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실천을 모색하는 대학 글쓰기 교육 방안 연구* 1)
김주언
<목 차>
1. 머리말
2. 인문학적 사고를 실천하는 글쓰기 학습 모형: 물음의 인문학으로 구
성하는 문제틀
3. 텍스트 모델 구조화하기
4. 인문학적 실천으로서의 글쓰기의 실제 5. 맺음말
<국문초록>
이 연구는 대학 글쓰기 교육의 위상 제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 논문 은 글쓰기 교육을 외국어 교육과 마찬가지로 의사소통교육 정도로 분류하고 있는 한 분류기준표에 문제를 제기하며 출발한다. 나아가, 이 연구는 인문학적 사고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글쓰기 학습의 한 실제 모형을 제시한다.
이러한 학습 모형은 인문학의 요체를 다름 아닌 물음에서 찾는 ‘물음의 인문학’
* 이 연구는 2014년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의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대분류 중분류
가 기초교육 영역
1 사고교육 (논리학/ 수리적 사고/ 통계적 사고/ 비판적 사고 등)
2 정보기술교육 (컴퓨터 교육 등)
3 어문 교육(1): 한국어 의사소통교육 (읽기/ 글쓰기/ 말하기 등) 4 어문 교육(2): 국제어 의사소통교육(A) 영어 (읽기/ 글쓰기/
말하기 등)
5 어문 교육(3): 국제어 의사소통교육(B) 기타 외국어 (읽기/ 글 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문제틀의 구조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의 기본 형식 이기도 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학습 모형이 인문학적 실천을 모색하는 데 유용한 학습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사례글들을 통해 논증하고자 했다.
이런 인문학적 모색들이 축적될 때 대학의 글쓰기 교육은 명실상부한 교양 교육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이 연구는 판단한다.
주제어 인문학적 실천, 글쓰기 교육, 물음의 인문학, 억압적 탈승화, 실재계, 교양, 문제틀.
1. 머리말
대학 교양교육으로서의 글쓰기는 최근 10여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교양교육 에서 논리적 사고나,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같은 사고력 향상 교육은 글쓰기 교육 과 연동되어 추구되었고, ‘이공계 글쓰기’나 ‘과학적 글쓰기’ 같은 글쓰기 교육 자체 내에서의 분화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양교육 종사자들이 참여하는 전문 학회들도 창립되었고, 대학 교육 현장에 새로운 교육 인력의 수요도 창출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대학 교양교육으로서의 글쓰기 교육은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인문학적 사고 를 실천하는 글쓰기 학습의 한 실제 모형을 제시하고자 하는 데 연구 목표가 있는 이 연구는, 글쓰기 교육의 위상을 간단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 분류기준표에서 출발하고 자 한다.
쓰기/ 말하기 등)
6 어문 교육(4): 동서 고전어교육(한문, 희랍어, 라틴어 등)
7 (기초) 과학교육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등)
나 심화교양 교육영역
1 자연 및 과학에 관한 탐구 2 기술의 본성 및 성과 탐구 3 인간의 본성과 조건 탐구 4 문화현상과 현대문명의 탐구 5 사회적 현실의 탐구 6 역사적 현실의 탐구
7 인륜성의 탐구와 도덕적 추론 8 종교적 가치의 탐구
9 미학적 가치의 탐구 10 기타·융복합적 주제의 탐구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제시 교양기초교육영역 구성표(다.비학술적 체혐교육 영역, 라.
