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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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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되어: 1781-1789

아론 버는 시오도시아 프리보스트와 결혼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알았 다. 그에게 부양해야 할 아내와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는 뉴 욕 주의 수도 알바니에서 뉴욕 변호사 자격증을 따려고 했지만, 법원이 이를 거 부한다. 법원은 1년간의 법 공부로는 부족하다고 3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버는 그와 같은 참전 용사들은 특별한 혜택을 받아야만 한 다고 판사들을 설득했다. 바로 버는 자격증을 획득했다. 아론 버와 시오도시아 프리보스트는 1782년 7월 2일 뉴저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바로 뉴욕 알바니로 갔다.

알바니는 비포장도로의 개척 도시로 겨우 3,000명의 주민이 사는 곳이었다.

개척 도시인 것과 상관없이, 버는 돈을 벌고 유명해지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어 쨌든, 그는 질 좋은 와인, 화려한 마차 그리고 비싼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시오는 재정 부족이라고 말했지만, 지금 당장 “궁핍”이란 문제가 있었다. 다행히 버의

훌륭한 집안 배경 덕분에 알바니 사교계의 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도 알바니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알바니 사교계는 이미 그들 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어쨌든, 엘리자 해밀턴은 스카일러 가문 출신이었고, 스 카일러 가문이 알바니를 좌우했다. 버와 해밀턴은 어쩌면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만났을 지도 모르지만, 변호사가 되고 나서야 친구가 되었다.

버의 가족들은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1783년, 딸 시오도시아가 탄생하 면서 삶은 더욱 좋아졌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스러운 딸” 이라고 했다.

그러나 뉴욕이 손짓하고 있었다.

1783년 공식적으로 독립 전쟁이 끝이 나자, 영국인들은 뉴욕을 떠났다. 버는 뉴욕에서의 많은 사건 수임을 상상할 수 있었지만, 뉴욕으로의 이주는 그가 감당 하기 쉽지 않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든든한 티모시 에드워드 삼촌이 빌 려준 돈으로 버는 뉴욕으로 갔다.

영국인들은 엉망진창의 이 도시를 떠났다. 약 2,000여 채의 건물들이 불에 탔 다. 소들이 쓰레기로 가득한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건물들과 교회들은 병원, 감 옥 혹은 창고로 쓰였다. 이스트사이드는 텐트와 판잣집이 즐비한 황폐한 지역으 로 되었다.

버의 생각이 옳았다. 이런 혼돈은 변호사에게 큰돈을 가져다 줬다. 그는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도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버처럼 법률 사 무소를 개업했다. 즉시 두 남자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 도시를 편안하게 여겼 고, 둘은 바로 충실한 뉴요커로 태어났다.

버와 해밀턴 둘 다 법정 변호사로 시작했는데, 종종 같은 사건에서 함께 하기 도 했지만, 대부분 상대측 변호사로 만났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변호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버는 절제가 있으면서 간결하고, 차분했다. 해밀턴은 달랐다. 그 는 열정적이었고, 논쟁을 좋아했으며 말을 많이 했다.

“버는 해밀턴이 2시간 말할 내용을 30분 안에 했다.” 판사가 말했다. 동료 변 호사는 다음과 같이 그들을 분석했다. “해밀턴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버 는 “우선 마음속에서 정리한 후에 말을 했다.”

여전히 두 남자에겐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버가 절대 가족의 역사를 잊지 않

았던 반면, 해밀턴은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똑똑하고 야심이 넘쳤다. 그리고 둘 다 대령이란 호칭을 고집했다. 상류 사 회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종종 빚을 졌는데, 특히 매우 외향적인 아론 버가 그랬다.

버는 뉴욕에서 유명해질 것이라고 확신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뉴욕에 온 지 1년 만에, 그는 뉴욕 주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버는 감정을 잘 나타내는 편이 아니었는데, 점차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법안이 나오자 자신의 목소리 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설전에 뛰어 들어가서 “점차적”인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단번에 노예제를 없애는 법안이어야한다고 말했다. 의회는 버의 제안 과 법안을 거부했다.

버가 노예제 폐지의 뜻을 비쳤지만, 사실 그는 수년간 집안일을 하는 노예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해밀턴도 노예제 폐지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뉴욕 노예 해방 협회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한 두 명 정도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확 인되지 않은 얘기가 있었다.

버는 1년 만에 의원직을 그만뒀다. 노예제 폐지 법안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 는 돌아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만 했다. “범선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카누로, 카 누에서 다시 범선” 을 타며,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수입을 올리 기 위해 다른 지역의 사건을 맡아 이동했다. 1785년은 매우 기쁜 해였다. 버의 두 번째 딸, 샐리가 태어났다.

