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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令壽閤과 商景蘭 시의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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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은 예로부터 같은 漢字문화권에 위치해 있어 문학적으로 많은 공 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점은 상층 지배계급인 사대부남성들에 게만 해당되었을 뿐 여성들은 그러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특히 본고에서 논의하고자 했던 詩作 면에서 보면 漢詩는 원래 한문문학에 포함되는 것으로 사 대부남성들이 이를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시작의 주목적은 과거시 험을 위한 일종의 교양 쌓기에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봉건사회에 서 자유롭게 문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 고 여성들은 그 나름의 문학체계를 형성하였다. 이 중 사대부가 여성들의 문학적 체계 형성은 다른 계층의 여성에 비해 더딘 상태에서 발전되어 왔지만 조선후기 와 명말 청초에 이르러 사대부가 여성들은 여성시인의 흥성시기를 맞으면서 인 원수와 작품 수에서 이전 시기에 비해 상당한 우세를 선보였다. 그러므로 한국과 중국의 여성문학 흥성 시기인 조선후기와 명말 청초 사대부가 여성시인의 작품 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여성문학의 흥성 시기에 관해서 필자는 이미 Ⅱ장 생애 부분에서 기존 저서의 견해에 따라 인원수 통계를 만들어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연 구사에선 조연숙의 견해, 중국의 연구사에서는 胡文楷의 견해에 따라 이를 수용 하여 필자 나름으로 조선후기와 명말 청초를 흥성기로 설정해 보았고 이러한 논 리를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두 여성 시인인 조선후기 서영수합과 명말 청초의 상 경란을 비교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중세사회에서 문화 선진국으로 여겨졌던 중국의 문학적 경향은 연행을 간 역 관을 통하여 많은 서적이 유입됨으로써 조선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러한 문학적 경향은 생각만큼 쉽게, 또 빠르게 조선에 반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함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문학적 경향은 배제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사대부 남성들의 창작 경향에서의 상황도 이러한데 사대부가 여성들의 창작 현장은 이보다 더 더디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명말 청초가 여성시인의 흥성 시기였으나 한국에서는 조선후기인 서영수합이 살았던 당대가 여성시인의 흥성 시기로 다소 차이가 나

타남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선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상경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 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60년대에 시집이 발행된 것을 보면 비교적 잘 알려진 여성시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후 정치체제의 불안정으로 초판 발행 후 그녀에 대한 연구가 공백기에 처하였다. 심지어 부분적인 書稿도 훼손되고 말았 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상경란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 다. 본고에서는 상경란이 서영수합의 비교 상대로서, 또 앞선 시기의 시인으로서 어느 정도로 훌륭한 시인인지에 대해 한층 더 깊이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상경란의 본격적인 시작 활동은 출가 후로 판정되었지만 출가 이전부터 이미 시작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경란의 본가는 원래 명문사대부 가로서 여성이 시작하는 것에 대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는 출가 후 남편의 지지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중 심으로 가족여성시사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둘째, 여타 사대부가 여성시인과 달리 상경란의 작품에서는 이별의 감정이 주 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다른 계층의 여성시인과 달리 이별의 대상은 남편 과 친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남편의 순국 후에는 사별에 대한 정을 나타냈는 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세상 떠난 남편을 애도함(悼亡詩)」이다.

셋째, 상경란은 유교이념이 주류인 사회에서도 자신의 시작을 견지하였다. 심지 어 남편이 순국한 이후에도 시작을 계속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규방여인으로부 터 독립적인 자아를 추구하는 진정한 시인으로 전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 세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본 결과 상경란은 명말 청초 사대부가 여성시인 임을 알 수 있다.

