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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의 이데아

문서에서 플라톤『국가』 (페이지 43-174)

1. 정의(dikaiosynē)

4.2 지식의 대상

4.2.3. 가지적인 것(to noēton)

4.2.3.1. 좋음의 이데아

4.2.3.1.2. 선분의 비유 4.2.3.1.2.1. 가시적 영역 4.2.3.1.2.2. 가지적 영역

4.2.3.1.2.2.1. 수학적인 것들의 영역 4.2.3.1.2.2.2. 이데아들의 영역

4.2.3.1.2.3. 영역 구별에 따른 앎의 상태

제3부『국가』의 주요 주제어 분석

1. 정의(dikaiosynē) 1.1. 전통적 정의관

1.1.1. 정직과 채무의 이행

정의(正義)에 관한 논의는 케팔로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노년의 삶이 어떠한지를 묻자, 케팔로스 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은 대개 젊은 시절의 즐거움(성적쾌 락, 술잔치 축하연)을 아쉬워하고 그런 것들의 상실을 한탄하면 서 노년에 겪게 되는 여러 곤경들의 탓을 노령에 돌리지만, 정작 탓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활 방식(tropos)이다. 노년에 이르면 광 포한 주인과도 같은 온갖 욕망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큰 평화와 자유가 생기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묻는다. 사람들은 케팔로스가 노년을 수월하게 견뎌내는 것은 가 진 재산 덕으로 생각할 텐데, 재산을 가짐으로써 덕을 보게 되는 것 중에서 어떤 점이 가장 좋은가? 케팔로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재산의 소유는 마지못해서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 준다든가, 신께 제물을 빚지거나 남한테 재물을 빚진 채로 저승 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없애준다 라고.(328e~

331b)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이 대답이 ‘정의’에 대한 의미 규정(horos)으로서 충분한지를 되물으면서 정의에 관한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 아주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케팔로스님! 하지만 바로 이것, 즉 정 의(dikaiosynē)를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는 것을 갚는 것이라는 식으로 단

순히(무조건적으로) 말할 것인지요, 아니면 이런 걸 행하는 것도 때로는 정의롭지만, 때로는 정의롭지 않다고 말할 것인지요? [···]”(331a ~b)

1.1.2. 합당한 보상(報償)

케팔로스의 정의(‘정직과 채무의 이행’)가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받자, 폴레마르코스가 나선다. 그는 시인 시모니데스의 권위에 의 지해서 케팔로스의 정의를 지지한다. 시모니데스는 “각자에게 갚 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롭다”라고 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 말의 참뜻을 친구에게는 좋은 것을 돌려주고 적에게는 나쁜 것을 갚아 주는 것, 즉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으로 풀이한다.(331 e~332c)

“[···] 누군가가 황금을 맡긴 사람에게 그걸 되돌려 준다고 할 때, 만약에 그 되돌려 줌과 받음이 해로운 것으로 된다면, 더구나 돌려받 는 쪽과 돌려주는 쪽이 서로 친구 사이일 경우에는, 그가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오. 당신은 시모니데스가 이런 뜻으로 말한 걸로 보지 않겠죠? [···] 그렇다면 시모니데스는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서 시인처럼 암시적으로 말한 것 같소. 그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 이것이 정의로운 것이라 생각하고, 이 합당한 것(to prosēkon)을 갚을 것(마땅한 것)이라고 일컬은 것 같으 니까 말씀이오.”(332b ~c)

1.1.2.1. 참된 의미의 보상(報償)

첫 번째 제안(‘합당한 보상’)이 논박 당하게 되자, 폴레마르코 스는 오류 가능성을 배제한 ‘참된 의미의 보상’으로 수정한다.

“선량하다고 생각(판단)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선량한 사람을 친 구로 규정하자는 겁니다. 반면에, 선량하다고 생각되긴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자는 친구로 생각되긴 하나 실은 친구가 아니라고 말씀입 니다. 그리고 또 적에 대해서도 똑같은 규정(thesis)이 적용되겠고요.

[…]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더러 처음에 우리가 친구에겐 잘 되게 해 주되 적한테는 나쁘게 되게 해 주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한 그

‘정의로운 것’(to dikaion)의 의미 규정에다 덧붙일 것을 당부하는 게 로군요 이제 이 규정에다가 이런 식으로 즉 실제로 좋은 친구는 잘 되 게 해 주되 실제로 나쁜 것은 해롭도록 해 주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 고 덧붙여 말하라고 당부하는 거겠죠?”(334e~335a)

1.1.3. 강자의 이익

폴레마르코스가 논박 당하자 트라시마코스가 분을 터트리며 개 입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상투적인 시침떼기 술법을 질타한 후 에 ‘강자의 이익’으로서의 정의 개념을 대담하게 내 놓는다.(336 b~339a) 케팔로스의 ‘정직과 채무의 이행’이나 폴레마르코스의

‘합당한 보상’이 개인들 간에 지켜야할 규범이나 원칙과 같은 성 격의 것인데 비해서, 트라시마코스의 ‘강자의 이익’은 국가 차원 의 정의 개념이다. 트라시마코스가 ‘정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법 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정 치 권력을 쥔 강자(통치자)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만든 법을 약자가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라는 주장의 약식 표현이다.

