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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술대회 결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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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기스칸과 원 나라는 몽골사인가 중국사인가

. ( )元 ?

칭기스칸은 몽골 사람인가, 중국 사람인가? 원( )元 나라는 몽골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

만일 칭키스칸이 몽골사람이면, 그 세력으로 세운 원나라도 당연히 몽골 역사이다. 그 런데 원나라가 몽골사이고, 원나라가 차지했던 영토가 몽골사에서 다루어진다면 중국사는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과 중국의 역사 전쟁은 일찍이 시작되었고, 아직도 평행선 을 긋고 있다.

지금 비록 작은 나라지만 몽골은 한 때 한족을 완전히 지배했던 국가와 민족 가운데 지 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국가이자 민족이다. 그만큼 중국에서도 몽골 역사 서술에는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 붇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국력이나 경제력에서 따라가지 못한 몽골은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중국만 큼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몽골이 나름대로 논리를 개발해서 국제사 회에 내놓는다면 그 파장은 그 어떤 나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몽골 역사학자들이 처음으로 적극적인 대응논리 개발에 나섰다 이번 고구려. 연구회와 공동으로 갖는 “역사적 진실과 중국의 역사 기술 문제 가 바로 그 첫 발표장” 이 되었다.

중국의 몽골사 왜곡에 대한 비판적 분석 .

년 중화민국이 성립하자 가장 강하게 반발한 민족이 몽골족이었다 그리고 내외몽

1911 .

골을 가리지 않고 격렬하게 나타난 현상이 독립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외몽 골의 젭춘담바가 독립을 선포하였다. 막강한 청나라가 한족(漢族)과 몽골을 비롯한 많은 민족을 지배했는데, 그 청나라가 망하자 한족은 중화민국을 몽골민족은 몽골을 세워 300 년 피정복에서 독립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족과 몽골족은 서로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워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

(2)

고, 이런 논의는 오랜 동안 계속되었다 한국이 동북공정으로 떠들썩하기 훨씬 전부터 몽. 골은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대응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몽골의 연구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이번 한 몽 학술대회였다.ㆍ

몽골 발표자들은 몽골 역사학자들 가운데 권위 있는 학자들이 거의 참가한다. 발표자들 의 면면을 보면 몽골과학원의 역사연구소, 고고학연구소, 몽골국립대, 국립울란바타르대 학, 국제문제연구소에 소속된 원로 들이다.

몽골 학자들의 발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의 몽골사 왜곡에 대한 비판적 분석

몽골 각 시대사에 대한 훌륭한 역사적 사실

그 가운데 ①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실과 중국의 기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한 논문은 모두 편이었는데 한국 학자들이 두 편의 논문을 더 발표하여 모두8 , 10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역사 만들기 년 그 과정과 평가

1. 30

서길수 서경대 교수( )

서길수 교수는 중국이 역사를 침탈하려는 기도는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유는 다민족통일국가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다민족통일국가론은 현재 중국 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 때 영토였다며, 중국 중학교 지리부토에 나 온 청나라 영토와 현재 중국의 영토를 대비하는 지도를 특별히 제작하여 발표하였다. 이 지도에는 현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몽골, 키르기즈, 카자흐스탄 등이 모두 중국의 영 토였고 통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어 러시아 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

(3)

중국은 이런 다민족통일국가론에 입각한 역사서술과 국경학을 세우기 위해, 지난 30년 동안 1983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을 세운 뒤, 하상주단대공정, 동북공정, 중국고대문명 탐원공정, 신강항목 같은 많은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는 것을 자세히 밝혔다. 중국의 역 사왜곡과 동북공정은 매우 장기적이고, 용의주도하게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중국의 몽골사 왜곡과 몽골 학계의 대응 2.

달라이 과학원사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전 소장

Ch. Dalai ( , )

몽골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학자이기 때문에 연설에 가까운 발표지만 영향력이 아주 컸 다. 몽골에서는 이미 70~80년대 중국의 몽골사 왜곡에 대해서 반론을 폈으며, 90년대도 계속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시 신문에 났던 기사까지 같이 제시하였다.

