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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 투사된 남성 주체의 몸: 민족의 역사와 순혈의 영토를 상징하는 신체적 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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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를 비롯한 문인들과 교류했던 오윤은 1969년 <현실과 동인>이라는 미술단체를 만들고, ‘미술의 현실주의’를 표방하였다.48)이후 오윤의 작품에서는 민중의 모습이 조각도로 파낸 힘찬 선을 이용하여 판화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8) 오윤은 1969년에 임세택, 오경환과 더불어(여기에 평론가로 김윤수와 김지하가 참여) ‘현실동인’을 결성하 고 전시회를 계획했으나 무산된다. 김지하가 썼다고 알려진 ‘현실동인 제1선언’의 내용에서 미루어보면, 그 들은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미술은 그 내용에 있어서 현실 지향적이어야 한다고 보았 다. 채효영, 「1980년대 민중미술연구-문학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8, pp. 68-69 참조.

(그림 20) 오윤, <도깨비> 부분, 1985, 광목에 목 판 채색, 91x218cm

(도판 19) 오윤, <낮도깨비>, 1985, 42x54cm

<짊어진 사람>(도판 16)이나 <노동의 새벽>(도판 17)은 그러한 작품들의 실례에 해 당한다.두 작품은 모두 짐꾼이나 노동자,즉 민중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데,얼굴묘 사도 없는 강인한 근육질의 몸은 험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질긴 생명력과 원초적 힘으 로 나타나고 있다.

오윤이 ‘현실과 발언’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1980년대 중반에 제작한 <칼노래>(도판 18)에서는 이러한 민중의 모습이 자본과 권력의 부패에 맞서 칼을 든 의적의 모습으로 투사되었다. 이 작품에서 민중의 강인하고 역동적인

남성다움은 칼을 휘두르는 찰나에 반토막난 텍스트들 -邪(사),汚(염)㿄(의),滅(멸),貧(빈),暊(부),夭 (요),壞(괴), 淫(음)...-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도깨비>연 작들은 주술적 힘을 지닌 전통문화적 도상인 도깨비를 그리고 있다.이는 자신의 병마로 인한 죽음의 위협49) 과 신군부의 억압에 맞서 저항하기 위한 초인적 남성 성을 나타내려는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작품들 중의 하나인 <낮도깨비>(도판 19)는 민담에 구전되고 있는 것처럼 머리에 뿔이 나 있고 신기를 부리는 방망이를 들고 있는 도깨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깨비는 또한 민족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머리에서는 힘찬 기운이 뿜어 나오고 있으며, 얼굴과 몸은 강인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 는 남성주체의 몸은 하드바디의 민중에게 투 사되는 것으로 시작하여 주술적인 힘을 획득 한 초인적인 남성성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9) 오윤(1946-1986)은 평소에 간경화를 앓고 있었으며, 1986년 첫 개인전으로 주목을 받은 후, 자신의 고향 인 부산 공간화랑에서 전시를 열던 중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오윤의 <낮도깨비>의 작품에서 도깨비의 몸에 강조되어 나타난 독특한 근육 의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다.<낮도깨비>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도깨비>(도판 20)에서는 이러한 근육들이 씨름을 벌이거나 운동을 하고 있는 도깨비들의 전,후,측 면의 몸을 통해 더욱 다양하고도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70년대 중반 노동자나 짐꾼의 몸에 나타난 근육과 비교해보았을 때,<도깨비> 연작에서의 근육은 혹모양의 얼굴 근육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치 상형문자처럼 추상화된 몸의 근육에 이르 기까지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강조되어 있다.이러한 모습은 근육들이 온 몸을 뒤덮이 도록 만들고 있는 작가의 과잉된 집중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그는 왜 이토록 몸의 근육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을까?

오윤의 <도깨비>연작에 나타난 이러한 초인적 남성성의 특징은 유신정권이 들어선 이후 비슷한 시기에 문학을 중심으로 재현되었던 남성성과 연계해봄으로써 좀 더 구체 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소설가 황석영은 조선 숙종 때 신출귀몰했다던 전설적 인 민중의 영웅인 ‘장길산’을 모델로 하여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간에 걸쳐 한국 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한다.이로 보았을 때,황석영과 오윤이 유신정권에서부터 신 군부정권에 이르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모두 민중에 투사된 강인한 남성성을 그려내고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황석영이 그의 연재소설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장길산’의 남 성다움은 임신한 어미가 추노꾼에게 쫒기는 아비를 찾아가는 길에 광대패의 이빨로

‘탯줄’을 끊고 태어남으로써 태생적으로 질긴 생명력과 원초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재 현되고 있다.초인적인 힘을 지닌 장길산을 죽음으로 이끄는 유일한 것은 바로 ‘민중’

과의 인연이다.소설의 결말에서 장길산의 행방은 묘연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장길 산>은 민중을 위한 희생으로 불멸의 숭고한 정신을 획득한 영웅서사로서 초인적인 남 성성의 신화를 보여주고 있다.<장길산>의 도입부에서 황석영은 황해도 장산곶의 험한 마루턱에 내려오는 전설 속의 매의 모습으로 장길산의 남성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 고 있다.그 일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새벽에 주변의 섬으로 놀러나갔던 매는 황혼녘이면 돌아왔다. 그리고는 마을 상공을 늠름하 게 한 바퀴 돌고나서 당솔나무에 앉아 쉬거나, 마을의 지붕에 내려와 아이들의 찬탄 섞인 웃음을 들으면서 사귀다 갔다. 고깃배가 출어하면 매는 한나절 거리는 좋이 됨 직하게 따라 왔다가 해변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만선의 북을 두드리며 포구로 돌아오면 벌써 매는 날씬

