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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알론조

스페인 출신 망명자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알론조는 현대 여성의 실존 적 문제를 탐구하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으로 주목받는 프랑스 중견작 가이다.

경제학을 전공한 뒤 25세에 ‘상사 없는 회사’를 기치로 내건 금융 컨설 팅 회사로 성공을 거뒀다. <엘르ELLE> 잡지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당선 된 뒤, 『그나마 이것도 내가 참는 거야!』(1995), 『여자 역시 남자와 마 찬가지로 평등하다』(1999), 『왜 내가 경비견일까』(2001) 등 여성의 관 점에서 본 비판적 에세이로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여러 시사 프 로그램에서 코멘테이터로 활약했고, 유엔난민기구 등 국제 구호활동에 참여하는 사회활동가로도 유명하다.

2002년부터 소설 창작에만 몰두해, 『파란 물의 소설』(2003), 『옴므파 탈』(2005), 『망명이 나의 국가이다』(2006) 등 현대 여성의 심리를 섬세 하게 포착한 소설로 유럽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옮긴이 이승환은 1980년 서울 출생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한국 과 프랑스를 오가며 수학했다. 한국 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불어-한국어 소사 전』, 『베네치아에서 건진 희망』, 『톰 소여의 모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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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IGRANE by ISABELLE ALONSO

Copyright ©EDITIONS ROBERT LAFFONT, S.A., Paris, 2005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JIAN BOOKS CO., 2008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wa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DITIONS ROBERT LAFFONT, S.A. (Paris) through Bestun Korea Agency Co.,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베스툰 코리아 에이전시를 통해 저작권자와의 독점계약으로 지안출판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옴므파탈

1판 1쇄 인쇄 2008년 5월 20일 1판 1쇄 펴냄 2008년 5월 25일

지은이|이자벨 알론조 옮긴이|이승환 펴낸이|윤정훈 편집집|박현주 황지영 디자인|이정민

영업・관리| 구본산 김한중・박윤경 윤재숙 전화 02-322-3575 팩스 02-322-3858 펴낸곳|지안출판사

등낸록|2005년 2월 28일(제300-2005-27호) 주낸소|서울 종로구 계동 139-3

전낸화|02-766-1713 팩낸스|02-764-8592 이메일|[email protected]

출낸력|영준그래픽스 인쇄・제본|백산하이테크

ISBN 978-89-958970-3-4 03860 값 9,800원

Homme Fatale

이자벨 알론조 지음 이승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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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 대한 이상이 클수록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은 강해지기 마련이다.

마리 프랑스 이리고양, <정신적 희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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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 대한 이상이 클수록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은 강해지기 마련이다.

마리 프랑스 이리고양, 『정신적 희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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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나의 구세주였다. 그때 나는 열여섯, 아버지를 암으로 보낸 직후였 다.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죽은 아버지를 보니 미칠 듯이 기 뻤고, 본심을 숨길 수 없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가 알 까,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보며 내가 느꼈던 벅찬 환희를.

어느 날, 감정이 차분해지고 어머니의 감시가 소홀해지면, 그러니까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을 때가 오면, 나는 묘지 로 달려갈 작정이다. 가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춤을 출 것 이다. 구더기들이 그를 먹어치운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이다.

암 세포들이 그를 보내버렸다. 고맙기 짝이 없다. 지금쯤이면 구더기들이 뒤처리를 하고 있겠지. 나는 춤을 춘다. 기쁨에 취해 춤추고, 분노에 취해 춤춘다. 음악 없이도 춤을 춘다. 아 버지는 나를 죽였지만, 나는 그를 이기고 다시 태어났기 때 문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보여 서는 안 될 것을 내 입에 쑤셔 넣었다. 그 뒤로 나는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모든 것을 증오했다. 뱀, 살무사, 보아뱀, 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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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뱀장어, 국수, 버미첼리, 스파게티, 마카로니 등등. 엄마가 미끈거리는 것들을 물에 헹구어 체에 거르는 모습만 봐도, 마치 그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아 구역질이 났다. 엄마 는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나를 의사에게 데려갔 다. 의사는 내게 면류를 주는 것을 포기하고 빵이나 설탕이 함유된 전분을 주라고 권했다. 이런 유치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

10년씩이나 공부를 하다니. 의사들을 존경할 수가 없다.

그들 역시 아버지와 같은 족속들이다. 얼굴 가득 자기만족의 개기름을 처바르고 있는 저명인사들…… 꼴도 보기 싫다.

하여튼 면류를 피하고 아버지를 땅에 묻었지만, 나는 무력 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자살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하늘에 가면 그 인간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는 두려움이었다. 내 해묵은 두려움의 대상은 하얀 옷과 하 얀 날개의 아버지, 내 입 안에 영원히 들어앉으려는 창백하 고 물렁한 그것, 그리고 저주받은 구더기였다.