도구적 실용지식교육 영역은 생략)>1)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일명 ‘대교협’) 산하 기구이다. 대학 교 양교육 프로그램의 구조조정에 대한 컨설팅을 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한국교양기초교 육원이 제시하는 위 분류기준표에 의하면 대학의 교양교육은 ‘기초교육’과 ‘심화교양 교육’으로 대별된다. 글쓰기 교육은 어문교육의 일종으로 파악되고 있고, 한국어의 어 문교육은 영어의 읽기, 글쓰기, 말하기 등과 더불어 의사소통 교육으로 분류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외국어 교육이 커뮤니케이션에 초점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하기 어렵다. 그러나, 10년 이상 모국어를 학습받은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의 사소통’ 중심의 한국어 쓰기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 다. ‘국어’, ‘영어’가 ‘국‧영‧수’에서 나왔기 때문에 항상 한 단위의 묶음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면 몰라도 이런 식의 편의적인 분류법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설령 ‘의사소통’이
1) http://konige.kr/info/simpleSearch.php#
끝내 문제라고 하더라도 의사소통에도 다양한 수준과 차원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글 쓰기 과목은 인문 교양의 본령에 충실해 ‘나’항의 ‘심화교양교육 영역’을 글쓰기의 대 상으로 취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글쓰기 교과목은 ‘기초과목’인가, ‘심화교양과 목’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위의 분류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학에 서의 글쓰기는 ‘교양’ 과목도 아닌 ‘기초’ 과목 정도에 그친다는 인식을 사회적 통념으 로 수긍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연구는 글쓰기야말로 인문학적 실천을 주요 내용 으로 하는 교양 과목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 대학에서의 글쓰기 수업 사례의 한 모형을 제시하며 설득하고자 한다.2)
교양교육의 본래 취지를 인문학에서 찾는 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교양인을 양성하기 위한 일반교육이 바로 인문학이었다. 주지하듯이 인문학은 파이데이아(paideia)와 후마니타스(humanitas)가 개념적 기원인데, 파이데이아가 교 육 혹은 학습의 뜻이라면 후마니타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이 인문학이 교양교육의 의미로 확장된 건 2세기 무렵, 로마의 수필가 겔리우스에 와 서라고 한다.3)교양은 파이테이아였으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대에 이르면, 교양 이 몸과 마음의 이상적인 구현, 덕과 아름다움의 일치, 문화이상을 뜻하게 된다.4) 교 양은 물론 시공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자기변모를 거듭한다. 교양 교육의 개념도 엄밀 히 말하자면 본질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성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담화공동 체에게 수긍될 수 있는 개념의 새로움은 어떤 주관성이 멋대로 부여하는 자의적인 모 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새로움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 리는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분류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현대 교양론을 일본 학계 에서 펼치고 있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논의를 주목할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에게는 무엇이 현대의 교양과목이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는 교양을 기본적으로 테크네(techne)와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두 개의 개념축
2) 대학 글쓰기 교과목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과 가능성을 다름 아닌 인문 교양의 본래 의미에서 찾고자 한 논의로는 김주언의 「교양 없는 시대의 교양으로서의 글쓰기―대학 교양 교육으로서의 글쓰기 과목의 방향 설정을 위한 모색」(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34집,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2007.3)이 있다. 그 러나 이 연구는 교과목의 학습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세목보다는 교과목의 포괄적인 정체성 탐구에 주력한 논문이다.
3) 김경집, 인문학은 밥이다, 알에이치코리아,2013,4면.
4) 이왕주, 교양의 탄생, 한길사,2009,43면.
에서 분류하고 사유한다.5) 교양학부를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아트 앤 사이언스(art
and science)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 그리스 어에서 유래된 테크네와 에피스테메를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테크네는 ‘기능(‘기술’보다는)’ 정도의 의미이고, 에피스테메 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런 분류 관점을 유지하는 다치바나 다카시에게는 한편으로는 기능 교육으로서의 대학 교양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 교육으로서의 대학 교양 이 있는 셈이다. 그에 의하면 외국어 습득은 거의 테크네에 해당되고, 자국어의 읽고 쓰는 능력은 에피스테메와의 복합적인 능력이다.6)이렇게 교양의 현대적 변용 개념을 모색하는 입장에 비추어 보더라도 글쓰기를 외국어 습득과 나란히 ‘나’항의 인문학적 콘텐츠와 별도로 구별짓는,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제시하는 분류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는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실천의 글쓰기 사례로 문제제기를 한다. 분류는 중요하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통째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절 단위로 인식하며, 그 인식이 분류로 표현되고 그 표현은 통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의 첫 머리에서 동물을 분류하고 있는 중국의 한 백과사전을 인용하고 있는 대목7)은 분절의 자의성을 폭로하는 인상적인 사례로 우리 에게 기억된다. 이 연구는 푸코처럼 엄청난 도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소박 한 문제제기가 축적되어 결국 글쓰기 교육에 대한 인식의 지형도가 변화하는 데 기여 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2. 인문학적 사고를 실천하는 글쓰기 학습 모형: 물음의 인문학으로 구성하 는 문제틀
구성주의 관점에 의거한 과정 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지향한다고 할 때, 글쓰기 학습 자에게 글쓰기는 먼저 스스로의 사고활동과 탐구정신에 의거해 의미를 구성해 가는 과정이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즉 구성 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맞추는 직물적
5) 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이정환 옮김,청어람미디어, 2003, 269-70면.
6) 위의 책,271-72면.
7) 미셀 푸코, 말과 사물,이광래 옮김,민음사,1995,11면.
단계가 그것이라는 것이다.8)달리 말해 벤야민에게 좋은 글을 쓰는 과정이란, 단어나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적으로’ 직물 구성물 같은 텍스트에 실천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수자는 인문학적 사고를 실천하는 글쓰기 학습을 위해 먼저 구성적 단계에서 형식적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 이 형식적 조건은 사고하 기의 조건을 간섭하고 규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첫 번째로 주어지는 조건은 첫 문장을 물음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문장을 물음으로 시작하 는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그 다음 문장부터는 물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해결의 사 고과정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적 구성은 자연스럽게 사고력 신장 의 글쓰기로 귀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물음을 묻는 정신이야말로 실은 인문학 적 정신의 요체이고 본령인 것이다.
