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보면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기록이 상당부분 겹쳐지면서 도 약간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간의 차이 점이 반드시 상호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보완관계로서 본다 면 그들의 행적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자료가 부족한 한국선도사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해준다고 할 것이다.
청학집은 필사본과 유인본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말기에는 널리 알려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면 이미 이규 경(1788-1856)이 청학집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이 그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속에서 확인된다.
위한조(魏漢祖)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운학집(雲鶴集)이라는 것은 비기 류(祕記類)이다[속전(俗傳)에 이르기를 명종⋅선조 때의 사람으로 호남에서 살았으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사사하였다고 한다. 운학집은 청 조(靑鳥)의 요지로 비결(祕訣)이 있다고 한다.43)
인용문에서 말한 위한조가 지은 예언집이라는 雲鶴集은 바로 청 학집의 이명이다. 아무튼 청학집의 존재를 이규경이 알고 있었고, 그
43)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技藝類, 卜筮, 祕緯圖讖辨證說 “魏漢祖者著雲 鶴集 祕記類也【俗傳明宣兩朝時人 居湖南 李土亭之菡師云 其集卽靑鳥之旨 而有祕訣云】”.
비기류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4)
청학집이 후대에 일부 가필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책자체 가 위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문제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더 이상의 문제제기는 없다. 하지만 규원사화에 대해서만은 몇몇 사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초기의 위작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특이한 일이다. 조 인성은 규원사화는 해동역사 지리고등을 참고하여 작성된 것이 분명하며 20세기 초에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결국 “규원사화
는 환단고기와 마찬가지로 단군신앙과 관련된 종교사화일 뿐 우리 한국고대사 연구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45) 박광용은 한말에서 1920년대의 작품이며, 그 저자는 한말 계몽적 사학 내지 사관직책 관련자이거나, 1910년대 조 선편찬위원회나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에 관계가 있는 인물일 것이 라고 구체적으로 주장하였다.46) 김성환은 규원사화가 1910년대 중반 부터 1920년대 이후의 위작이며 규원사화가 청학집의 내용을 베꼈다 고 판단했다.47)
만일 어떤 위작론자의 말대로 규원사화가 청학집을 베껴서 20세기 초에 만든 위작이라고 한다면 본고에서 고찰했던 바와 같이 청학집 과의 비교결과 규원사화에만 나와있고, 청학집에 없는-더구나 다른 어떤 서적에도 발견되지 않는-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 가? 만일 규원사화가 청학집을 베낀 것이라면 당연히 청학집에 들어 있는 내용의 범위내에서 그 일부를 인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규 원사화에는 그 범위를 벗어나있거나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로 우리는 2가지 가능성밖에 생각
44)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청학집은 표지의 제명이고, 내지의 제명은 ‘운학선 생사적’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선도문화6집, 95-96쪽 참조.
45)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78-88쪽.
46)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 가을호, 208쪽 참조 47) 김성환, 재야사서의 사료적 검토-규원사화의 진서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할 수 없다. 즉 첫째 청학집 외의 또 다른 한국도가서를 인용했거나, 둘째 완전히 가공으로 꾸며냈거나 둘 중 하나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 전연 알려져있지 않은 1920년대에 인용했던 도가서가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할 것이고, 또 설혹 그렇다고 하 더라도 청학집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그것대로 가치를 지닌 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규원사화속에서 청학집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는 내용이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규원사화가 삼국유사 이후 단군 관련한 기록들과 전혀 다른 것이어서 이를 받아들이기 주저되며, 오히려 고조선 연구와 인식에 많은 혼란을 준다는 투의 시각은48) 객 관적이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규원사화가 1920년대에 완전히 허구로 꾸며졌다는 두 번째 가능성 도 거의 성립하기 어렵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국립도서관소 장본 규원사화 책 자체에 대해 1972년에 이미 서지학자들의 공식적 인 검증과 확인을 거쳤기 때문이다. 위작설이 제기되기 한참 이전인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금석학과 서지학자의 감정결과 숙종 당시의 진본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규원사화 위작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이 감정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계속 위작설을 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지 학이란 책에 사용된 종이와 제본 인쇄 조판 제작과정등 책의 물리적 특성을 분석하는 학문으로서, 적어도 전적의 연대문제에 관해서는 서책에 대한 직접 고증이 없는 관념적 역사학보다는 더 신뢰할 수 있다. 위작설이 나오기 10여년전에 이미 공식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 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계속 위작설을 제기해 오기 때문에, 일부학자들이 주변 학문과의 학제간 연구를 기존의 통 설에 입학해서 제한한다는 오해를 받거나, 의도적으로 서지학등의 48) 김성환, 재야사서의 사료적 검토-규원사화의 진서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
로-, 79-81쪽, 95쪽 참조.
연구결과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받는 것이다.49)
필자의 다른 연구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지금 규원사화의 위작논 쟁을 하고 싶다면 먼저 이 서지학적 감정결과에 대해 과학적 분석을 통해 새로운 반론의 근거를 찾는 것이 나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규원사화가 갖고 있는 자료적 가치를 더 연구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더 발굴해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잃어 버렸던 한국선도사를 복원하고 풍부하게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규원사화가 삼국유사 이후의 기록들과 다르다면 규원사화가 위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규원사 화가 숙종 당시의 전적으로 규명이 된 이상, 규원사화는 청학집과 별 도의 저작이거나, 최소한 규원사화가 청학집 이외의 또다른 조선중 기 이전에 나온 저본을 가지고 인용한 것이라고 추론해야 정상적인 추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