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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에 대한 인식은 선승으로서가 아니라, 풍수지리가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 다. 그러나 도선비문 전기부분은 선승으로 생애가 일관되어 나타나고 풍수지리설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기부분이 끝난 다음에 별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산선문을 이루었다.

풍수도참설과의 관계이다.24) 최유청 역시 이 점을 고려해서 도선 비문 말미에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銘하기를 과거의 모든 부처는 미묘한 법이 있다. 문자로 기록한 것도 아니요, 思修에 따른 것도 아니다. 超然이 바로 眞心을 가리키며 一念이 千劫이다. 오직 우리 국사는 넉넉하게 그 지경에 들어갔다. 잘 배움은 배움이 없는 것이며, 참으로 空한 것은 空이 아니다. 正法眼을 갖추었으니, 4방으로 열리고 6모로 통했다. 오직 그 나머지 餘技로 술법에 뜻을 두었다.25)

이처럼 “오직 그 나머지 餘技로 술법에 뜻을 두었다.”고 말한 것은 도선의 면모는 선승이었고, 풍수지리설은 선종에 부수된 餘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찬술자도 이 점 을 염두에 두었다. 이보다 앞서 찬술된 최응청의 <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及 官誥>에서도 도선의 풍수지리가로서 성격보다 선승의 모습을 찬하면서 나머지 일로 음양을 알았다26)고 표현한 것을 보면 두 찬자 모두 동일한 자료에 근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습득하게 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대사가 옥룡사를 중건하기 전에는 지리산 구령에서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이상한 사람 이 대사의 앞에 와서 뵙고 말하기를,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지가 근 수백 년이 됩니다.

조그마한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에게 바치려 하니, 천한 불법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 다면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 도하는 법입니다.” 하고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대사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가 말한 남해의 물가를 찾아 갔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 형세를 보여주었 다. 돌아본 즉 그 사람은 없어졌다. 그 땅은 지금 구례현의 경계인데 그 곳 사람들이 사도촌

24) “도참설이란 미래에 대한 예징, 예언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李丙燾에 의하면 圖는 미래에 일어날 은밀한 상징, 표징, 신호, 징후, 전조, 암시로써 의의를 가진 것으로 문자나 기호로 표시되는 것이며, 讖은 言변에 참자를 붙인 것으로 참은 細葉의 정구지풀을 뜻하는 글자로 함하여 細言, 徵言, 은어, 장래의 徵驗을 약속하 는 은밀한 말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도참은 그 표현양식이 어떠하든 간에 장래의 사상, 인간생활의 길흉 화복과 성쇠흥망에 대한 예언 징조를 범칭하는 용어로 정리된다.” (양은용, 앞의 책, p.132.)

25) 민족문화추진위, 뺷국역 동문선뺸 9권, 1969, pp.101∼106 인용.

26)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급관고」, 뺷동문선뺸 권 27.

(…묘한 근원을 性海에서 찾아 空門에 막히지 않았고 眞印을 禪林에서 얻어 스스로 묘한 뜻에 통달하였다.

깊고 묘한 것은 이미 佛祖에 지극하였고, 나머지 일로는 더욱 음양학에 정통하였다.…)

이라 일컫는다. 대사가 이로부터 환하게 깨달아 음양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비록 금단 과 옥급의 깊은 비결이라도 모두 가슴 속에 새겨 두었다.27)

여기서 도선에게 풍수지리설을 전수해 준 사람은 세상에 숨어사는 이인이며, 도선이 그를 처음 본 곳은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인 지리산 구령에 머물던 시기이다. 그를 다시 만난 곳은 구례현의 경계인 남해변으로 기록되어 있다. 속세를 떠난 지 수백 년 이 되었다고 하는 이인은 도선에게 大菩薩救世渡人之法인 堪輿術을 전해 받도록 청한 다. 약속한 남해강변에서 이인은 모래로 山川順逆地勢의 형상을 조성해 보이는데, 이 때 도선은 오묘한 원리를 터득하고 풍수설을 남김없이 전수 받는다. <옥룡사비문> 비 음기에는 신인이 나타나 삼국의 형세를 설명해 주고 그 자리에 삼국사를 개창했다고 전한다.28) 산천순역지세란 三國 곧, 한반도의 형상이었으며 여기서 삼국은 신라왕조의 멸망을 상징한다. 삼국이라는 사원명이 후삼국으로 분열하기 전에 지어졌다는 것은 고 려 건국 성립의 필연성을 둘러싼 도선참기의 원류로 파악되므로 삼국사는 도참설의 원 천이 되는 셈이다.29)

