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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상 안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획득하는 것을 근대화의 사명으로 자임했던 전통 지식인들은 서구 학문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고대 사상 등 다양한 사상의 섭취와 교섭을 통해 이를 성취하고자 하였다. 단지 ‘교유’가 아니라 ‘교섭’을 했다고 보는 이유는 이들이 당시 외적 폭력에 대한 저항과 내적 발전의 도모라는 공동의 시대 과제를 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 과 노력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본 논고에서 살펴본 박한영과 이건방, 정인 보는 근대의 신학문을 접하면서도 각각 불교와 양명학이라는 전통 사상에 충실하였고 학문적 배타성없이 공감과 교섭을 실현한 인물들이다. 박한영 과 이건방, 정인보의 공감과 교섭은 1. 현실인식, 2. 민중인식, 3. 종교인식 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이들의 현실인식은 당시 사회 전반과 과거 지식인들의 문제가 진정 한 자기 계도를 실행하지 않고 형식만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고 이것이 바 로 국권 상실과 문화 퇴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虛學‧虛名

‧假行‧僞行‧無實에 대한 비판과 眞知‧實行의 회복이라는 대안으로 연결 된다. 현실뿐만 아니라 학문 비판과 공부의 핵심을 眞假의 논리로 끌고 가 는 것은 하곡학파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박한영은 불교 승려임에도 이들과

宿과 居士比丘와 男子尼姑의 階差 莫論고 過去佛敎의 殷鑑을 見며 未來佛 敎의 秦鏡을 照야 個個丈夫的 智行을 圓圓正正히 하야 世界海上에 吾佛敎의 眞 慧公德을 頂戴肩荷야 方行實踐 境遇ㅣ면 未來에 黃金時代 卽 佛敎의 全盛 을 謂이라

의 교류를 통해 왕양명을 불법과 세법에 통달한 선비로 보았고, 당시 불교 계 또한 이를 법으로 삼아 僞知僞行, 假戒定慧를 眞知實行, 眞戒定慧로 전환하여 본래 하나인 知行의 一圓相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민중 인식은 애초에 불법의 진정한 증득과 양지의 온정한 주체성 확립에 있어 필수 요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불교의 대승사상은 上求菩提에 下 化衆生을 더하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으며 하곡학에서도 양지가 민중에 감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 불법의 절대 평등 세계에서 一身과 衆生은 무차별한 하나이고 양지 감응, 감통은 좀더 가까 운데서 시작한다는 원리는 있으나 결과적으로 萬物의 一體를 지향한다. 이 런 의미에서 민중은 타자가 아니며 민중 감통도 자기화 된 감통에 해당한 다. 민중 인식과 감응은 박한영, 이건방, 정인보 모두에게 ‘福利’증진을 결 과로 하였다. 이때 민중의 복리는 각각 진리 성취라는 측면의 정신적인 福 利에서 물질적인 福利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박한영의 경우 국가와 사회를 위한 물질적 복리 증진 주장은 불교의 一切皆空 논리와 맞지 않지만, 근대 기 문명화 요구에 대한 현실적 대안과 방편으로 제기될 수 있었고 동시에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민중 감통과 복리 추구의 논 리가 가장 먼저 우리의 역사와 사적탐구를 통한 주체성의 회복으로 이어진 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민중의 주체의식 확립이 복리 가운데 가 장 급선무인 정신적 복리의 첫 번째 실천사항이었다. 박한영에 의하면 본래 불교는 자기 각성이 주이지만, 각성이 일어나는 인생자체가 감각적 세계이 며 敎史와 禪乘, 史蹟을 통해 불도 증득의 길이 열린다. 또한 중생구제와 불교진흥을 위해서는 古蹟과 史乘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정인 보의 경우는 우리 민중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 우리 자신을 알려는 역사‧고 문헌 탐구를 중요하게 여겼고, 이는 조선학 운동으로 이어졌다.

