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이 절에서는 정치와 종교의 문제, 혹은 이데올로기와 교조주의의 문제가 그의 세 소설에 나타나는 사제와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하여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권력과 영광 을 살펴보면, 이 작품의 구성과 전개는 위스키 신부 와 경위의 쫓고 쫓김의 과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서 천국의 사냥개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여기서 위스키 신부의 내면세계는 쫓김의 과정에서의 행 동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쫓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당 시의 사회상황이다. 즉 혁명 이후 가톨릭 교회가 민중을 현혹하는 불순세력

으로 탄압 받는 상황에서 그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경찰에 쫓기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스키 신부는 호세 신부와 비교된다. 호세 신부는 권력에 굴 복하여 사제의 신분을 벗고 결혼하여 살고 있지만 그는 호세 신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위스키 신부가 확고한 신앙심으로 무장 했거나 불타는 사명감에 가득찬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행동방식은 우유부 단함에서 비롯된다. 이런 위스키 신부의 행동 유형을 파악하는데는 기존의 순교적 삶에 관한 접근보다 “제 3의 심리학”을 통한 분석이 더 적절할 수 도 있다.(본 논문 75 참조)

위스키 신부와 경위의 관계는 특이하다. 특히 정치와 종교에 관한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대한 그린의 시각은 이 작품에서 신부보다는 오히려 경위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경위와 신부의 공통점은 둘 다 인간 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애정의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 다. 신부는 사제로서의 그의 역할과 삶에 깊은 회의와 좌절을 느끼면서도 항상 딸 브리지따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차 있다. 반면에 경위는 민중을 빈 곤과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를 선택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는 이념적으로만 민중을 사랑할 뿐이다. 한 예로 경위는 신부를 숨겨준 마 을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마을주민을 잡아 인질로 처형하기도 한다.

그러던 경위가 위스키 신부를 붙잡은 후에는 마치 삶의 목표를 상실해버 린 사람처럼 허무감에 빠지고 오히려 신부를 동정하게 되며, 신부가 고해성 사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거나, 금지되어 있는 브랜디를 갖다주기도 한 다. 특히 경위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상의 변화를 보이며 신부에게 이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 should like to do something for you,” the lieutenant said.

“I've brought you some brandy.”

“Against the law?”

“Yes.”

"It's very good of you.”. . .

“You have such odd ideas,” the lieutenant complained. He said, “Sometimes I feel you're just trying to talk me round.”

(PG 206)

위 인용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끌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비평가들은

“사랑의 전이”라 부르고 있다(Sharrock 112). 즉 위스키 신부의 사랑이 경 위에게 전이됨으로써 그가 진정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위는 막상 위스키가 죽자 “마치 생이 이 지상에서 빠져나간 것처럼(as if life had drained out of the world)”(PG 207) 자신의 투철했던 신념에 회의를 느끼고 혼란에 빠지게 되며, 또한 그가 가장 증오 하던 사제를 통해 오히려 삶의 새로운 측면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될 점은 그린이 위스키 신부와 경위를 통하여 진정한 인간구원과 정치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역설하고자 했다는 점 이다. 특히 그린은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 경위의 갈등과 심적 변화를 통하여 정치이데올로기가 갖는 허구와 현실에서의 적용문제에 대해 진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린은 이 작품을 통하여 정치적 유토피 아를 건설하겠다는 공산주의가 표면적으로는 승리한 것 같으나, 결국 한 인 간이 처절한 고통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우러나온 순수한 인간애와 정신세 계가 승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그린의 문제제기는 이후 명예영사 와 몬시뇨르 키호테 를 통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 듯이, 그린은 알랭과의 대담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명예영사 라 고 밝히면서, 그 까닭은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고 드 라마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29). 이러한 변화는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인 리바스 신부와 플라르, 그리고 명예영사 포트넘에게 공통적 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본 논문에서 분석하고 있는 정치와 종 교의 갈등을 리바스 신부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먼저 리바스 신부는 그가 파계한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 장면에서 부패한 정치인과 교회지도자들 그리고 민중의 고통에 침묵하는 교회에 대해 분노 를 느끼며 강도높은 비판을 한다.

“Sell all and give to the poor” - I had to read that out to them while the old Archbishop we had in those days eating a find fish from Iguazu and drinking a French wine with the General.(HC 143)

그러므로 리바스 신부는 신의 개입의지를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사회 에서 신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타락한 사회를 개조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라 판단하고 게릴라조직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경찰과 대 치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 속에서 리바스 신부는 그가 속한 혁명조 직과 게릴라운동, 그리고 그 속에서 딜레마를 느끼며 심한 갈등을 겪는다.

특히 자신들의 실수 때문에 죄없이 억류되어 있는 명예영사 포트넘에게 인 간적 연민과 죄스러움을 느끼며 그를 돌봐주려 한다. “땅바닥에는 담요를 깔아도 너무 습해지니까요. 당신이 류머치즘에 걸리기를 바라지 않아섭니다 (The earth is too damp for sleeping on, even with a cloth under you.