그리고 현재의 행정구역명에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사도리는 지리산 남쪽에 위치하여 上沙와 下沙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례 군과 곡성군․승주군의 군계인 섬진강변에 위치한다. 세 군은 고려시대의 구례현, 곡성 현, 승평현의 개칭이기 때문에 비문의 상황과 일치한다. 비문에 의하면 도선은 지리산 에서 내려와 사도리 부근의 강변 모래밭에서 풍수술을 전수하고, 섬진강변에 삼국사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또한 「지리산화엄사사적」에는 도선이 섬진강의 남쪽에 있는 오산에서 주석하면서 천 하지리술수를 통달했다고 한다. 이는 사도리와 연결된 곳으로 이곳에서 풍수술을 전수 받은 뒤, 가까운 오산에 주석하면서 도참술에 정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0) 27) 민족문화추진위, 뺷국역 동문선뺸 9권, 1969, pp.101∼106 인용.

28) <옥룡사비문> 비음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十二年戊寅與神人聚沙劃三國圖處 開創三國寺…”

라 하여 신인으로부터 술수 전수처가 나타나는데, 이곳에 삼국사를 열었다고 전하고 있다.

29) <옥룡사비문>에 나타난 도선의 풍수지리술은 풍수도참으로 볼 수 있다. 도참이란 의미가 앞에서 언급했듯 이 (앞의 각주 21 참조) 미래 예언을 뜻하고 있으며, 도선이 집터를 상점해 준 것 역시 고려 건국을 예언하 고 있어 정확히 표현하면 풍수도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본 장에서 도선 풍수의 성격을 도참이라는 의미 를 부가하여 표현하였다.

도선이 신인을 만나 풍수도참술을 대보살의 구세법으로 전해 받고, 그 곳에 사원을 건 립한 불교적 전개의 의미는 선종의 성격과 맥이 닿아 있다.

선종은 중국에서 성립 당시 사원택지법을 중심으로 풍수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31) 특히 신라의 수많은 입당승들이 선법을 전래한 당나라 말기에 江西之法이라는 陽基을 중시하는 새로운 풍수법이 강서지방에 유행하였고, 신라승이 대부분 이 곳에서 傳心하 고 있었다. 도선의 은사인 혜철이 서당지장을 찾아간 것도 강서지방이며, 지장 문하의 도의(가지산문), 홍척(실상산문)은 귀국한 다음, 혜철처럼 지리산 주변에 산문을 개창 하였다.

도선은 入唐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태안사에 문을 연 혜 철이 남종선과 江西之法의 풍수지리를 신라에 전했다는32) 사실을 볼 때, 그의 법맥을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풍수지리를 접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대당 교통의 중요 한 관문인33) 전남의 서남해안 지역에 새롭게 유입되고 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권 안 에 있었을 것이다. 당시 서남해안은 대당무역에 중요 기점으로, 당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승려들이 드나드는 포구였기에 이곳을 통해 유입된 풍수사상이 도선에게도 영 향을 주었을 것이다.

<옥룡사비문>에는 혜철에게 풍수술을 전수받은 기록은 없다. 도선이 구족계를 받고 운수행각에 나선 이후 혜철과의 왕래 흔적은 비문에 기술되지 않았는데, 만약 비문에 기록된 것처럼 지리산 이인으로부터 감여술을 전수받은 것이라면 앞에서 추측한 혜철 에게 풍수술을 전수 받았다는 것은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히려 혜철을 비롯한 선 30) “求禮縣鰲山 頂有一巖 巖有空峭 深不可側 師嘗住於此 盡天下地理云”, 「지리산화엄사사적」.

