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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대토벌 작전과 나주민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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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시종일관 의병을 ‘暴徒’라고 지칭하였다. 의병을 탄압하던 실 상을 전해주는『暴徒에 관한 編冊』·『暴徒史編輯資料』·『朝鮮暴徒討 伐誌』·『全南暴徒史』등 의병을 다룬 일제측 자료집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의병을 ‘폭도’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일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병을 ‘화적이나 도적의 무리와 다름없는 폭력적 무리’로 즉

‘假義’들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럼으로써 일제는 의병 탄압의 명분을 축적하고, 나아가 군경에 의 한 무력행위를 합리화했던 것이다.131) 전기의병 당시 정부는 선유사를 파견하여 의병을 해산하였으며, 이에 불응하는 경우에는 親衛隊와 鎭衛 隊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해산하였다. 그 과정에서 개화파 관리를 처 단한 의병부대에 대해서는 주모자들을 처벌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 가 나주의병이었다.

19세기말 전기의병이 일어났을 때 진압 주체는 조선 정부였다. 따라 서 일본군은 의병 진압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았다. 청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일부가 한반도에 주둔 중이었지만, 그들이 직접 의병 진압에 나 선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132) 당시 일본군은 의병 진압에 나선 친위대 와 진위대의 병참을 지원하거나 군사적 고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 서 전기의병 당시에는 의병들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하는 경우가 그 리 많지 않았다.

후기 의병이 격화되자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일제는 의병을 제 거할 목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선유사를 이

131) 홍영기 앞의 책, 369쪽.

132) 李求鎔 ,「韓末義兵抗爭에 대한 考察 - 義兵鎭壓이 段階的 收拾對策-」,『國 史館論叢』23, 1991, 200쪽.

용한 방법, 귀순활동을 장려한 방법, 일본군을 직접 투입하는 방법, 자 위단을 구성하여 진압하는 방법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907년 8월 이후 후기의병이 크게 확산되자 정부는 다시 선유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전기의병과는 달리 후기의병 활동은 더욱 고조되었 고, 선유사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도 높아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907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선유사를 선유위원이라는 이 름으로 바꾸어 각 도에 파견하였다. 이때에도 정부는 기대만큼의 선유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선유활동과 함께 정부는 의병의 귀순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는 의병의 귀순과 선유사 파견을 짝지어 추 진함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거두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순 활동도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군은 의병 진압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일제가 의병 진압에 대한 주도권을 행 사하는 문제는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즉 일본 閣議는 1904년 5월 말에「帝國의 對韓方針」과「對韓施設綱 領」등을 채택함으로써 군사적 방법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화를 본격화 하였다.133) 이는 식민지화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인 의병을 진압 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이 목표하는 조선의 식민지화 일정에 차질을 가져 오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의병을 진압하려고 했으며 그 대표적인 방법이 군사력 동원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의 군대는 크게 3가지의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 는데, 첫 번째 부대는 ‘韓國駐箚隊’(이하 주차대로 약칭)로 이 부대는 전기의병운동 세력이 약화되어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해산했을 즈음인 1896년 5월 러·일간에 이른바 ‘고무라·웨베르 각서’가 체결되면서 러일

133) 鄭昌烈, 「露日戰爭에 대한 韓國人의 對應」,『露日戰爭前後 日本의 韓國侵 略』, 일조각, 1986, 210~211쪽.

전쟁 개전 당시까지 조선에 주둔할 근거를 갖게 된 부대로 일본군은 스 스로 이 부대의 명칭을 ‘韓國駐箚隊라고 고쳤다.134)

일본군 주차대는 1896년 5월, 종래의 일본군 수비대가 철수하고 평 시편성 1개 대대가 새로 파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은 1년 교대제 로 조선에 와서 머물면서, 공·영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부산과 원산에 각 1개 중대가 분파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京 城에 주둔하였다. 이밖에 일본군 주차대에 소속된 일본군 병력으로 군 병원 및 군용전신 경비 목적인 臨時陸軍電信府와 임시헌병대가 있었 다.135)

1906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본 군경이 적극적인 의병 진압책이 점 차 효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후기의병 기간에는 이미 대한제국의 군 대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의병 진압의 임무는 朝鮮駐箚軍과 헌병대를 비 롯한 일본 군경에 이양된 상태였다.

또 다른 부대로는 기병연대가 있었는데, 1907년 10월초 파견된 기병 연대는 한국주차군 사령군 長谷川好道가 본국 정부에 증원 요청하여 파 견된 부대였다. 이때의 ‘임시기병파견대’는 경성, 조치원, 대구, 전주 등 주로 남부지역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의병 활동 중심이 충청 이남의 남 부지역으로 이동한 탓으로 이에 대하여 기동성이 있는 대응이 필요하였 기 때문이었다. 이후 의병들의 거점 이동에 따라 전라남북도에 배치되 었다가 ‘남한대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대토벌의 임무를 마친 직후인 1909년 11월에 철수하였다.136)

기병연대의 파견으로도 부족하여 한국주차군은 1908년 5월 병력의

134) 홍순권,「한말 일본군의 의병 학살」,『제노사이드연구 제3호』, 2007, 135 쪽.

135) 홍순권 앞의 논문, 137쪽.

136) 홍순권 앞의 논문, 138쪽.

