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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의 하귀마을과 항일운동

하귀마을은 물과 경작지, 그리고 자원이 풍부한 연안 어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다. 하귀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 지만 탐라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초기 철기 시대에 제주도 에 나타나고 있는 고인돌이 먹돌새기 일대와 외도천을 건너 하귀와 광령에 집중 된 것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하귀는 貴日村과30) 동일지역으로 서 2,000∼2,200여 년 전부터 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문헌상으로도 약 1,0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향토사학자 김봉옥은 삼별초 항쟁과 관련하여 귀일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 록을 남기고 있다.

김통정이 한라산 북쪽 귀일촌에 바깥 외성으로 흙을 쌓고, 안쪽 성으로 돌을 쌓으니 이게 항파두성(缸坡頭城)이다. 이 외에 애월포에 나무로 성을 쌓았으며, 하귀포를 군항(軍 港)으로 삼았다. 지금 동귀리를 군냉이(軍港洞의 속칭)라 함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의 규모는 외성인 토성(土城)의 둘레가 15리나 된다. 성 안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돌 로 쌓은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동서로 하천이 있으므 로 천연 요새를 이룬다

귀일촌은 삼별초의 임시 수부(首府)였기 때문에 서울의 언어 풍속까지도 전하여졌을 것이다.31)

숙종 28년(1702)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제주도 관내를 순력하면서 자연, 역사, 풍속, 산물, 방어 시설 등을 기록한 탐라순력도의 飛揚放鹿 (제주서면 53개의

30) 탐라가 한반도에 성립한 국가의 중앙정부에 탐라군으로 종속된 것은 숙종 10년(1105)이었지만 현령 이 중앙에서 파견된 시기는 의종대(1147-1170)부터이다. 의종 7년(1153)경에 탐라군에서 탐라현으로 개편되었고 현령 등의 외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희종 7년(1211)에 탐라현과 귀덕현으 로 나누어졌고 고종 3년(1216)보다 앞선 시기에 탐라현이 탐라군으로 칭해지다가 이후 7년 쯤 지나, 제주( 부사와 판관 파견)로 불렸다. 충렬왕 21년(1295년)에는 제주목으로 개편, 충렬왕 26년(1300)에 이르러 제주목에 속했던 촌 가운데 14개의 촌이 동 서 방향으로 나뉘어 각각의 군현으로 개편되었 다. 이로서 그 이전에 형성된 귀덕현을 합하여, 고려 때 탐라민의 거주지는 대촌과 15개 군현에 집중 적으로 형성되었다. 충렬왕 시기에 군현으로 새롭게 개편되는 14개의 촌중에 하나가 오늘날 하귀마 을을 중심으로 하는 귀일촌이다(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 신서원, 2000, 87-93쪽).

31) 김봉옥, 제주통사, 제주문화, 1987, 54-55쪽, 61쪽.

마을 위치와 지형 봉수대등을 담고 있음)에도 軍浪浦, 軍郞浦, 藻腐浦가 표기되어 있다. 하귀마을의 옛날 이름인 군냉이(軍浪浦, 軍郞浦, 軍港洞)는 삼별초 당시 항 파두리성의 전초기지 및 군항지로 이용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1273년 여몽 연 합군이 삼별초군 정벌 시 군랑포로 상륙하여 삼별초와 격전이 벌어져 파군봉과 오늘날 주로동32) 일대에는 병사들의 선혈과 시체가 즐비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땅은 흘린 피로 온통 붉었다고 한다.33) 이후 사람들은 이 주로동 일대를 '붉은 질'이라고 불렀는데 4 3 때도 이 붉은 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하귀라는 마을 이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광해군 때 (1609) 실시된 면리제도에 의해 상귀리, 하귀리로 분리되어 이때부터 하귀리라 칭해졌다고 보고 있다. 원래 하귀리 향사는 미수천 하구에 있었으나 구 애월면 하귀 출장소 자리로 향사가 이설되었다고 한다. 하귀마을이 미수천을 경계로 하 귀 1, 2구로 분리된 시기는 1925년, 일제강점기 때였다.34)

해방 직후에도 하귀마을은 하귀 1구와 2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귀 1구는 ' 군냉이'라고 속칭되기도 했던 것처럼 마을 구조가 단순했다. 그러나 하귀 2구는 미수동, 가문동, 개수동(훗날 학원동), 답동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는데 하귀 2구 의 개수동만이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간 위치에 있었고, 나머지 마을들은 모두 일 주도로변이나 또는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방 직후 하귀마을에는 500호에 2,800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

해방 직후의 교육 기관을 보면 일제강점기인 1940년 3월 25일 하귀사립심상소 학교에서 시작된 하귀공립국민학교가 하귀 2구 미수동에 있었고, 하귀 1구에는 하귀중학원이 설립되어 하귀 1구 동민회관에서 중등교육이 시작되었다.

제주 4 3 당시 하귀마을에는 강(姜,康), 고씨, 김씨, 정씨, 문씨, 장씨, 이씨, 배 씨 등이 살았는데 그 중 강씨, 김씨, 고씨가 많이 살았다. 제주 4 3으로 빨갱이 마을이 된 하귀는 1953년에 동귀리와 귀일리로 마을 이름을 개칭하여 생존을 꾀 했다. 6월 항쟁 이후 하귀마을 정체성 찾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1993년 9월 1일에 일시적으로 동귀와 귀일은 하귀리로 통합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북제주군 조

32) 주로동은 답동의 일부 마을이다(제주특별자치도, “하귀마을”, 제주의 마을, 2017. http://jejuvill.jeju.go.kr/).