버의 가족들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떨어지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3년 후, 버 는 매형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막내를 잃었어요. 우리 샐리, 예쁘고 사랑스 러운 아기를.” 버가 계속해서 “엄청난 두통”과 몬머스 전투에서 처음 발병한 “눈 병”으로 고통 받을 때, 시오도시아는 하루는 잘 지냈다가 다음날엔 암 투병에서 오는 끔찍한 고통으로 힘들어했다.

버 가족들의 삶이 힘들었던 반면, 새로 태어난 미국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 었다. 1788년, 미국 헌법이 이 땅의 최고법이 되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 최초 의 대통령으로, 존 애덤스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 번째 당인 민주-공화당 이 생길 때까지 연방당이 이 나라에 유일한 정당이었다.

1789년, 버는 변호사로서 엄청난 명성을 쌓는다. 그 해, 민주-공화당 소속인

조지 클린턴 주지사가 그에게 뉴욕 주의 검찰 총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버는 주저했다. 그는 자신을 “진지하고 조용한 부류” 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 다. 친구들조차도 그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내키지 않아 서 민주-공화당인지 연방당인지 한 번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뉴욕 의회에서 는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선호하는 당을 결정해야했다.

버는 클린턴 주지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 르지만, 민주-공화당 소속 주지사의 검찰 총장이 됨으로써, 아론 버는 정확한 민 주-공화당 사람이 되었다.

해밀턴

1781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법 공부를 시작했다. 알바 니에 있는 스카일러 가의 대저택에서 사는 것도 좋았지만, 알렉산더와 엘리자는 자신만의 집을 갖고 싶어 했고, 그래서 돈이 필요했다. 킹스 컬리지 시절부터 알 아온 오랜 친구 로버트 트로프는 아론 버와 법 공부를 함께 했었다. 그는 자진해 서 해밀턴의 공부를 가르쳐줬고 해밀턴이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돈을 벌 수 있 게 도움을 줬다.

아론 버 덕택에, 참전 용사들은 더 이상 3년 이상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공부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참전 용사 해밀턴은 뉴욕 변호사 시험 합격 해서 축하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782년 1월, 그의 첫 번째 아이, 필립의 탄 생을 축하했다. “아내가 아주 예쁜 남자 아이를 낳아 줬어.” 그는 친구에게 자랑

했다.

해밀턴이 전쟁 영웅이라는 사실과 처남 필립 스카일러가 가장 영향력 있고 부 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알바니에 있는 그의 법률 사무소는 번창했고, 그와 엘리자는 아주 바쁜 사교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버와 마찬가지로, 해밀턴도 뉴욕의 매력에 빠졌다.

해밀턴 가족들은 바로 뉴욕으로 이사했지만, 그들의 57번가 동네는 버의 멋진 3번가 동네만큼 부유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서 해밀턴 집에 두 명이 아이가 더 태어났다. 딸 안젤리카와 아들 알렉산더였다. 해밀턴 가족은 고아 한 명을 데 려 오기까지 했다. 아마도 해밀턴의 슬픈 유년시절이 그를 “사랑스러운 아이들”

의 다정한 아버지로 만들었을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식구들의 부양을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해밀턴은 수임 료로 햄 한 통이나 치킨 한 마리를 주는 가난한 고객들의 사건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쟁 시기에 영국 에게 충성을 바쳤던 고객들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영제국 치하에서 고통 받았 던 뉴요커들은 이 사실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두 남자 다 배심원들의 혼을 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정에 서 해밀턴과 버의 논쟁을 구경하는 것이 곧 뉴욕의 관광 이벤트가 되었다. 해밀 턴의 하늘색 눈, 혈색 좋은 얼굴빛 그리고 매일 이발소에서 손질 받는 적갈색의 머리가 잘생긴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몇몇 사람들은 해밀턴이 뻣뻣하고 건방 지다고 생각했지만, 한 판사는 그를 “정감 있고,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너그러 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해밀턴은 1784년 뉴욕 주 최초의 은행인 뉴욕 은행을 설립하게 되면서 근무 시간을 한 시간 더 추가한다. 해밀턴은 이 은행이 전쟁 피해를 입은 뉴욕의 사업 가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은행은 뉴욕에 혼란스럽게 돌고 있는 지역, 주, 외국 화폐를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 었다.

뉴욕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미국은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처럼, 13개의 주는 모든 문제-경계선, 돈, 세금 그리고 무역-를 가지고 다퉜다. 해밀턴은 하나 되지 않은 미국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버가 먼저 했던 것처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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