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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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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blems of development of agriculture (rice) in the Soviet Far East (1920-1930) (the example of the Soviet Koreans)

II. 소비에트 시기 극동의 사회경제적 상황(1920-1930)

5. 문화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는 극동에서 직장별, 지업별, 지역별로 실시되었다. 따라

52 《레닌의 긔치》 58호. 1938. 11. 7. 3면. “쎄쎄쎄르를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과 기술 과 가장 생산력이 많은 농업의 국가로 변하자. 식료품의 풍족을 달성하자 - 십월혁명전 사 회주의 빅이에서의 승리자들” 중 "극장예술의 향상을 위한 투쟁". 여기에서 빅이는 경쟁을 의미한다.

53 《레닌의 긔치》 64호. 1938. 11. 28. 3면. “사랑을 받는 쏘베트 배우”.

서 가족이나 친지들이라 하더라도, 또는 여행이나 업무차 다른 지역에 가 있을 경우에도 그들이 원하던 지역, 원하던 사람들과 함께 이주하지 못했다. 따라서

《레닌기치》에서는 한민족의 전통인 이산가족 찾기와 죽은 사람에 대한 부고 를 광고 형식을 취해 게재했다. 그러나 무료로 기사를 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광고 크기에 따라 단가를 달리했다.54

이에 1938년에 사람을 찾는 광고와 부고 광고가 총 24회에 걸쳐 실렸다. 이 광고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 사위 송용준을 찾는 광고 였다. 홍범도 장군은 1938년 6월 10일 다음과 같은 광고를 《레닌기치》에 실 었다. “나의 사위 송용준이 아랄쓰크 모레루 갓다는데 그의 거처를 아시는 동 무는 г. Кзыл-Орда, Красный городок, No.60 홍범도에게 전하여 주시오 .”55 이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홍범도의 사위 송용준과 그의 딸이 아랄스크해 근처로 이주당했다는 사실과 홍범도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후 기거했던 주소이다. 그런데 이 주소는 앞에서 언급했던 고려극장 주소였다.

즉 홍범도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노년에 고려극장에 근무했다는 것이다.56 이산가족을 찾는 기사의 대부분은 강제이주로 헤어진 가족과 친지를 찾는 것 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헤어진 가족과 친지를 찾는 광고도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강제이주 이후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카자흐스탄이나 우즈 베키스탄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나 친지들과 헤어진 경우로 해석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헤어져 다시 만나기 힘 들어진 이유는 강제이주 과정에서 소비에트 당국이 고려인들의 공민증을 압수 한 후 되돌려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로 발급해 주지도 않아서 고려인들의 이 동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57

강제이주라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과 사건이 있었지만 중앙아시아 척박한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았다. 사람 사는 곳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부

54 사람을 찾는데 있어서 그에 일정한 광고료가 있읍니다. 오호 한줄에 1루, 사호, 삼호 한줄에 1루 50꼬, 이호 한줄에 2루, 일호 한줄에 3루. 주소 : Г. Кзыл-Орда, Сырь-Дарьннски й район, Редакция кор. Газеты "Ленины Кичи". 《레닌의 긔치》 4호. 1938. 5. 24.

4면. “독자동무들에게 두어가지 충고”.

55 《레닌의 긔치》 9호. 1938. 6. 10. 4면. “송용준을 찾소”.

56 홍범도 장군은 《레닌기치》에 총 3회에 걸쳐 실리는데, 사위를 찾는 광고를 낸 것과, 1943 년 10월 27일자에 그가 10월 25일 별세했다는 기사, 1968년 8월 27일자에 그에 관련 특 집기사 등이 그것이다.

57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 대한 공민증 재발급은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인 1953년에 가서야 이 루어졌다.

족하거나 문제점이 있는 일들은 지적하고 개선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크즐오 르다 시에는 수만명의 노동자와 사무원들을 위한 문화적 휴식공간이 있었다.

이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고려인들이었다. 그러나 고려말로 연 극을 하거나 음악 연주를 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독서실에는 고려 책자를 한권 도 갖춰놓지 않았고, 당에서 발행하는 《레닌기치》신문도 없다는 비판이 있기 도 했다.58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 사회에서도 다양한 체육행사와 예술 올림피아드, 라디 오페스티벌 등 각종 문화행사들이 열렸다.

7월 20일부터 23일까지 크즐오르다 시내에서 크즐오르다주 콜호즈 운동대회 가 개최되어 다양한 경기들이 열렸다. 육상과 카자흐 전통 씨름은 물론 조선 씨름도 대회 종목의 하나였다. 육상경기는 콜호즈별 단체 경기로 칠리구역의

《선봉》콜호즈가 우승을 차지하고 씨르다리야구역의 《꼴로쓰》콜호즈가 2등 을 차지했다. 카자흐 씨름과 조선씨름은 개인전으로 진행되었다. 카자흐 씨름은 고려인들에게 생소하여 등위에 드는 고려인들이 없었다. 대신 조선 씨름은 우 리의 전통 경기답게 고려인들이 우승에서 3등까지 모두 차지했다.59

《레닌기치》신문사에서는 자체적으로 단편소설 공모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58 《레닌의 긔치》 21호. 1938. 7. 16. 4면. “시공원엔 결함이 많다”.

