교묘한 논리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란 시공을 날고 있다는 우리의 상 식에 대한 도전이다.

제논에서 금세기의 사상가들에게 이르기까지 시간의 문제 전체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모순 투성이고, 따라서 시간은 합리적(이성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만이 확인되었을 따름이다. 그것은 어떤 관념상의 흐름(경험적 시간)이 아니며, 또한 시계와 같은 계기나 그것으로 측정 가능한 단 위(객관적·과학적 시간)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은 단순히 과거·현재·미래라는 관념적 의미 단위 도 아니고, 낮과 밤, 작년, 내년, 봄, 가을 같은 개념 자체도 아니다.

그것들은 밤의 개념이 정해짐으로 인해 변별되기 위해 낮이 생긴 것 뿐이고, 하나가 의미 부 여됨으로써 그로부터 다른 하나가 개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순전히 자의적(恣意的)인 관습일 뿐이며 시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데는 여전히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다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다.

그것은 인간 의식의 직접적 자료로서 인지되고 경험되는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시간과, 연, 월, 일, 시, 분, 초라는 명백하고 계측 가능한(객관 타당한) 논리적 구성으로서의 시간 사이의 모순2)

— 물론 여기서 마이어호프가 이야기하는 시간 모순과 쥬네트의 시간 모순(착오) 개념과는 근본 적인 차이가 있다. 이 양자 간의 불일치가 결국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공하 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일단 원론적인 문제인 시간에 대한 논의 자체의 어려움은 지 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집중하는 부분은 인간 개인이 지각하고 경험하는 시간, 하이데거(H.

1) St. Augustin(354~430), 고백록Confessions, 제11장.

2) Hans Meyerhoff, Time in Literature, Univ. of Califonia Press, Berkely ans Los Angeles,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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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degger)가 얘기하는 인간 존재의 기본 범주로서의 시간, 존재와 시간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가 관습과 경험으로 얻은 시간의 모습이란 이미 있음, 나아감, 다가옴이라는 과거에서 현 재, 그리고 미래로 향하는 불가역적(不可逆的)과정, 즉 선적 구조(지속성)를 갖는다는 것이며, 이 것은 시간의 순서뿐만 아니라 방향까지도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성(時間性) 즉, 시간의 질 서 개념이다. 이 시간성은 인과관계(인과율)의 틀 안에서 결합함으로써 객관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과율을 전제할 때만이 시간적으로 잇달아 나타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객관 적 배열과 주관적 배열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인과율은 하나(A)와 다른 하나(B) 사이의 선후관계이므로 A가 원인이 되고 B가 결과가 되는 논리적, 시간적 순서 관계를 내포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적 순서와 인과관계라는 개념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이들은 그 내부 를 관류하는 시간적 지속(持續, 시간을 연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실어 나른다. 이점은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다루게 될 이야기로서의 영화—그리고 여타의 서사 텍 스트들이 공유하는—가 갖는 시간의 문제, 바꾸어 말하면 위와 같은 시간의 몇 가지 성질이 영화 적으로 또는 기술(記述)·구술(⼝述)적으로 인간을 재구성하고 묘사하는 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특 별한 의의를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의 핵심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영 화에 대한 내재적 연구의 한 국면 즉, 영화 구조 요소의 한 부분으로서의 시간 문제를 집중적으 로 다루게 될 것이다.

2. 영화 텍스트의 시간 분석을 위한 전제

영상의 시간적 지위와 특수성

오늘날 일반적으로 우리가 극장에서 접하게 되는 영화의 영상은

1. 카메라에 생필름을 넣고 피사체를 1초에 24번씩 연속으로 촬영하는 것을 현상하여 음화 필름을 얻는다.

