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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이란 낱말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분위기는 모든 것을 공허하게 만들어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니힐 리즘은 오히려 염세주의에 가깝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니체의 니힐리즘 개념의 고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니힐리즘이 단순히 허무주의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니체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니힐리즘은 염세주의에서 시작해 불 완전한 니힐리즘을 거쳐 완전한 니힐리즘에 이르기까지 그 양태에 있어 여러 모습 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종류의 니힐리즘은 단순히 그때마다 나타나는 하 나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가 일련의 흐름 속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하나의 과 정 내지 역사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되는 니힐리즘은 완 전한 니힐리즘의 단계에서 가치의 전환을 통해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 니체의 철학은 이러한 니힐리즘의 극복을 시도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니체의 시도가 니힐리즘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 각한다. 하이데거는 그 이유를 니체의 근본사상이라고 파악한 ‘힘에의 의지’개념에 서 찾는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니체는 니힐리즘을 최고가치의 가치붕괴 과 정으로 파악했으며, 가치는 생성 속에서 삶의 유지와 향상을 위한 제 조건을 정립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때 가치가 정립될 수 있는 바탕인 ‘생성’은 하이데거가 볼 때 힘에의 의지의 다른 말일 뿐이다. 즉 니체의 가치정립의 원리는 ‘힘에의 의지’를 근거로 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가 갖는 성격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존재자성의 의미를 지닌 ‘존재’로 파악한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는 데카르트에 의해 정초된 주관성이 그 극단에까지 사유된 것이라고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니체에게 새로운 인간상으로 등장한 것이 ‘초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니체의 형이상학의 본질이다. 즉 서론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니체의 주요개념 다 섯 가지는 하이데거의 해석에 의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니힐리 즘 개념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개념들이 얽혀들어 체계적으로 해석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가 니체의 니힐리즘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도달하는 결론은 니체철학이 ‘힘에의 의지의 무조건적인 주체성의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니체의 사상을 탈형이상학적으 로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지만, 우리는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을 통해 근대형이상학

뿐만 아니라 플라톤 이래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접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니체철학이 주체성의 형이상학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다. 우리 가 이미 본 것처럼 니체는 그의 저서 곳곳에서 자아나 주체개념을 비판하고, 또한 이러한 비판의 대안으로 ‘몸’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니체의 철학을 주체성의 형이상학에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 나 우리가 어느 한 철학자의 언어에 구애돼서 그 철학자의 사상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을 것이다. 니체의 주장이 정당해 보이 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펼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좀 더 비판적으 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을 살펴보는 것은 니 체철학을 좀 더 심도있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두 사상가 사이 에 대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해석은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던 ‘생 각하는 나’,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대해 깊이 숙고 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본고의 제3장과 제4장 1절 및 2절의 내용에서 니체의 데카르트 해석이 정 당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코기토 명 제해석이 데카르트에 대한 오해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즉 코기토 명제는 하나의 추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명제는 오히려 ‘근본명제’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해석이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한 해석이다. 니체의 데카르트 비 판을 통해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었으며, 또한 우리 가 자명한 것으로 여겼던 ‘나’에 대하여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열렸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제시했던 코기토 에 르고 숨은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영향력 있는 명제로 남아있다. 그 명제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코기토 명제는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원리’ 내지 ‘근본명제’로 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니체가 근대 철학이 이룩해 놓은 여러 성과들을 어떤 면에서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철학이 근대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해 석처럼 니체철학은 전통 형이상학의 끝에 도달한 채, 그 마지막 수단으로 가치의 전환을 통해 니힐리즘의 극복을 시도하였으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체성이 최고조 로 강화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자기 자

신도 모르게 동일한 것 속으로, 즉 전통 형이상학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러한 니체해석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의 도식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 는 니힐리즘의 원인을 존재망각에서 찾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의 물음이 소위 ‘존재-신-론’이라는 점에서 잘못을 범했다고 본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존재망각의 역사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오늘날 니힐리즘의 역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회상하고 회 복하는 것만이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존재의 의 미를 묻는 물음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형태로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존재물음을 통해 ‘무’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존재 자체의 경험도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봤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근 대철학에서의 ‘생각하는 나’, 즉 ‘주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현존재’로 존재할 때 가 능하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을 주체로 설정하고 세계를 대상, 즉 객체로 설정하 는 인식 방식에서는 진정한 존재물음을 수행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분법 적인 도식 구조를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 한 가 운데에 던져진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퓌시스의 열린 장에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 울이며, 사유를 통해 존재의 언어에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러나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우리 역시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존재’라는 낱말의 막연함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막연함 때문에 그의 철학은 신비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사유 의 도상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할 수 없기에 때로는 신비주의적인 것을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언급했던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존재의 의미를 천착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니힐리즘을 극 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