베네트는 “인문학은 우리 문명과 다른 문명들에 속한 남녀들이 어떤 방식으로 영원 한 질문들 즉,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을 귀중하게 아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 등의 문제들과 어떻게 부딪쳐 싸워왔는가를 말해 준다.”9)고 하지만, 인
문학에 관한 한 베네트의 이런 생각은 독창적인 견해라고 보기 어렵다. “모든 학문의 근본은 이러한 마음의 각성에 있다. 학문의 출발은 주어진 사실의 사실성에 대하여 의문을 발하는 데 있다. 그러면서 이 물음은 물음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이 재귀 적인 물음이 인문학적 질문의 본질에 자리해 있다.(…) 여러 난점들이 있음에도 오늘 의 인문학, 인간과학의 주된 과제는 좁게는 물음으로서의 인간을 상기시키며, 더 넓게 는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의 신비를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시대의 좀더 바른 인간 적 건설에 이바지하는 길을 여는 일이다.”10)라고 말하는 김우창은 물음 자체를 심도 있게 탐구한 경우이다. 1970년대에 쓴 글에서 김우창은 역사의 단계에서 인간적 실천 의 원리로서의 주체성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실천적 예지를 가질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 바로 물음이라고 주장한다.11)
인문학의 본질을 물음에서 찾는 지적 흐름은 다른 인문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8)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7,56면.
9) 윌리엄 베네트, “To Reclaim A Legacy”, 1984:정대현 외, 표현인문학, 생각의나무, 2005,20면에서 재인용.
10) 김우창, 「인간에 대한 물음—인문학의 과제에 대한 성찰」, 새로운 인문학을 위하여, 경상대 인문학연 구소,1993,43-44면.
11) 김우창, 「물음에 대하여」,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1977,411-24면.
있는 공통된 어떤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동일에게도 인문학은 무엇보다도 물음 의 학문이다. 최한기의 추측론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자 하는 조동일에게 인문학은 ‘학문학’인데,12) 학문이란 다름 아닌 배우고 묻는 것을 뜻한 다.13)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란 질문하는 능력의 확장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대 학에 인정하는 높은 특권 그 이상이 아니라는 도정일14)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 다. 그에게 인문학적 사고능력은 무엇보다도 어떤 기본적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이다.15) 요컨대 인문학은 답을 가르쳐주는 학문이 아니라 질문하는 힘 을 길러주는 학문인 것이다.16)그런데 이러한 인문학에 대한 이해의 흐름은 ‘교양’에 대한 전통적 이해의 흐름과도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놀드에 의하면 “교 양이란 우리가 관심을 갖는 모든 문제에 있어 세계에서 생각되고 말해진 최상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전면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 지식을 통해 고정관념과 습관에 신선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물줄기를 갖다 대는 것”17)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사고를 실천하는 글쓰기의 첫 번째 조건으로 첫 문장을 물음으로 시작해 보라는 학습 요구는 인문 교양의 핵심 과제를 집약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 다. 물음으로 시작하는 글쓰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물음이란 문제에서 발단하는 것이 고, 그것은 주어진 세계를 괄호 속에 넣고 그것의 부정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18) 물음은 결국 학습자의 삶과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인데, 뚜렷한 문제의식 없이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바쁜 학생들에게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 자체가 버거운 도전일 수 있다. 이런 학생들을 문제적 정황에 노출시키기 위해 교수자는 문제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문제(problem)란 무엇인가. 일단 우리는 우리가 겪는 여러 사건들과 의미 가운데서
12) 조동일, 「인문 학문의 사명」, 서울대학교 출판부,1997,223-27면.
13) 조동일, 우리 학문의 길, 지식산업사, 1996,167-90면 참조;정대현,「물음과 이성 규범의 내재적 이해」,
맞음의 철학,철학과현실사, 1997,364-78면 참조.
14) 도정일, 「여행자 이야기—신입생을 위하여」, 씨네 21 292호,2001.3.17.
15) 도정일, 「실천인문학의 한 방법—사고와 표현은 왜 중요한가」, 사고와 표현학회 학술대회 발표집,한국 사고와 표현학회 창립 학술대회,2007,10면.
16) 김경집, 앞의 책,9-10면.
17) 매슈 아놀드, Culture and Anarchy,1869:유종호, 「인문주의의 허와 실」, 유종호 전집 5:문학의 즐거 움, 민음사,1995,321면에서 재인용.
18) 김우창(1977), 앞의 글,424면.