한편 “한국과 몽골은 옛날부터 많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두 나라 역사 학. 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중국의 역사 왜곡에 함께 대처해야 한다.”고 하여 마치 기조연설 과 같은 형태를 취했다.

고대 유목민에 대한 중국의 역사 기술 3.

간볼드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J. Ganbold ( )

중국사에서 북방 유목민에 대해 어떤 용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을 중점 적으로 연구 발표하였다.

중국사에서는 유목민을 대부분 미개하다고 기술하였다. 중국 자신만 중심이고 주변은 미개하다고 대해 왔다. 이런 의식은 기원전 14~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중국의 의식. 은 유가사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동주시대부터 천제, (天帝), 천자(天子) 같은 사 상 형성되었으며, 중국만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은 모두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식 으로 역사를 기술하였다.

흉노(匈奴), 선비(鮮卑), 유연(柔然) 같은 유목민 국가 표기에서도 한족의 인식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변 국가에 대한 인식은 바로 역사왜곡과 연결된다. 축하하기 위해 선 물을 하면 조공이라고 하고, 신하국가로 신속(臣屬)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허세. 는 20세기까지도 계속되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같은 유럽 국가들이 선물을 받치면 모두 중국에 속한 신하라고 불렀다.

중화사상은 공자사상이 주변 국가에 퍼지면서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다. 논어를 비롯한 공자의 저서에는 예( )禮 를 얘기하면서 북방민족은 예( )禮 와 인( )仁 이 없어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고 하였다. 공자의 사상은 하늘을 섬기는 의식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천하관은. 하늘에는 해가 있고 주나라에는 천자가 있다 는 식으로 기술되었다 아울러 야만인과

‘ .’ .

는 관계를 멀리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공자의 사상과 책은 중국의 후대의 역사 서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처럼 다른 민족을 깔보는 역사서술이지만, 그런 책들을 통해서 다른 민족의 역

(4)

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기술 중 대몽골국 연구 몽골문 출판물을 중심으로

4. ( )

촐몽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S. Tsolmon ( ,

국립 울란바아타르대 부총장)

현재 중국에서 몽골을 연구하는 학술기관과 대학이 20 ,개 출판사가 80 남짓, 잡지 22 종이 7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중국 학술계에서는 몽골사를 아주 중요하게 취급 하고 있는데, 남방에서는 원대사(元代史) ,를 북경을 비롯한 북방 내몽골사회과학원 등( ) 에서는 몽골 역사 전체를 연구하고 있다.

몽골 역사에 관한 출판물 내몽골 사범대학 등 들이 많이 나오는데( ) , 발표자 자신은 중국 어를 못하기 때문에 중국어판 출판물에 대한 분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 안타깝다. 그 러나 몽골문으로 발표한 것들만 보아도,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다.

년 중국은 몽골 학자까지 초청하여 세계몽골학자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내몽

2005 .

골에 있었던 칭기스칸은 중국인인가 아닌가 하는 토론이 있었는데 “중국 국경 안에 있던 민족은 모두 중국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칭기스칸은 우리 중국인 모두의 우상이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나서 자란 곳이 모두 현재 몽골 지역이라는 것은 모든 자 료가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이런 연구가 몽골에서도 많이 나와 있지만, 중국 학자들은 몽 골 학자의 연구를 잘 인용하지 않는다.

원나라의 경제 발전과 중국의 역사 기술 5.

폰삭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중세분과장

A. Ponsag ( )

이 학자는 중국의 내몽골에서 살던 우짐칭족이었는데, 몽골국인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중국에서 자라서인지 발표 첫머리에서“정치적이 아닌 학술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 하였다 이 말이 오히려 학술적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비쳐 흥미로웠다. .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중국학자들은 마르크스 입장에서 학술을 벗어난 연구가 있었 다. 경제적으로도 그런 것이 있었다. 중화사상 다민족통일국가 입장에서 접근한 것도 사 실이다.”며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원나라의 정체성에 대 해서도 “원나라는 몽골제국의 연속이다. 칭기스칸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며 중국 사에서 자기 나라 역사로 다루고 있는 원( )元 나라 역사가 몽골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 다.

