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에 의하면 백제에는 신라와 고구려인 뿐만 아니라 왜인과 중국인들도 잡거하고 있 었다.48) 마찬가지로 가야지역에도 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49) 백제의 경우는 낙랑․대 방이 소멸된 이후 중국계 이주민들이 다수 관료로 선발되어 외교분야에서 기용된 사례가 있듯 이,50) 왜계백제관료의 등장 또한 당시 백제가 처한 지리적․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 다.
백제가 중국계 이주민들을 관료로 등용한 것은 그들이 지닌 선진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 고 대중국교섭에서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였다.51) 웅진․사비시대의 중국계 백제관료 가운데는 상당한 유교적 소양과 문서행정에 능통한 인물(박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각종 정치제도․토목․의학 등과 함께 생산 기술 분야의 전문적인 자문역을 담당하였을 것이며, 중국 내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언어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노일 본서기명에 의하면 왜와의 문물교류와 외교교섭에서도 왜계백제관료와 함께 실질적인 매개 역 할을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왜계백제관료의 경우는 왜국뿐만 아니라 가야지역에도 파견되고 있다. 관련 사료에 는 왜계백제관료와 가야나 왜국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이들이 어떻게 백제의 관 료가 되어 외교 사신단에 편성될 수 있었는지, 그 등장배경과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들은 흠명 2년 추7월조에 인용된 분주의 기록대로 왜인과 한인 사이의 2세일 수도 있 고,52) 또는 왜국 유력씨족들이 대한반도 통교 확보책 차원에서 백제에 파견한 사람들의 2세일 수도 있다.53) 다만 이들의 활동시기가 동아시아 격변기에 해당되고 왜국 내 유력씨족들 뿐만 아니라 가야와의 관계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다각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관련 사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백제가 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斯那奴阿比多를 고구려의 사신 安定 등에 딸려 보내어 내조 하고 우호를 맺었다. <계체 10년 추9월조>
② 백제는 안라일본부와 신라가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前部奈率鼻利莫古, 奈率宣文, 中部奈 率木劦眯淳, 紀臣奈率彌麻沙<기신 나솔은 아마 기신이 한의 부인을 얻어 낳았을 것이다.
48) 동이전 백제조 “其人雜有新羅高麗倭國 亦有中國人”
49)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한조
50) 송서 이만전 백제국조, 남제서 동남이전 백제국조, 수서 동이전 백제조 등에 다수 보인다. 중국계 관료 들의 등장배경과 활동에 대해서는 윤용구의 연구(2007, 중국계 관료와 그 활동」,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9
백제의 대외교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참조.
51) 노중국, 1998, 「신라와 고구려․백제의 인재양성과 선발」,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19, 신라문화선양위원 회, 85~86쪽
52) 岸俊男, 1966, 앞의 논문, 102쪽; 山尾幸久, 1989, 앞의 책, 140쪽.
53) 鈴木英夫, 1996, 앞의 책, 83~86쪽.
백제에 머물러 나솔이 된 사람이다. 그 아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경우도 모두 이에 준한다> 등을 안라에 보내 신라에 간 임나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우는 것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흠명 2년 추7월조>
③ 백제가 紀臣奈率彌麻沙, 中部奈率己連을 보내서 하한의 임나의 정무를 아뢰고 아울러 표 를 올렸다. <흠명 3년 추7월조>
④ 백제 성명왕이 前部奈率眞牟貴文, 護德己州己婁, 物部施德麻奇牟 등을 보내어 부남의 보 물과 노 2구를 바쳤다. <흠명 4년 추9월조>
⑤ 백제가 施德馬武, 施德斯那奴次酒 등을 임나로 보내 일본부와 한기 등에게 “내가 기신나 솔미마사, 나솔기련, 物部連奈率用歌多 등을 보내 천황에게 알현하도록 하였다. 미마사 등 이 일본에서 돌아와 ‘너희들은 그곳에 있는 일본부와 함께 조속히 좋은 방책을 세워 짐이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라. 삼가 조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는 조서의 내용을 말하 였다.<후략>”라고 하였다. <흠명 5년 2월조>
⑥ 백제가 奈率阿乇得文, 許勢奈率奇麻, 物部奈率哥非 등을 보내서 표를 올려 “나솔미마사, 나솔기련 등이 신의 나라에 와서 조서를 바치며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일본부와 함께 좋 은 계책을 내어 하루빨리 임나를 세워라. 신중히 진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후략>” <흠명 5년 3월조>
⑦ 백제의 사인 나솔득문과 나솔기마 등이 돌아갔다. <흠명 5년 동10월조>
