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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기회의 평등과 책임성

1. 책임성과 정의

롤즈는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everyone's advantage)과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는(equally open) 원칙이 적용되는 방식에 따라 사회체제를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체제와 자유주의적 평등(liberal equality)체제, 민주적 평등(democratic equality)체제로 구분한다. 자연적 자 유의 체제는 효율성을 지향하는 시장경제체제에서 재능 있는 자는 누구나 출세할 수 있도록 하는, 형식적 평등이 보장된 사회이다. 그러나 이 체제

는 개인의 최초부존자원의 불평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 롤즈는 이 부존자 원의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우연적 요인, 즉,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임의적인’ 요인에 의해 분배 몫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체제의 뚜렷한 부정의(不正義)라고 지적하면서, 기회의 평등이란 이러한 부정의가 없는 상태임을 역설한다. 자유주의적 평등체제는 상속된 부와 소득에 의해 분배가 결정되지는 않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요소 인 타고난 재능에 의해 분배 몫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 한다. ‘도덕적으로 자의적인(morally arbitrary)' 요소는 하늘이 내린 운(혹은 불운)과 같은 것으로, 그것이 소득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 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가 민주적 평등체제이다.

드워킨(Dworkin 1981 a, b)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이라는 규정의 의미를 개인의 책임성(responsibility)의 문제로 대체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게 주어진 자원(resource, endowment)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지만 선호 (preference, ambition)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후생의 평등’을 기각하고 ‘자원의 평등’을 옹호한 것 도 후생에도 개인의 책임이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책임성의 구분과 관련된 쟁점(1) - 재능의 자기 소유권

위에서 본 롤즈와 코헨의 논의는 평등주의적 책임성 개념이 지닌 두 가지 쟁점을 확인시켜준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쟁점은 타고난 재능도 도 덕적으로 자의적인 요소이고 개인의 책임성을 벗어난 요소라는 것이다.

재능이나 장애 모두 똑같이 인간의 신체에 체화되어 있는 특성이긴 하지 만, 장애의 경우 개인의 책임이 아니므로 사회적 재분배의 고려대상이라 는 사회적 동의를 얻기는 쉽다. 그러나 재능의 경우, 특히 그 재능을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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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당신의 재능은 당신의 것이 아니니 그 재능 때문에 번 돈의 일 부를 사회에 내 놓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재능에 의한 소득을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명제가 자기소유권 (self-ownership) 명제이다. 자기소유권 명제란 ‘타인에게 해가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신의 힘을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도덕적 권리가 있다’

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내 몸을 어떻게 이용하든, 그 결과 다른 사람에 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로인한 모든 이익은 내 것이다’는 주장이다.

우선 사회적 통념이나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 식에서 일관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사람들은 장에 대해서 겉으로는 온 정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현실적 이해가 걸린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재능에 대한 감성적 태도는 우호적이지 않을지 모르 지만 사회는 재능에 따른 이득을 거의 모두 인정해준다. 자본주의 사회에 서 노동력의 매매는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매춘은 허 용되지 않는다. 장기의 기증은 허용되지만 장기의 매매는 허용되지 않는 다. 이러한 현실은 자기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일관되지 않음을 보 임과 동시에 재능의 사용에 대한 재분배가 얼마나 사회적 합의를 얻기 어 려운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일관성이 평등주의적 정책의 여지를 없애는 것은 아 니다. 자기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사회적 규범은 자기 소유권에 대한 전면적 부정도 아니지만 전면적 인정도 아닌, 부분적 인정의 입장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소유권을 신 성불가침의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국가가 기회의 평등을 구현 하기 위해 민간부문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상당히 커진다.

3. 책임성의 구분과 관련된 쟁점(2) - 선호에 대한 책임성

두 번째 쟁점은 과연 선호를 개인의 책임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선호를 개인과 분리시킬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으로부터 선호의 외생성과 내생성, 환경이 선호 형성 에 미치는 영향 등의 내용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선호에 대해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드워킨의 입장은 선호가 개인 이 자신을 형성하고 타인과 구별되도록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인식 론적 배경을 갖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에 대해서 책임이 없 다고 한다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행한 특정한 행동을 사회가 존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행위자에게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된다. 선호에 대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선호체 계를 갖고 있거나 공격적인 선호, 혹은 가학적인 선호, 혹은 값비싼 선호 를 가진 사람에게는 적용될 수 있다.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고통을 자처 한 구도승의 고난에 대해 사회가 보상해줄 필요가 없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매 끼니마다 값비싼 프랑스산 포도주에 캐비어를 먹어야만 남들과 동일한 정도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취향을 충족시켜주기 우해 세금을 내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값비싼 선호와 정 반대의 경우, 즉, 값싼 취향 (cheap taste) 혹은 길들여진 가정주부(tamed housewife)의 문제에 적용될 때 에는 일반적인 도덕적 감정에 반하게 된다. 일찍 결혼하여 평생을 가정주 부로만 살아온 어떤 여성이 일체의 사회적 성취에 대한 소망 없이 아주 소박한 일에서 큰 행복을 느낀다면 사회는 그 주부에게 얼마 안 되는 양 의 자원만을 보장해 주어도 되는가? 센은 길들여진 가정주부, 길들여진 노예의 소박한 희망은 환경에 의해 강요되고 주인에 의해 억압된 선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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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빈곤과 불평등을 바라보는 시야와 정책선책의 폭은 훨씬 넓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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