끝으로 폰삭 교수는 “이전에 몽골인들이 한국 민족들에게 고통을 준 점에 대해서 칭기 스칸의 후예로서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인사를 해서, 원나라가 고려에 침략했던 것을 학자가 정식으로 사과하는 초유의 사실도 발생하였다.

(5)

몽골의 봉건주의 해체시기에 대한 중국의 역사 기술 6.

아리온고아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N. Ariungua ( , )

원나라(1271 1368)∼ 가 망한 뒤를 봉건 해체시기라고 하는데, 이리온고아 연구원은 이 시기에 대한 중국의 역사기술을 살펴본다.

년 이후 마대정 을 비롯한 중국의 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중국

2000 (馬大正) ,

에서 잠깐 벗어난 시기로 보고 있으며, 명나라와 북원 사이에 있었던 전투는 모두 중국 국내 전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몽골의 항쟁은 지배층에 투쟁하는 반란일 뿐이 고, 몽골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중국 역사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조공관계에 기준을 두고 있다. 하 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莫非王土)는 사상과 연결되는 것으로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중국의 중화사상은 하늘 아래 황제를 벗어난 땅은 한 줌도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대외적인 교류도 모두 책봉한 사실을 위주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페어뱅크는 “20세기 이전의 중국 외교는 조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쓰 고, 조공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중국 문화의 우월성 1)

외부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 2)

경제 무역 중시 3)

외교적인 실용 4)

러시아 학자도 중국 외교에 대해 연구에서 “조공은 중국 대외정책의 근간이다. 다른 민족과 관계를 맺을 때 항상 평등한 관계라고 하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한 것이지 안으로 는 신속관계라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중국은 평등한 외교를 해본 경험이 없으며,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 나라를 누르거나 그 나라에 눌렸다.

발표자는 이런 문제와 관계해서 14~16세기 몽골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명나라와 몽골 관계는 필요에 따라 상호무역이 이루어졌다 이 당시 지배하고 지배

1) .

당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상국에 바치는 물품 같은 계약관계 없었다 중국 관리가 몽골에 파견되어 관리하지

2) .

도 않았다.

몽골 왕족이 인질로 가 있지도 않았다

3) .

책봉하는 것은 양국 간의 입장에서 성격을 규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

4) .

몽골이 중국에 신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 책봉은 조공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단순히 형식. , 적인 것이었다.

중국이 북방민족에게 왕이란 칭호를 내렸는데 이것은 단지 당시 우호적인 관계를

5) ,

나타내는 것이지 중국에 신속되는 것이 아니다 조문 사절 때 보면 서로 우호관계를 나타. 내는 표현이 많다.

이 당시 양국의 관계는 예의 와 형식적인 관계이면서 각각 독자적인 관계를 맺

6) (禮儀)

고 있었다 때로는 전쟁도 있었지만 양측이 모두 독립된 국가였다. . 기타 중앙아시아의 관

(6)

계에 있어서도 이런 관계는 마찬가지다.

몽골의 신해혁명사에 대한 중국의 역사 기술 7.

잠스란 국제문제연구소 수석연구원

L. Jamsran ( ),

오랑고아 몽골국립대 역사학과

J. Urangua ( )

몽골과 중국과의 관계는 예전부터 각각의 영토에서 살아온 이웃이다. 때로는 우호적이 고 때로는 침략하는 평화롭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13, 14세기에는 중국을 지배하였 다.17, 18세기 퉁구스계 만주족이 몽골과 중국을 통치하였다. 청나라 때는 몽골 민족은 자주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몽골이 독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외국에 대해 많은 선전을 했다.

신해혁명 이후 몽골은 독립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의 한 부분이었다며 몽골 독립 문제에 대해서 많이 왜곡하였고 몽골 학자들은 강하게 비판해 왔다, . 중국은 1911년 몽골 이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한 것을 부정하고, 단순히 외국에서 부추겨서 생긴 것이고, 몽 골인들은 서로 반목만 일삼아 왔다고 폄하했다. 재정러시아의 부추김으로 자치를 선포했 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독립운동도 몽골인이 직접 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부추겼다고 기록 하였다.

