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4년 백흥용 씨의 베를린 양심선언
1990년 8월 독일 교민들이 범민족대회에 다녀온 직후인 11월 20일 남, 북한과 해외의 정당, 사회단체 등이 베를린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을 결 성하였다.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이 없어지면서 베를린은 남한의 외교 및 정보 기관뿐만 아니라 북한 이익대표부가 공식적인 외교 활동을 하던 곳이었으므로 남, 북한 대표와 해외교민들이 자유롭게 모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인 1991년 8월 박성희, 성용승 씨가 전대협 대표로 북한 에서 열린 제1차 남북해외 청년학생 통일대축전에 참가한 후 판문점 귀환이 막 히자 베를린으로 와서 통일운동을 하게 되었다. 범민련 유럽지부가 있던 베를린 에 방북 작가 황석영 씨와 전대협 대표가 머물게 되면서 베를린은 남한과 북한의 통일운동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공간’이 된 셈이었다.
이처럼 남북한과 해외동포들의 통일운동에 관한 활동들이 활발하던 1994년 백흥용(가명 배인오)이라는 안기부29 프락치가 베를린의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 생연합30 사무실로 찾아왔다. 백흥용 씨는 1990년 초 노동문화운동에 관심을 갖 고 영화운동을 시작하였다. 1991년 남누리 영상을 공동 창단하고 배인오라는 이 름으로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는 16미리 영화를 제작하였다. 1992년 5월 재미한 청과 영화상영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후 6월 초 귀국했는데, 그 후 시작된 안기부의 ‘영화 관련 조사’ 과정에서 안기부 정보원으로 일하도록 회유, 협박을 당했다. 자신과 가족에 대한 강한 협박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안기부 정보원 활동을 받아들인 백흥용 씨는 안기부 지시에 따라 일본의 조 총련 및 한통련 간부 등을 접촉하며 정보를 수집, 보고하고, 1993년 ‘김삼석 김은
29 1961년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로 개칭했다. 1999년 현재의 국가 정보원이 되었다.
30 1992년 8월 15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3차 범민족대회에서 결성된 남북 및 해외 청년들의 통일운동단체 이다.
주 남매의 간첩행적을 조작하는 활동’에 가담하였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 임」·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94.11.09 보도자료 & 주간전국연합 1994: 28).31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인 논란이 제기되자 안기부는 백흥용 씨를 잠깐 숨어 지내 도록 했다가 해외로 파견한 것이었다.
백흥용 씨는 1994년 9월 1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베를린에 도착한 뒤 범청학 련 사무실로 전화해 방문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덴마크, 노르웨이, 체코, 헝가리 등의 동유럽 국가를 여행하였다. 10월 19일 범청학련 대표인 박성희, 김정수 씨 의 집으로 가서 한국에서 비밀리에 안기부 직원들의 대화를 녹화한 비디오테이 프가 들어있는 가방을 맡긴 후, 10월 20일 다시 방문하였다. 그의 행동을 수상하 게 생각한 범청학련 회원들이 가방 속 비디오테이프를 복구하여 안기부 직원들 의 대화를 확인한 후 10월 20일 사실을 추궁하자 그는 자신의 프락치 활동을 고 백하고 양심선언 의사를 밝혔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1994.11.09.a, 백흥용 진술서). 이 자리에 함께 있던 범청학련 관계자들과 최선숙 씨를 비롯한 교민단체 회원들은 크게 놀라 이 사실을 즉시 재독양심수후 원회(이하 후원회)에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였다.32 당시 상황에 대한 최선숙 씨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영화 만든 친구잖아, 이 프락치를 하면서 안기부 사람과 같이 다니면서 몰래 카메라를 안막핸[anmachen: 작동] 한 거야, 그거를 가지고 독일에 온 거야, 박 성희하고 김정수 (…) 그 집에 찾아와서 야[얘]가 카메라 테이프를 뜯은 거를 야 [얘]들 집에 두고 간 거에요, 그래서 난리가 난 거에요 그때부터 그때 독일의 이 00 씨가 하는 [재독]양심수 후원회에 연락하고 우리가 모여서 가만있으면 안 되
31 1993년 09. 24 안기부가 발표한 ‘김삼석·김은주 남매간첩단 사건(이하 남매간첩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1994년 7월 7일 고등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94년 10월 25일 대법원이 피고인들의 상 고를 기각하여 최종 확정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0월 31일 백흥용 씨가 ‘남매간첩 사건을 조작했 다’는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32 1989년 한국에서 창립한 양심수후원회의 인권보호 활동에 동의하여 1990년 독일에서 자발적으로 조 직되었다. 약 20~30여명의 한인 회원들이 1990년대 말까지 활동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재독양심수 후원회 자료).
겠다, 그 후에 [녹색당 등에] 연락을 해서 야[얘]가 양심선언을 했지”(최선숙 구 술녹취록 2018/ 6).
