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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의 순응과 순환의 상상력: 8시집 『소로(小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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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는 1993년 아내의 죽음 이후 7시집 『그리고 그 이후(以後)』를 발간한 데 이어, 1994년 8시집 『소로(小路)』를 발간한 뒤 그해 생을 마감했다. 박남수는 고독 한 현실 세계를 떠나 시 속에서 다시 돌아갈 곳으로 귀소하는 것을 상상한다. 그 상상은 극적으로 그의 죽음과 포개진다.

흙을 빚어서 만든

도자기가 보기 좋게 배열되어 있다.

그 앞,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여인.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저 여인도 흙을 빚어 만들었나 하고 혼자서 웃는다.

도자기가 사람이나 매 일반 흙으로 빚었다면, 도자기와 사람은 몇 촌쯤 될까.

새도 나무도, 저기 뛰는 메뚜기도 일가 문중.

세상 만물이 모두 흙에서 나왔고 종당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잠시 잠깐 세상에 살면서

제 재간껏 살다가, 다시 돌아가는

귀로에 우리가 서로

한 권속임을 확인하게 된다.

- 「흙의 변주(變奏)」 전문

“도자기와 / 사람은 몇 촌쯤 될까.”라고 표현한 「흙의 변주(變奏)」는 귀소 의식 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자는 도자기를 통해 과거를 본다. 도자기, 사람, 새, 메뚜기 등이 모두 같은 흙의 권속이다. 박남수는 여섯 번째 시집에 수록된 「서글 픈 암유(暗喩)」 연작시에서 이미 우울한 이미지스트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줬다. 그 에게 암유(暗喩)는 음지(陰地)의 비유였다. “밤이면 벌레가 운다. 지금 / 한껏 울 고, 낮에는 울지 않기 위하여 / 서러움을 찌 찌그르르 목 비트는 소리를 낸다. / 몸통을 거머쥐고 짜는 소리를 낸다.”에서의 울음은 시인의 울음이다. 그의 울음에 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 시대에 의한 실향, 순수 지향의 좌절, 공간성의 한계 등이 뒤섞여 있다.

「흙의 변주(變奏)」는 아내의 죽음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순환의 길을 보여준 다. 그것은 「아직 눈을 감고 있다」의 구조와 일치한다. “애기는 눈을 감고 있다. / 뜰까 말까 / 깊이 생각하고 있다. / 눈을 뜨면 오염된 먼지. / 눈을 안 뜨면 / 세 상을 확인할 수가 없다.” 죽음과 탄생의 순환이 나타나는 점이다. 아기는 눈을 떠 야 세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세상은 현실이라는 오염된 먼지가 있는 세계다. 아기 가 시작할 세상은 결국 시작했기에 오염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시에서 는 “눈을 뜰까 말까를” 고심한다. 삶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다.

촛불이 떨구는, 한 방울 의 피. 무작정 흘리는

그것은 촛불이 타고 있기 때문 만은 아니다. 어둠 속에서 타는 촛불이 만드는

광명 속에 흔들리는 그림자들은 좁은 공간을 넘쳐

밖으로 뛰어 나간다.

밖에는 검은 까마귀처럼 펄럭이는 새어 나간 촛불의 광명

의 조각들이 어둠을 태우고 있다. 빛과 어둠

의 아라베스크. 어디선가 침묵이 노래하는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 갔다. 한 마리의 벌이 꽃 속으로 파고 들며 그 큰 엉덩이를 비틀고 있는 것처럼. 머리에 화분을 쓰고 얼굴이 온통 누우렇게 분칠을 한 남사당패

의 검은 모자가 흔들리다.

빛과 어둠의 아랫도리가 엉키어 자꾸 뿔어나는 광명과

어둠이 한 방 가득 차 있다.

- 「빛과 어둠」 전문

「빛과 어둠」에서 나타나는 빛과 어둠의 경계 이미지는 이미 그가 세 번째 시집

『신(神)의 쓰레기』에서 소리를 통한 공간의 경계를 보여준 바 있다. 「종(鐘)소리」를 보면 소리가 새가 되어 날아가는데, “광막한 하나의 울음”은 “뇌성(雷聲)이 되어 /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音響)이 된다.”라고 말한다. 즉 지상의 소리들은 하늘로 올 라가 천둥이 되어 다시 지상에 흩뿌려진다. 「종(鐘)소리」와 「빛과 어둠」은 공통적 으로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통해 그는 순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의도된 시행 이월의 사용도 빛과 어둠이라는 대비의 한 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경계는 “빛과 어둠의 아랫도리가 엉키어 / 자꾸 뿔어나는 광명과 어둠이 한 방 / 가득 차” 허물어진다. 그것은 “아라베스크”처럼 뒤섞여 묘한 규칙을 이루어 미

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하루살이」에서는 “하루살이가 떼지어, 일심으로 / 하늘의 기둥을 세우고 있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 지상에서 공중으로 하루살이들의 움직임이 “하늘의 기둥”을 만들지만 “노동으로 땀 흘려” 움직이는 인간이 형성하는 기둥은 시간으로 남아 인 간은 하루살이로 상징되는 시간의 유한과 일치하면서 시간적 한계에 머물게 된다.

「빛과 어둠」과 「하루살이」의 공통점은 그 한계에 화자가 저항하지 않고 수긍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남수는 1994년 여덟 번째 시집 『소로(小路)』를 낸 그해 9월 17일에 미국 뉴저 지주 에디슨 자택에서 숙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박남수는 마지막 시집에서 고독의 정서로 인생의 의미를 나타내는 시로 본질과 관계되는 존재론적 사유를 끝까지 밀 고 나간다. 그리고 1998년에 한양대출판원에서 『박남수 전집 1·2』이 나왔다.

박남수는 마지막 시집에서 순환의 길을 보여준다. 그가 줄곧 추구한 순수를 지향 하는 이미지는 중기 시에 이르러 상상력의 정수를 보여주다가 후기 시에서는 근원 적 상실을 맞이하면서 회귀 의식을 보여주는 순환성으로 시 세계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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