59 《레닌의 긔치》 25호. 1938. 7. 28. 6면. “주 운동대회의 결과”. 조선 씨름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등 – 조알렉세이, 꼴호즈 “아츰놀”, 까르막치 구역, 이등 – 황룡, 꼴호즈 “크슬-우 란”, 쩨렌우샤크 구역, 삼등 – 김응연, 크슬 오르다시.

국제청년의 날과 콤소몰 20주년을 기념하여 실시된 공모전에서는 국방과 콜호 즈 건설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로 1등과 2등에게 상금 100루블과 75루블을 각각 수여하고 원고료는 가작까지 포함해 지불했으며, 당선된 작품들은 신문에 실리 기도 했다.60

크즐오르다주 내에서는 1938년 한 해 동안 성년자들의 올림피아드, 아동들의 예술 올림피아드와 산업동맹 예술 올림피아드 등 세 번의 올림피아드가 개최되 었다. 10월 10일에 개최된 크즐오르다주 산업동맹 주최 올림피아드는 30여종의 예술품 전시와 연극공연, 합창과 독창, 현악연주, 시낭송, 소설읽기, 무도 등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합창에서는 《라스노쁘롬》알쩰리 회원들로 조직된 조선인 합창대가 2등을 했고, 독창에서 최운학이 3등을 차지했다. 특히 관중들의 인기 를 끈 것은 까르막치의 《뻬료드》알쩰리 회원 안 류드밀라의 춤 공연으로 당 당히 일등을 차지했다. 그런데 《레닌기치》에서는 이 문화행사의 성과에도 불 구하고 고려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크즐오르다주 산업동맹 관할 내 에 15개의 알쩰리가 있는데 농촌 및 구역의 알쩰리들 중에는 《뻬료드》하나만 참여하여 지방에 대한 연락 및 참여 독려를 촉구했다. 그리고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위한 숙소 및 식당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할 것을 지적했다. 가장 핵 심적인 지적사안은 올림피아드에 참여한 노래들이 거의 대부분 자연과 새에 대 한 노래나 아리랑 또는 성주푸리 뿐이었고, 사회주의 승리와 소비에트조국, 그 리고 영웅적 노농민 붉은군대에 대한 노래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61

1938년 십월 10부터 31일까지 크즐오르다시 라디오 페스티발이 개최되었다.

이 페스티발에는 크즐오르다 시내에 있는 전체 학교들과 몇몇 생산단체들, 그 리고 성악가와 시인들이 참가했다. 《라스노쁘롬》 알쩰 리가 합창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성악에서는 리 니꼴라이(조선극장 배우)가 1등, 최운학이 2등을 차지 했다.62

강제이주 직후라 하더라도 고려인들은 기본적으로 소비에트 시민으로 간주되 어 소비에트 당국에서 실시하는 복지 혜택을 여타 민족들과 동일하게 누렸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임신을 할 경우 산전 및 산후에 1개월씩 노력동원이 면제 되었다.63

60 《레닌의 긔치》 34호. 1938. 8. 22. 4면. “도라오는 국제청년날과 레닌 꼼소몰 20주년에 주 는 선물 - 단편소설 현상모집”.

61 《레닌의 긔치》 51호. 1938. 10. 16. 3면. “주적 예술올림삐아다”.

62 《레닌의 긔치》 59호. 1938. 11. 12. 3면. “라지오 페씨왈의 총화”.

63 《레닌의 긔치》 18호. 1938. 7. 6. 4면. “한심천만한 로력동원”.

소비에트 여성들은 다산을 할 경우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예를 들어, 구리예브주 박싸이 구역 《빠울롭까》콜호즈에 사는 전옥은 7명의 자녀를 두어 아이 많은 어머니에게 주는 보조금 4천 루블을 받았다. 그녀는 그 돈으로 젖소 와 돼지를 사고 나머지는 자녀들의 학비로 지출했다.64 《레닌기치》는 이와 같 이 여성들이 정당한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할 경우 이를 도와주기도 했다. 1938 년 9월 10일 기사를 보면 까르막치 구역에 사는 최 옐레나가 보조금을 지불받 기 위해 《레닌기치》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는, “아이 많 은 어머니들을 방조함에 대한 쎄쎄쎄르 인민위원쏘베트의 1936년 륙월 26일 결 정의 기초우에서 나는 아이 7명이 있는 여자로서 국가로 붙어 1936년 륙월 26 일-1937년 륙월 26일 일년치 구제금 2,000루블리를 받앗다. 그런데 맞으막 아이 가 1933년 십일월 7일생으로 1938년 십일월 7일에 가서야 5세되기 때문에 1937 년 륙월 26일-1938년 륙월 26일 일년치의 구제금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다. 그런데 까르막치 구역 인사등록부에 가서 알아본즉 이제는 보조금 받을 권 리가 전혀 없다하기에 이에 대한 사실을 귀신문사에 쓰면서 이 문제를 상당하 게 해결하도록 돕아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레닌기치》에서 크즐오르다주 검 사국과 까르막치 구역 검사국에 문의하여 답장을 받은 결과 최옐레나는 1937-1938년치의 구제금을 받게되었다.65 이 편지와 기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 는 사실은 소비에트정부가 1936년 6월 여성들을 위한 복지정책의 하나로 아이 를 많이 낳은 여성에게 보조금을 지불했다는 사실과 고려인들도 동일하게 그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다양한 방식을 통해 혜택을 찾기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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