무언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필요한 것을 다른 것들과 구별해 ‘문제’라고 부른다.19) 연세대학교의 글쓰기 교재는 문제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 즉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문제의 종류를 해결이 가능한 대 안을 요구하는 문제와 가치 평가를 요구하는 문제로 구별하고 있다.20) 또, 가톨릭대 학교 교양교육원이 펴낸 분석과 창의적 문제 해결을 보면 문제란 그것이 어떤 상황 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다소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서, ①시험 문제와 같이 어떤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라는 의미에서 ‘문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②실제 삶에 서 발생하는 어떤 골칫거리를 해결한다는 뜻에서 ‘풀어야 할 과제’라는 의미로 쓰기도 하고, ③사람들 사이에 조정이 필요한 의견 충돌이 있을 때, ‘논쟁을 일으키는 이슈’라 는 의미로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여러 상황의 경우에 따른 ‘문제’의 쓰임을 나열 하고 있다.21) 끊임없는 이런저런 문제 상황의 연속이 삶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문제 앞에 노출되어 있는 문제적 상황 속에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실천으로서의 대학 글쓰기 교육에서 다룰 만한 문제는 역시 ‘정답’을 요구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골칫거리’이고 ‘이슈’가 되는 문제가 해결을 요구하는 의미 있는 문 제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 주변에서 문제의식을 발견해 그것을 문제로 발전시 키는 동력과 문제에 대한 접근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삶의 주변을 성찰적으로 탐문하는 에세이나 일기는 문제를 발견하는 글쓰기로서의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에세이나 일기를 한 편 쓰되, 다만 첫 문장을 물음으로 시작해 보라는 요구를 학습자에게 글쓰기 학습 내용으로 부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글쓰기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 당위는 누구도 쉽 게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기도 하다.22)
그러나 단지 물음을 제기하고 문제 해결의 사고 과정을 보여 주는 글쓰기만으로 인 문학적 실천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물음이 물음의 대상이 되는 세계의 부정
19) 연세대학교 국어교육위원회, 글쓰기와 삶,연세대학교 출판부,1992,25-26면.
20) 신형기 외, 글쓰기,연세대 출판부,2003,108면.
21)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분석과 창의적 문제 해결,가톨릭대학교 출판부,2005,15면.
22) 벤야민은 「작가의 기술에 관한 13개의 테제」에서 아홉 번째로 ‘단 한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할 것’(Nulla dies sine linea)이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인 폴리니우스가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에 대해 서술한 말에서 유래하는 성구라고 한다.(발터 벤야민,앞의 책,67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도저한 파괴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구조를 좀더 정교하게 조직할 필요가 있다. 물음의 인문학을 실천하는 글쓰기는 어떤 글쓰기 보다도 고정관념, 굳어진 가치관, 주류적 통념에 도전하는 글쓰기여야 한다. 이런 글 쓰기 실천의 구체적 가이드라인으로 특정 문장의 삽입을 글쓰기 구성의 필요 조건으 로 요구할 수 있다. 즉 물음표로 시작하는 글의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 혹은 두 번째 단락의 첫 문장을 ‘그런데(그러나) 과연 그럴까(?)’라는 반전의 문장을 반드시 삽입하도록 하는 형식적 요건을 인문학적 글쓰기의 규약으로 조건화할 수 있다. ‘그런 데 과연 그럴까’라는 문장은 그 문장 앞에 오는 모든 내용을 부정하고 의문에 부치는 전략적 전복의 힘을 내장하고 있다. 이 문장 다음에 놓이는 글의 내용은 불가피하게 그 이전의 내용에 반하는(against) 반전의 내용이 배치될 수밖에 없다. 이 배치를 좀 더 구조적으로 설명해 보자.
먼저 첫 문장을 물음으로 시작하는 일기(에세이)를 두 개의 단락으로 쓴다. 두 개의 단락 사이에는 일종의 연결사로 ‘그런데 과연 그럴까’라는 문장이 삽입된다. 이렇게 되면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앞의 첫 단락은 주류적 통념, 전복될 만한 허위의 상식, 진리와는 무관한 고정관념 같은 것이 놓일 수밖에 없고, 뒷 단락은 앞 단락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내용 구성이 불가피하게 구조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쓰기 구성에서 앞 단락을 ‘A’, 뒷 단락을 ‘B’라고 약호화해서 학습자들에게 익숙한 문법구조로 도식화시켜 말하자면 <not A but B>라는 편의적 명칭의 소통모델로 명명 할 수도 있겠다. 기실 A 대(對) B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의 기본 형식이기도 하 다. 모든 비판적․창의적 사고는 항상 무엇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not A but B> 구문의 문제틀(problematic)이 성립하는 셈인데, 이제 문제는 이 문제틀이 과연 얼마만한 수준의 인문학적 훈련을 겨냥할 수 있는 도구인가 하는 것이다.