년 자주를 선포했던 것이 아니라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재정 러

1911 . ‘

시아의 중국 침략 이란 책에서 이것을 부정하였다’ . 중국 교과서에서도 몽골은 옛날부터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몽골현대사에 대한 일부 중국 사학자들의 논저에 대하여 8.

바트바야르 몽골 외무부 자문위원

Ts. Batbayar ( )

년부터 러시아 문서보관서에서 새로운 자료 공개되고 있고 몽골문제에 대한 문서

1990 ,

가 출판되고 있다. 이 문서에는 1911~1915년 몽골의 분리 독립에 대해서 쓰고 있다. 러시 아는 외몽골의 독립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자치를 지지했다. 외몽골의 자치는 실상 독립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몽골인민공화국은 소련의 16번째 주다 고 폄하’ 하였다.

중국의 역사 기술에 나타난 타그나 오량하이 문제

9. (唐奴 烏浪海)

슈르후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D. Shurkhuu ( , )

중국 경제 성장하자 국가통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국가통일은 홍콩 마타오 마치고, 대만이 남아있다. 중국의 영토문제 가운데 아직 분쟁이 되고 있는 곳은 인도, 일본 같은 동남아시아지역이다 최근 중국의 국경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탕나 우랑하이(唐奴 烏浪海) 문제이다( 20『 세기 중국 국경 연구』라는 책이 나와 있다).

마대정 등의 학자들이 한 연구 결과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중국에서 변경학이 독립과목으로 등장한 하였는데 고대부터 중원 변경이 구별되어 있었다, , .

(7)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변경 연구는 이전의 전통이 무너진 시기이다 러시아

1) .

와 관계해서 추진한 시기이다. 러시아에게 많은 영역을 빼앗겼다는 의식이 일반인에게도 퍼져 있었다. 이 때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도 많았다.

년대 중반 러시아에 대해서는 약간 누그러지고 실크로드 연구가 많이 된다

2) 1980 - , .

변강사지연구중심 1987년 세워졌다. 5년이나 걸린 것은 전문가가 적었고, 심각한 문제라 시간이 걸렸다. 중요한 문서 활용이 어려웠던 것도 한 이유다. 변강사지연구중심 설립 후 많은 연구서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변경의 역사만 다루었는데, 이때부터 변 경문제를 다루게 된다.

중국이 말하는 ‘역사적인 변경 이란 무엇인가’ ? 쉽지 않는 문제이다. 1989년 중국 통 사에는 청나라 때 국경이 중국 국경이고 역사라고 나와 있다. 중국 소수민족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한다고 해도 문제이다 어떤 민족은 중국 밖에 있기 때문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몽골도 중국 역사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국 학자의 공통적인 결론은 담 기양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우랑하이 문제는 러시아와 관계이다. 중국에서는 우랑하이와 어떻게 통일하고 어떻게 되찾을까 하는 것들이 인터넷에 배포되고 있다. 중국의 이런 경향에 대해 몽골에서 주시 를 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랑하이는 몽골 국경 투바공화국이기 때문에 우랑하이가 중국의 역사이고 국경이면, 몽골은 당연히 중국의 역사이고 중국의 국 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몽골사 왜곡의 현황 10.

박원길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

청나라의 멸망 후 몽골족이 느꼈던 것은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정권이 붕괴되어 더 이 상 한족과 나라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공내전. (國共內戰)에 들어갔던 장개 석(蔣介石,Jiang jie shi)‐ ‐ 이나 모택동(毛澤東, Mao ze dong)‐ ‐ 모두가 느꼈던 점이며 그들의 이탈을 방지할 논리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몽골과 중화민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간에는 청나라의 성격에 대한

    ( )

논리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논리싸움에서 열세에 놓인 중화민국 이후 중화인민공( 화국 은) 55개 소수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논리구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 다. 그것이 바로 소수민족의 한족화(漢族化) 추진정책인 통일적 다민족국가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몽골사를 왜곡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다.