위의 구술에서 최선숙 씨는 ‘백흥용 씨를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20여년이 지 난 당시의 상황을 단숨에 토하듯이 전달하고 있다. 범민련 임원이자 후원회의 일 원이기도 했던 구술자는 그 이전에 북한을 거쳐 베를린으로 왔던 박성희, 김정 수 그리고 황석영 씨의 난민인정 및 체류권 관련 일들을 지원하고 있던 중 백흥 용 씨의 베를린 방문을 알게 된 것이다. 10월 22일 연락을 받은 후원회장이 베를 린으로 와서 후원회가 이 일을 담당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공개 적인 양심선언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한국에서 크게 보도되었던 ‘남매 간첩사건’
을 직접 조작한 당사자의 양심고백과 안기부의 프락치 활동을 증명할 비디오테 이프를 공개함으로써 사회운동에 대한 남한 정부와 안기부의 탄압을 밝히기 위 한 것이었다(최선숙 구술녹취록 2018/ 8). 후원회 자료에 의하면 10월 23일 엠네 스티 인터내셔널(이하AI) 망명담당자에게 백 씨의 양심선언 취지와 신변보호, 거 취문제 등과 관련된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10월 25일에는 독일 녹색당 시의원들 과 기자회견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또 10월 31일 11시 양심선언 기자회견 전까 지 후원회는 백씨가 작성한 진술문,33 백씨가 소지하고 있던 비디오 자료의 녹취 록을 독일어로 번역한 자료,34 한국의 인권상황과 양심수에 대한 자료들을 준비 하여 독일 기자들과 언론기관에 발송하였다. 동시에 국내의 민가협과 KNCC에 백흥용 씨의 진술서를 발송하여 보도하도록 하였다.35 이에 따라 ‘안기부 프락치
33 「안기부의 간첩조작을 폭로한 백흥용 씨 양심선언 경위 진술」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간전국연 합통신 1994.11.07.28). 백흥용 씨가 직접 자신의 안기부 활동 내용과 양심선언까지의 과정을 기술하 였다.
34 이 자료는 「안기부의 프락치 공작에 대한 증거 자료(비디오테이프 녹취록)」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었다.
이에 의하면 녹화는 백흥용이 ‘남매 간첩단 사건’ 직후 프락치로 의심받게 되자 1993년 10월 30일 경, 안기부 직원들이 자신을 낚시터로 피신시키기 위해 동승시킨 차량 안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자신 이 살해될 경우 ‘남매 간첩단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라도 남기기 위해서 녹화했다고 한다.
35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94년 10월 31일 베를린에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사무실로 백 흥용 씨의 기자회견문이 팩스 전송되었으며, 이 자료가 전국연합과 민변 등 재야단체로 전달되었다(주 간전국연합통신 28 1994.11.07.10). 한총련은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조직되었다.
사건’이 독일과 한국에서 동시에 보도되었다.
1994년 10월 31일 독일 베를린 동맹90/녹색당 기자회견실에서 백흥용(가명 배인오) 씨의 양심선언이 이루어졌다. 그는 남한의 정보조직인 ‘안기부’를 위해 비밀리에 일해 왔으며 베를린의 남한 학생그룹을 탐지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나, 비밀정보부 활동이 양심과 일치될 수 없기 때문에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고 밝 혔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동맹90/녹색당 연합은 독일이 남한 정부에 대해 정 치적 탄압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Bündnis90/Grüne 1994.11.01). 또한 독일 매체들은 백흥용 씨가 안기부의 지시로 남한 정권에 비 판적인 김은주, 김삼석 남매가 북한의 간첩활동을 했다고 “조작된 증거”를 만들 었던 사실을 전하며, 과거 1967년에 발생했던 동백림 사건을 비롯하여 남한의 정보부가 지속적으로 조직의 안정을 위해 ‘조작간첩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 판했다(Neues Deutschland 1994.11.01). 다른 보도는 그동안 그가 공포 속에 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으며, 베를린에서도 공포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 틀림 없다고 전하며 ‘안기부’의 피해자인 그의 망명신청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Frankfurt Rundschau 1994.11.03). 또 다른 신문에서는 독일 전체에 사는 5만 여명의 한국인들 중 약 2천 명이 살고 있는 베를린이 안기부의 주요한 표적 중 하 나임을 지적했다(Tageszeitung 1994.11.04).
한국 언론에서는 백흥용 씨가 안기부로부터 진달래라는 암호명과 고유번호 7353을 지정받고 “한총련 등 국내 운동단체와 일본 한통련 등이 연결돼 있는 증 거를 만들라“는 등의 지시를 받고 6차례 일본을 방문해 조총련계 인사들과 접촉 하는 등 공작을 벌여왔으며, 베를린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 가서 프락치 활동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받고 독일로 출국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10월 20일 범청 학련 쪽에 양심선언을 했다고 전했다(한겨레신문 1994.11.01). 10월 31일의 기 자회견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독일 일간지 외에 베를린 공영방송 SFDB의 라디 오에서도 인터뷰 형식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독일주재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 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재독양심수후원회 1995.03.28). 당시 후원 회원이 던 서미경 씨는 쾰른에 거주하던 회장을 대신하여 백흥용 씨 후원활동을 전담하
한국 언론에서는 백흥용 씨가 안기부로부터 진달래라는 암호명과 고유번호 7353을 지정받고 “한총련 등 국내 운동단체와 일본 한통련 등이 연결돼 있는 증 거를 만들라“는 등의 지시를 받고 6차례 일본을 방문해 조총련계 인사들과 접촉 하는 등 공작을 벌여왔으며, 베를린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 가서 프락치 활동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받고 독일로 출국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10월 20일 범청 학련 쪽에 양심선언을 했다고 전했다(한겨레신문 1994.11.01). 10월 31일의 기 자회견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독일 일간지 외에 베를린 공영방송 SFDB의 라디 오에서도 인터뷰 형식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독일주재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 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재독양심수후원회 1995.03.28). 당시 후원 회원이 던 서미경 씨는 쾰른에 거주하던 회장을 대신하여 백흥용 씨 후원활동을 전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