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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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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정의, 안전, 회복, 기억에 대한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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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Ⅳ. 진실, 정의, 안전, 회복, 기억에 대한 권리  |

“첫 번째가 아이들이 죽은 이유에 대한 진상규명, 그 다음은 책임자 처벌, 마지막으로 왜 아 이들이 죽었을까 따지고 보면 재난에 대한 대비책이 없어서 그런 거니 안전사회시스템 구축, 이 세가 지가 딱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몸으로 부딪치고 확인하고 해결하면서 온 거죠."14)

재난참사마다 양상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요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진상규 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대책 마련! 국제인권문헌에서 말하는 피해자의 권리도 다르지 않다. 2005 년 유엔인권이사회가 채택한 「불처벌투쟁원칙」, 2005년 유엔 총회가 채택한 「인권피해자 권리장 전」, 2006년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이 진행한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는 이러한 권리를 세세하게 밝혀놓았다. 진실이나 정의처럼 누구나 인정할 법한 가치들이 피해자들에게 '권리'로까지 주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를 낳는 사건들이 권력과 맞닿아있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늘 은폐되기 쉽고 책임자는 상황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재발방지는 약속되지 않는다. 피해자의 회복은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왜곡된다. 이런 조건에서 피해자의 존엄은 훼 손되기 쉽고, 모든 사람의 권리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국제인권문헌이 강조하는 피해자의 권리가 주로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시 작되었다는 점에서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권리로까지 연결하는 것을 낯설게 여길 수도 있다. 재난참사 는 천재지변이나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인해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강이 넘치고 땅이 갈라지거나 무너진 것을, 화재가 나고 배가 침몰한 것을, 국가나 권력의 문제라고까지 생각하지 않기가 쉽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의 요구가 사적인 것처럼 치부되는 이유도 그것이 다. 그러나 앞서 싸운 피해자들이 힘겹게 밝힌 진실은, 모든 재난참사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구조의 문제이며 그 과정에 국가의 의무 위반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 하는 것과 피해자의 권리를 이해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가 아프겠구나, 피해를 입었구나, 라는 데 서 그치지 않고 그가 당한 피해가 사회적 문제로 인한 결과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피해 자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주장하기 위해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권의 주체이 므로 피해와 관련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 사람, 즉 권리의 보유자(rights holders)임을 '인정'해야 한다.

재난참사의 피해는 생명과 건강 및 재산상의 손해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 사회의 진실과 정의 역시 14)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2019,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창비, p. 145.

피해를 입는다. 진실, 정의, 안전, 회복, 기억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 참여할 권리는 재난참사에서 기 본적이고 핵심적인 피해자의 권리다. 진실은 상황과 이유, 배경과 조건, 원인과 책임을 포함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권리다. 정의는 사건을 초래하게 된 각각의 행위들에 책임을 묻고 정당하게 처벌하며 피해에 대해 배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전은 재발방지에 대한 약속인데, 재난참사의 경 우 대개 안전을 위한 대책이 마련되므로 '안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복은 피해자들이 달라진 세 계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각종 지원에 대한 권리다. 기억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진실이 동 시대와 후대에 이어지도록 할 권리다. 다시 강조하자면, 피해자는 권리의 보유자이지 수혜자가 아니 다. 이 장에서 서술하는 권리들에 관해 피해자 참여는 번번이 기각 당한다. "당사자니까 빠져!" 피해 자가 가해자를 직접 조사해? 피해자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함께 결정해? 그래야 한다. 피해자가 가장 많이 질문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답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난참사를 먼저 겪은 피해자들 이 힘겹게 꺼내는 질문이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사회로 이끄는 소중한 목소리임을 기억해야 한다. 피 해자의 참여는 권리에 필수적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와도 닿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권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재난참 사의 원인은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하고, 책임자는 합당하고 공정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재난방지 대 책과 제도적 변화는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 권리들은 개별적인 항목으로 존재하기보다 포괄적 이고 상호적인 특징을 갖는다. 재난참사의 '해결'을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상호 연관된 조치나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난 세월동안 진실과 정의, 치유와 회복이 서로 거래되거나 저울질되는 경우를 목 격했다. 세월호 특별법이 논의될 당시 정부는 피해자 배보상을 내세우며 특별법 시행령을 흔들었고, 진실을 밝히지도 못한 채 섣불리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논하기도 했다. 이렇게 각각의 권리에 대해 쪼개서 접근할 때 피해자의 권리는 어떻게도 보장되기 힘들다. 재난참사 이후의 모든 과정에서 진실, 정의, 치유, 회복, 기억 사이의 불가분성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재난참사 이후 무 너진 사회의 정의와 안전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재발 방지책을 세우는 등 변화해나갈 수도 있다. 책임을 물어야 다음에 똑같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이루어져야 피해자가 회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사회도 온당하게 사건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정의가 지연된 진실, 기 억되지 않는 진실은 진실일 수 없다. 인권의 상호불가분성에 대한 이해는 인권의 실현을 위해 필수적 이다.

재난참사 발생 현장에서 피해의 유형에 따라 주목해야 할 내용이 달랐던 것과 비교할 때 이 장에서 다루는 권리들에 관해서는 피해의 유형을 뛰어넘는 유사점이 훨씬 많다. 실종자나 희생자의 가족, 생 존자와 그 가족, 구조나 지원에 참여했던 사람들,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로서 권리를 가진다. 피해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선험적으로 전제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피해자로 인정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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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 진입조차 못하는 경우는 없어야 하며 피해를 폭넓게 인정할수록 더 나은 사회가 될 방법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점을 짚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1. 진실에 대한 권리

유엔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여타의 권리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양도 및 훼손 불가능한 권리로 다뤄져야만 한다. 이는 인권 침해의 이유와 침해가 발생한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을 포함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진실, 사건의 구체적 상황, 그리고 누가 사건에 참여했는지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납득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 닥뜨렸을 때,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왜 누가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목숨을 잃은 이의 마 지막 순간은 어떠했는지, 끝없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재난 참사 피해자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나'라며 그 이상의 의 문은 과한 것처럼 취급하는 시선을 마주치게 된다.

피해자들이 멈출 때까지 진실은 '아직' 없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진실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진실이란 항상 이미 어떤 관계의 표현이 다."15)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이 진실일 수는 없다. 피해자에게 진실은 무엇일까? 피해자 만의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일까?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한 세계를 가지며 누군가의 죽음 이후 추구되는 진실은 그 세계의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진실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피해자에게 진실인 것이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진실일 수 없다. 결국 진실을 추구할 때 중요한 것은 누구의 위치에서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또한 어떤 해석이 재난참사 이후의 세계에 새겨 지는가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진실을 공유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실은 재 난참사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며, 진실에 대한 모두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 해서라도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로서 진실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는 가장 많이, 가장 늦게까지 질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실종자나 희생자의 가족은 실종 자나 희생자의 위치에서, 생존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진실을 추구하게 된다. 피해자가 이 위치에 굳 건히 서있을 때만 진실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피해자라서 오히려 진상규명 과정에서 배제 15) 후지이 다케시, 2018, 『무명의 말들』, 포도밭출판사,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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