2. 이것을 다시 영사할 수 있도록 양화 필름으로 바꾸어 영사기에 걸고 다시 1초에 24개의 정사진 필름들을 연속으로 돌아가게 하여 스크린에 투사하여 움직이는 환상을 얻어내는 것.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진적 영상이 갖고 있는 시간적 속성에 관한 것이다. 즉, 한 프레임씩의 개별적인 정사진이란 이미 어느 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어떤 것(사람, 사물)을 우리가 그것을 접하는 순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형식으로서 ‘그때 그곳에 있었던 하나의 존재’3) 또는

‘한 순간의 공간적 시간적 현실에 대한 시각적 점유’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 라서 그것은 과거완료시제(완료상)를 그 지향점으로 한다.

반면에 영화 영상은 ‘관객이 스크린을 응시하는(그 순간) 그곳에 지금 존재하는 것’4)으로 인식 된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상영이 시작된 영화관에 들어갔을 때, 이전에 지나간 영상들은 이미 흘러간 것일 뿐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현상과 맞딱뜨리게 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화

3) Roland Barthes, “Rhetoique de l’ image”, communication N°4, 1964.

4) Christian Metz, Essais sur la signification au cinema, tome I, Paris, Klincksieck, 1968,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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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영상은 단지 하나의 시간만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며, 우리는 ‘영화에서 모든 것은 항상 현재’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메츠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약 영화적 영상이 항상 현재라면, 영화 그 자체는 그 사진의 편에서 보았을 때 항상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닌가?”

메츠의 이 말은 영화 필름의 영사란 이전에 완전히 완료된 행동을 되살리는 것이며, 사전에 지나갔던 것이 지금 관객에게 나타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대상으로서의 영 화는 카메라 앞에 이미 존재했던 하나의 행동을 녹화하였다(촬영된 것)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과거이며, 이 행동이 상영되는 순간 직접적으로 연속된다(영화적 수용)는 이유에서 현재가 된다.

그러나 촬영된 것이 지난 사건의 흔적을 붙잡아 두는 것이라는 생각을 쉽사리 용인한다 해도 영화적 영상이 현재라는 문제는 좀 더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화적 영상은 그 자 신이 보여주는 것(행동)을 현실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츠 역시 이러한 사실에 대해 “관객은 (영상의) 움직임을 항상 현실로 받아들인다”라고 첨언하고 있다.

결국 영화적 영상은 시간 안에서 행동의 흐름(시간적 지속)이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서사 전개 과정(process)이라고 부를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A---X ---Y---B

· X—Y = 서사 전개 과정의 실행에 대한 지속 축(연대기적 시간의 흐름)

· A—B = 서사 전개 과정의 연출 기간

· A = 도입부

· B = 결말부(행동이 종결된 부분)

이러한 도식화는 영화 서사 텍스트를 구성하는 하나의 행동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방식으로 서술(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우선 행동을 이끌어가는 주체(행위자)가 부분 A—B의 내부에 위치하는 경우 즉, 점A(도입부)에서 점B(종결부)를 향하여 가는 과정의 지속 내 부에 위치한 자신의 실행(행동)과정을 묘사하거나 이야기하는 경우—미완료상에 의해 표현되는 것 즉, 관객은 인물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흥망성쇠에 동참하고 있다는 환 상을 갖도록 하는 것—가 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자가 부분 A—B와 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뒤에 일어나는 어느 한 순간에 위치하는 경우—이때 관객인 우리는 서사 전개 과정의 실행에 대한 지속 내에서 동작주·행위자를 수행한다. 즉, 우리는 A—B의 내부에 위치하게 된다—혹은 완전히 완료된 과정에 나타날 경우 즉, B—Y에 위치(완료상에 의해 표현)하는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점과 화법 등 서술의 문제와 관련을 맺으며 더욱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지, ‘영화적 영상은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는 순간 우리 앞에 수행되는 서사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논리의 방향에서 시간을 갖는다는 점’과 ‘현상(懸象) 으로서의 시간은 카메라 앞에서 행해진 것이며 물론 그것의 복원(재현)의 시간이라는 점’에 대한 확인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영화적 영상은 ‘현재라는 시간적 자질’과 ‘직접화법이라는 양태’를 가지고 그것이 ‘지금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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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있다는 미완료상적 존재의 특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개념을 갖 고 후속 논의에 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영화라는 하나의 서사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매체인 음향(대사, 효과음, 음악)이 영상과 함께 결합하거나 분리 되면서 빚어내는 세 가지 시간 개념 즉 서사체 내부 사건들의 연대기적 재배열을 통해 얻어지는 스토리 시간과 개별 사건들을 텍스트 내에서 다루고 있는 담화의 시간, 그리고 문학 텍스트에서 는 계측 불가능하지만 영화 텍스트에서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계측 가능한 관객의 수용 시간(영 화의 영사 시간, 러닝 타임)을 나누어 고찰해야 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질투의 모호한 대상

