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1. 돌 문화의 역사

제주 사람들은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제주도에 유난히 돌 이 많게 보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도가 화산도라는 것과 관련된다. 온 섬이 화산재와 자갈에서부터 큰 암석에 이르기까지의 크고 작은 화산 쇄설물로 덮힌 데다가 주민들이 그 암석을 생활재료로 곳곳에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돌 이 많은 섬에서 살아온 제주사람들이 이뤄낸 문화는 돌 문화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 을 것이다. 제주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제주도 여러 지역에서 선사문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선사시대의 제주사람들의 생활모습은 그들이 구축해 놓은 돌 문화 유적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선사시대 무덤 양식 중 대표적인 것 은 지석묘이다. 그 중에도 제주 지방에는 제주시 오라동. 용담동 등지에 도합 60여기 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석묘 즉, ‘고인돌’

<사진1>

은 고대인의 무덤으로 제주특유의 현무암괴석을 지상에 받친 것으로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1> 지석묘(제주자연사박물관)

또한 제주도 지석묘의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석기로 이루어진 돌그릇, 돌 칼, 돌화살, 돌도끼 등이 그 당시 문화의 모습도 돌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7)‘선돌’(立 石)

<사진2>

은 장대한 돌을 세워 성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과 마을의 액을 막는 구 실로 세워지기도 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분포된 거석(巨石)8)숭배의 흔적물이다.

<사진 2> 가파리 선돌

7) 玄吉彦;「제주와 돌(石)의 문화」, 문화산책, p176∼179

8) 거석숭배(巨石崇拜) : 특정한 타계관(他界觀)․풍양관념(豊穰觀念) 등을 배경으로 하여 거석기념물을 건

립하는 풍습이 일종의 종교적 복합체로서 전파된 것.

사면의 바다라는 자연환경은 해적 및 외세 침입이 잦아 제주의 선인들은 외세에 침 략으로부터 섬을 보호하기 위해 도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성을 쌓아야만 했다. 그 대 표적인 흔적이 ‘환해장성’

<사진3>

이다. ‘환해장성’은 고려원종11년(1270년) 고여림이 진 도에 웅거한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해안선 삼백리에 걸쳐 쌓 은 것인데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현재는 성의 일부만 남아있다.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통신수단의 하나로 오름에 설치된 ‘봉수대’9)의 일종인 ‘연대’

<사진4>

는 제주도의 해안선 곳곳에서 돌로 쌓아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연대는 돌을 층 층히 쌓아 횡력(橫力)을 견딜 수 있도록 축석하였고 연대 위에는 화덕자리가 있다.

이렇듯 제주사람들은 생존과 직결되는 돌로 성을 쌓으면서 제주의 역사적 상황을 극 복하려는 의지가 한데 어울려 지금의 제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진 3> 환해장성(성산읍 온평리) <사진 4> 협자연대(성산읍 고성리)

9) 봉수대 :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

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였다. 봉화는 밤에 피

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도 포함해서 흔히 봉화 라

통칭하였으므로 봉수대의 이름도 봉화의 봉(烽) 자를 따서 여러 가지로 불렀다.

2. 돌 문화와 생활

‘정낭’의 유래는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고 집안에 사람이 있 고 없음을 표시하는 역할도 했다. 또한 돌을 이용해 온돌을 만들었고 집안에서 사용 되는 돌의 쓰임새를 보면 식물성 기름을 짜는 틀인 ‘봉애기’

<사진9>

는 조선시대 18세 기에 사용되었으며 재료는 모두 현무암이다. 뿐 만 아니라 돌은 농산물을 가공하는 도정기구로도 이용했다. 곡물을 찧던 도구들인 ‘남방애(나무)’나 ‘돌방애(돌)’

<사진10>

도 같은 역할을 한다. 나무나 돌을 둥그렇게 파내고 그 가운데를 구멍을 파내어 만든다.