몽골족간사 의 편찬

1. (蒙古族簡史) (1985)

몽골족통사 의 편찬

2. (蒙古族通史) (1991)

전자판 몽골족통사 의 편찬

3. (電子版) (蒙古族通史) (2001)

몽골민족통사 의 편찬

4. (蒙古民族通史) (2002)

권본 몽골족통사 의 편찬

5. 10 (卷本) (蒙古族通史) (2004)

박교수는 1980년대 이후 각종 서적을 통해 몽골사를 왜곡하고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지 적하고, “몽골국의 학자들은 원대 역사를 몽골의 중국 지배사라고 간주하고 있다. 중화

(8)

인민공화국이 진정으로 원나라를 ‘통일적 다민족 국가 의 기원으로 간주한다면 그들이’ 정복한 영토보다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를 연구하여 인류에게 역사적 유산으로 제시해 주 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는 결론을 내린다.

몽골사에서 다루고 있는 흉노 돌궐 거란

. , ,

현재 몽골 국경 안에서 원시시대부터 흉노, 돌궐, 거란에 관한 많은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모두 몽골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동시에 중국에서도 모 두 중국사로 편입한 국가들이다.

몽골 최고의 고고학자와 학자들이 몽골사에 나타났던 각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 고 연구하여 발표하므로 해서 몽골사의 정체성을 더욱 단단하게 하고 있다. 최근 발굴된 몽골 원인을 발표하므로 해서 몽골의 역사가 북경원인보다 앞섰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흉 노와 돌궐 문화의 발전상을 통해서 중국의 속국이 아닌 당당한 제국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다.

몽골원인

1. ‘Mongolanthropus’

체벤도르지 몽골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소장

D. Tseveendorj ( )

흉노 수레의 특성 2.

에르덴바아타르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고고분과장

D. Erdenebaatar ( ,

국립 울란바아타르대 사회학부장) 중국의 수레와 흉노의 수레 차이를 발표하였다. 아울러 다른 두레와도 비교했는데, 중 국의 수레가 중후한 반면, 흉노의 수레는 기동력이 있었다고 한다. 중간에 프레젠테이션 이 잘 안 되어 중단되었지만, 나중에 자기 파일을 복사해 주었다. 여러 가지 고고학적 결 과와 현대의 수레에 대한 비교가 있었다.

에르덴바아타르는 역사연구소 고고학분야에서 1인자로, 영어도 잘하고 국제적 수준의 학자라고 한다.

(9)

돌궐 및 위구르시대 고고 유적 3.

바야르 몽골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D. Bayar ( ,

국립 울란바아타르대 고고학과 학과장)

실제 발굴에 참여한 빌게카한의 유적일 비롯한 돌궐과 위구르시대의 고고 유적에 대해 하나하나 사진을 보여주며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특히 빌게카한의 유적 발굴에 대해. 집중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이 유적을 처음에는 무덤으로 보았는데, 현재까지 연구결과로 는 무덤이 아니라 제사유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무덤과 같지 만 사람의 뼈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점은 돌사람이 서있는 유적과 같은 내용으로 앞으로 더 논의가 필요하다 돌궐 사람들은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

빌게카간의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

*

빌게카간과 부인의 돌상 - 여성은 허리띠를 매지 않았다.

비석 - 3조각이 났다. 초기 돌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아시아 특히 돌궐사에 중요한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 이전에는 룬문자 해석이. 안 되었는데 이 비가 발견되면서 해독이 가능해졌다, . 100여 년 전 발굴 시작하여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사서에도 돌궐 기록이 나오지만 비석이 큰 도움을 준다. .

빌게카간 무덤에서 나온 금관 : 5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유식을 즐기던 새 형

상이 앞에 나타나 있다.

은 사슴 : 빌게카간 무덤에서 발굴. 청동기부터 사슴은 숭상되었다. 돌궐의 기원도

사슴과 연관이 있다 사슴 굽 부분에 보면 꼽기 위한 뾰족한 것이 있다. .

금 컵과 용기, 접시는 아주 작다. 이런 유물을 보면 다른 돌궐 유물들과 같다.

