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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오(楊照)의 「연화(煙花)」

이것은 20년 전쯤의 일이었다.

근처는 오후가 되면 유난히 조용해졌다. 맞은편에 연구소가 하나 있고 길을 건

너면 언덕들이 점차 눈에 들어오며 나무들이 들쭉날쭉하다. 예전에 상사수(相思 樹)75)가 몇 그루 있었는데, 인근 주민들이 속속 베어내 화로에 태워 버리고 말았 다. 그릇만큼 굵고 쓸모없는 나뭇가지만 버려져 잡초가 가득한 진흙 땅바닥에 흩 어졌다. 오래 세월이 지나 생긴 작은 오솔길들이 잡초와 나무 사이에 끼워져 있 었다.

올해는 겨울비가 예년보다 늦어져, 며칠 동안 겨울철에 보기 어려운 맑은 날씨 가 계속되었다. 정오가 지나 인근 초등학교에서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려 주변은 조용해졌다. 연구원들은 가끔 연구실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들은 급히 걸어 다녀서 자갈길을 밟을 때 항상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땅을 바 라보거나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하늘의 구름은 늘 뿔뿔이 흩어져 공중에 널려 있었다. 산비탈의 방향에서 보면 높이가 다른 굴뚝이 세 개가 나란히 우뚝서 하 늘과 가깝게 보였다. 사실, 근처에는 곳곳에 굴뚝이 있는데 단지 그 세 개가 유 난히 도드라졌을 뿐이었다. 쨍쨍한 햇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와, 정확한 거리 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오른쪽의 굴뚝이 좀 더 멀리 떨어졌다는 것만 알고 있었 다. 석회를 다시 칠해서 해가 떨어진 다음에야 작업이 시작되었다. 왼쪽의 두 굴 뚝은 하루종일 멈춘 때가 거의 없었다. 가장 높은 굴뚝은 골고루 뿌연 연기를 내 뿜고 있었다. 바람이 없을 때는 연기가 끊기지 않고 높아질수록 가늘어져 쭉 구 름 사이까지 올라가 구름인지 연기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굵직하고 낮은 굴뚝은 불규칙적으로 한 덩어리씩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황갈색의 짙고 탁한 연기는 소 리 없이 좌우로 흩어졌다.

연구소 주변의 나지막한 집에서는 가끔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와 아기가 우 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맑은 날씨 때문에 멀리서 들려와도 소리가 뚜렷하고 부드럽고 섬세하며 마치 햇빛에 반사된 것 같았다. 유일하게 아스팔트가 깔린 길 에서 사람이 지나자 강아지가 바로 소리를 지어 골목에서 쫓아 나왔다. 멀리 있 어서 그런지 강아지가 날카롭게 짖는 소리와 온몸이 움츠러드는 동작의 박자가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75) 역주: 학명(Acacia confusa) 콩과 식물이다. 동남아시아가 원산지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들 이 타이완 전 지역에 널리 재배한 식물로 타이완 초기에 잘 알려진 식물 중 하나이다. 상사수는 홑잎이고 대부분은 가로수는 심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상사수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담겨 있으며, 슬픈 사랑의 상징이다.

어느 중년 남자가 달구지를 끌고 길옆을 바짝 붙어서 걸어왔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멈추고 차의 받침대를 내려놓아 달구지를 길거리 세운 채 “참외, 토마 토…” 소리를 외쳤다. 머리 위에 있는 삿갓 모자를 벗고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피치76)를 칠해서 노랗게 된 전봇대에 기대거나 다른 집의 울타리에 기대고 있었 다. 모자를 아래위로 20번쯤 부치다가 방충망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 음 골목을 향했다. 이런 시기에 과일을 사서 먹는 것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일이 었다.

여자는 보통은 과일을 파는 사람이 올 때까지 잠을 잤다. 임대한 집의 창문은 마침 골목 입구와 맞닿아 있어서, 세수하고 나서도 늦지 않을 경우는, 쫓아가서 제철 과일을 몇 개 사서 점심밥 대신 먹곤 했다. 그녀가 샤워하고 집에서 나올 즈음에는 해가 많이 기울어졌다. 그녀는 늘 옷깃이 작고 양쪽에 단추가 달린 낡 은 코트를 입는다. 엉덩이를 살짝 덮은 나일론 재질이다. 그녀는 연구소 동쪽의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다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연구소에 들어가 잔디밭과 인 적이 드물고 오래된 집 두 채를 지나 정문으로 나왔다.

언덕을 올라갈 때 햇빛은 비스듬히 왼쪽에서 내리쪼이고 긴 그림자는 땅바닥 이나 나무줄기에 떨어져 비스듬히 움직이고 있었다. 고갯마루의 나무 아래에 수 많은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모두 서쪽을 향해 쭉 늘어놓여져 있었다. 분명히 사람들이 아침에 여기에 옮겨 놓아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돌덩이는 완전히 저녁의 노란 노을빛에 노출되어 흐릿한 빛을 반짝이 고 있었다.

여자는 고갯마루의 꽃이 활짝 핀 양제갑(羊蹄甲)나무에 기대어 유유히 땀을 식 히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보통 5시 이후에 사방팔방에서 나와 정문을 향해 밖으 로 나갔다. 날이 어두워져 비슷한 모습들이 두루마기인지 양모 코트인지 구별할 수가 없는 옷에 감싸였다. 바스락거리는 발소리와 말소리를 섞은 채 인파가 정문 에서 사라졌다. 이때 보통 한 사람만이 언덕 쪽으로 걸어오곤 했다. 겨울옷을 입 었는데도 엄청 말라 보였다. 노을의 빛 속에서 그의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

76) 역주: 석회수(Lime water)이다. 석회수는 중국에서 겨울이 되면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나무 들이 쉽게 갈라져지는 바람에 보호해 주기 위해 칠하는 것이다. 또는 석회수는 살균, 살충의 효 능이 있어서 병충해를 방지해서다.