김기덕, <시간>

김기덕의 <시간>은 남녀의 통속적인 사랑 관계에 얽힌 대상의 모호함을 시간이라 는 프레임 속에서 탐색한다. 파격적인 남녀 관계를 통해서 욕망과 사랑의 함수에 대 해 실험적인 질문을 던져온 전작들의 연장선에 서서, 얼굴을 소재 삼아 알지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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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아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얼굴에 대한 현대인의 집착에서 욕망의 흔적을 찾는다. 마주보는 얼굴은 욕망을 감싼 채 사회적인 모습으로 변모된 현대 인 간 관계의 근본이며, 자아가 타자로부터 규정되듯, 타자 또한 보이는 자아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남자인 지우의 시선에서 시작한다. 그는 오랜 연인인 세희 외에 다른 여자 들의 얼굴과도 사회적인 시선을 주고받는다. 세희가 질투하는 건 그 시선. 세희는 늘 똑같은 얼굴이라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그 똑같은 얼굴은 지겨움만을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세희는 지우의 시선에서 욕망을 엿보며, 그의 욕망을 일깨우기 위해 달라 진 얼굴을 필요로 한다. 세희에 따르면 동일성은 지겨움, 차이는 설렘이다. 대상이 주체의 욕망을 재규정하는 방식이다.

영화적 시선은 얼굴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여자 세희의 관점을 중심으로 가져온다.

세희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지우 곁을 떠나버린 후, 지우는 헤어짐의 허전함을 달 래며 다른 여성들을 만나지만 무언가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는다. 그것은 지우의 시 야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후 마치 유령처럼 주변을 맴도는 세희의 시선이다. 3자로서 거리를 둔 채 미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속에 드러나는 질투의 시선이다. 지켜보는 자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잠깐씩 관객의 시점을 취하여 질투의 정당성에 동의를 구하 기도 하고, 모텔의 유리창을 깨며 행동으로 현실에 개입하기도 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빈집>에서 태석의 흔적과도 흡사하다.

지우는 우연찮게 새희라는 여성을 알게 되고 사랑하지만 그녀는 지우의 옛 연인 세희만을 강하게 질투할 뿐이다. 사실 새희는 얼굴 성형을 받고서 지우의 사랑을 되 찾고자 한 세희지만, 관계는 그녀의 기대처럼 되지 않는다. 새희가 세희임을 알자 지우는 새희 곁을 떠나버린다. 마침내 두 사람은 새 얼굴의 지우와 세희의 가면을 쓴 새희로 다시 만나지만 그들의 관계는 어떤 새로운 변화도 얻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만다.

세희와 새희는 동일자인가 유사자인가, 두 얼굴을 지닌 같은 인물인가, 얼굴이 다 른 딴사람인가. 지난 세월의 희열과 새로운 희열을 연상하게 하는 그녀들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같은 공간인 조각공원에서 각기 다른 시각에 지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무엇이 원본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새희가 질투하는 세희는 자신인 가, 타인인가. 포스트모던에서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는 일이 무의미하듯 영화의 두 여자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녀들은 충족되지 않는 사랑 또는 욕망을 갈구 하는 같은 자아의 변조일 뿐이다. 그 때문에 낯선 조우는 필연적인 동시성을 얻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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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 사이에서 순환하는 시간은 마치 무의식처럼 욕망과 ‘결여lack’에 관한 서사 와 이미지를 풀어놓는다. 두 번의 마주침은 그녀들의 행로가 폐쇄된 것임을 명징하 게 드러낸다. 성형을 통해 얼굴을 바꿈으로써 유혹의 유효기간을 확대하려는 행위는 결여된 주체를 살아 있게 하려는 히스테릭한 욕망에 의하여 폐쇄회로를 순환하는 반 복일 뿐이다. 그것은 그녀들이 항상 찾아가는 바다와 이에 접한 해변공원의 선정적 인 조각물로 나타난다.

