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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학풍과 사상은 강릉의 지식계를 주기론적 전통에 몰두하게 만들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다. 흔히 퇴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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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 율곡을 기호학파의 대표라 하여 경쟁 관계로

여긴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한다.

사임당 신인선(1504~1551). 현모양처의 이상형. 어느 남성도 범접하기 어려운

뛰어난 학식과 예술적 소양까지 겸비한 여성. 율곡과 매창을 키워낸 조선시대식 여성해방론자.

난설헌 허초희 (1563~1589) 허균의 누나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책읽기를 좋아했던 천재시인은 불우한 결혼생활로 26세에 생을 마침.

교산 허균 (1569 ~ 1618). 홍길동전의 저자. 풍운아, 서자들과 혁명을 꿈꾸다 처형됨.

허균의 스승으로 영향을 준

이달 (1561~1618).

서자 출신의 뛰어난 시인으로

개혁지향적 제자양성.

• 강릉의 리버럴한 지적 전통

• 강릉이 배출한 유명한 이들의 인생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살고 당쟁을 일삼으며 재산을 모으고 허망한 명 예속에 죽어가던 흔한 유학자들과 다른 길이었다. 사회 불의를 참지 못하고 개혁을 꿈꿨으며, 실질을 숭상하여 혁신적인 예술이나 학문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서경덕에서 시작된 주기론적 학풍은 주리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범보다는 실리를 좇아 현실적이며, 보다 개혁 적이었다. 강릉의 지식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고 파격적인 삶에 익숙하게 된 지적 전통을 만드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그 리버럴한 지적 풍토가 강릉의 여성들에게도 교육과 수양의 기회를 부여했고, 자기 실현의 가능성을 꽃피게 할 수 있었다.

• 모계 효도의 전통

이 지방의 여성 파워. 강릉 여성의 아름다움. 강릉에 미인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지식과 성품이 높았다는 의미.

모계 효도의 전통은 이 지역 지식층의 주류를 형성한다. 가부장제 사회인 조선조에 모계 효도 전통은 강릉의 독 특한 현상이었다.

강릉향현사에는 이지역 대표적인 유림 12인을 모시고 있는데, 이들에게 공통된 특징이 바로 모계 효도이다. 최 응현 등의 유림은 중앙 높은 관직에 올랐어도, 고향 강릉에 있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지방 고등학교 교장격인 강릉훈도를 자청하여 여생을 고향에서 효도와 은거생활을 계속했다. 최응현 만이 아니라 12현 중 10현이 과거 에 합격했으면서도 모친의 봉양 때문에 고향에 머물면서 은거했던 인물들이고, 이들 삶은 향토 지식인들의 모 범이 되어 숭상받아왔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부친 봉양’을 위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언급 은 없다. 가부장제 사회인 조선조에서도 모계 효도 전통은 강릉의 독특한 현상이었다.

가정생활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강릉의 현명한 어머니들은 가족 화합의 핵이 되었고, 다른 무 엇보다도 가정과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독특한 사회를 만들었다.

• 강릉, 촌락형성의 지리적 배경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경계로 영동과 영서 지방으로 나뉜다. 원주를 중심으로 한 영서 지방에 대해, 강릉이 중심이 된 영동 지 방은 상이한 문화상을 간직해왔다. 교통이 편한 영서 지방은 서울과 빈번한 교류 속에서 중앙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험준 한 대관령이 유일한 통로였던 영동지방은 중앙의 영향을 받기보다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영동 과 영서는 사투리도 다르고, 지적인 전통도 달랐다. 또 동해안에서는 비교적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었던 강릉의 지리적 조건 은 풍부한 해산물과 농산물을 기반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었다.

• 강릉의 고립적 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된다. 신라의 왕위 계승권자였던 김주원은 사소한 실수로 등극에 실패하여 강릉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경주의 원성왕은 그에게 ‘명주군왕’이라는 작위를 주어서 자치적 통치권을 승인했다. 강릉을 하나의 소국가 로 인정한 것이다. 이때 김주원을 따라 이주한 김, 최, 박, 함, 곽씨 들이 토착 씨족을 이루면서 강릉의 지배 계층으로 자리잡 게 되었다. 토착 씨족들이 자리잡은 곳은 대관령 동쪽의 골짜기였다.

강릉지역을 크게 동서지역 둘로 나누면, 서쪽 대관령 아래는 오래된 토착 씨족이, 동쪽 해안 부근은 조선 중기 이후의 신흥 씨족이 자리잡은 모습이다. 서쪽 산기슭의 오랜 토박이들이 지역 사회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해안 평야 지대의 신진 세력들은 별도의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살펴볼 배다리의 선교장이 대표적이며, 율곡을 배출한 오죽 헌의 죽헌동, 허균 집안이 잠시 의탁했던 초당동도 이에 속한다. 강릉이 변방의 중심지였다면, 이들 마을은 강릉의 또다른 변 방인 것이다.

• 현실적인 지적 전통, 지식인들의 파격적, 개방적 의식, 여성 교육의 상대적 활성화, 가족 중심의 가치관 등이 변방의 중심으로 강릉이 축적해온 특성이라 한다면, 강릉 사회의 또 변방이었던 동쪽지역에서 이들 가치관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는 것은 당연 한 현상이다.

선교장 건축에 나타난 파격성과 자유로움, 대규모 지향성과 복합성 등은 이러한 지역적 전통 속에서 살펴볼 때 그 원인과 실 체를 이해할 수 있다.

