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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화

1) 중문리의 역사적 배경

이 마을의 설촌은 1586년(선조 19)에 장사랑(將仕郞)겸 羅州訓導였던 정붕(鄭 붕)이 속칭 ‘웃터’라고도 하는 ‘군물동산’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온 다. 설촌 당초 이 마을은 물이 귀했는데 지나던 중이 샘 자리를 가리켜 주어 거기를 파서 샘을 얻고 그 때문에 ‘중물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나중 중 문리가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중문리의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또하나의 설이 전해온다. 지세를 정 찰하던 한 선비가 이 마을 북쪽 5㎞ 지점의 ‘녹화지’에 이르러 마을을 내려다 보는데 마을의 형상이 붓과 벼루 가운데 놓여 있는 책과 같다 해서 ‘중문’이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보면 녹화봉은 붓이요 속 칭 ‘베릿내 오름’인 성천악은 벼루 형태라는 것이다.

과거 이 마을을 낀 천제연에서는 원이 있어 이곳에서는 임금님께 바칠 공마 를 길렀다고도 전해온다. 또 천제연 서북쪽 3㎞지점에는 ‘창남동산’이라는 곳 이 있는데 여기는 무사들이 활을 쏘던 장소라 전한다. 중문리라는 명칭은 1914년부터 사용돼 왓다. 1927년 3월1일 좌면공립보통학교로 시작한 이 마을 의 교육기관인 중문국민학교는 당초 천제연 상류에 있다가 1941년 2월 현위 치로 옮겨졌으며 1949년 12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학교에는 중문뿐 아니라 대포․회수․색달 등 주변마을의 학생들도 취학하고 있다.

하원리의 설촌은 마을 북쪽 산 기슭에 현재 복원중인 법화사의 건립과 비슷 한 시기로 보인다. 이 사지의 발굴로 그 설립 연대는 대충 元이 제주 통치 시 기인 1273년 이후 100년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절이 지어질 무렵 마을 상류 인 영실의 불래악(볼래오름)에도 절이 있었고 法井에도 사찰이 있었다.

구전에 따르면 불래악 사찰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上院이라 했으며 法井岳

사찰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中院, 그리고 현재의 법화사 일대를 下院이라 했 는데 지금의 마을 이름 河源도 그 下院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 下院이란 이름은 1850년까지도 계속돼 오다가 마을 주위에 法華水, 源頭水, 통물, 큰이 물, 개상골 등 샘이 많다고 해서 河源이라 고쳤다는 것이다. 마을 주변에는 오래 전부터 ‘許哥동산’, ‘呂哥밧’, ‘黃哥밧‘, 文哥우영’등 성씨와 관련된 지명들 이 보여 이 시대에 이런 성씨들이 여기 거주했음을 미뤄 알게 하고 있다.

이후 조선조 중엽인 1645년에는 安씨와 姜씨가 이 마을에 와서 정착했다 하 며 安씨는 당시 속칭 ‘여가빌레’서쪽에 자리를 잡았었다고 전한다. 마을 설촌 의 연원이 되었던 법화사는 설립 수 여러 가지 곤경과 변화를 겪는다. 발굴 과정에 이 절의 대웅전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한꺼번에 쓰러뜨려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1702년 제주목사 李衝선이 당 오백, 절 오백을 부술 때 이 절도 훼철됐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후 226년이 지난 1928년 봉려관 스님이 이 자리에 소규모의 절을 세웠으 나 다시 1948년 4․3사건으로 없어지며 1950년에는 모슬포 소재 제2훈련소와 제3숙영지로 징발되어 주위 일대가 훈련장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그 후 1955 년 이 자리에 다시 사찰이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 동안 발굴작업을 펴온 당국은 1987년 3월, 발굴된 대웅전 자리에 복원작업을 시작하는 한편 1990년에는 연지도 발굴한 바 있다. 1797년 이 마을의 통계는 24개 성, 10통 50가구 228명이었으며 1980년에는 359가구, 1,609명으로 집계된 바 있다. 그 동안 마을의 주업은 농업이었으며, 한때 마을 북쪽 목장지대인 ‘너른냇도’ 등 에는 화전민들이 거주했던 듯 아직도 그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산업은 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감귤 일변도로 바뀌었다가 80년대 초부 터는 파인애플과 바나나 등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했었다. 마을의 목장지대는 조선시대에 는 8소장이었으며 지금도 법화사 서남쪽 700m 거리를 ‘點馬廳’이 라고 부르는데 공마를 점검하던 곳으로 보인다.

1800년대 말게부터 한학이 융성하여 최성기에는 5-6개소의 서당이 있었으며

문인 활동인 瀛州吟社 활동을 편 바도 있었다. 이 마을의 아동들은 해방 후 까지 도순 국민학교에 통학을 하다가 1969년 9월에 도순교 하원분교장이 개 교되고, 이후 1970년 6월에는 하원국민학교가 설립 인가되어 1984년 신학기 이후 7학급을 운영하고 있다.

회수리의 옛이름은 ‘도래물’이다. 이 지명에서 마을 사람들의 물에 대한 갈망 을 읽을 수 있다. 지금도 회수리 서쪽 ‘섯못동네’에서는 오래 묵은 기와 파편 들이 나오는데 1732년 중문리로부터 20여 호가 이 마을로 이주해 올 당시에 는 여기 고승과 선비들이 모여들어 그 분위기를 좇아 왔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 마을은 하원리의 법화사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그 분위기가 전래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당초 이름은 上文里였다가 道文里를 거쳐 현 재의 廻水里로 바뀌었다 한다.

처음 입주한 성씨는 李씨인데 조선조 正祖시대에 大浦里에 살다가 잃어버린 소를 이 마을에서 찾았으므로 이주해 왔다고 하며, 그 후 그의 인품을 추앙하 던 사람들 50여 세대가 따라 올라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1948년 4․

3사건으로 다시 대포리로 이주했던 이 마을 사람들은 사건이 진압될 무렵 계 엄사령부의 집단마을 형성 계획에 따라 대포리의 27세대를 포함 128동이 옮 겨와 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이후 이 마을은 지역적으로 소외되는 듯 했으나 1975년 제2횡단도로가 개통되면서 이 길이 마을 복판을 관통케 되어 소통이 원활해지고 개발의 속도가 빨라졌다. 한편 대포리의 설촌은 지금으로 부터 450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原州元씨 15세 손이 이 마을로 와서 포 구 근처인 ‘절터왓’과 ‘동골왓’ 일원을 근거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지금도 동골왓일대에는 대나무와 양하들이 돌담 굽에 자생하고 있고 정주목과 주춧돌의 파편들도 보인다. 그 후 이 마을 에는 朴씨, 李씨, 金씨들이 이주해오게 되며 이씨는 당초 지금의 포구 동쪽 1

㎞쯤 떨어져 있는 속칭 ‘소동이터’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전해온다. 마을이 현 위치로 이주한 것은 朴씨가 먼저이며 그 후 李씨, 任씨, 金씨 들이 옮겼을 무

렵 큰개(大浦)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전한다. 이곳에 이주해왔던 이씨 중에 는 나중 회수리로 옮겨가 그 마을을 설촌한 사람도 있다.

‘大浦’란 마을 이름은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사용돼온 듯 1807년에 작성된 이 마을의 호적도 ‘大浦里 戶籍 中草’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마을 이름이 ‘큰 개’인 것은 마을 동쪽 바닷가의 포구가 과거에 이 인근의 큰 포구 역할을 했 기 때문으로 짐작되며 일설에는 과거 貢馬를 하던 포구였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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