한 날개를 펴고 황포의 돛 위에 날아 앉거나, 마을 부녀자들에게 그들의 무사귀환을 알리기 위해 재빠르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50)

위의 글에서 매는 날씬한 날개로 한나절이나 되는 거리를 가볍게 날면서 아이들과 사귀거나 황포의 돛 위에 앉아 고깃배를 살피고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미리 알려주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재현되고 있다.매가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신화적 원형을 획득하게 된 것은 마을사람들(민중들)이 매와 맺은 인연의 표시로 다리에 매어준 붉은 실매듭으 로 인해 죽은 후의 일이다.이로써 매는 민중을 위한 희생으로 불멸의 신화를 획득했 던 영웅,즉 장길산의 초인적인 남성성을 상징하고 있다.51)

70년대 중반부터 황석영이나 오윤의 작품들에서 재현되고 있는 민중에게 투사된 강 인한 남성성의 신화들은 유신정권 이후 정치적 압박이 대중들의 일상을 담는 영화나 가요 등의 대중문화에까지 가해졌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등장하였다.당시 유신정권 의 탄압은 그에 반대하는 지식인이나 학생들에 대한 정치적인 억압뿐만 아니라,영화 의 장면이나 대중가요 가사의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등의 경범죄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검열과 단속의 형태로 이루어졌다.이러한 강압적인 사회현실은 80년대 신군부정권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으며,이로 인해 군사정부의 파시즘에 저항하 는 강인한 남성성의 신화는 당시 대중 모두가 갈망하던 것이었다.52)이를 통해 보았 을 때,당시 문학이나 미술에서 재현되었던 초인적인 남성성의 신화는 역설적으로 군 사정부의 강압적인 파시즘으로 인해 불안해진 남성주체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열망 하였던 ‘갑옷이나 공격적인 태도’53)와 같은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파시즘에 대한 주체의 이러한 편집증적인 방어 태도를 ‘갑옷 입은 에고 (ego)’라고 말하였다.54)주체의 ‘에고의 갑옷’,혹은 ‘갑옷 입은 에고’란 원래 라캉

50) 황석영, 『장길산』1권, 현암사, 1984, pp. 8-9.

51) <장길산>은 이후 대하소설 형식으로 출판되었는데, 홍성담은 전통적인 목판화기법으로 이 소설의 삽화를 제작한 바 있다.

52) 오윤과 황석영이 재현하고 있는 초월적인 남성성은 앞 서 살펴 본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에 나타난 페티시즘 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들 모두 70년대 유신정권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남성주체 의 같은 목적을 지닌 성정치적 전략들 속에서 배태된 다양한 형태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3) Hal Poster, The Return of the Real: The Avant-Garde at the End of the Century , The MIT Press, 1996. 이영욱외 역,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 311 주)9 참조.

54) 라캉의 ‘갑옷 입은 에고’에 대한 언급은「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난 ‘나’ 기능 형성자로서의 거울단계,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도판 21) 임옥상, <웅덩이 5>, 1988, 209x138cm, 아크 릴릭

이 거울의 단계에서 에고를 일컫기 위해 사용한 말로써,허구적 합성물인 ‘이상적인 나 (Ideal-I)’와 타자로 둘러싸인 현실과의 불일치를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해결하려 는 존재를 의미한다.55)<도깨비>연작들에 나타난 강인한 남성다움의 형상에는 오윤 자신이 열망하는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으며,이는 70년대 중반부터 80 년대에 이르는 격변의 역사로 인한 위기의 현실 외에도 자신의 병마로 인해 직면하게 된 죽음의 실재와 겨루면서 매우 힘겹게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런 점에서 오윤이 <도 깨비>연작에서 온 몸을 둘러싸고 있는 과잉된 근육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강인한 남 성성에 관한 재현의 수사는 역설적으로 거세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주체가 몇 겹으 로 껴입은 ‘에고의 갑옷’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초인적인 남성성의 신화들과 관련하여 80년대 중반 이후 임옥상의 작품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 의 그림은 70년대의 민중에 투사된 주 체의 강인한 남성성의 계보를 이으면 서 남성주체의 몸을 민족주의 정신을 담지한 숭고의 대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다.

임옥상의 작품들이 그의 나르시시즘

적 세계를 표출하고 있는 데서 벗어나 현실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보인다.예를 들면,1988년 제작된 <웅덩이 5>(도판 21)는 1976 년에 제작된 <웅덩이>(도판 3)와 비교했을 때,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1976년 <웅덩 이>가 장소를 가름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면,1988년의 <웅덩이

(1936/1949)에서 “소외를 낳는 전체성의 갑옷”에 대해 쓰고 있으며, 또 비슷한 언급을 『에크리』(trans.

Alan Sheridan, NewYork: Norton, 1977)에서도 볼 수 있다. 자크라캉, 『욕망이론』, 권택영 외 옮김, 문 예출판사, 2009, p. 42.

55) 할 포스터는 라캉의 ‘갑옷 입은 에고’가 바로 현대의 불안한 주체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할 포스터는 이 용 어는 라캉의 시대를 반영한 것으로, "1930년대 히틀러 정권에서 강압적으로 세우려했던 파시즘적 주체에 대 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들과 공격적인 태도’와 같은 것, 즉 에고의 나르시즘적 토대와 그것의 편집증 적인 구조 사이의 상호 연관적 경향"이라고 말한다. Hal Poster,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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