해변의 조각들은 성적인 결합이나 남근적 phallic 상징으로 가득하고, 바다는 그들 을 물에 담갔다 뺐다 하기를 거듭한다. 결여의 주체는 즐거웠던 한때를 그리워하거 나 새로운 희열을 찾으면서 조각공원을 반보개서 찾는다. 그러니까 조각물과 바다는 사라져가는 욕망의 불씨를 되살리는 효력을 지닌다고 가정된 셈이다. 영화 포스터에 서 세희가 굳게 붙잡고 있는 조각상의 한 부분이 무엇이지 생각해보라. 이렇듯 기이 한 질투 이야기는 이일호의 조각 작품과 만나면서 욕망을 되살리는 층위로 옮겨가는 데 성공한다.

지우가 <빈집>을 편집하는 장면은 장난 섞인 우연일 수 있지만, 두 영화에 공존하 는 유사한 시선을 설정하는 필연이기도 하다. <빈집>이 아직 편집 중일 때 <시간>

이 관객에게 보여진다는 시간적인 도치는 영화 <시간>의 뒤섞인 시간을 잘 설득하 는 효과를 준다. 또렷이 보여주는 세희의 휴대전화번호 010-2006-0118은 영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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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과 관련된 날짜를 암시하면서, 영화에 부재하는 지나간 시간과 영화과 촬영되던 시점에는 부재했던 관객의 시간이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 안에서 충돌하게 된다.

그렇듯 영화 <시간>에는 선형의 시간과 순환의 시간이 혼재한다. 세희와 새희는 두 차례에 걸쳐 시선을 교차한다. 처음에는 과거의 정체성으로서의 세희의 관점이 성형외과에서 나오는 새희를 바라보고 끝에는 새희가 현재의 정체성으로서 과거의 세희를 주시한다 nf론 이 처음과 끝은 영화 안에서는 동일한 시점이다. 물리적인 시 간이 존재하지만 영화의 플롯은 시간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결여를 채우기 위해 자아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성형수술로써 사랑을 되살려낸 새희였지만 세희에 대한 견디지 못할 질투심 때문에 다시 세희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새희는 세희 얼굴 가면을 쓴 채 지우에게 나타난다. 가면은 누구이며 가 면 뒤에 가려진 얼굴은 누구인가.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싸인 자신이 누구인지 분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속이는 건 곧 가면과도 같은 자아의 기능이다. 그렇기에 자신 을 알지 못하는 그녀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함은 당연 하다. 사랑의 관계는 현실세계의 자아를 반영하며, 따라서 손상된 자아는 자기반영 인 타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영역에서 뒤엉켜버린, 절대적인 법칙의 큰 힘에 눌려 희열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은 달아나고 싶어한다. 교착된 자아로 인해 주체는 세희 얼굴 가면에서 느껴 지는 유령 같은 섬뜩함만큼의 공포와 마주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괴 리되고 실재에 근접하는 두려운 경험이다. 흔들리는 자아로부터 달아나기에 가장 유 효한 곳은 익명이라는 위치다. 지우가 정체성을 숨겨버린 채 사라진 것이나 새희가 아무도 자신을 몰라보는 또 다른 얼굴을 갖기 원하는 것은 곧 이런 익명에 대한 희 구다.

