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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도고찰 척도고찰 척도고찰 척도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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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의 척도고찰은 척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유물이 없어서 간접적으로 추 정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취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아래의 표 17,18은 평양시 낙랑구역의 정오동,정백동,토성동,남사리 등 넓은 범위에 고대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이에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고조선 후기문제를 해명하 기 위하여 이 일대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이다.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의 의의는 정백동3호분은 기원전 1세기로 편년되며 전형적 인 귀틀무덤으로 연대가 쓰여 있는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1세기 때로 정백동2호무덤(고상 현무덤)의 ‘영시3년’(기원전 14년)양산대,정오동1호무덤의 ‘시원2년’명귀잔,‘선사5년’

(기원5년)명귀잔,정오동6호무덤의 ‘건무5년’(기원29년)․‘건무18년’(기원42년)명칠반,‘건 무7년’(기원31년)명귀잔 3점,정오동4호무덤의 ‘영평14년’(기원71년)명칠반 등에서 확인됨 에 따라 연대가 비교적 잘 알려진 거울이 드러난 정황을 통해 볼 때 귀틀무덤이 기원1세 기초부터 기원2세기 초까지의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80)

이러한 고분에서 주체부에 해당하는 관(棺)은 제작 시 피장자의 신장을 고려하여 만들 어지고 또한 석재나 목재를 이용해 직육면체의 공작물을 만들기 때문에 부재의 상호접 합,절단을 위한 척(尺)이 존재했을 것이다.실제로 분석대상의 관의 크기에서는 척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수치적 특징들이 관찰된다.

80)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1,『北韓文化遺蹟發掘槪報』,p.34~41.

일련

번호 무덤명칭 나무곽크기

(길이×너비×높이,cm) 발굴년도 비 고

1 정백동 10호분 300×100×60 1971 ※홀로묻기무덤

※BC 1세기 전반기조성 2 정백동 3호분 300×135×60

300×125×70 1963 ※부부함께묻기무덤

※BC 1세기 후반기조성

표 17.나무곽 무덤

일련

번호 무덤명칭 널의 크기

(길이×너비×높이,cm) 발굴년

비 고

1 정백동 2호분 여자(동쪽)널 :208×80~85×48 1961 ※ 기원전1세기말~기원전 1세기초 조성 2 정오동 1호분 동(여자)․서쪽(남자)널 :202×62~60×46 1967 ※ 기원1세기초 조성 3 남사리 1호분 서쪽널 :250×76×50 1969 ※ 기원1세기 전반기 조성 4 정오동 3호분 서쪽(여자)널 :200×60×48

가운데(남자)널 :195×60×23

동쪽(여자)널 :200×56×19 1968 ※ A.D.1세기 후반기 조성 5 정오동 4호분 서쪽(남자)널 :212×70×60

동쪽(여자)널 :서쪽것보다 4~5cm 좁음 1968 ※ A.D.1세기 후반기 조성 6 정오동5호분 서쪽(남자)널 :220×70×60

동쪽(여자)널 :210×40 1969 ※ A.D.1세기 중엽 조성 7 정오동6호분 서쪽(남자)널 :212×64×30

동쪽(여자)널 :210×72×42 1969 ※ A.D.1세기 중엽 조성 8 정오동7호분 서쪽널 :220×64

동쪽널 :220×56 1969 ※기원1세기 후반기 조성

9 정오동8호분 서쪽(여자)널 :212×54×43 1969 ※기원1세기 말 조성 10 정오동9호분 북쪽널 :210×58×24

서쪽널 :210×60×24 1969 ※기원1세기 후반기 조성 11 정오동12호분 서쪽(남자)널 :260×70×42

동쪽(서쪽)널 :260×70×42 1971 ※ A.D.1세기 말 조성 12 정백동4호분 동쪽(여자)널 :240×60 1963 ※기원1세기 중엽 조성 13 정백동5호분 널 :220×70×70 1961 ※기원1세기 후반기 조성 14 정백동6호분 서쪽(남자)널 :201×57×54

동쪽(여자)널 :208×67×74 1961 ※A.D.1세기 후반기 조성

15 정백동11호분 서쪽널 :250×65 1971

16 정오동2호분 동쪽(여자)널 :211×49~50×40 1967 ※A.D.2세기 초 조성

표 18.귀틀무덤

아래의 그림은 관의 길이를 내림차순으로 정렬하고 산점도로 표현해 본 것이다.

그림 9.낙랑고분 관의 길이

그림 10.낙랑고분 널의 너비

관의 길이는 그룹화 할 수 있으며 각 그룹 간에는 약 10㎝차이가 있다.즉 관의 크기가

200㎝에서부터 210,220,240,250,260㎝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관을 제작할 때 일정한 수 치가 적용되었으며 보다 큰 관을 만들 때에는 나름의 수치체계 속에서 일정한 길이가 증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반면 관 너비의 실측값은 길이와는 달리 2~3㎝정도씩 규칙성 이 없이 증가한다.너비는 길이와 달리 수치의 변화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수치가 확인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척도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관의 길이인데,주지하다시피 낙랑은 우리나라에 漢 문화 유입의 교량적 역할을 했던 곳이며 따라서 낙랑에서 사용되었던 척도는 한척으로 보아왔다.그러나 분석에서 나타난 관의 길이는 10㎝ 단위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것은 한 척이나 고구려척의 배수체계에 맞지 않는다.10㎝는 10진법의 체계 속에서 3寸~5寸범위 에 해당함으로 1寸을 3.3㎝(=10㎝/3寸),2.5㎝(=10㎝/4寸),2㎝(=10㎝/5寸)중 하나로 볼 수 있어서 1尺은 33㎝,25㎝,20㎝등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산출된 1尺의 길이는 선행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한척(23.39㎝),고구려척 (35.6㎝)등의 길이와 비교해 볼 때 일치하지 않는다.낙랑고분에서 관의 길이를 대상으로 수치 분석한 결과는 한척 또는 고구려척과 일치하거나 비슷한 값들이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결과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최소한 우리 고유의 척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여지를 남긴다는데 의의가 있다.

정리해 보면 철기시대의 척도는 기존의 연구에서 기전척,한척,고구려척 등 학설이 있 었으며 그 길이는 23.39㎝와 35.6㎝이다.그러나 낙랑고분군의 관의 길이를 토대로 분석 한 결과 한척과 고구려척과는 다른 척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강 이남지역의 경우는 철기시대 척도에 대해서 연구가 극히 미약한 실정이고 이 시대척도에 대한 고민 없이 삼국시대이후부터 적용되는 북방전래와 같은 외부 유입설 에 비중을 두고 있는데,이것은 특별한 근거 없는 추론이 마치 정설처럼 고착된 것이다.

우리 고유의 척도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향후 자료의 발견과 재조명을 통 해 반듯이 확인되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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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시대 삼국시대 영조척 삼국시대 삼국시대 영조척 영조척 영조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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