금과 은 병 용기 손잡이에 새 형상이 있는 것도 있다, . . 은 기구 - 1800점 발굴.

황금 허리띠 귀고리 머리꽂이 기타 자세한 용도를 모르는 유물들 많다, , , .

돌사람들이 여러 점 나왔다 가부좌한 인은 아주 특이하다. 2 .

관에서 나온 굴테긴의 머리 상 년 체코 몽골 공동발굴단 발견 의 머리에 새 모

* (1958 ㆍ )

양이 새겨져 있다 형제 유적에서 같이 나왔다. .

룬문자 사료에 나타난 고대 한국에 대한 정보와 근년에 발견된 문자유물에 4.

대하여

바트톨가 몽골국립대학교 터키학과 학과장

Ts. Battulga ( )

룬문자 기록과 고대 한국사와의 관계

*

퀼테긴의 비석 넷째 줄에 뵈클리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고구려를 말한다. 이 부분이 한 국과 관계가 된다 대부분 연구자들이 언어학자들이기 때문에 뵈클리를 빼고 연구하는 경. 우가 많다. 뵈클리는 강성한 나라이고 돌궐과 관계를 맺었던 것도 분명하다, . 만주지방에 나라를 세운 나라가 돌궐과 힘을 합해 수당에 대적했다는 기록도 있다. 몽골에서는 고구 려와 관계에 대해 아직 큰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돌궐과 고대 한국과의 기사들은

(10)

찾을 수 있다 앞으로 중앙아시아와 연결하여 연구해야 할 것이다. .

몽골에서 새로 발견된 룬문자 개 룬문자 기록이 년 년간 새로 발견되

* - 63 2005~2006 2

었다 몇 가지만 보면 다음과 같다. .

문자유적 바얀홍고르에서 나왔다 공주에 대한 기록이 나왔는데 이름을

bumbugur : . ,

거꾸로 새겼다. 3사람이 합쳐 돌궐을 명망시켰다는 내용. 문자유적 고비지역에서 발굴 개가 발견되었다

Biger : . 8 .

작은 문자유적 고비알타이 바위그림 Shaakhar( ) : .

문자유적 사신이 지나간 기록 Altan Khad :

문자유적 바얀 얼기에 있는 기록 키르키즈시대와 관련된다

Tekht : . .

문자유적 첫 번째 달 같은 시기를 알려주는 글이 있다

Jirimün Hudag : .

앞으로 룬문자로 된 책도 발굴되기를 바란다 신장에서는 종이에 쓴 것도 나왔다 몽

* . .

골에서는 돌에만 쓴 것이 발견되었다 위구르 하르발가스 같은 성을 발굴하면 나올 수 있. 다고 생각한다.

거란족의 기원과 몽골국의 거란족 유적 5.

엥흐터르 몽골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A. Enktur ( )

년에 발굴된 성과를 바탕으로 발표하였다

2000~2005 .

일반적으로 거란은 유목민족이라 정착해서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거란인의 유적을 보면 정주한 곳이 많다 바로 거란인들의 성터가 그것을 얘기해 준다. .

몽골 지역에 있는 거란의 성터는 크게 지역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성을 집약3 . 적으로 발표하였다. ① Khar Byukhn, ② Chin tolgoy( 돌 같은 축조물이 있다.), ③

오글룩친 등

Ulan kherem, ④ (Oglugchiin Kherem) .

특히 친톨고이 거란시대 성은 금년 발굴에서 온돌이 나오고, 발해시대의 질그릇이 나와 발해의 유민들이 이곳에 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아울러 대회 이후 답사에서 이 성을 가. 보기로 되어 있어 관심이 컸다.

질문이 있었다

* .

요나라와 위구르 성은 어느 나라 성에서 이어진 것인가? 소그드나 발해 고구려 유민? 다른 곳에서는 돌로 쌓은 산성이 없는데, 요나라 성 가운데 돌로 쌓은 것은 진짜 요나 라 성인가?

