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동서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38) 1964년 케네디 정부 는 미국이 한일국교정상화 노력이 갖는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것이 동북 아의 평화에 기여하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한국은 안보와 정치적 안정 및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여전히 미국 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실정이었으며, 일본 또한 외교 정책 37) 김용호, 앞의 논문, p .19.
38) 1960년대 초반에 동서긴장을 고조시킨 사건들로는 미국의 U-2기 사건 (1960), 피그만사건 (1961), 베를린 위기 (1961), 쿠바미사일 위기 (1962)등을 꼽을 수 있다.
의 핵심은 미일관계의 발전여부 속에서 대체적인 맥락이 형성되고 있었 다.39) 이러한 상황에서 1951년 10월 20일 이래 모두 7차례에 걸쳐서 진 행된 한국과 일본의 공식회담은 결국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 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이 조인되면서 그 결실을 맺었다.40) 한일 조약이 조인되자 북한은 다음날인 6월 23일 공식성명을 발표하여 금번 박정희정권과 일본국간의 체결된 조약과 협정들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군 사동맹 조약을 위한 음모책동의 일환 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을 저해하고 조국의 분열을 고정화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 이러한 제협정은 무효임을 거듭 주장하였다.41)
북한이 이 협정을 반대한데는 크게 보아 서로 수준이 다른 세 가지가 있었다. 먼저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민족과 일본의 화해작업이 한 민족의 반쪽을 이루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 일방과만 이루어져서는 아무 런 의미가 없다 는 것이었다. 북한이 한일협정을 반대한 더 현실적인 이 유는 이 조약 제3조에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 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즉 북한의 존재를 일본이 국제조약 속 에서 부정한 것이다. 북한이 협정을 반대한 가장 낮은 수준의 구체적인 이유는 대일청구권 문제와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 및 한일어업협정문 제 등이었다.
대일청구권의 경우 同조약 제3조에 따르면 형식 논리적으로 볼 때 북 한의 대일청구권은 자연 소멸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날 난관에 부딪힌 북한경제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 대일청구 39)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압력에 대해서는 강량,「현대 한국과 일본
의 외교정책」(서울: 예진, 1994), pp .57~58참조.
40) 한일회담에 관해서는 성황용, 「일본의 대한정책」(서울: 명지사, 1981) p p . 180~275참조.
41) 노명준, 북한의 대・미일 외교 ,「북한 외교론」(서울: 북한연구소, 1976). p .276.
고준석, 「북한 현대사 입문」(서울: 함성, 1990).pp .208-217
권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고있는 조일수교 협상 에서 핵심의제의 하나로 올라있다.
또한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에 관련한 경우 이 협정은 재일교포의 영주권과 한국국적을 연결 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당시 친북 태도가 강했던 재일교포 사회에 대하여 북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 었다.4 2)
이와 같이 한일협정과 당시의 긴장된 동북아정세43) 는 북한이 격앙된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후 1971년경까지 북한은 공식적으로 한 일협정의 파기 없는 조일수교를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외의 정 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일관계는 꾸준히 확대되어 갔다.
1965년 8월 22일 일조무역회와 북한의 조선무역촉진위원회간에는 일 본가 북한 양국상사간의 상품거래에 관한 일반조건 협정을 체결, 연불 조건에 의한 무역이 시작됐다. 연불조건 무역은 수출은행융자가 적용되 지 않아 일본기업들의 금리부담 문제가 걸림돌이 돼 2년 정도밖에 시행 되지 않았지만 당시 북한도 7개년 계획(1961~67)으로 본격적인 경제건 설에 나설 시기여서 일본과 북한의 경제협력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 었다.44) 예컨데 북・일간의 무역추이를 살펴보면 한일협정의 여파로 양 국관계가 극도로 약화되었던 1966년을 제외하고 양국간의 무역은 꾸준히 증가해서 1971년에는 1964년에 비해서 87%가 증가한 5천9백만 달러에 달했다. 한편, 한일협정 기본조약 제3조에서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 법정부로 인정하였지만, 그것은 국제연합결의 제195호45) 에 명시된 바와 42) 1984년 현재 등록된 재일교포 67만명 중 남한국적은 약42만명 이며 북한은 약
25만명이라는 사실이 역전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43) 당시 동북아의 긴장 요인으로는 월남전 확전, 중・소 분쟁 및 중・소 갈등 등을 지적할 수 있으며 이는 북한에게 위기 의식을 고조 시켰다.
44) 오대영, 앞의 논문, p .53.
45) 유엔총회 결의 195호의 내용은 1948년 12월 12일에 채택된 것으로 대한민국은
같이 라는 한정구를 사용하여 북한정부를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한일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제3조의 전문 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III) 호에 명시된 바와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 다. 그런데 제3조의 해석에 따라 양국의 입장은 크게 달라진다. 한국측은 이 조항을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해석하여 일본과 북한 과의 관계를 봉쇄하려는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나 일본측은 한국은 군사 분계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아니다 라는 것이다.46) 이와 같이 일본이 남한의 반대를 무릎쓰고 이 조약의 적 용범위를 남한에 한정시키고 북한과의 관계를 백지 상태로 남겨둔 것은 남북한의 평화공존시기나 통일의 시기에 대비하여 북한에 대해 정치적 배려를 한 것이며,4 7) 일본이 추구하고 있는 2개의 한국정책 의 한 단면 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데, 이시기 일본과 북한의 관계는 일본과 남한 의 관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특히 이 관계는 1965년에 체결 한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의 규정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일관계는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된 이후 1971년경까지는 무역거래 이상의 수준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38도선 이남의 지역에서 유일의 합법정부 라는 것이다.
46) 이병승,「일본이 가는 길」(서울: 나라, 1992), pp .318~319참조.
47) 김용호, 앞의 논문, p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