고 걸음마다 차분하게 걸어왔다. 그는 매우 침착하게 걷는다. 슬로모션을 보는 것처럼 발걸음마다 끊긴 듯하면서 그렇지 않은 동작이 몇 단계로 정확하게 구분 할 수 있었다. 움직임 때문에 코트가 살짝 무릎 위로 들어올려졌다. 그는 항상 머리를 살짝 들어 발가락으로 타진하는 듯 먼저 땅을 닿아야 발바닥과 발끝을 확실히 내려 땅을 밟았다. 그 와중에 해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서인지 노을빛에 반사된 그의 왼쪽 얼굴도 희미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게 공간적 혼란에 빠지게 했다. 심지어 그가 제자리에서 걷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서로는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되었다. 여자는 꽃이 활짝 피는 양제갑나무 아래 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만 자신의 걸음에만 집중하고, 고 개도 별로 들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의 앞까지 걸어가도 빛이 눈을 찔러서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이 순간에 외투를 벗는 것 을 좋아했다. 오후에 샤워하고 남은 짙은 향은 쉽게 감지되지 않은 땀의 열기와 함께 물씬 풍겨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난 향기를 맡으 면서 기쁘게 그를 맞이하러 빛 속으로 들어갔다. 두 팔은 외투를 껴안고 가슴에 감겼다.

2, 3일마다 연구원들이 퇴근하기 전에 고갯마루에 달려와 그를 기다리는 것이 여자의 습관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녀는 그가 매 일 언덕 뒤편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올라오는 것을 지 켜보다가 다가가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홍자오(金鴻藻)’ 글자 하나씩 천천히 내뱉어 목소리가 자연스레 들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자는 살짝 턱을 내 리고 입술을 오므리며 호호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에게 그녀처럼 자신의 이름을 성(姓)까지 다 불러주는 경우는 꽤나 오래전의 일이되었다. 어른 들이 그를 ‘홍자오’라고 부르고 또래들은 그를 ‘진형’이라고 부르거나 ‘무문(茂文) 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문은 그의 자이다. 후배들은 당연히 그를 ‘진선배’ 또 는 ‘진선생님’이라고 불러 준 것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그의 이름을 처음에 알았 을 때,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가끔씩 부르면 늘 ‘자오’를 무겁고 또렷한 권설음으로 발음했다. 한번은 그가 참지 못해서 완곡하게 그녀의 발음을 고치려 고 했다. “사실은 ‘자오’는 권설음이 없어.” 여자는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뜨고 말

했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읽어주었다. ‘진홍자오(zao)’ 여 자는 그의 말투와 리듬을 모방하여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발음이 맞 았네. 진홍자오(zao), 진홍자오(zao), 진홍자오(zao)”. “자오(zao), 자오(zao), 자오 (zao).” 하지만 여자는 또다시 일부러 혀를 앞니에 세게 대고 “자오(zhao)”라고 발음했다. 그러다가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도 좋아한다. 여자와 함께 다니는 장소는 줄곧 연구소 맞은편의 길거리 부터 이 산비탈까지뿐이었다. 고갯마루를 넘어 멀리까지 쭉 이어진 분지 주변을 둘러싼 산들의 사이에는 기복이 심하고 완만한 구덩이가 있었다. 거기에 방향, 크기, 색깔, 모양이 다른 무덤들이 규칙 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적어도 백여 개의 무덤이 있었다.

여자는 매혹적인 비석과 무덤 사이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여자의 아버지 가 이곳에 묻힌 지 20년쯤이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두 동생과 같이 어머님을 아버지의 무덤 옆에 매장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는 다른 낯선 무덤들이 빽빽이 들어있어서 그녀는 부득이 아버지의 무덤에서 약 50 미터 떨어진 곳에 어머니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줄곧 미안하다고 여겨왔 다. 어머니는 평생에 한 번도 아버지를 의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그 날, 그 일대는 가장 고요한 오후 무렵이었다. 그녀는 새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였다. 일어났을 때 고개를 들자, 말라 보이는 체형에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양복 자락을 올린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그를 처음 보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거의 매일 오후에 무덤을 찾아오곤 했다. 아버지의 무덤은 이미 허름해지고, 비석도 시간의 침식 때문에 글자가 흐릿해지고 거칠어졌다. 그 러나 주변은 여전히 깨끗하다. 그녀는 때로 오후 내내 고갯마루에서 앉아 한참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먼 곳의 채소밭을 바라보니, 주변이 온통 푸르러진 것 같 았다. 금방 수확한 곡식들이 채소밭 옆의 시멘트 바닥에 깔아 놓아 누릇누릇해 보였다. 짙은 색채를 오래 보았더니 온 세상은 그 가운데 두 가지 색깔만 남은 것 같고 옆의 사물들이 모두 희뿌연 흑백 그림이 되었다.

흐릿한 그림자가 길고 홀쭉하다. 늘 무덤 사이를 오가며 때로 허리를 굽히고, 심지어 몸을 웅크리기도 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가끔은 구름이 두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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