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임성과 정의
롤즈는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everyone's advantage)과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는(equally open) 원칙이 적용되는 방식에 따라 사회체제를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체제와 자유주의적 평등(liberal equality)체제, 민주적 평등(democratic equality)체제로 구분한다. 자연적 자 유의 체제는 효율성을 지향하는 시장경제체제에서 재능 있는 자는 누구나 출세할 수 있도록 하는, 형식적 평등이 보장된 사회이다. 그러나 이 체제
는 개인의 최초부존자원의 불평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 롤즈는 이 부존자 원의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우연적 요인, 즉,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임의적인’ 요인에 의해 분배 몫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체제의 뚜렷한 부정의(不正義)라고 지적하면서, 기회의 평등이란 이러한 부정의가 없는 상태임을 역설한다. 자유주의적 평등체제는 상속된 부와 소득에 의해 분배가 결정되지는 않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요소 인 타고난 재능에 의해 분배 몫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 한다. ‘도덕적으로 자의적인(morally arbitrary)' 요소는 하늘이 내린 운(혹은 불운)과 같은 것으로, 그것이 소득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 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가 민주적 평등체제이다.
드워킨(Dworkin 1981 a, b)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이라는 규정의 의미를 개인의 책임성(responsibility)의 문제로 대체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게 주어진 자원(resource, endowment)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지만 선호 (preference, ambition)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후생의 평등’을 기각하고 ‘자원의 평등’을 옹호한 것 도 후생에도 개인의 책임이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책임성의 구분과 관련된 쟁점(1) - 재능의 자기 소유권
위에서 본 롤즈와 코헨의 논의는 평등주의적 책임성 개념이 지닌 두 가지 쟁점을 확인시켜준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쟁점은 타고난 재능도 도 덕적으로 자의적인 요소이고 개인의 책임성을 벗어난 요소라는 것이다.
재능이나 장애 모두 똑같이 인간의 신체에 체화되어 있는 특성이긴 하지 만, 장애의 경우 개인의 책임이 아니므로 사회적 재분배의 고려대상이라 는 사회적 동의를 얻기는 쉽다. 그러나 재능의 경우, 특히 그 재능을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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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당신의 재능은 당신의 것이 아니니 그 재능 때문에 번 돈의 일 부를 사회에 내 놓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재능에 의한 소득을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명제가 자기소유권 (self-ownership) 명제이다. 자기소유권 명제란 ‘타인에게 해가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신의 힘을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도덕적 권리가 있다’
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내 몸을 어떻게 이용하든, 그 결과 다른 사람에 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로인한 모든 이익은 내 것이다’는 주장이다.
우선 사회적 통념이나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 식에서 일관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사람들은 장에 대해서 겉으로는 온 정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현실적 이해가 걸린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재능에 대한 감성적 태도는 우호적이지 않을지 모르 지만 사회는 재능에 따른 이득을 거의 모두 인정해준다. 자본주의 사회에 서 노동력의 매매는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매춘은 허 용되지 않는다. 장기의 기증은 허용되지만 장기의 매매는 허용되지 않는 다. 이러한 현실은 자기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일관되지 않음을 보 임과 동시에 재능의 사용에 대한 재분배가 얼마나 사회적 합의를 얻기 어 려운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일관성이 평등주의적 정책의 여지를 없애는 것은 아 니다. 자기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사회적 규범은 자기 소유권에 대한 전면적 부정도 아니지만 전면적 인정도 아닌, 부분적 인정의 입장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소유권을 신 성불가침의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국가가 기회의 평등을 구현 하기 위해 민간부문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상당히 커진다.
3. 책임성의 구분과 관련된 쟁점(2) - 선호에 대한 책임성
두 번째 쟁점은 과연 선호를 개인의 책임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선호를 개인과 분리시킬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으로부터 선호의 외생성과 내생성, 환경이 선호 형성 에 미치는 영향 등의 내용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선호에 대해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드워킨의 입장은 선호가 개인 이 자신을 형성하고 타인과 구별되도록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인식 론적 배경을 갖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에 대해서 책임이 없 다고 한다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행한 특정한 행동을 사회가 존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행위자에게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된다. 선호에 대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선호체 계를 갖고 있거나 공격적인 선호, 혹은 가학적인 선호, 혹은 값비싼 선호 를 가진 사람에게는 적용될 수 있다.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고통을 자처 한 구도승의 고난에 대해 사회가 보상해줄 필요가 없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매 끼니마다 값비싼 프랑스산 포도주에 캐비어를 먹어야만 남들과 동일한 정도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취향을 충족시켜주기 우해 세금을 내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값비싼 선호와 정 반대의 경우, 즉, 값싼 취향 (cheap taste) 혹은 길들여진 가정주부(tamed housewife)의 문제에 적용될 때 에는 일반적인 도덕적 감정에 반하게 된다. 일찍 결혼하여 평생을 가정주 부로만 살아온 어떤 여성이 일체의 사회적 성취에 대한 소망 없이 아주 소박한 일에서 큰 행복을 느낀다면 사회는 그 주부에게 얼마 안 되는 양 의 자원만을 보장해 주어도 되는가? 센은 길들여진 가정주부, 길들여진 노예의 소박한 희망은 환경에 의해 강요되고 주인에 의해 억압된 선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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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빈곤과 불평등을 바라보는 시야와 정책선책의 폭은 훨씬 넓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