익명성은 욕망의 주체로서 느끼는 죄책이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관련 있다. 그 현대적인 의미는 유혹의 첫 번째 소통ㅅ단인 얼굴이 성형수술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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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되듯이 주체는 욕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채 타자의 시선에만 기대어 숨는다 는 것이다, 주체의 욕망이 은폐되고 사랑이 적절한 상징적 위체에 등록되지 못하면, 세희와 지우처럼 반복되는 욕망의 폐쇄회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 남성의 이미지는 다소 부드러워지고, 여성을 중심에 올려두 었으며, 캐릭터와 상황의 설정이나 편집과 소품 같은 다소 거칠던 요소들이 조금 세 밀해진 느낌을 준다고 해서 <시간>이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는 향기’같은 김기덕 감 독의 독설적인 미학으로부터 철수했다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다행하게도 아름다운 허구가 될 수도 있었던 지우와 세희의 사랑 이야기는 소름끼치는 진실한 욕망 이야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김창남, 대중문화의 이해, 한울아카데미

디터 메르쉬(문화학연구회 역), 매체이론, 연세대학교출판부

마셜 매클루언(김상호 역),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커뮤니케이션북스

단대문예교육진흥위원회, 문학에의 초대 , 단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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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시간성의 세 차원

스토리의 시간이란 사건과 인물이 가진 성질과 조건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필요하게 되는 진행 또는 행위의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사건과 행위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연적 시간의 경과 (스토리 시간)이다. 이것은 시간이라기보다 일종의 경과성 즉,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는 사물의 변화적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과성이 없다면 사건과 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 라서 사건이나 인물이 가진 스스로의 조건들, 성분들 때문에 스스로 규제되고 지배되어 나온 것 이다.

다음으로 담화의 시간은 작가가 한 편의 이야기 내부에 사건을 제시하고 그 사건을 추인해 가 는 인물의 행위를 서술할 때 자연적인 시간의 경과뿐만 아니라 이른바 플롯 구조를 통해 이 자 연 시간을 임의로 분절하고 변형(변조)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노리는 특정 목적 즉, 주제를 구현하고 강화시키며, 이야기적 가치를 점증시키기 위해 어떤 사건의 결과 를 서두 부분에 놓고 원인과 과정을 뒤에 가져올 수 있는 것 등이다. 따라서 담화의 시간은 사 물 자체에 부과된 원초적 시간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서 임의로 만들어지는 시간이며, 이러한 방 식은 모든 종류의 이야기에 허구성을 부과하는 하나의 조건(패러다임)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객의 수용 시간(영화의 영사 시간, 러닝 타임)은 스토리 시간과 담화의 시간과 같은 작품의 내적 시간이라기보다는, 반대편에 서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 구현의 시간이 기도 하다. 즉, 영상과 음향으로 재생해 내는 기록의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간은 장면 장 면을 담기 위한 경과의 시간이라기보다는 고려의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곧 작가의 개성이 표출 되는 첫 번째 지점이기도 하다. 재료의 선택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재생해 내 는 여러 가지 기술적 흐름의 완급에 따라 작가의 재주와 상상력 등 모든 역량이 발현되는 곳이 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시간의 차원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작품의 창작과 수용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텍스트에서 시간성에 대한 분석은 자체의 메커니즘 속성상 매우 복잡다기한 일이며 그만큼 창작자나 분석자, 독자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의 논의에서는 우선 앞의 두 가지 문제 즉,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는 스토리의 시간과 담화의 시간 에 대한 분석 연구에 집중하면서 수용의 시간 문제는 발췌된 예들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부분적 으로 언급할 것이다.

이 부문에 대한 연구는 프랑스 구조주의 서사 학자들, 특히 쥬네트의 연구가 가장 탁월한 업 적으로 손꼽힌다. 그는 기술 서사체(記述 敍事體, 주로 소설) 내부에 존재하는 위의 두 시간성을 집중적으로 분석, 연구하였고 이 두 시간 사이의 불일치 문제를 시간 착오(Anachronie)라고 명 명하였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