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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이원성

문서에서 이청준의 예술가소설 연구 (페이지 50-96)

오늘날 예술과 생활의 거리는 산업문명에 의하여 점점 더 심화되었다.산업화는 우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와 삶의 방식을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외부적 환경에 대한 제약은 인간 주체적 삶의 제약을 의미한다.그 결과 삶의 내적 요구는 그 환경적 조건과 부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내면에 잠재 되어 있던 고향의 의미와 공동체적인 아름다움은 도시화,상업화에 의해 후퇴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청준은 이러한 산업화에 대한 비판과 잃어버린 전통적 삶 속에 묻힌 절대적 가 치에 대한 향수를 귀향과 연결시켜 놓고 있다.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은 현실과 적응할 수 없는 정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그러한 경향의 인물들 은 급변하는 상업주의나 약삭빠른 실리주의가 무모하게 강하고,저열한 욕망에 의 하여 야비하게 횡행하는 세상에서 좀더 냉정히 사물을 살피면서 조심성 있게 또는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선량하면서도 굳은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하겠다.41)이러 한 인물들은 지나간 시대의 고귀한 가치를 그대로 전수 받고 그 맥을 이어가기 위 해 현실과는 전혀 융화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고집하게 된다.이청준은 이러한 인 물들을 통해 현실과 철저히 차단된 소외된 삶 속에서 개인의 예술성을 확인하고 그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는 장인정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 다.

이청준은 급변하는 세계와 인간관계의 해체위기의 현실을 진단하고 시대의 뒷전 으로 밀려날 위기에 놓인 장인의 삶과 예술적 삶의 가치를 이해하고 재발견하게 하려는 시도를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다.이러한 이청준의 글쓰기에 대해 김현은 “우리의 현대 변천사 속에서 ‘가치체계’의 극심한 혼란을 체험하고 고민하

41) 신동욱,「진실을 탐색하는 이야기꾼」,김치수 외, 이청준론 . 삼인행,1991, pp.136-137.

며,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이다.그는 이 가치체계의 변 화를 탐구함에 있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교체에서 발생하는 이원적 대립을 소설구조의 대응적 양식으로 다루는 바 우리는 이를 비판 적 지식인의 반성적 전제로서 이해할 수 있다”42)고 하여 이청준의 글쓰기가 시대 적 모순에 대한 의혹을 구체적으로 반성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지적인 작업 과정이라고 말한다.따라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면적 리얼리즘의 구도를 벗어나서 시간성의 내부로 환원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소외되고 불협화 음 하는 장인들의 삶과 예술적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1.예술가의 존재방식

1)예술행위와 시대적 가치

소설 「줄광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소외되어 가는 줄타는 광대의 이야기 이다.

줄을 타는 광대는 혹독한 수련과정과 고난도의 기술을 습득해서 공연 때마다 관 중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줄을 타야 하는 위험한 직업이다.그런 만큼 서커스라는 옛 풍속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그 나름대로의 애정을 받아왔던 사람들이다.그러나 근대화로 인해 직접적 생산 체계와 거리가 먼 이러한 풍속들은 해방이후 정치,경 제체제의 변동과 함께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나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청준이 이렇게 사라져 가는 전통적인 가치체계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써 상기시키고 그들의 삶과 정신을 예술적 경지로 형상화시키고자 한 이유 는 ‘장인들의 삶이 교환가치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다는 사실과 이들이 피해자일 뿐 절대로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그리고 그러한 사실의 언어화가 소설의 탐구

42)김현,「이청준에 대한 세 편의 글―문학과 유토피아」,문학과지성사,1980,p.243.

적 성격의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는 사실’43)에 있다.이러한 현실적 배경과 근대적 가치체계에 대한 혼돈 속에서도 이청준의 소설 속에 등장한 예인들은 그들의 가치 체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가는 고집스러움을 지닌 인물들로 형상화된다.

줄광대 허 노인에게 줄을 타는 행위는 예술과 현실 사이의 분명한 경계가 된다.

허 노인이 지상에서 더욱 높이 하늘을 향해 줄을 매달수록 그의 줄타는 행위는 현 실에서 멀어진 초월적인 행위가 된다.줄 위에서의 그의 삶은 현실세계로부터 고립 된 절대적 소외의 공간이다.그만큼 허 노인의 줄타기는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다.

그런 허 노인에게는 허운 이라는 아들이 있다.허 노인은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을 갔다가 시들해서 돌아온 아들에게 독백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줄광대가 밟을 만한 땅이 흔찮을 게 당연하지....「줄광대」 p.24.

서커스단에서 평생을 줄타기로 살아온 허 노인의 이같은 독백은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온 자신의 예술행위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 대한 자각의 말이다.그는 아들에게 줄타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다.이것은 아들 허운 역시 학교생활을 통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되고 대신 아버지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될 것을 의미한다.