3. 텍스트 모델 구조화하기
학습자들에게 <not A but B> 구문의 문제틀을 실감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실례의 텍스트 모델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시를 위한 모델은 어디까지나 시사적이고, 분명하
게 의식화되어 있지 못한 잠재적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주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모델 속에 있는 무슨 정답을 찾아 그것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훈련이 결코 인문학적 훈련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질문의 인문학은 답을 닫힌 텍스트 안에 가두는 학문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학습 주체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문 제를 제기하여 문제 해결에 이르는 단계에서 도움을 줄 만한 전략적 소통모델로 3편의 모델글을 골랐다. 3편 모두 ‘그런데(그러나) 과연 그럴까’ 의 구문이 등장하여 앞‧뒤 단락을 A 대 B의 구조로 갈라놓은 경우이지만, 첫 문장이 물음으로 출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모델글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첫 문장을 물음으로 시작한다고 할 때 가능한 상상적 구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질문을 능동적으로 구성 하는 학습이 되기도 한다.
(가)우리는 왜 쓰는가?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와 처지는 저마다 다르다. 사르트르는 당 신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쓴다고 했다.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한 카프카에게 글쓰기의 동기와 목적은 좀더 충격적인 것이겠다. 이러한 작가들의 경우처럼 글을 쓴다는 일이 도전적인 행위라면, 도전의식으로 충만되지 않 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글쓰기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면 넘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선, 현실적으로 사고를 하자. 글쓰기의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 사르트르나 카프카 같은 작가가 아니어도 우리는 프린터를 한 대 정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글을 출력해 보고 있다. 게다가 오늘도 어김없이 메일링을 하며 글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쓰고 말았 을 것이다. 이런 글쓰기가 물론 사르트르나 카프카의 경우처럼 사회성이 있는 그런 것은 아 닐 터이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는 사르트르나 카프카가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우리가 그들 이 아니어도 쓴다는 사실이다(써야 한다거나, 쓰고 싶다거나가 아니고). 우리는 쓴다, 그러므 로 우리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쓴다는 것은 이제 삶의 한 조건이 되 고야 말았다. 어떤 이유나 목적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쓰게 되는 이런 상황으로의 전환 이 일단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글쓰기의 환경 변화이다.23)(밑줄 강조:인용자)
글쓰기의 목적과 동기에 대한 학습은 글쓰기 수업 초반부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 부분이다. 글쓰기 수업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학습에서도 학습자에게 동기부여하는
23) 단국대 글쓰기기초편찬위원회, 글쓰기 기초, 단국대 출판부,2008,11면.
과정이 필수적인 코스일 것이다. 그러나 특히 대부분의 학습자들이 글쓰기에 대한 의 지나 동기 같은 것이 전무하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희박한 수준에서 글쓰기 교육이 실행되고 있는 처지를 고려한다면, 글쓰기 교육은 특히 동기부여가 절반의 성공을 좌 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기 자체가 자기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위 모델글은 글쓰기의 이유나 목적을 억지로 부여한다기보다는 의식적인 차원에서 미처 모르고 있 는 글쓰기의 상황을 밝히고자 한다. 글쓰기를 단지 멀리하고 특별한 행위로 치부하기 에 급급한 기피현상의 고정관념을 ‘그런데 과연 그럴까?’로 의문에 부치고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도전을 유도하고자 한다. A단락은 목적어를 취하는 타동사적 글쓰기가 관념으로 존재한다면, B단락은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적 글쓰기가 우리의 현실로 존재한다고 이 글은 말한다. 글쓰기가 특별한 동기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행위라는 관념에 갇혀 있다면, 한 발짝도 글쓰기에 다가갈 수 없다. 따라서 글쓰기 학습을 위해서는 글쓰기를 특별한, 예외적인 행위로 치부하는 통념부터 타파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 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 뻣뻣하게 서 있는 내가, 벽에 머리 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 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끊임없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할 때 ‘국·영·수 해야지’ 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알고 소스 라치게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범생이도 아니었던 내가 그럴 정도라 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 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 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 는,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 (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와 같은 전체인구의 1%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 같은 일의 기계적 반복이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 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
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 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는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 그 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의 일부로 살다 간다.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엄청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한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을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 간다. 나는 호모 루덴 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 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 일상적이 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 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24)(밑 줄 강조:인용자)