증파를 본국에 다시 요청하여 보병 2개 연대를 더 지원받았다. 그중 1 개 연대인 제7사단 27연대는 원산에 상륙하고, 다른 1개 연대인 제6사 단 23연대는 마산에 상륙하여 각각 북한 지역과 남한 지역의 의병 진 압 병력을 보강하였다.137)

일본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헌병과 경찰 병력을 증가하여 1906년 일본의 한국주차헌병대 병력은 1,162명으로 증가되었고 이들이 2,679 명의 경찰을 보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1907년에는 헌병을 2 천 명으로 두 배 늘리고, 경찰도 4,952명으로 늘려 1908년에는 다시 헌병을 6,608명으로 3배 이상이나 더 늘리고 경찰은 4,991명 선을 유 지하였다. 일본군은 이 밖에 의병 진압을 위해서 1908년 6월 조선인 헌병보조원 4천여 명을 모집하여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삼았다.138)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마을마다 이른바 자위단을 조직하게 하고, 일본군과 경찰이 의병을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 동원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자위단 조직은 이후 활동 실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주민들의 비협조로 유명무실해지고 만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지역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위단 조직에 비협조적이었 으며 오히려 자위단에 속한 사람들이 의병과 긴밀히 협조하는 모습도 보이며, 이들은 나주 군민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일제에 저항하였다.139)

1908년 3월 이후 의병과 한국주차군 등의 충돌이 급증하였다. 특히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북도와 호남지방에서 잦은 충돌이 일어난

137) 유한철,「일제‘한국주차군’의 한국 침략과정과 조직」,『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2, 160쪽.

138) 유한철 앞의 논문, 148~149쪽.

139) 배항섭 앞의 논문, 227~230쪽.

것을 알 수 있다. 여단병력과 기병대를 파견하고 헌병을 증원했지만 그 다지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군의 의병진압 방식 또한 매우 잔혹하였다. 그들은 의병들을 발견하면 닥치는 대로 무 자비하게 살해하였으며, 의병들의 거점이 될 만한 장소는 그곳이 일반 촌락이냐 사찰이냐를 가리지 않고 방화하고, 의병이나 의병활동을 방조 한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주민까지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은 채 무차별적 으로 학살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부록] 나주출신 의병 명단에서 보이 는 것처럼 나주지역에서도 많은 전사자가 나오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 다.

이러한 일본군의 대응방식은 이제까지 관망하면서 의병에 가입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까지 의병에 가입하게 만들었다. 결국 의병 탄압은 또 다른 의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통감부와 한국주차군 관계 자들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열린 회의 가 1908년 5월 2일의 統監府會議였다. 이 회의에서는 의병투쟁에 대한 종합 대책이 논의되었다. 회의 직후 나온 첫 조치는 병력을 다시 증강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치는 以夷制夷 戰略의 일환으로 채택된 憲兵 補助員制度였다.140)

물론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의병투쟁이 왕성해지자 일본군 은 꾸준히 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가령 1908년 2월 지리산 일대의 의 병을 대상으로 제2연대장의 지휘 아래 경남의 일본군 병력이 작전한 경우, 2월 21일부터 5일간 제2연대장의 지휘 아래 영광, 장성, 고창, 태인, 정읍 일대에서 벌인 제2대대의 작전, 기병대가 2월 23일부터 3 일간과 4월 19일부터 15일간 전남의 서남부와 남서부 일대에서 벌인

140) 신주백,「湖南義兵에 對한 日本 軍·憲兵·警察의 彈壓作戰」,『역사교육 8 7』,2003, 225쪽.

작전, 9월 30일부터 고부에 주둔한 기병대가 나주일대까지 남하한 작 전, 12월 1일부터 10일동안 제38관구 헌병대가 광주, 장성, 담양, 옥 과, 창평, 곡성 일대에서 벌인 작전, 같은 달 14일부터 영산포 헌병분 대가 管區地域에서 8隊 縱隊로 벌인 작전, 같은 시기 3隊로 나뉜 광주 수비대가 광주, 선암, 사창, 장성, 함평 등지에서 2주 동안 벌인 작전 등을 들 수 있다.141)

그런데 군, 헌병, 경찰의 작전에도 불구하고 호남지방 의병이 크게 위축되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다음 세 가지 점도 뺄 수 없다. 먼저, 한국주차군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당시까지 중부지 방의 의병투쟁에 비해 호남의 의병투쟁이 조금 덜 활발했기 때문에 호 남의 군병력은 기본적으로 적었다. 또 전남은 도로사정이 나빴기 때문 에 탄압작전의 효율성이 다른 지방에 비해 그만큼 떨어졌다.

두 번째 한국주차군의 작전상의 한계다. 의병의 입장에서 작전이 벌 어지는 공간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거나 다른 곳으로 잠시 이동하면 그 만이었다. 때문에 작전을 통해 의병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작전 구역에서 의병을 쫓아버리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호남의병의 특징이다. 호남의병은 경기 도, 강원도, 충청도에서 일어난 주요 의병부대와는 달리 대한제국 군대 의 해산병과 직접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호남의병은 출신지역을 중심 으로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는 부대가 더 많았다. 또 안규홍 부 대처럼 대오내에서 양반과 천민 사이의 신분적 갈등이 없는 경우도 있 었으며, 비록 느슨한 형태이지만 부대간의 연계를 유지한 채 연합투쟁 을 벌이기도 하였다.142)

141) 李一龍譯,『秘錄韓末全南義兵鬪爭史』,全南日報社, 1977, 36, 43, 61, 66, 70

~ 71 ,76, 79쪽.

142) 신주백 앞의 논문, 232~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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