We did not want you to catch rheumatism.)”(HC 146)라고 말하며 포트넘 을 위해 리바스 신부는 침대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또 포트넘이 실수로 도마뱀을 죽인 일 때문에 울었듯이 리바스 신부 역 시 쥐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며, 두 사람은 모 두 동정심이 많고 관대하다. 이들은 서로에게서 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이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며 마음을 털어놓아 고백하려 한다. 이 소설에 서 포트넘이야말로 리바스 신부의 변화를 주동하는 매개체이다.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의를 보고 등을 돌리는 것보다 낫다는 확신을 가지고 혁명에 참가한 리바스 신부이지만, 마음이 여 리고 인간적인 그에게서 효과적인 작전을 기대하긴 애초부터 어려운 것이 었다. 여기에서 리바스 신부의 딜레마는 포트넘을 죽이고 철수하자는 아키 노의 제안과, 정치적 행위의 실패를 감수하면서라도 개인의 목숨과 구원을 더 소중히 여기는 리바스 신부의 인간적인 태도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에서 그린은 리바스 신부의 인간적인 측면을 중요시하고 있 다. 이를 통해 그린은 결국 정치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드러 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한편 몬시뇨르 키호테 에서 그린은 키호테 신부의 입을 빌려 윤리신학 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교회가 갖는 형식주의와 교조화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으며, 또한 공산주의자 시장 산쵸와의 대화를 통하여 정치와 종교에 관한 그의 사상을 매우 상세하게 피력하고 있다.

먼저 윤리신학에 대한 그린의 입장은 아래에 인용된 대화내용에 잘 나타 나고 있다. 키호테 신부는 덥수룩한 외모에 30년간 엘토보소(El Toboso)에 서 본당 사제로 봉직해온 경험 많은 사제이다. 그는 말고기 스테이크를 오 랫동안 소고기인줄 알고 즐겨 먹는 소박함을 지닌 인물이다. 반면에 그를 대신하여 교구에 새로 부임하는 헤레라 신부(Father Herrera)는 하얀 피부 에 깨끗한 칼라를 착용한 깔끔한 사람이다. 그는 윤리신학을 전공했으며 사 목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젊은이이다. “그의 외모나 성격은 얼핏 권력과 영광 의 경위를 연상케 한다. 이들의 외모나 경험, 지적 수준의 차이는 세 상을 보는 눈과 사제로서 이들이 지닌 신앙의 차이를 시사한다”(최 재석 1992, 202).

“Your doctorate was in . . . let me remember.”

“Moral Theology.”

“Ah, I always found that a very difficult subject. I very nearly failed to pass - even in Madrid.”

“I see you have Father Heribert Jone on your shelf. A German. All the same, very sound on that subject.”

“I am afraid I haven't read him for many years. Moral Theology, as you can imagine, doesn't play a great part in parish work.”

“I would have thought it essential. In the confessional.”

(MQ 36)

But, Sancho, Moral Theology is not the Church. And Father Jone is not among my old books of chivalry. His book is only like a book of military regulations. St. Francis de Sales wrote a book of eight hundred pages called The Love of God. The word love doesn't come into Father Jone's rules and I think, perhaps I am wrong, that you won't find the phrase “mortal sin” in St. Francis' book.(MQ 79)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키호테 신부는 윤리신학이 사목하는데 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헤레라 신부는 윤리신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다. 키호테 신부는 윤리신학이 신자들을 딱딱한 교리와 관례에 얽어매는 불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리신학에 대한 그린의 입장이다. 그는 기계적인 교회의 가 르침은 오류를 낳는다고 보고 있다. 법이나 규칙, 신학에 의지하는 사람은

바리사이파와 같은 자만심을 낳는다. 그들은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 동정, 사랑의 원천이 메마르게 되며 자기 만족적이고 피상적인 사람이 된다 (최 재석 1992, 202). 이같은 그린의 입장은 권력과 영광 에서도 잘 나타나 고 있다. 즉 감옥에서 만난 신심이 깊은 여인과 항상 성인들의 이야기를 아 이들에게 들려주며 기도를 열심히 하는 소년(루이스)의 어머니를 통해서 그 린은 형식적 율법만을 내세우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쵸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린이 보는 윤리신학은 사랑이 메마른 율법과도 같은 것이다. 살레스의 성 프란시스와 같은 성인들이 그들의 삶과 책을 통 해 사랑의 신앙을 설파하고 용서와 자비를 주장했다면, 헤리베르트 존 신부 가 신봉하는 현대사회의 윤리신학은 마치 군대법과 같은 것이라고 보고 있 는 것이다.

그린은 무슨 이유로 윤리신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많은 모 순들 중에서 왜 그린은 윤리신학을 공격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일까? 그 이 유는 그린이 보기에 윤리신학이야말로 교조화된 현대교회의 전형적 모습이 기 때문이다.

원래 윤리신학은 인간이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한 지침이었다. 신 의 세계가 인간사회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면 신의 뜻에 합당하게 죄를 덜 지으며 살아 갈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교회가 경직되기 시작하면서 윤리신학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의 경중과 유무를 판가름하는 잣대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윤리신학은 원래의 목적에 서 벗어나 신자들을 교회의 교리와 형식에 얽어매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 렸다. 그린은 그렇게 변질된 윤리신학의 모습을 본래의 순수함으로 돌려놓 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교조화를 극복하고 사랑의 교회, 자비의 교회로 돌아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한편 소설에서 키호테 신부는 종교적으로 본다면 순수주의자이다. 그는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