서영수합의 비교 대상으로 선정된 상경란은 이미 중국에선 훌륭하고 특색 있 는 시인으로 기존연구에서도 많이 검증된 상황이지만, 서영수합은 아직까지 여성 시인으로서의 가치 부여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서영수 합을 전형적인 사대부가 여성시인으로 보고, 그녀의 시의 내용에서 이렇다 할 연 구 결과를 내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본고 Ⅲ장에서 다룬 3가 지 시각으로 이 시인을 살펴보았을 때 이 시인은 중국의 상경란과 견주어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시인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서영수합의 시작 활동은 남편의 권유로 시작되었지만 이것은 어렸을 때

부터 품었던 욕망이 남편의 도움으로 비로소 분출된 것이었다. 또 남편 이외의 가족들과 수창한 것이 시에서는 자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편과 시우가 되어 시 를 지은 것이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시작에서 서영수합 자신이 시작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면 절대 사대부가 여성시인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을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몇몇 시작품에서 시인이 여성인 것을 모르고 읽을 경우에 전형적 사대부가 지은 것으로 착각할 만한 것이 나타 나기도 한다.

둘째, 여타 사대부가 여성시인과 달리 서영수합의 작품에서는 이별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다른 계층의 여성시인과 달리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식의 사행 길을 배웅하면서 처음으로 사대부가 여성시인 이 지은 별장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별장 성격의 시작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셋째, 서영수합은 유교사상으로 철저한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시인으로서의 자 의식이 강한 인물로 판정하기는 힘들다는 편견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어 릴 때부터 시작에 대한 욕망을 꿈꿔왔고 출가 후 남편의 권유로 그 욕망을 실현 시켰다. 서영수합의 생애 전반과 시작품의 전반을 꿰뚫어 보면 그녀는 늘 유교이 념과 시작에 대한 욕망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로서, 시작하는 동안에 늘 윤리 와 조화를 추구하려는 의식을 보여주었다.

서영수합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절필’이라는 방식으로 시작의 끝을 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영수합의 짧은 시작의 기간 동안 다작을 한 것으로 보 아 시작을 하기 이전에 이미 준비된 시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딸인 홍원주 의 시작 활동은 어머니의 시적 열망이 딸에게 전수된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사항들을 종합해 본 결과 서영수합은 조선후기 훌륭한 사대부가 여 성시인임에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Ⅴ. 결 론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의 여성문학 흥성 시기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후 기 서영수합과 명말 청초 상경란의 생애, 작품 개관, 시작활동과 시적 특징을 살 펴보았다. 이것은 양국 흥성 시기의 문학사에서 두 시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고려한 것이었다.

필자가 국경을 벗어난 두 시인을 비교의 대상으로 선택하여 연구한 이유는 서 로 다른 나라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시작품에서 같은 특징이 많이 보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두 시인의 공동점을 추출하고자 하였다. 그 런 다음 2차적으로는 그 공통점 내부에 존재하는 개별적 차이에 주목하고자 하 였다.

제Ⅱ장에서는 서영수합과 상경란의 생애와 작품을 개관하였다. 두 시인은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공통적으로 사대부가 여성이면서 시를 지었고 시집을 남겼다. 서영수합은 71년을 살았지만 시작한 시간은 남편의 만년부터 죽 음까지의 불과 몇 년이었다. 이처럼 짧은 창작 시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는 115편 191수의 다작을 남겼다. 심지어 그녀의 시작과 문학에 대한 사랑은 자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 맏딸인 홍원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상경란도 명말 청초 당시 약 72년의 천수를 누렸다. 서영수합과 달리 상경란의 인생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詩作을 이어온 삶을 살았다. 그녀는 67수의 詩, 94수의 詞, 補遺詩 3수와 遺文1편 등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상경란은 祁氏 가족의 여성을 이끌며 시작을 하였다.

世人들의 평가에 의하면 상경란은 남편보다 시를 더 잘 지었다고 한다.

제Ⅲ장에서는 본연구의 중심으로서 서영수합과 상경란의 시작 활동과 시의 특 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서영수합의 시작 활동을 출가 전, 출가 후, 남편 사후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 펴보았다. 출가 전의 서영수합은 글을 좋아하고 시 읊기를 즐겼지만 할머니를 비 롯한 徐氏 가족의 금기에 따라 시를 짓지는 않았다. 심지어 출가 후 10년이 넘 도록 시가에서는 그녀가 글을 아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서영수합은 남편의 권유 로 말년의 시우가 되었지만 본가의 훈계를 머릿속에 새겨 두어 자신이 읊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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