이 글도 또 하나의 모델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글이다. 이 글의 경우, 첫 문장 을 어떤 물음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인문적 리터러시 공부의 시작일 수 있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정도가 첫 문장으로 와야 글의 의미 맥락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이 본래 있었던 자리에서 생각한다면 ‘나는 왜 로키 산맥을 오르는가’ 정도가 타당할 것이다. 자전거로 아메리카를 횡단하는 길 위에 서 홍은택은 쓰고 있다. <not A but B>라는 비판적‧창의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우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논점을 먼저 정리해 보자. A단락의 키워드가 호모 파베르와 일이라 면, B단락은 호모 루덴스와 놀이이다. 호모 파베르가 주류적 통념에 해당한다면 호모 루덴스는 이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대립항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호이징가가 이미 있는 이상 호모 루덴스의 개념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롭고 창 의적인 것일 리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호모 루덴스는 홍은택의 글의 맥락에서 재맥락
24) 홍은택, 아메리카 자건거여행,한겨레출판,2006,286-88면. 인용은 원문을 가감없이 인용하되, 텍스 트 모델화를 위해 단락 구성은 필자가 임의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화되면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적절한 지식의 개입이 글의 신뢰도를 높이고 탄탄하 게 한다는 실례로도 이 글은 교육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다. 호모 파베 르론을 펴면서 근대화의 집단적 무의식과 자본주의의 의식화를 거론했고, 호모 루덴 스의 논거로 니체의 말이나 자원의 고갈 문제까지 논급했다. 학술적 글쓰기가 아님에 도 불구하고 멋대로 주관적 상상력을 펼치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분석적 지식을 동원 해 논지의 설득력을 높이는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가장 큰 교육적 가치는 글 내용 자체에 있다. 교양교육으로서의 글 쓰기 교육은 주로 대학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데, 입시지옥에서 해방된 학습자들은 대부분 ‘놀아야 한다’는 그들의 강박적 이데올로기에 시달리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가 단지 억압적 탈승화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 까. 놀아도 이렇게 노는 인문학적 수준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에게는 플레이보이가 아니라 이처럼 노는 데도 격이 있는 호모 루덴스라는, 학습자들 에게는 낯선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홍은택의 글은 <not A but B> 구문을 학습하는 학습자들에게는 오해를 줄 수 있는 소지도 있다. 홍은택 글의 A항과 B항의 배치를 어떤 문제의 장점/단점,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식의 배치 정도로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음의 인문학을 통해 비 판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훈련하는 <not A but B>의 문제틀은 단순한 이분법적 명 암을 도식적으로 대조시켜 보는 훈련이 아니다. A항과 B항으로 어떤 문제의 장점/단 점, 긍정적인 면/부정적인 면이 설정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설정의 형식 적 가능성이 아니다. 내용적으로 B항은 A항의 주류적 통념에 거슬리는 비판적이고 창 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25) 그러므로 <not A but B>의 문
25) <not A but B>가 단순히 이분법적 명/암이나, 장/단의 대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좀더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교수자 입장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not A but B>를 <not only A but also B> 정도로 착각하는 경우를 바로잡는 것도 중요한 교수 내용의 일부를 이룬다. 역시 풍부한 실례를 제공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런 의미에서 서준식의 글도 참고가 될 수 있어 본문의 지면 관계상 각주에서 인용해 본다.
(…)“미래의 크고 빛나는 약속보다 오늘 하루의 작은 진실을….”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이런 말에는 선뜻 찬성하기 힘들다. 인간에게는 큰 이상과 유토피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역사와 사회에 맹목적인 자잘한 소시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바로 눈앞밖에는 ‘골치 아프
제틀을 통한 글쓰기 학습은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그러나 이 이상은 어떤 문제에 대해 대중적 의견을 간단히 추종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자기만의 생각으 로 비로소 한 명의 사유하는 주체가 되는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4. 인문학적 실천으로서의 글쓰기의 실제
물음으로 시작하는 <not A but B>의 글쓰기는 웹보조 수업으로 주어지는 이러닝 캠퍼스(e-learning campus)에 행해졌다. 먼저 한 학습자가 글을 쓴 다음, 누군가가 답글의 형식으로 같은 문제를 공유하되, 전혀 다른 사고와 문제 해결을 보여주는 글쓰 기가 글쓰기의 규약으로 주어졌다. 이런 규약을 통해서 적어도 한 문제에 두 가지 이 상의 다른 관점과 해결이 가능하다는 사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나아가 업 그레이드 버전을 허용함으로써 끊임없이 비교 우위를 다투는 글쓰기 게임을 유도하고 자 했다. 이러한 ‘게임’으로서의 글쓰기는 글쓰기 수업에 대해 흥미를 갖게 하는 전략 이기도 했다. 아래의 글을 인용할 만한 우수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가)내가 보는 세상이 원래의 세상인가?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은 내가 체험하는 것 에 의존한다. 다른 동물이 같은 현상에 대해 어떻게 경험하는지 그 동물의 육체가 되지 않고 서는 완전히 알 수가 없다. 그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사물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아서 눈앞에 사물이라고 인지한다. 이처럼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감각 에 의존하여 보이는 대로 사물을 판단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감지된 사물을 의심 의 여지없이 느낀 그대로의 것으로 인지한다. 내가 보는 세상을 원래의 세상이라 한다. 그런 데 과연 그럴까?