33)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주교육박물관, 학교가 펴낸 우리고장 이야기-애월읍, ㈜ 건국디자인 편 집실, 2014, 702쪽.

34)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주교육박물관,앞의 책, 2014, 647쪽.

례로 하귀마을은 하귀 1리와 하귀 2리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하귀마을은 항일운동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하귀마을 출신의 대표 적인 항일운동가는 김귀영(金貴榮) 강문일(康文一) 박영순(朴榮淳) 김홍규(金弘 奎) 배두봉(裵斗鳳), 김용해(金容海), 김달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제의 주 목을 받는 이른바 '요시찰 인물'들이었는데 주로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과 사 회주의운동을 통한 항일투쟁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35) 이들을 중심으로 행해진 항일운동은 크게 3가지 방면으로 조명할 수 있다. 첫째는 일본 내에서의 노동운 동과 결합된 항일투쟁, 둘째는 동아통항조합운동과 혁명적인 농민조합운동을 통 한 사회경제적인 항일투쟁, 셋째는 하귀에서 야학을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 는 교육활동중심의 항일투쟁 등을 들 수 있다.

1910년대 금지했던 일본으로의 도항이 일제의 노동정책에 의해 1922년에 자유 도항제로 바뀌고 다음 해에 제주와 오사카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많은 제 주민들이 일본으로 일을 찾아 떠났다. 하귀마을 역시 한 집에 1-2명씩 갈 정도로 일본으로의 출가 노동이 많았다.36) 거기서 하귀 출가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현실 과 식민지 백성의 설움 등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해방된 조국과 새로운 세상을 찾고자 공부와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로 성장해 갔다. 그런데 1932년 일본 오사카 나시요도가와구에 위치한 오즈다케바야시 기업회사라는 방직공장에서 한국인 여 공 36명을 무단 해고하자, 이에 대항하여 4월 22일 무단해고 반대와 노동조건 개 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회사가 이를 묵살하자 5월 14일 다시 시 위를 벌이며 공장에서 농성을 시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강제로 30명을 검거 했다. 이 때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서 활동하던 배두봉이 파업사건의 배후인 물로 검거되어 1933년 6월 29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아 감옥 살이를 하였다.37)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그는 만기 출옥 후 고향 하귀리로 돌 아와 김홍규, 박영순 등과 함께 야학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일본으로의 출가 노동이 활성화되면서 제주와 일본을 오가는 배를 이용하는 제주민들이 늘어갔다. 그런데 일본인이 선박업을 독점하고 있어서 제주와 일본

35) 4 3은 말한다 , 제민일보,1999. 3.12.

36) 고창선(1934년생, 하귀2리)의 증언(2016.11.15) 37) 동아일보, 1935. 8. 16.

오사카를 다니는 배 삵이 그들에 의해 마음대로 책정되었다. 급기야 1920년대 말 에 오면 일본 선박회사가 갑자기 배 삵을 종전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높게 올 려 일본에 왕래가 많았던 제주민들의 부담이 너무 커졌다. 오사카 거주 제주민들 은 배 삯 인하를 요구하였으나 일본 선박업자들은 제주민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손으로 우리 배를 운영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동 아통항조합운동'이 그것이다. 이것을 처음 추진한 이는 조천 사람인 고순흠이었 다. 1928년 12월에 제주항해조합을 결성하여 먼저 추진하였으나 조합원이 적고 돈이 부족하여 도중하차하였다. 그 후 1930년대에 와서 오사카 노동조직을 이끌 었던 김문준이 중심이 되어 '동아통항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고룡환을 임대하여 출항하고, 나중에는 복목환을 사들여 자주운항을 추진하였다. 한때나마 우리 민족이 운영하는 배를 타고 오사카까지 제주 사람들이 다닐 수 있었다.

동아통항조합운동에 김문준을 도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 중에 하귀 사람이 있 었다. 김달준과 김용해가 그들이다. 김달준과 김용해는 김문준과 함께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다. 동아통항조합운동에 뛰어들기 전 인 1920년대 후반기에는 오사카와 도쿄의 신간회 지부 간사 일을 맡아서 항일 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38)

한편, 1932년 해녀항쟁을 계기로 많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가 구속되면서 사회 주의 항일운동은 타격을 받았다. 제주도에서는 이에 대한 새로운 사회주의 항일 노선이 구축되었다. 이것이 혁명적인 농민조합운동이다. 과거와는 달리 하층민의 기반 위에 해방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혁명적인 농민조합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항일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 중에는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많았다. 이 시기 제주도에서도 이익우를 중심으로 혁명적인

한편, 1932년 해녀항쟁을 계기로 많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가 구속되면서 사회 주의 항일운동은 타격을 받았다. 제주도에서는 이에 대한 새로운 사회주의 항일 노선이 구축되었다. 이것이 혁명적인 농민조합운동이다. 과거와는 달리 하층민의 기반 위에 해방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혁명적인 농민조합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항일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 중에는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많았다. 이 시기 제주도에서도 이익우를 중심으로 혁명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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