막스는 우리 집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그는 바이올 린에 재능이 있었던 만큼이나 다른 일에도 능숙했다. 호적상 으로는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학력상으로는 5년이나 빨랐 다. 그는 월반을 했고, 나는 유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뻗어 나를 잡아주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주 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치유를 해주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아프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살아 있게 했다. 삶 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악마들을 물리치고 구더기들을 없애주었다. 내 주변에는 더 이상 구더기들이 우글거리지 않 았다. 단 한 마리도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는 내게 삶을 주었다. 시간과 인내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너무나 순결한 사랑을 주었다. 그로 인해 나는 미래가 있는 소녀로 다시 태어났고, 현재가 있는 여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성숙한 육체를 가진 여인으로 완성된 것이다. 물론 함께 따 라와야 할 행복들도…… 아니, 너무 과장하지는 말자. 하지만 적어도 나는 삶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남자였다. 나를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고, 내 부모를 대신해준 존재였다. 당시 그는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아기였다.

막스와 결혼하려면 먼저 친권으로부터 독립해야 했다. 그 래야 결혼에 대한 권리가 내게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나는 주변의 모든 우려에 반기를 들기 위해 가슴받이가 달린 멜빵바지를 입고 결혼하겠다고 고집 을 부렸다. 사실 내 주변에는 아직 결혼은 하얀 옷을 입고 해 야 하며, 절대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되며, 여자는 학 업에 실패할 수 있지만 그건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 니며, 무엇보다 부유한 남편감을 낚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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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멍청이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관행에 나는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물론 멜빵바지와 막스 덕분이었다. 하객들은 나를 보 고 웃어주었다. 아직도 그 얼굴들이 다 기억난다.

사람들은 막스가 배경은 보잘것없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같다고 인정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일을 했고, 그 와중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사주었다. 나는 비싸고 예쁜 옷들을 좋아한다. 내 미적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고, 보다 이상적으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스가 별 능력 없는 남자 였을지라도 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나를 구원해준 남자니까.

소방관에게 백만장자일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우리 이야기는 너무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지금에서야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아름다웠노 라고. 어떤 것도 그 아름다움을 망치게 할 수 없을 만큼 아름 다웠다. 나는 오랜 세월,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강아지처럼, 우 리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살아왔다. 만약 당신이 여자라면, 그 래서 진짜 왕자님을 만날 기회를 가진다면, 당신은 절대 놓 치지 않을 것이다. 공중에 뛰어올라서라도 낚아채려 들 것이 다. 기회를 거머쥔 그 순간, 인생은 빛나기 시작한다. 무채색 일상은 곧바로 다채로운 빛을 발하며 일탈의 영역으로 접어 든다. 아마도 당신은, 그 사랑 이야기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이다. 내내 회상하고 읊조리며 남은 생애에 윤기를 더해 갈 것이다. 나의 왕자님은 막스. 그는 내 눈동자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그때 나는 아직 학교 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한 번만 만나 달라고 간청 할 만큼 눈부신 나이였다.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들만 집적거리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연기를 하거나, 고르거나, 거절하며 지냈다. 너무 자주 거절하면 평판이 나빠진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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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주 승낙해도 역시 다른 이유로 평판이 나빠진다. 그 러니 마음 가는 대로 하자는 게 내 원칙이었다. 나는 남자들 이 날 꼬시려 드는 것이 좋았다. 그들을 퇴짜 놓는 것도 좋았 다. 원래 나는 싫어하는 것은 별 고민 없이 거절하는 축이다.

가끔은 성적 욕구까지 억누르면서 호감 가는 남자들을 거절 하기도 했다. 솔직히 내가 정조를 지킨 진짜 이유는 성적으 로 미숙했기 때문이었다. 비웃음을 당할까 두려웠다. 그때가 한창 시절이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해 나는 학생아파트에서 2년 넘게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두 명의 룸메이트와 나의 첫사랑 니콜라와 함께였다. 나는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그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니콜라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다시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적어도 노력 만이라도 해주길 원했다.

사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남자였다. 완벽한 남자. 하지만 이미 지나간 사랑이었다. 그는 우리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처럼 함께 늙어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지구상에서 그 두 사람보다 섹시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닮을 바에야 땅 밑에 평안히 묻히고 싶을 정도였다. 니콜라 는 능력도 안 되면서 끊임없이 선물을 사서 물질공세를 펼치 곤 했다. 사랑의 맹세와 약속이 빼곡히 적혀 있는 편지들, 우 리의 미래에 대한 설계를 늘어놓은 메모들과 함께. 자기 딴

에는 그런 것이 근사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 저 어설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아프게 하기 싫었다.

나는 계속 겉돌고만 있었다. 차마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고 고백하지 못했다. 그 틈을 지질학을 전공하는 브루노라는 남자가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가만히 자신을 방치하며 상황 에 몸을 맡겼다. 결국 모든 연애 법칙이 정한 순서대로 불륜 이 시작되었다. 떠나보내기 힘든 옛 남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삶에 활력을 주는 새 남자를 보며 그의 슬픈 질투심을 지운 것이다.