과연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느낀 그대로의 것일까? 여기서 함정은 감각이다. 인간 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종류와 정도에 따른 한계가 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직 정의하지
다’며 한사코 보지 않으려는 소시민이 간직하는 ‘진실’이란 아무리 그럴듯해도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거시적으로 볼 때 엉뚱한 이기주의요 죄악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미래의 크고 빛나는 약속을, 그리고 오늘 하루의 작은 진실도…”라고.
이와 비슷한 말이 또 생각난다. 휠덜린의 ≪히페리온≫이라는 작품 속의 말. “가장 큰 것에도 눌려 굴복함이 없이, 가장 작은 것에도 기쁨을 찾아내는….” 우리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 보지 않겠 는가? 예수는 그 정신 속에 양과 호랑이를 아울러서 가지고 있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밑줄 강조:인용자) (서준식,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야간비행,2002,446-47면)
않은 감각이 있을 수도 있고 상어와 같이 전기를 감지하는 감각을 지닌 동물도 있다. 또한 매는 뛰어난 시각으로 다양한 색채를 볼 수 있지만 인간은 그보다 뒤떨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다. 원래 존재하던 세상과는 다르게 인간의 감각을 통해 한층 걸러서 들어온 정보를 바탕 으로 인지한다. 오로지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판단한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안과 우물 위에 부분적인 하늘만이 본래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구에 다함께 어울려 사 는 자연물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인간의 시선을 넘어 다른 자연물의 시각에서 더 다채롭게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는 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것이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미래에 박쥐가 초음파를 통해 장 애물을 감지하는 원리를 적용한 기계를 만들어서 밤길이 어두운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나)내가 사는 세상이 정말 내 세상일까? 어떻게 보면 기이할 수도 있는 질문이다. 내가 사는 세상은 무엇이고 실제 세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시각과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자극을 인지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 자극과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우리의 관점으로 재해석 하여 우리 나 름대로 세계를 인지한다. 여기서,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정말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각에서 가시광선 외의 영역을 인지하지 못하고, 청각에서는 가청주파수 이외의 음 파를 감지하지 못한다. 또한 아주 미세한 촉각적 자극을 인지하는데도 한계가 있으며 미각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실제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과 큰 차이가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실제의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다시 갖으면서 나는 실제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진정한 실제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란 신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외에는 없을 것이다. 신이라는 형이상적 존재의 실재를 배제하고 생각해 본다면, 과연 실제 세계는 누구관점에서 의 세계라 말해야 할지 의문이다. 결국 실제 세계라는 개념 또한 우리들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절대적인 실제 세계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 즉, 절대적인 실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세상은 허구만 존 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가? 이에 따라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결국, 나는 자신이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 세상이 자신에게 주관적인 실제 세상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세상에 절대적 기준이 없는 만큼 내 기준에서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주관적으 로 내가 받아들이는 실제 세계라고 생각한다.26)
26) (가)와 (나)의 학생 글에서 어문규정의 틀림을 바로잡지 않고 실상 그대로 옮긴다.
교양은 항상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형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 을 서술하고 자신의 행동 근거를 대는 범주들을 살펴보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다. 이 범주들에는 자아정체감, 역할, 심리, 감성, 고뇌, 감정, 의식, 무의식적 모터프, 억압, 보상, 이상 따위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주도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자아성찰의 첨단화된 형식들에 접근할 통로를 확보할 수 없 다.27) (가)와 (나)의 글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형식으로서의 이런 범주에 관한 글 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는 A단락에서 “내가 보는 세상을 원래의 세상”이라고 하고, B단락에서는 이런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세상을 원래의 세상이라고 확정지울 수 없다 고 한다. 일단 세계는 ‘나’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유한한 경험, 체험, 감각의 세계는 세계의 전부일 수 없다. 그것을 전부로 오인하게 하는 것은 유아론적 세계, 자아중심주의적 세계, 인간중심주의적 세계의 환상일 뿐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체험과 감각과 같은 문제를 보다 심오한 사유의 문제로 치환한다면 이는 근대 코기토 에 대한 반성을 함축할 수도 있는 문제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나)의 글은 (가) 글의 압도적인 문제제기에 힘입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A단락까지만 보면 자신만의 그럴듯한 견해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면서 (가)글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B단락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가)글보다 훨씬 발본적이고 근원적 인 것이다. (가)글의 요지는 인간은 주체이지만(A), 객체에 불과하다(B) 정도로 요약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지만, (나)글은 도대체 ‘실제 세상’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도저하 다. 주관적 충족감으로 구성되는 상상계(the imaginary)나 이런 충족감을 분할하면서 기본적으로 착각과 오인으로 구성되는 상징계(the symbolic)와 달리, 대상 자체의 세 계를 실재계(the real)라고 한 라캉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학습자는 사실 라캉 식의 사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가)와 (나)글의 주인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 부이고, 보이는 것에 모두 안달인 비주얼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 영상의 시대에 이런 사유를 한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not A but B>의 글쓰기에서도 물론 교수자의 피드백이 글쓰기 결과물의 수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피드백은 그야말로 ‘인문학적’ 수준에서 행해져야
27) 디트리히 슈바니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 인성기 외 옮김,들녘,2004,690면.