구멍이 만들어진 이유는 곡물이 밖으로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돌로 만든 화 로인 ‘봉덕’

<사진11>

은 위가 넓고 밑은 약간 좁게 장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정으로 파 내어 만들어졌다. 한편 물이 없어 물레방아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을마다 군 데군데 ‘연자매’

<사진12>

를 만들어 놓아야 했는데 곡식의 탈곡 도정 제분을 하는 기구 로 ‘몰방아’라고 불렀던 ‘연자매’는 소보다는 말이 많아 말이 끌었다. 11)

<사진 9> 봉애기(제주대학교) <사진 10> 돌방애(제주대학교)

<사진 11> 봉덕(국립제주박물관) <사진 12> 연자매(성읍 민속마을)

11) 玄化珍;「탐라의 슬기」, 동양산업사, 1987, p100∼103

이것을 만들고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관행이 생겨 나기도 했다. 농사를 짓는데도 석재 농기구가 이용되었다. 돌이 지천으로 깔린 제주 의 밭은 농사를 지어도 흙이 바람에 날아가기 때문에 이를 밟아줘야만 했는데 여기 에는 말과 소를 이용해 밟기도 했지만 ‘돌테’

<사진13>

라는 농기구를 이용해 흙을 다지 기도 했다. 부락 청년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서 들어올리는 ‘듬돌’

<사진14>

은 그 마을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화합적 차원의 돌이다. 제주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검붉은색의 돌담

<사진15,16>

은 고려 때 ‘김구(金坵, 1211-1278)목사’의 「지보집(止潽集)」에 돌담을 쌓은 기록이 있으며, 밭의 경계선을 두기 위해 곳곳에 널려있는 돌을 이용하여 쌓았 다. 돌을 외줄로 올려놓아 위태로워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돌과 돌 사이로 바람이 새 나가기 때문에 농작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돌담은 제주도의 경관의 일부이면서 상 당히 과학적인 것이다.12)

<사진 9> 봉애기(제주대학교) <사진 10> 돌방애(제주대학교)

<사진 11> 봉덕(국립제주박물관) <사진 12> 연자매(성읍 민속마을)

12) 제주도;「제주도 통권 103호」, 제주도, 1999, p177

이것을 만들고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관행이 생겨 나기도 했다. 농사를 짓는데도 석재 농기구가 이용되었다. 돌이 지천으로 깔린 제주 의 밭은 농사를 지어도 흙이 바람에 날아가기 때문에 이를 밟아줘야만 했는데 여기 에는 말과 소를 이용해 밟기도 했지만 ‘돌테’

<사진13>

라는 농기구를 이용해 흙을 다지 기도 했다. 부락 청년들이 힘을 겨루기 위해서 들어올리는 ‘듬돌’

<사진14>

은 그 마을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화합적 차원의 돌이다. 제주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검붉은색의 돌담

<사진15,16>

은 고려 때 ‘김구(金坵, 1211-1278)목사’의 「지보집(止潽集)」에 돌담을 쌓은 기록이 있으며, 밭의 경계선을 두기 위해 곳곳에 널려있는 돌을 이용하여 쌓았 다. 돌을 외줄로 올려놓아 위태로워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돌과 돌 사이로 바람이 새 나가기 때문에 농작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돌담은 제주도의 경관의 일부이면서 상 당히 과학적인 것이다.13)

<사진 13> 돌테(제주대학교) <사진 14> 듬돌(국립제주박물관)

<사진 15> 돌담(성산읍) <사진 16> 돌담(애월읍)

13) 제주도;「제주도 통권 103호」, 제주도, 1999, p177

3. 돌 문화와 신앙

2)방사탑

‘방사탑’