그러니까 정의의 주체는 법을 따르는 약자이며, 강자의 편에서는 자신에게는 이익이 되나 약자에게는 해가 되도록 법을 만들거나, 만들어진 법을 마음대로 어기는 행위, 즉 ‘불의를 행하는 것’이 된다.결국 정의와 불의는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부딪치자 처음의 주장을 두 번에 걸쳐서 수정 한다. ‘강자’를 ‘엄밀한 의미의 강자’로 수정 했다가, 그것을 포기하고 ‘현실 속의 강자’로 다시 바꾼다. 이 일련 의 주장들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일단 논박되지만,『국가』 II 권에

서 글라우콘에 의해 보다 세련된 형태로 재현되면서『국가』 전체 에 걸쳐 플라톤이 본격적으로 상대해야할 반 테제의 역할을 한다.

“들어보십시오! 저로서는 정의로운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 의 이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338c)

“헌데, 적어도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은 자기의 이익을 목 적으로 하여서 합니다. 민주 정체(demokratia)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 주 정체(tyrannis)는 참주 체제의 법률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정치 체제들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 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 게 정의로운 것으로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나 불 의를 저지른 자로서 처벌하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제가 주 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에서 동일한 것이, 즉 수립된 정권의 이익이 정의로운 것이지요. 확실히 이 정권이 힘을 행사하기에,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나 정의로운 것은 동일한 것, 즉 더 강 한 자의 이익으로 귀결됩니다.”(338e339a4)

1.1.3.1. 엄밀한 의미(akribē logon)의 강자

강자인 통치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실수로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법으로 제정할 수도 있 다는 반박을 피하기 위해 트라시마코스는 실수가 없는 이상적인 통치자 개념을 끌어들인다. 엄밀한 의미의 전문가(demiourgos) 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지식 (epistēmē)이 모자랄 때 실수를 하므로, 실수하는 한에서는 전문 가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통치자도 그가 통치자인 한에서 실수 를 하지 않는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 서 최선의 것을 법으로 제정하게 되며, 다스림 받는 쪽은 이것을 이행해야만 된다고 주장한다.(340d~341b)

"그러니까 엄밀한 뜻에 따라 말한다면, 더구나 선생께서도 엄밀한 표현을 하시려는 터이니 말씀입니다만, 그 어떤 전문가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달릴 때 실수를 하므로, 이 실수와 관련해서는 그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문가나 현자 가 그렇듯, 그 어떤 통치자도 그가 통치자인 때에는 실수를 하지 않습 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의사가 실수를 했다느니, 통치자가 실수를 했다 고 말하긴 하겠지만. 그러니 제가 앞서 선생께 했던 대답도 그런 뜻의 것으로 이해하세요. 그러나 가장 엄밀한 표현은 조금 전의 것, 다시 말 해서 이런 것 입니다. 통치자는,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 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제정 하게 되나, 다스림을 받는 쪽으로서는 이를 이행해야만 된다는 것입니 다. 따라서 처음에 제가 말했던 바로 그것이, 즉 ‘더 강한자의 편익’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저는 주장합니다.”(340d~341a)

1.1.3.2, 현실 속의 강자

첫 번째 수정 제안(‘엄밀한 의미의 강자’)이 논박 당하자 트라시 마코스는 실수가 없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개념을 포기한다. 그 러면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는 피통치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한다고 비판하는 소크라테스를 향해 현실을 전혀 모르는 코흘 리개 어린이 같다고 비꼰다. 현실에서의 통치자나 양치기가 양이 나 소들을 보살피고 좋은 것을 해 주려고 신경 쓰는 목적은 결국 주인과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라는 것.(343b) 여기서 트라시마 코스는 ‘강자’를 ‘남보다 더 이득을 취할(pleonekein) 능력이 있 는 자’라는 뜻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법을 제정하는 권력자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 서도 그런 능력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항상 이익을 본다고 주장한다.(343d ~e) 트라시마코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 익”이라고 했을 때, 정의의 주체는 법을 따르는 약자인 반면에,

“부정의(不義)가 이익”이라고 말할 때는 부정의의 주체는 강자이

다. 이때의 ‘부정의’는 ‘남에게 해를 끼친다’는 뜻으로 ‘법을 따르 지 않는 것’ 보다 포괄적인 의미이다. 강자는 법을 만들기도 하고 제정된 법을 마음대로 어기기도 하면서 이익을 도모한다. 반면에 남을 이길 힘이 없는 약자는 해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불의를 비난하고 법을 따른다. 그래서 손해를 본다. 이처럼 힘 있는 자가 언제나 이익을 보는 현실에서는 불의가 정의보다 이익이 되며 따 라서 행복한 삶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 트라시마코스가 강변하는 내용이다.