국명에 대하여 세기 중반 세기

6. (14 ~17 )

엥흐체첵 몽골국립대 역사학과

D. ( )

몽골에 관한 여러 가지 칭호, 즉, 푸른 몽골, 유목 몽골, 대 몽골, 몽골 제국 같은 이 름들은 몽골인들의 존재를 표현해주는 것이고, 몽골인의 호장한 기상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다.

(11)

몽골( )元 이 멸망한 뒤 중앙집중적 권력이나 법률이 자체 세력 다툼으로 변화가 많았다. 이때 몽골은 어떤 나라이름을 붙였을까 이것이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이다? .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20여개의 호칭이 있다. 소위, 명대 몽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대신, 북원(北元)이 많이 사용되었고, 오이라트라고도 쓰인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명대 몽골’ 표현이 많다. 명나라에 소속된 것이 아니고, 명나라 시기의 몽골을 지칭했을 뿐이라고 하지면 결국은 명나라에 소속된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명대몽골 이란 국명이 나온 것은 당시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몽골 활동이 축소되

‘ ’ ,

었고, 세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몽골 역사를 기술하면서 일본이나 다른 나라. 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안타깝다.

최근에 이 시대 명칭에 대해 새로운 사료를 바탕으로 북원(北元)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 용되고 있다 약. 227년간 이어진다. 북원을 사용하면, 남원(南元)을 생각하여 두 개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아니고 그 전의 원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북원은 어떻게 나 왔는가? 1370년 아유시리다가 등극하면서 북원이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몽골식은 ‘오마르트 원’이라고 하는데 시기문제가 조금 다르다. 이것은 어느 한 시기 만을 가리킨 것 같다. 몽골과 외국 학자들은 쓰지 않지만 내몽골 학자들도 이 이름을 공 식적으로 사용한다.

세기 세기 까지 몽골의 여러 사서를 바탕으로 해서 볼 때 세기는 몽골이라는

17 19 , 14-17

표현이 많았다 몽골은 예전부터 이어왔던 조상들의 국명을 계속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

북위 요 금 원 나라는 중국사인가

. (北魏), ( ),遼 ( ),金 ( )元 ?

원( )元 나라가 중국사가 아니고, 몽골의 역사라면, 다른 민족이 한족(漢族)을 다스렸던 북위(北魏), 요( ),遼 금( ),金 청( )淸 나라의 경우도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이 문제는 그동안 고구려연구회 측에서 적극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학술적인 측면에서 깊이 있게 다룬다 즉. , 북위, 요 금, , 원 같은 이민족들이 한족(漢族)을 어떻게 통치했는가 하 는 점을 객관적인 사관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측 발표자

강선 숙명여대 강사 북방 선비 족의 한족 지배사 북위 를 중심으로 1. ( ) : (鮮卑) (漢族) - (北魏)

한규철 경성대 교수 발해 와 유목왕조의 교류 2. ( ) : (渤海)

서병국 대진대 명예교수 요제국 거란족의 한족 통치사

3. ( ) : - 漢契一體的中華思想 虛構性 批判

4.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 ) : 금나라 여진족의 한족 지배

주채혁 세종대 교수 나라의 한족 지배 원나라 관인층의 사회신분 분석을 중 5. ( ) : () (漢族) -

심으로

명의 한국 학자들은 모두 북위 발해 요 금 원나라를 중국사로 보지 않고 이민족

5 , , , , ,

이 한족을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하는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해 몽골 학자들도 큰 관심을 가졌다.

(12)

역사 분쟁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서 터어키 국제협력단

. TIKA( )

이번 학술대회는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각 시대의 현상을 정 확하게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국 학자들의 연구가 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분쟁을 만 들어내는 씨앗이 되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학술대회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상생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 미에서 몽골국에서 TIKA(터어키 국제협력단) 활동을 발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찾는 다.

