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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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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수습위원회의 구성

계엄군이 물러가고 도청이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밤사이 광주시 전역에

21) 한국현대사료연구소, 「광주민중항쟁일지」, 서울;한울, 2000, p.110.

22) 조선일보사, “조선일보취재일지;광주사태” 「월간조선」, no.64, 서울;조선일보사, 1985, 한국현 대사료연구소, 「광주민중항쟁일지」, 서울;한울, 2000, p.110에서 재인용.

23) 월간말 no.23, 서울;월간말, 1988, p.42.

24) 나간채, 「5․18항쟁의 이해」 중 제4장 “5․18항쟁의 선전;승리한항쟁의 역사”를 요약하여 구성 하였음.

전해졌다. 흥분과 감격에 젖어 이른 아침부터 도청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속속 발표되 는 사망자 숫자와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보며 계엄군의 잔학상에 치를 떨었고 앞으로의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자체치 안 확보와 질서확립을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계근무를 섰다. 해방기간 광주 에서는 큰 안전사고 없이 생활물자를 나누어 쓰고 시민군들에 적극 협조하는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갔다.

지난밤 지역방어 전투에 참가한 시민군은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을 등록시켜 임무를 부여했으며, 무장시민군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자체 조직과 병력을 통제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도청에서는 시내 유지급 인사, 목사,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요구할 협상조건을 토론하고 무기회수를 시작하였다. 일부 도청수습위원들의 구성에 불만을 느낀 홍남순, 김성용, 송기숙 등 재야인사들도 남동성당에서 따로 모임 을 갖고 수습대책을 논의하였다. 5․18수습대책위원회는 회수한 무기 중 일부를 가지고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7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계엄군 측과 협상, 오후 5시경 협상결과를 도청광장에서 보고하였다. 그러나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계엄사 의 요구와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협상의 내용을 전 해들은 시민들은 협상대표를 향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25). 저녁때쯤 김창길을 위원 장으로 한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무기회수를 둘러싸고 수습회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일부 시민은 무기를 반납했으며, 일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이러한 갈등은 결국 강․온대립으로 갈리게 되어 25일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탄생시킨다. 시위는 목포, 해 남, 강진 등 시외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무기 탈취와 차량시위가 계속되었다.

주남부락과 교도소 부근에서는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있는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끊이지 않았고, 계엄군의 통합병원 확보를 위한 진격으로 화정동 주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2일 존 위컴 주한연합사 사령관의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을 군중진압

25) 임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서울;사계절, 1988, pp.137-138.

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 또한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긴급 출동시키기로 결정하는 등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되었다26).

나.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 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도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청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인 무기반납만을 주장함에 따라 수습위 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시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했으며 도청 내부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등 분위기 가 살벌했다. 시민군 중에도 무기를 반납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궐기대회를 준비해 온 청년, 학생, 노동자들은 YWCA에 모여 도청의 수습위로는 현 재의 상황을 수습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토론에 참석한 청년들이 25일 발족되는 항쟁지도부의 핵심을 이룬다.

무기를 반납해서 희생을 줄이자는 의견과 우리의 요구사항이 전혀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견으로 학생수습위 내부에서도 강․온건파의 대립 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수습위원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됨에 따라 박남선 등 일반인을 포함시켜 학생수습대책위 기구를 개편했으며, 25일 김창길이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물러 나면서 수습위원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윤상원, 정상용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도 부가 발족되었다.

다. 항쟁지도부의 탄생과 활동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 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 를 정립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

26) 동아일보 1980. 5. 22.

했으며,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 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농성동 한전 앞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자 전 시민군에게 비상령이 떨어졌다.

계엄군의 세 차례에 걸쳐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며,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은 기정 사실화되어 갔다. 이날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시민들은 심한 고립감과 불안 속에 밤을 보냈고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끝까지 광주를 지키겠다 는 비장한 각오로 최후의 항전에 대비했다. 기동타격대 대원과 투쟁위원회, 그리고 마 지막까지 남은 예비군, 학생 등으로 조를 편성하여 도청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 이 들어오는 길목에도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이미 지역방위군이 편성,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2) 도청 함락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도청 행정 전화가 끊기자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홍보부에서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 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가두방송을 했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가공할 무기를 앞세우고 충정작전을 개시한다. 시민군은 계엄 군에 맞서 끝까지 싸웠으나 뒷담을 넘어 들어온 특공조의 후방공격과 무차별한 사격으 로 순식간에 전투력을 상실 당하였으며 YWCA를 지키던 사람들도 진압되고 말았다. 전 기간을 통해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생존자들은 도청 방화자, 총 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제3절 사건사로 본 광주민주화운동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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