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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교’나 ‘조선유학’은 조선이라는 시공간에 있었던 유교 혹은 유학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하지만 막상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표현이 없었고, 개항 과 식민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즉, 지칭하는 대상과 다르게 근 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개념사 방법론을 통해 ‘조선유교’와

‘조선유학’이라는 표현의 의미장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 그리고 역 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종교’나 ‘철학’이라는 서구 개념이 번역되어 들어오기 전까지 전통시대의 유교·유학 개념은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유교·유학을 지칭하고 있으며, 근 대의 종교나 학문 개념과 다르게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영역에 걸쳐 있었다.

개항 이후 유교를 국가의 종교로 삼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아직은 전통적인 유교·유학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종교와 함께 나열할 때는 유교라는 표현을 썼지만, 유학이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았다.

1905년 전후 신구학 논쟁 등을 거치면서 학문의 영역에서 전통적 유교·

유학이 배제되면서 그 의미장이 대폭 축소되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철학 개념을 ‘서양의 유학’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으나, 유학이 구학으로 배척받게 되어 근대 학문을 설명하기에 부적합하게 되자 결국 철학이란 번역어가 살 아남게 되었다. 이처럼 근대적 학문 개념이 유교·유학에서 분리된 이후, 유학자들은 유교도 나름의 시의성과 효용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도덕성이나 종교성을 근거로 유교를 종교로 전환하고자 했다. 다만 조선에 수용된 종 교 개념은 ‘문명화 달성’ 노력과 ‘집단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이라는 두 축에 따라 복합적인 의미를 보이고 있다. 이중 유교를 국교로 삼아 서양세 력에 대항하고자 했던 이들은 집단 정체성 유지의 측면을 중시하는 관점에

서 유교를 바라보았다. 또한 종교로서의 유교도 철학과 종교가 일치된 것 으로 보았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성의 형성과 함께 종교-세속의 이분법이 점차 정착되면서 유교 개념의 의미장은 더욱 축소되었다. 결국 근대 학문 개념이 정립되면서 철학의 관점에 조응하는 영역만 ‘조선유학’으로 재구성 되어 갔다.

조선유교라는 표현은 장지연이 「조선의 유교원류」라는 칼럼을 쓰면서 본 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다카하시 도루와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이 망하 게 된 이유에 대해 조선유교 자체보다는 당파싸움을 일으킨 사림이 문제라 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유교연원』을 집필하여 학파의 전개와 이로 인한 당쟁을 서술하였다. 이때 장지연이 사용한 ‘조선유교’라는 표현에 서는 근대적인 종교 개념의 영향을 받아 국교로서 유교를 중시하고 있다는 측면도 보인다. 다만 여전히 전통적인 윤리와 교화의 측면이 강한 전통적인 유교·유학 개념의 의미장과 유사한 면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유학이라는 표현은 학문적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그 시작은 식민지 적 지역학 연구를 위해 일제에 의한 지원 아래서 친일협력유림과 교류하는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유학과 관련된 식민지 계몽담론은 제국주의 담 론에서 조선의 유교망국론을 이용해 사상의 분열과 민족성을 결합시키려고 시도하는 와중에, 장지연이 주장한 주리·주기파의 형성과 당파의 분열을 가져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다카하시 도루의 저작에 나오는 조선유 학이란 표현은 철학 개념을 바탕으로 구축되었으며, 사상의 고착성과 당파 성을 민족성과 연결시키기 위한 식민주의 계몽담론이었다.

이후 조선유교라는 표현은 1920년대부터 서구 개신교를 모델로 하는 종 교 개념과 결합하여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조선유학이라는 표현은 1930년대부터 철학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인 연구

자에 의해 사용된 경우, 식민지 계몽담론의 토대 위에 근대적 방법론으로 조선유학을 대상화시켜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조선유교나 조선유학이 민 족과 연결되는 경향은 사실 근대 이후 ‘조선적인 것’은 스스로를 조선과 비 교해 ‘일본적인 것’을 확립하려는 식민제국의 욕망과 식민제국에서 수행한 연구에 대항해 민족적 동일성을 추구하려는 두 ‘민족’이라는 주체의 욕망이 공모하여 만들어진 표현이다.

이후 조선유교에 관한 담론은 배제되고 과학적, 객관적, 논리적인 틀이 라는 이름 하에 조선유학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유학’ 혹은 ‘한 국유학’이 포괄하는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이지만 조 선유교와 조선유학 표현이 만들어지면서 근대적 종교와 철학 개념 바깥으 로 밀려나 ‘전통’이나 ‘문화’ 등의 개념과 결합하여 모호한 형태로 재영토화 된 ‘나머지’가 더욱 중요하다.

이상에서 ‘조선유교’와 ‘조선유학’ 표현의 개념사적 전개를 정리하였다.

이를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서구의 종교·철학 개념에 전통적인 유교·유학을 놓고 해체시키는 이미지를 상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보면 오히려 중국의 반고(盤古), 인도 의 푸루샤(puruṣa), 바빌로니아 창세신화의 티아마트(Tiamat), 게르만 창 세신화의 이미르(Ymir) 등 오히려 죽음으로써 천지를 창조한 거인의 신화 가 더 적절한 이미지일 듯 하다. 즉, 조선의 유교·유학은 오히려 배제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통해 문화와 전통 등 다른 영역에서 ‘근대성’으로 재구성되 었다고 볼 수 있다.

(논문투고일: 2021.12.12. 심사완료일: 2022.1.11. 게재확정일: 202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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