몽골에는 돌궐(Türk)의 유적이 많다. 그리고 터키는 그 돌궐이 터키의 선조라고 본다. 그러나 두 나라는 돌궐 역사와 유적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분쟁을 하지 않고, 오히려 터키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몽골과 함께 돌궐 유적을 정비하고 공동으로 연구하는 프로그 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TIKA(터어키 국제협력단) 활동 을 발표하므로 해서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분쟁 해결을 위한 좋은 본보기를 공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몽골국에서의 터어키 국제협력단 활동

1. TIKA( )

A. Refik ÇETİNKAYA (TIKA 몽골사무소 소장)

호쇼차이담 빌게 카한 유적 울란바타르에서 떨어져 있는데 하라호린에서

1) : 365㎞ ,

유적까지 45㎞짜이 포장도로를 만들어, 2005년 7월 20일 개통하였고, 터키 수상이 직접 개통식에 참석하였다.

몽골국내 돌궐 유적 보존을 위해 유적을 복원하고 희귀하고 중요한 점 유물은 복

2) , 38

제품을 만들었다. 작년부터는 퀼테긴, 빌게카간 비를 탁본해서 복제품을 만들고 있다. 보 호 수장고는 박물관으로 활용된다. 원래 비석은 박물관 안으로 옮기고 복제품을 밖으로 세우게 된다. 올해 박물관이 완성될 것이다.

그 밖에도 두 나라의 상호 교류를 여러 가지 지원을 한다

3) .

터키학과에 교재와 기구를 티카에서 제공하고, 올해부터는 문화문제도 교육할 것

① 이다.

몽골 교육 분야에 참여하기 위해, 교육 혁명 지침서 4000부를 마련하여 배포하였

② 다.

몽골 교육부와 우수 교사를 터기에 보내는 프로그램 운영, 2006년 5 , 2007명 년 7

명을 파견한다.

바얀얼기 다르항 같은 곳에 학교 지었다, 4 .

몽골에 혈액은행을 만들어 지원한다.

종합토론 .

주로 ① 몽골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 ② 몽골에는 흉노,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 거란의 유적이 많은데 몽골역사로 취급하고 있는가? 그럴 경우 역사적인 국경은 어떤 기 준을 가지고 있는지?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깊이 있는 논의는 되지 못했다.

(13)

간볼드 선생이 ‘러시아 학자의 논의는 동호의 후손이다.’고 했다는 식으로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러나 돌궐, 흉노가 몽골사인가? 거란이 몽골사인가 하 는 것은 중요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토론이 끝나고 한 학자가 개인적으로 그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고, 앞으로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라고 의견을 제 시해 왔다.

주채혁 교수가 “원나라가 중국 역사냐 몽골의 역사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했을

때, 폰삭 고수가 “몽골 건국 800주년 기념으로 4권짜리 『몽골사』가 나왔는데, ‘몽골 의 원 이라고 해서’ , 원나라는 몽골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고, 그 뒤 내몽골 학자들도 기뻐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적봉이나 내몽골에 신석기 이후 유목민족의 유적이 많다. 비록 이런 것들이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안에 있지만 유목민의 역사임이 분명하지 중국의 역사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제안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몽골과 한국 학자들의 공동 논

의는 의의 있는 일이다. 앞으로 중국 주변의 여러 국가들이 힘을 합쳐 돌아가며 이런 대 회를 열어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중국을 성토하고 중국의 역사 왜곡에 주변, 국가가 모두 힘을 합쳐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번 학술대회의 의의 .

두 나라 역사학자들이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공동으로 대처하고 논의한 것은 처 1.

음 있는 일이다.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두 나라가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학술적으로 깊이 있게 공동 대처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한족 을 지배한 민족과 국가 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몽골의 사관을 통해 2. (漢族) ( )元

몽골이 어떻게 한족을 지배하였는가를 살피고, 그 밖에 한족을 지배했던 북위, 요 금 같, 은 민족들의 한족지배도 동시에 다루어 동아시아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로서 동아시 아를 지배했던 대 세력의 상호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3 .

그 동안 한국에서 북방사를 연구한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 성과를 북방의 현지 학자들과 토론을 통해서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관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든다.

중국사와 가장 많이 겹치는 역사를 가진 몽골에서 처음으로 전반적이면서 세부적으 3.

로 중국의 역사 서술과 그 왜곡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비판하게 되었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