• 최초의 선교장, 강릉형 ㅁ자집

대저택 선교장은 한순간에 건축된 집이 아니다. 배다리에 터를 잡은 18세기부터 200여년의 세월 동안, 적어도 4차례의 대대 적인 확장과 변형을 거듭해왔다. 따라서 주택 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초창기 마스터플랜이 존재하지 않았고, 때에 따라 건 물의 성격이 변하고 영역의 경계가 확대되는 독특한 건축의 역사를 가진다.

강릉 지역에 처음 이주한 입향조인 이내번을 1대로 치고, 현재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이강백씨는 9대이다. 역대 선교장주들 은 끊임없이 선교장을 확장하고 고쳐왔지만, 획기적인 건축적변화는 대개 1대 이내번과 3대 이후, 6대 이근우 당시에 이루어 졌다.

[1대 이내번, 배다리에 정착하다.]

이내번 (1693~1781)이 배다리골에 선교장의 기틀을 잡은 것이 대략 1760년경이다. 이내번은 세종 임금의 둘째 형인 효녕대 군 11세손이다. 이내번의 친모친은 충주에 거주하던 토반층 부친 이주화의 셋째부인인 안동 권씨였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 염전을 통해 부를 일구다)

권부인이 아들 이내번과 함께 강릉으로 이주한다. 남편보다 27세 연하였던 권부인은 이내번이 15세때 늙은 남편의 3재취로 시집온 후 청상과부가 되고 아마도 부인과 처족들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처음에 경포대 부근 저동에 자리잡고 열심히 토지 를 매입해 부를 축적한 후 이씨 가는 새로운 터전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저동 일대는 이미 기존 마을들이 개발되어 있었고, 신입자라는 눈총도 있었다. 새로운 터전으로 발견한 곳이 현재의 배다리였다. 이씨 가는 이 땅을 사들여 집을 짓고 뿌리를 내 린다. 이는 조선 초기 혹은 중기에 씨족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조선 중기 이전의 씨족 입향조들은 대개 처가의 재산을 양도받아 정착을 시작했지만, 후기의 입향 과정은 이내번의 경우와 같이 매입과 축적을 통해서 재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지금의 경포호 둘레는 4km 정도지만 예전에는 12km에 달하는 넓은 호수였다. 그때는 선교장 활래정 바로 앞까지 물이 차 나루터가 있었고, 나루터에서 다리를 건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배다리’ (船橋, 선교)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호수가 현재처럼 좁아진 이유는 자연적인 퇴적 현상과 더불어 일제기를 통해 벌어진 대대적인 간척사업 때문이다.

교통과 영농의 요지에 터를 잡은 이내번 당대에는 지금의 안채를 중심으로한 보통 상류 주택 정도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전한다. 당시 지어진 살림집의 모습은 ㅁ자형이었다고 전한다.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등이 하나의 구조물로 연결되고 폐쇄된 안마당을 갖는 ㅁ자집은 영동지방, 경북 북부 안동일대에 널리 분포한다. 강릉지방만의 특징이라면, 안채 부분이 양통집의 구조를 가져서 전(田) 자형으로 배열된 4칸의 방이 안방부를 이룬다는 점이다.

안방부의 뒷줄칸은 골방이나 반침 등 수장 공간으로 쓰인다. 田자형 방의 배열은 멀리 함 경도부터 시작하여 강릉, 삼척 일대까지 동해안 지역에 분포하는 양통집의 특징이다.

• 배다리를 포함한 경포대 부근의 지형은 독특한 특성이 있다. 산들은 낮고 완만해서 얕은 골짜길를 이루고, 골 안에는 결코 좁지 않은 평야들이 펼쳐진다. 그 앞으로는 드넓은 경포 호가 자리잡아 육로나 수로 교통 모두가 편리하다. 넓은 들과 호수 때문에 안산으로 삼을 만한 뚜렷한 봉우리들은 매우 멀리 위치한다. 따라서 집과 마을이 바라볼 안대를 얕은 골 짜기 내의 동산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양통집 (‘겹집’) 한 지붕 아래 방이 앞뒤로 포개어 두줄로 구성되는 집.

반대로 방들이 한줄로 구성되는 집은

‘홑집'이라 한다.

강릉형 ㅁ자집의 사례 1, 강릉 죽헌동 김윤기 가옥

전체 배치에서 보이는

강릉형 ㅁ자집

겹집을 사용한 안채에 사랑채, 외양간, 곳간 등이 연결된 ㅁ자형 배치

안채와 사랑채를 병렬로 놓고, 안방과 사랑방을 대각선으로

엇갈려 배치하는 방식.

강릉형 ㅁ자집의 사례2 강릉 운정동 심상진 가옥 (해운정 옆)

심상진 가옥 (좌) 및 해운정 (우) 평면도

안채는 장대석 기단위 화강암 주춧돌, 네모기둥. 팔작지붕을 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

원래는 부엌에 이어서 광, 마루가 있는 ㄱ자 형태였으나, 부엌에 이어져 있던 부분을 수리하여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외벽은 판벽, 안채 전면에 툇마루, 마루 천장은 판자마감.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 위 자연석 주춧돌 한변 18cm의 네모기둥.

ㄱ자집 형식으로 배치되어 안채와 함께 집 전체의 배치구조는 ㅁ자형 구성.

오른쪽 모서리에 마루방이 있고, 그외에

방이 배치됨. 사랑방 전면과 안채쪽으로

전면에 장마루가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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