<사진19,20>

은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살과 부정을 막기 위해 마을의 경계나 기 가 허한 곳에 돌을 쌓아놓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탑 위에는 새나 사람 등의 형태 를 올려놓아 재앙을 쫓아 버리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탑을 쌓아올릴 때는 그 속에 밥 주걱이나 솥을 묻는데, 밥주걱은 외부의 재물을 마을 안으로 담아들이라는 의미이고, 솥을 묻는 것은 뜨거운 불에도 끄덕 없는 솥처럼 어떠한 재난에도 이겨내고자 하는 바람에서였다.15)

<사진 19> 방사탑(이호동) <사진 20> 방사탑(산굼부리)

3)산담, 동자석

현상에서의 황폐한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조상의 음덕(陰德)을 통해 가능하다는데 이른다. 조상의 묘소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곤궁한 살림 중에서도 이렇게 ‘산담’

<사 진21>

을 치장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신앙이면서 자손으로서 자신을 주체하려는 노력 의 결과인 것이다. 더불어 무덤 앞에 한 쌍으로 이루어진 석상인 ‘동자석’

<사진22>

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터를 지키는 지신이라 말할 수 있다.

<사진 21> 산담(산굼부리) <사진 22> 동자석(산굼부리)

15) 강창언;「제주민속유적」, 제주도, 1997, p157∼165

4. 돌 문화와 조형 디자인

2. 문화와 조형디자인

디자인은 인간이 태어나 삶을 이루면서 행위 되어졌던 모든 산물에서 볼 수 있다. 이 는 자연을 통한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의․식․주 전반에 어떠한 형태로든 만들어졌 다. 디자인이란 계획을 일컫지만 인간의 본질적 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행위에서 성장 하였다. 제주도의 문화에서도 디자인은 제주사람들의 역사와 삶, 신앙을 통해 많은 변화와 발전을 해왔던 것이다. 제주도의 뛰어난 조형문화 전반에서 이루어진 디자인 의 요소는 삶의 작은 소품에서 정신적인 믿음의 ‘돌하르방’, ‘동자석’등의 조형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돌’이라는 자연소재에서 조형성을 이끌어낸 제주사람들의 소 박한 마음처럼 척박한 제주의 역사 속에 뛰어난 조형문화의 전통을 만들어 낸 것이 다.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옛 것의 표피적인 모방이나 답습이 아니라, 이처럼 독특한 ‘돌 문화’의 섬, 제주도의 우수하고 독특한 문화와 조형의 본질을 재발견,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제주도의 고유한 ‘돌 문화’를 통해 확인 된 우수한 조형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새 로운 조형을 창조하여 더불어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 다고 본다.

<표 3> 문화와 조형디자인

5. 동자석의 조형디자인 연구

2. 동자석의 배치와 기능

‘동자석’은 묘의 앞에 좌우로 한 쌍이 놓여졌으며 권력과 부에 따라 ‘문신석’, ‘무신석’

‘망주석’ 한 쌍이 있는 것과 ‘망주석’과 있는 것, ‘동자석’만 있는 것으로 배치되었다.

조상을 숭배하고 주술적 의의인 ‘동자석’은 제주도 전 지역의 무덤에서 간혹 보여지 는데 ‘동자석’이 있는 무덤 몇 십 기를 종합해 본 바로는 규모가 꽤 큰 무덤에 동자 석이 세워졌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는 벼슬이 있고 부유한 층의 사람의 무덤에 비석 과 함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동자석’과 ‘문․무신석’, ‘망주석’을 나란히 세워서 망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보호하며 후손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도 의미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불교에서는 동자(童子)의 의미를 출가(出家)하기 이전의 20세미만의 어린아 이를 지칭한다. 또한 예배와 제사의 주대상 인물을 보좌하는 존재로 기능을 한 것처 럼 ‘동자석’은 그 무덤의 주인 영혼을 위로하거나 묘지의 수호신 기능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3. 동자석의 분류

‘동자석’을 역사적, 학술적으로 분류 된 것은 없으나 여러 가지의 다양한 형태의 동

‘동자석’을 역사적, 학술적으로 분류 된 것은 없으나 여러 가지의 다양한 형태의 동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