“그건 선생께서 양을 치는 이들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한 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것들을 살찌게 하고 돌보는 것이 주인한테 그리고 자신들한테 좋은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염두에 두어서라고 생각하시니까 하는 말입니다. 더더구나 선생께선 나라들에 있어서 통 치자들이, 즉 참된 뜻에 있어서 통치를 하는 이들이 다스림을 받는 이 들에 대해서 마음 쓰는 것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양들을 대할 때와 는, 그래도 어떻게든 다른 데가 있다고 생각하시며, 따라서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이득을 보게 될 것과는 그래도 다른 어떤 것을 밤낮으로 생 각하고 있다고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께선 정의로운 것 (to dikaion)과 정의(dikaiosynē),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것(to adi -kon)과 부정의(adikia)에 관해서도 이처럼 캄캄한 터여서, 이런 사실 조차도 모르고 계실 정도입니다. [···]”(343b)

1.1.3.2.1. 남에게 좋은 것

법을 따르는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의는 강자인 ‘남에게 좋 은 것’이요 남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인 반면에 자신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힘의 논 리가 정치 권력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의 생활 속에서 어 떻게 관철되는가를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시킨다:

일상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보다 어떤 경 우에나 덜 가진다. 계약을 맺었다가 해지할 때에 그렇고, 세금 납 부에서 그렇고, 공직을 수행할 때도 제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 집 안 형편이 어려워지며, 친척들에게 부당한 도움을 주려하지 않다 보면 미움을 사는 일도 있다.(343c~d)

“정의와 정의로운 것이란 실은 ‘남에게 좋은 것’, 즉 더 강한 자와 통치자의 편익이되, 복종하며 섬기는 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인 반면에, ‘정의롭지 못함’은 그 반대의 것이어서, 참으 로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니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저 강한 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하여, 그를 섬기며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결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입니 다.”(343c)

1.1.3.2.2. 큰 부정의의 이로움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의 이익’ 내지는 ‘부정의의 이득’을 뒷받 침하는 모범적 증거로서 절대 권력자를 언급하는 것으로 연설을 끝낸다. 강자의 논리가 통하는 현실에서 힘은 클수록 유리하다.

힘 있는 자가 이익을 보고 행복을 누리는 단적인 예는 참주와 같 은 절대 권력자에서 찾을 수 있다. 소소한 부정의를 행할 능력밖 에 없는 자는 잘못하면 발각되어 처벌받고 비난 받지만, 그런 처 벌과 비난까지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절대 권력자는 오히 려 사람들로부터 행복한 자로 불린다. 약자들이 불의를 비난하는 것은 실은 불의 자체를 꺼려서가 아니라 그로 인한 피해를 두려 워하기 때문이다.(344a~c)

“[···] 그러나 선생께서 무엇보다도 제일 쉽게 이것을 이해하시게 되는 것은, 가장 완벽한 상태의 부정의에 생각이 미치실 경우일 것입

니다. 그건 부정의 한 짓을 한 자를 가장 행복하도록 만들지만, 반면에 그걸 당한 자들이나 부정의 한 짓이라곤 아예 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 을 가장 비참하게끔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344a)

1.1.4. 약자들의 협약

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 대한 논박을 마무 리하면서 자신의 논변(‘정의로운 삶을 위한 변론’ 참조)이 충분하 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정의 자체가 무엇인지를 규명하지 않은 채로 정의가 훌륭함(aretē)이고 지혜(sophia)이며 그래서 불의보 다 더 행복한 삶을 가져다준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실 상 논변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 자체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기술 이나 지식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혹은 훌륭함(aretē)의 일종으로 단순히 가정하는데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와 불의의 비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II권에서 글라우콘 은 트라시마코스가 포기한 주장을 보다 세련된 형태로 되살려 내 어 소크라테스의 정의관과 대비킨다. 정의에 관한 논의가 본 궤 도에 오르는 것은 여기서 부터다.

1.1.4.1 좋은 것의 세 가지 부류

글라우콘은 우선 좋은 것의 부류를 세 가지로 구분하고, 소크 라테스의 정의관과 대중들의 정의관을 대비시킨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는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일 뿐 아니라 거기서 생기 는 결과들 때문에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의 생각은 그렇 지가 않다. 그들은 정의 자체를 수고롭고 까다로운 것이어서 기 피해야 할 것인데, 그런데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거기서 생기 는 보수나 평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358a) 이 대중들의 정의관 과 트라시마코스의 ‘강자의 이익’은 정의를 혹평한다는 점에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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