31) 이능화 편, 뺷조선불교통사뺸 하, p.252. (재인용; 양은용, 앞의 책, p.127.)

32) 최병헌, 앞의 논문, pp.116∼120. (선종과 풍수지리설과의 관계는 선종 성립 초기부터 밀접하게 맺어져 있 었는데, 당시에 양균송에 의해 집성된 江西之法이라는 풍수지리의 새로운 형법이 선보였다. 이러한 강서지법 은 마조도일의 문하에 유포되었으며, 혜철은 강서지방에 있던 개원사에서 유학을 한 승려로 이러한 풍수의 영향을 그대로 가지고 왔으리라 예측하고 있다.)

33) 당시 서남해안은 장보고가 활약했던 곳으로 대당무역의 관문이었다. 게다가 영산강 하구에 속하는 영암지 역은 지리적 특성상 자유무역을 통해 중국과의 소통이 활발했기에 문화적 여건, 지리적 여건에 힘입어 당시 에 발전된 문화수준과 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해준, 뺷역사속의 전라도뺸, 다지리, 1999, p.65.) 또한 당시 당으로 유학을 떠난 승려들이 이곳을 통해 오고 갔던 흔적을 조사한 자료가 있는데, 이를 보면

승려 현욱, 형미, 이엄, 경유 등이 唐 유학 후 나주 회진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회진은 영산강을 향해 뻗어 내린 능선의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한기문, 「신라말기 도선의 출가와 불교계 동향」, 도선국사 학 술대회발표논문, 뺷공덕과 장엄뺸, 2003, p.367.)

문고승들이 풍수도참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도선의 풍수술은 그러한 풍토아래 싹터서 지리산 부근에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리산에서 도선에게 풍수술을 전해 준 神 人은 박전지가 찬한 「용암사중창기」에는 지리산신으로 되어 있다.34) 지리산신이란 지 리산 일대의 신앙으로 성모천왕이다. 지리산신이 도선에게 풍수도참을 전수했다는 것 은 풍수술이 민간에 보편화된 속신형태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민심의 움직임을 전하 는 참언의 기능을 볼 때, 민간에 존속해 오던 풍수설이 불교신앙과 습합되어 민간에 유포되어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禪風의 새로운 사조는 나말여초의 혼란한 상황에서 새로운 구세이념으로 사회사상의 한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것이 地力과 관련되어, 민심의 응집력을 상실한 신라왕조의 붕괴와 새로운 국가 탄생을 예언하는 곳에 풍수도참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도선 의 생애를 통해서 본 풍수도참은 동요하는 신라말기 사회에 요청된 구세사상의 체계화 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볼 때 도선은 입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풍수도참술을 전해 받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옥룡사비문>의 도선 생애 기록은 선승으로 면모를 강조하고 있지만, 별개 로 구성된 단락에서 풍수술은 餘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도선이 풍수도참술을 접하게 된 과정을 진술하고 있다. 풍수도참술을 전수받게 된 경우는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혜철에게 직접 전수 받았거나, 지리산 아래서 수행할 때 혜철과 같은 선문승려들에게 전해 받았을 경우이다. 당시 선종의 고승들이 모두 풍수술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예측도 가능하다. 둘째는 민간에 전승되던 토 속신앙적 요소인 자생풍수설을 지리산 이인에게 전수받았을 가능성이다. 곧, 신라하대 의 어지러운 상황과 맞물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지향하는 민중의 구세사상과 결합 된 풍수적 요소를 운수행각 중 지리산 인근에서 이인에게 전수받았을 가능성도 추정할 수 있다. 신라하대 동요하는 사회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의식은 도선을 비롯한 많 은 선승들에게 자연스럽게 수용되었고, 이런 시대적 상황은 풍수도참설을 촉발시켰다.

34) 뺷동문선뺸 권 68, 「영봉산용암사중창기」. “昔開國祖師道詵 因智異山主聖母天王客속曰 若創三巖寺 三國爲一 云云 甌嶺異人 卽智異山山神也.” (옛날에 개국조사 도선이 지리산주인 성모천왕이 말한 “만일 삼암사를 창립 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하였는데 구령의 이인은 즉 지리산신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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