나는 브루노와 함께 숲으로 조깅을 나가거나, 바닐라 티를 마시며 켈트 음악을 들었다. 당시 내 이동수단은 자전거였는 데, 어찌나 무거웠던지 내 종아리는 닭다리를 방불케 했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연애의 희생제단이 있다면 바로 그 자전 거였다. 나는 자전거를 강의실 밖 계단에 놔두곤 했다. 강의 가 끝나고 나와 보면 자전거에는 사랑을 속삭인 쪽지나 엽 서, 시 따위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방과 후 과 외를 하러 시내로 나갔을 때에도 한 다발의 데이지나 미나리 아재비, 자그마한 나무딸기술 파이나 달콤한 초콜릿 등을 짐 받이 위에서 발견하곤 했다. 집에 돌아갈 때면 가슴이 찢어 질 듯 아팠다. 니콜라는 절망에 빠진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 림으로, 책으로, 몰래 찍은 내 사진으로 발목을 잡았다. 그러 나 보통은 연구실에 처박혀 일을 해야 했다. 다행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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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상황이었다.

2월이 오자 나는 남부로 여행을 떠났다. 친구 두 명과 이십

대에만 탈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후진 자동차를 몰고 길을 나 섰다. 돈도 없었고, 남자도 없었다. 우리는 아비뇽에서 녹색 으로 된 전통 농가를 한 채 빌렸다. 난방도 되지 않아 8일 동 안 찬물로 씻어야 했다. 유일한 열 공급원이라고는 미친 듯 이 웃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따금 프로방스의 겨울 태 양이 6월의 햇살처럼 가득 쏟아져 잠시 찬바람을 막아주었 다. 그러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함께 간 친구들은 학부 때 기타를 치던 날라리 릴리와 나 와 제일 친한, 친자매보다 가까운 클로드였다. 내 갈색머리만 큼이나 완벽한 금발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알지 못하 는 비너스였다. 폭포처럼 드리워진 컬과 수줍은 듯하면서도 다소 도발적인 표정, 마치 보티첼리의 비너스 같았다. 그녀는 특히 단거리 경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1학년 때부 터 그녀를 알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빠져들었던 것은 고등학 교 1학년 때였다. 그때 우리는 첫눈에 반했다.

사람들은 1968년 5월 혁명을 그리워하며 해마다 기념 시 위를 벌였다. 클로드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 다. 큰 백조 무리나 따라가는 미운 오리새끼마냥, 시위대가 앞장서 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바로

그날, 우연히 클로드를 만났다.

그녀는 시위대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했 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좌파였고, 집안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 였다. 우리는 시위대를 찾기 위해 힘을 합쳐 주변 대로와 시 내 골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쯤 뒤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시위가 있었다면 이미 끝났거나, 너무 은 밀히 진행되어 알아차릴 수가 없었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낙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배가 고팠다. 우리는 술집에 갈 만한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몇 프 랑밖에 되지 않는 돈을 털어 아몬드 크루아상 두 개, 속에 캐 러멜이 든 초콜릿 그리고 화학첨가물이 가득 담긴 플푸오르 소다수 한 병을 샀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었다. 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걸 어디서 먹지?

하늘은 흐리고 칙칙했다. 나는 그녀를 떠보고 싶었다.

우리 성당에 갈까?

만약 안 된다고 말한다면, 공산주의자건 아니건, 그녀에게 는 오래 묵은 신앙심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환 호했다.

오, 끝내주겠는데!

우리는 재빨리 예배당 중앙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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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게 큰 기둥 옆에 작은 돌의자가 있었다. 우리는 그 위에 식 량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창문으로는 천연색 빛들이 폭포 처럼 쏟아져 내렸고, 커다란 양초들이 곳곳에서 타고 있었다.

완전한 고요 속에. 우리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비록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장소가 주는 위엄에 민감하게 반 응할 줄 알았던 것이다. 클로드는 찬송가로 짐작되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는 그녀가 찬송가도 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는 계 속 이어졌다.

― 계속 거기 있어, 우리 좀 편하게 놔둬! 아멘!

나는 웃음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성당에서조차 그녀의 행동은 아주 도발적이었다. 모태신앙을 가진 나의 부모님은, 비록 신부는 싫어했어도,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할 줄 알 아야 한다고 항상 가르치셨다. 나라면 이런 식의 신성모독은 시도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기존의 사상을 파괴하는 모습이라면 무조건 매료 되었던 것 같다. 당연히 나는 클로드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녀의 쾌거를 웃으며 기뻐해주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약혼식 정찬이라 도 되는 양 엄숙하고 정중하게 점심식사를 음미했다. 성당에 서 결혼식을 올린 연인들처럼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기분이었다. 감동의 순간이 스쳐 갔고, 우리는 그것을 함 께 느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다시 밝은 거리로 나왔을 때, 이미 우리는 함께 죽고 사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1968년 5월 혁명을 특별하게 기념한 우리 둘만의 추억이다. 그때 우리는 열다섯 살이었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 지 늘 붙어 다녔다. 그녀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나 또한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첫 키스, 첫 생리, 첫 연애, 첫사랑. 그리고 실망과 분노, 욕망과 절망 같은 모든 감 정들을 함께 나눴다. 만약 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면,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다소 힘들지도 모 르겠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