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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07-110)

지금까지 내용 변화 형태를 중심으로 <서사록>과 <셔유견문록>의 관계 를 연구하고, 작품의 전반적인 특징에 대해 규명해보았다. 현전하는 사행 가사로 <셔유견문록> 이전 시대에는 주로 일본과 중국 기행에 한정하여 그 기록물이 전해지고 있다. <셔유견문록>처럼 서양을 다녀와서 기록물 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리고 이렇게 한글 가사로 이루어진 점 또한 우리 문학사에 드물다. 이런 이유에서 <셔유견문록>이 우리 문학사 에서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 연구하여 정리한 내용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결론을 삼고자 한다.

<서사록>을 집필한 작자가 <셔유견문록>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같은 날짜에 같은 사건을 겪거나 같은 대상을 관찰할지라도 두 작품이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우선 표기 수단 자체가 다르며, <서사록>은 작자의 한문 기록물, 일기적 성격이 강한 반면 <셔유견문록>은 <서사록>을 해석 하기는 하였지만 편집을 통하여 내용의 변화로 인해 문학 창작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장르 자체가 바뀜에 따라 내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셔유견문록>에서는 <서사록>에 기록된 날짜/(음력날짜)/날씨의 형태가 사라지고, 간간히 날짜가 등장한다. 또한 작자의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도 포함된다. <서사록>은 최대한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 은 반면 <셔유견문록>에서는 작자의 감정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내용 중간중간에 임금에 대한 연군지정(戀君之情)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으며, 오랜 시간동안 객지에 떨어져 지내는 작자의 외로움과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부분도 있다. 또한 한글 설명을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러한 특징들 가운데 <서사록>이 <셔유견문록>으로 번역되는 과정 중 많은 내용의 변화가 생겼는데, 이를 형태별로 보자면 <서사록>에 기록된 사건 순서와 <셔유견문록>에 기록된 사건 순서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있 다. 이 경우 작품의 구조상 내용을 매끄럽게 하기 위하여 사용된 경우이 다. 작자가 보고 느낀 점에 대하여 덧붙여 설명할 부분이 있다면 작자는 내용을 추가하였는데, 대표적인 부분으로는 여관에 대하여 묘사한 부분이 나 버킹엄 궁전에 대하여 묘사한 부분, 작자가 달을 보며 가족을 그리워 하는 부분 등이 있다. 또한 작자는 <서사록>을 <셔유견문록>으로 재해석 하는 과정 중 불필요한 부분에 대하여는 과감히 삭제를 하였다. 내용이 없고 날짜/(음력날짜)/날씨만 기록된 부분이나, 날짜/(음력날짜)/날씨+날 씨에 대한 간략한 설명 부분, 일상적인 부분, 불필요한 지명(地名), 공무 수행에 관한 내용 등을 탈락시킴으로써 작품을 탄탄하고 매끄러운 구조로 변형시켰다. 마지막으로 작자는 <서사록>에서 길게 표현된 부분을 <셔유 견문록>에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간략한 내용으로 요약을 하 였지만 많은 수사법을 사용하여 표현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에게는 장 황한 설명보다 이해하기 쉽다.

본고에서는 <셔유견문록>의 전반적 특징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셔유견문록>은 aaba식 구조, 4·4조 율격 등 작품이 해석되기 이전 시 기의 민요적 특징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독자에게 친근한 느낌을 준다. 또 한글 주석과 많은 수사법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하며 생생한 묘사와 뛰어난 표현 방식을 통하여 독자로 하 여금 직접 서양을 체험하는 듯 한 느낌을 전달한다.

<셔유견문록>이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 작자는 서양의 문물과 풍속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예 찬과 보여주기식의 묘사만 있을 뿐 당시 조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서 양을 관련지어 서술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몇몇 부분에서는 자국(自 國)의 부국강병에 대한 열망이 내재되었음직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으로 봤을 때 조선의 현실에 대해 걱정하고 당시의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작자의 고민이 드러난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나 작자가 사행 도중 제일 오래 머물렀던 영국에서 작자가 당시 영 국의 생활상과 조선을 연관시켜 조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 점, 그리고 관병식을 구경하며 영국을 서양 최고라고 치켜 세우지만 이를 당시 조선의 상황과 연관 지어 조선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강구하지 않고 다만 감탄과 부러움에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았다는 점이 <셔유견문록>의 한계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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