한다. 맞춤법, 띄어쓰기를 손보거나 아니면 이보다는 조금 진화된 형태로 스타일이나 수사를 교정하는 정도가 ‘인문학적’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음으로 시작하는 글쓰 기를 하는 학습자들은 대개 서둘러 문제를 미봉하고 긍정적인 해결책으로 ‘바람직한’ 종결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독사(doxa)로부터 해방되어 비판적․창의적 사고 를 겨냥하는 문제적 사고는 결코 쉽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을 볼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바람직한 사고는 대부분 규범적인 사고로서 그 동안의 제도권 교육을 통해 학습된 도덕적 상상력의 되풀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상 무효에 가까운 해결을 찾기보다는 문제적 상황을 견디고 좀더 끈질기게 문제의 진면목에 접근하게 하는 일 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인문학적’ 수준의 피드백은 또한 교수자의 폭넓은 인문적 소양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예컨대, “대학생에게 진정한 자유 란 무엇인가?”, “방황은 나쁜 것인가?” 같은 첫 문장의 물음으로 시작하는 글쓰기가 있다고 할 때, 이 글쓰기를 피드백하는 교수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나
파우스트(괴테)를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쓰기는 읽기의 이면이 고, 좋은 글을 읽어보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도 없다는 명제는, 교수자에게 먼저 엄격하게 요구되어야 할 글쓰기의 진리일 것이다.
5. 맺음말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한 인문학 서적은 프롤로그에서 “사뭇 인문학 열풍이다.”28) 고 첫 운을 떼고 있다. ‘사뭇’이라는 부사는 기왕의 ‘인문학’에 대해 이 저자의 인문학 이 견지하고자 하는 비판적 거리로 읽힌다. 인문학은 물론 문(文)‧사(史)‧철(哲)로 대표 되는 학문 범주일 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적 범주에 축소시키기에는 넓은 질적 범주의 학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이 결국 인간학이라면 인문학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새로운 정의와 이념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문학의 민주화는 앞으로 인문학의 ‘열풍’이 과연 어떤 내실로 이어 졌는지에 대한 검토와 검증을 불가피한 인문학의 과제로 부상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과제는 지금은 벅찬 추후의 과제에 해당하겠지만, 오늘날의 ‘열
28) 김경집, 앞의 책,4면.
풍’ 속에 있는 인문학들은 그것이 외화내빈의 거품이 아니라면, 가령 김예슬 같은 경 우에 대해서도 어떤 입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지금은 잊혀지고 있지만 그녀는 대학을 그만둔다고 했다. 아니, 거부한다고 했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 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29)고 했다. 물음의 인문학에 기반한 <not A but B>의 비판적․창의적 글쓰기가 이런 학생의 절망에 어떤 대안까지는 못될 것이다. 그러나 적 어도 이런 식의 절망에 침묵하지 않는 인문학적 모색들이 다름 아닌 글쓰기 교육에서 더 많이 축적되고 활성화된다면, 최소한 실천 인문학의 빈곤에서 오는 똑같은 절망을 대학의 교육 현장에서 되풀이하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국 교양기초교육원의 분류표로 돌아가서 말해보자. 대학 교양 과목으로서의 글쓰기는 이 런 인문학적 과제들을 자임할 때, ‘심화교양’에 미달하는 ‘기초교육’으로서 ‘교양’교육 의 기껏 하나의 동반자이거나 아니면 타자로 머물러 있지 않고, 명실상부한 교양교육 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 단국대학교 조교수
29) 김예슬, 김예슬 선언―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느린걸음, 2010,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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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Educational Way of College Writing Seeking Humanistic Practice
Kim, Joo-eon
This research has interest in raising the status of writing education at university.
First of all, this thesis begins bringing up a problem with a classification criteria chart which categorizes the writing education into a degree of communication education like foreign language education. Furthermore, this study suggests an actual model of a writing education aiming at the practice of humanistic thinking.
This educational model directed key word of humanities searching at ‘humanities of question’. Also, this structure of problematic is standard form based on critical and creative thought. This research tried to demonstrate that kind of educational model can be useful academic tools for seeking humanistic practice by means of some examples. When like these humanistic trials are accumulated, this paper judges writing education in college can take a leading role of liberal education.
Key words humanistic practice, writing education, humanities of question, repressive desublimation, the real, culture, problematic.
* 이 논문은 2014년 8월 5일에 접수되어 2014년 9월 3일에 심사가 완료되고 2014년 9월 5일에 게재가 확정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