허 노인은 아들에게 처음에는 땅에 금을 그어놓고 발을 왕래하게 하더니 나중에 는 각목과 줄로,그리고 몇 년 뒤에 드디어 그 줄을 허공에 매달아서 그 위를 타게 했다.허운에게 줄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그러나 아직도 사람 들 앞에서 줄을 타지 못하게 했다.아들은 자신도 사람들 앞에서 줄을 타고 싶다고 속마음을 말하자 허 노인은 아들을 향해 묻는다.

-그래...그럼 줄을 탈 때 끝이 가까워 보이느냐?

-네,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가는 줄이 넓게 보이겠구나... -그 위에서 뛰어 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43)김치수,「언어와 현실의 갈등」, 이청준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1998,p.97.

-그러자 허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

운은 까닭을 몰랐으나 더 대꾸하지 못했다.열 여덟 살이 되었다.

운은 허 노인에게 다시 같은 청을 드렸다.

-어떠냐,줄이 넓어 보이느냐?

-줄이 보이질 않습니다.

운은 불안했으나 사실대로 말했다.

-그래,줄을 타고 있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단 말이냐?

-예.

-귀도 들리지 않고.

-예.

그것도 사실대로 대답했다.

-흠,아직도 객기가 있어... 「줄광대」,pp.24-25

아직도 아들의 줄타기에 객기가 있다고 판단한 허 노인은 아들이 사람들 앞에 줄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노인에게 줄타기는 재주도,객기도 그 어떤 것도 개입 되지 않는 절대적인 무아의 경지를 의미한다.그것은 순수한 예의 세계에 대한 정 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이렇게 호된 훈련의 과정을 거친 후,어느 날 아들이 자신의 호통소리를 듣지 못하고 줄을 타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아들에게 사람 들 앞에서 줄타는 것을 허락한다.

줄 끝이 멀리 보여서는 더욱 안 되지만,가깝고 넓어 보여서도 안 되는 법이다.

그 줄이라는 것이 눈에서 아주 사라져버리고 줄에만 올라서면 거기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어야 하는 거야.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단 말이다.「줄광대」,p.27.

허 노인은 아들 허운에게 지상에 있는 모든 것에서 눈과 귀가,그리고 생각마저 닫아야 한다고 말한다.그것은 광대의 줄타기가 세상과 단절된 철저히 예술적인 완

전성과 순수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초월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자유스러운 예술세계 속으로 그의 삶 자체가 동화되고 지상의 삶에서 초 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줄을 타는 허공과 지상은 철저히 이원적인 관계의 세계다.현실과 비현실,현실과 이상,그리고 근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라는 이원 성이 존재하는 곳이다.그래서 허 노인이 허공에서 줄을 타는 행위는 현실에서 소 외된 자의 절대적 공간이 된다.

허 노인이 줄을 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천장 포장을 걷어 젖히고,넓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허 노인은 흰옷에 조명을 받으며 줄을 건너는 것이었는데,발 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게 그냥 흘러가 둣 조용히 줄을 건너가는 노인의 모습 은 유령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냥 땅 위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 다.이상한 것은 그렇게 줄을 타는 노인이었지만 줄에서 내려오면 그의 온몸이 언제나 땀에 젖어 있곤 한 것이었다.그리고 단장은 그런 허 노인의 줄타기를 몹 시도 싫어했다. 「줄광대」,p.25.

허 노인의 줄타기는 객기나,재주를 부리는 것과는 먼,혼신의 힘과 정신으로 행 하는 예술적 경지에 이르는 행위이므로 줄타기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 을 느끼게 한다.줄 위에서의 그의 육체는 정신과 완전한 일치상태가 되고,예술적 자유스러움을 경험하는 공간이 된다.그러나 세상의 요구는 허 노인에게 그런 자신 만의 예술적 자유스러움을 버릴 것을 강요한다.단장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구경꾼 놈들의 간덩이를 덜컹덜컹 놀라게 해주란 말이야,재주를 좀 부려,재주를”「줄광 대」,p.25요구하게 된다.그러나 허 노인은 줄을 타면서 재주를 부리는 것을 용납 하지 않는다.더구나 구경꾼들에게 재미를 더해 주기 위해 줄을 타지 않는다.그 때문에 단장에게 나무람도 들었다.노인은 줄타는 일이 구경꾼이나 단장을 위한 일 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그러기에 단장의 청이나 관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광대에게 줄은 그의 삶의 유일한 공간이고,거기에서 이 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의 삶 그 자체가 된다.44)그러므로 단장의 요구는 허 노인에 게 파랗게 질리는 고통을 안겨준다.그러나 줄을 타는 행위를 통해 그 고통은 잊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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