종교 인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섭을 통한 공감형성과는 다른 결과로 박한영과 정인보의 이견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박한영은 다양한 학문을

통섭적으로 이해하면서 불교가 가장 최상승의 종교라고 인식했다. 그가 제 기한 불교 유신은 불교 교리 자체에 대한 유신이 아니라 불교 형식과 불교 도의 유신이었으며, 오히려 불교의 본질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미래지향적 인 대안이라고 여겼다. 정인보는 민족의 주체성 확립에 치중하여 弘益 사 상이 곧 依自와 利他를 동시에 추구하는 조선 얼의 본령이라고 보고 조선 역사와 사상 전반을 조선 얼에 입각해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런 관점을 불교에 투영시킨 결과가 바로 「조선불교의 정신문제」이다. 여기서 정인보 는 依自와 利他에 기반한 救世와 護國이 조선 불교의 근본 정신이라고 하 였다. 박한영은 정인보의 견해를 불교에 대한 완전한 오해라고 일축했고 정 인보의 견해가 당시 민족주의와 군민주의를 지나치게 인식한 결과라고 비 판했다. 그가 평소 친분이 깊은 정인보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당시 불교계에서 護國과 護法을 일치시키고 조선 불교의 특성을 호국불교 로 제시하는 흐름을 비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박한영은 불법의 본질에 동 서고금이 따로 없으며 救世와 護國은 임시적인 방편이고 어쩔 수 없는 시 대적 선택일 뿐이라고 하였다.

불교의 근본 정신에 관한 논의는 정인보의 견해에 대한 박한영의 비판으 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로도 애정어린 교류를 지속하였고 정인보 는 이로부터 4년 뒤인 1939년에 「石顚上人小傳」을 지었다. 그리고 같은 해 이건방이 영면했을 때 박한영은 「蘭谷居士輓」을 지어 애도했다. 근대 기에 새로운 사상적 지표와 현실적 대안을 세우기 위해 어떠한 학문적 당 파성 없이 교류와 토론을 거듭하던 이들의 노력과 우정은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는 현재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 논고는 일제 강점기 전통 사상가들의 통섭적 학문 활동 가운데 불교와 양명학의 교섭,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박한영과 이건방, 정인보의 교류를 살펴본 실험적인 연구이 다. 또 박한영과 이건방, 정인보의 교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문학 및 기행론에 대해서는 아직 고찰하지 못했다. 이들의 결속이 비롯된 詩會

와 문학활동, 기행을 함께한 부분을 연구하게 되면, 이건창을 포함한 한말 문학론과 박한영 문학론의 연계성을 고찰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최남선이 나 이광수, 안재홍 등 더 많은 당대 지식인의 사상교류와 교섭을 검토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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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teractions about Buddhism and Hagok Studies on the Awareness of Reality and Reformation in the Modern Era

1)Kim, Yun-kyeong*

In response to the Western mental culture, traditional intellectuals in the modern period aimed to establish a universal order of civilization while maintaining the identity of traditional thoughts. They sought to draw unique thoughts that can deny the “dependence” and reliance” set by Japan within the ideology and culture of Chosun, as well as a universal mentality that could lead modern civilization in it at the same time. This attempt was shown not only through Western studies, but also through the acquisition of various thoughts and traditional philosophy interactions, such as Confucianism, Buddhism, and other ancient thoughts. The main examples of these aspects are the ideological interactions among Park Han-young, the representative Buddhist monk of the period, as well as Lee Geon-bang and Jeong In-bo, who were scholars of the Wang Yangming School. While exploring new modern academics, Park Han-young, Lee Geon-bang, and Jeong In-bo were devoted to the traditional thoughts of Buddhism and Hagok Studies, and carried out empathy and interactions without mutual academic exclusion.

The ideological interactions among Park Han-young, Lee Geon-bang, and Jeong In-bo can be seen in (1) awareness of the reality, (2) awareness of the people, and (3) religious awareness. Their awareness of the reality is connected to criticisms of the Study of Emptiness, Names of Emptiness, Deceitful Acts, Illegal Acts, and Vanity, as well as the alternatives of the recovery of True Knowledge and Practice. Also, the awareness of the people is a required condition to practice True

* Sungshin University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