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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다만 기존 분노 개념에서 포함할 수 없었던 분노의 경지와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바로 감성 자질로서의 분노를 설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제안을 담았다. 물론 여기에서 감성자질로서의 분노란 애초의 분노 감정에서 파생할 수 있는 분노의 표출 양상이나 이형태까지 포괄하는 개념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발분(發憤)’에 주목하였다. 필자는 분노의 대상이 개인적인 경우라기보다는 공공적인 것들에 대한 경우를 특히 발분이라고 가정한 까닭에 그 발현과 이후의 양상까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분함에 대한 감정, 즉 분노가 개인의 일반적인 감정 중의 하나라고 치부하고 보면, 그리고 그에 따른 한 종류로서의 ‘발분’이고 보면, 이 둘을 굳이 구분하여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본고에서 구태여 이를 구분하여 보았던 것은

‘마땅히’라는 용어가 가진 당위성에 있다. 그저 분노를 표출하는 ‘발분’이 아니라,

‘마땅히’ 표출해야 할 분노로서의 ‘발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발분의 대상이 개인이 아닌 사회, 즉 개인적 감정으로서의 분노가 아닌 집단적 감정 나아가 사회적 감정으로서의 분노를 바라보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 아래에서 필자는 우선 몇 개의 텍스트들을 통해 발분의 대상은 대사회적이며, 대국가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발분은 대개 ‘공분’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의 지향은 언제나 정의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발분은 ‘마땅히’ 드러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

드러내지 않으면 발분이 될 수 없고, 발분하지 않으면 개인,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 만들고자 했던 민중의 가치가 무참히 짓밟혀 사라져버릴 수도 있게 된다.

현대사의 무수한 질곡들이 이를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가 발분을 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출(出)’과 관련하여서는 관용이 발분에 다름 아니라고 무조건 단정하지는 않았다. ‘분노의 표출 양상’만을 보자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단순한 분노의 표출과는 달리 발분은 사회적인 반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이 공익적으로 향한다면 발분의 ‘출’은 단순한 표출 양상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의 반향까지를 고려해야 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消)는 해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된 듯 보이는 지점까지를 포괄한 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분노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마치 이미 해소된 듯 표출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을 삭인다.’는 양상과도 비슷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논한 발분의 양상, 즉 봉림대군의 시조에서 이미 그것을 목도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그 해소되지 않고 남은 분은 어디로 가는가? 차마 어쩌지 못하는 혹은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발분의 남은 지점은 무엇이겠는가?’라는

의문을 남겨두었다. 이러한 의문에 관해서는 차후의 연구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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