⑧ 백제가 사신을 보내 일본부의 신과 임나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보낸 나솔득문과 허세나 솔기마, 물부나솔가비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지금 일본부의 신과 임나국의 집사는 마땅 히 와서 칙명을 듣고 함께 임나의 일을 협의하라.”고 말하였다<후략>. <흠명 5년 11월조>
⑨ 백제가 나솔기릉, 나솔용가다, 시덕차주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렸다. <흠명 6년 하5월조>
⑩ 백제가 前部德率眞慕宣文과 나솔가마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흠명 8년 하4월 조>
⑪ 백제가 上部德率科野次酒와 杆率禮塞敦 등을 보내 군병을 청하였다. <흠명 14년 춘정월 조>
⑫ 백제가 上部奈率科野新羅와 下部固德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덕솔차주와 임나의 대부 등을 보내 해외 관가의 일을 보고하고, 신라와 박국 이 통모하니 <중략> 활과 말을 많이 내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말하였다. <흠명 14년 8월 조>
⑬ 백제가 中部木劦施德文次와 前部施德曰佐分屋 등을 축자에 보내 내신과 좌백련 등에게
“<전략> (구원병 등에 대해서) 대강이나마 듣고 미리 군영의 성벽을 쌓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흠명 15년 춘정월>
⑭ 백제가 下部杆率將軍三貴와 上部奈率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흠명 15년 2월조>
⑮ 백제가 下部杆率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전략> 신이 먼저 東方領 物部莫哥武連을 보내 그 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하략>”고 말하였다. <흠 명 15년 동12월조>
위의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왜계백제관료는 日本斯那奴阿比多, (中部)紀臣奈率彌麻 沙, 物部連奈率用歌多, (前部)物部施德麻奇牟, 施德斯那奴次酒(德率科野次酒), 許勢奈率奇麻, 物部奈率哥非, 上部奈率科野新羅, 前部施德曰佐分屋, 上部奈率物部烏, 東方領 物部莫奇武連
11명이다. 선행연구에서는 위에서 거론된 인물들 이외에도 몇몇을 더 포함시켜 논의해 왔지
다. 또한 같은 시기에 왜국으로 건너 간 박사들이 대부분 덕계통의 관등을 칭하고 있는 점을
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와 과야씨와의 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씨의 경우는 백제가 점차 가야지역으 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에 있었던 기씨 관련 인물들을 관료로 등용시킨 결과로 이해될 수 있 다.76) 5세기 후반 이래 백제와 관계를 맺은 왜인들이 1세대라면 계체․흠명조에 나타나는 왜계 백제관료는 그 2세대의 인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백제왕권은 이들 왜계 2세 중에 서 능력을 인정받은 자들을 백제관료로 발탁하여 대왜외교에 활용했을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출신씨족을 나타내는 씨명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은 대왜외교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백제측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백제는 왜국으로 이주해 간 백제계 도왜인들을 이용해서도 외교목적을 달성하고자 하 였는데 바로 허세씨와 왈좌씨 관련 인물들을 관료로 등용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77) 5~6세 기 왜국 내의 분위기도 백제와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흐름은 백제계 도왜인들 이 외교교섭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 입장에서는 바로 이들을 왜로 파견하는 사신으로 임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왜계백제관료는 엄밀히 말하면 백제의 왕도에 체재하면서 백제왕권의 관료로 발 탁되어 백제를 위해 활동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대화정권 내의 씨족들과 친연관계78)를 가지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백제에게만 신속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기존연구에서처럼 이들이 백제와 대화 정권 양쪽 모두와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다거나,79) 소위 양속관계 속에서 활동했다고 보는 것80)은 무리가 따른다.
다만 이들이 대화정권의 씨성을 칭하고 있는 점은 특이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 또한 왜계백 제관료가 왜 계통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백제왕권이 왜국의 씨성을 칭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 이지, 이를 왜국에 신속한다고까지 적극적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왜계백제관료의 특 수한 성격에 대한 설명으로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국가발전 단계를 고려할 때 두 정권에 동시에 소속된 관료가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81) 이들의 양속관계가 성립 되기 위해서는 두 국가의 관계가 먼저 지배-피지배 관계, 또는 조공-책봉체제하에 놓여 있어 야만 가능한 추론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