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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논총Journal of Special Education
2021, Vol. 37, No. 2, pp.163-166<서평>
아이히만에 비춰 본 교사로서의 모습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김 병 룡 (원주 교동초등학교)
몇 해 전 학생 한 명이 특별한 이유 없이 학교를 계속해서 결석한 적이 있다.
“교장 선생님, 서영이(가명)이라는 학생이 학교를 계속 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전화통화로 이 야기를 나눴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 쭤보니 환경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다가, 제가 학교 환경에서 어떤 부분이 어려움을 야기하는지 다시 여쭤보니, 본인이 냄새에 민감하다고 하시네요. 그럼, 서영이는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여쭤보니 같은 말을 반복하세요. 서영이랑 직접 통화는 했는데 학생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고민이 됩니다.”
“그래요? 그럼, 잘 상담을 해서 어머니가 학교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네요. 차분히 그리 고 충분하게 대화를 해보세요.”
“네. 그런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말씀 뒤에 그분은 조용히 자리를 떠나셨고 나도 이어서 개운하지 않은 뒤끝을 가진 채 학교 산 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봄 햇살이 따뜻해 정원에는 학생들이 많이 나와 놀고 있었다. 많은 학 생들 속에 작은 아이들 두 명이 큰 소리로 다투고 있다.
“얘들아, 그렇게 싸우면 어떡하니?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빨리 서로 사과하세요. 얼른.”
“미안해.”
“친구들끼리는 친하게 지내야 좋은 거야 싸우지 말고. 알았지?”
잠잠해진 두 명의 아이를 보며 가던 길을 계속 가려는 순간 마치 내가 저장된 알고리즘에 따라 말을 산출하는 컴퓨터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한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산출된 말 뒤에 https://doi.org/10.31863/JSE.2021.05.37.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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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처럼 깊은 생각 없이 내뱉는 상투적인 말들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현 듯 찾아왔다. 상투 적 말과 멈춰진 생각에 대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여기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법정에 한 남자가 서있다. 독일인 아이히만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 살렘의 아이히만’은 이 남자의 상투적인 말에 대한 기록이자 해석이다. 이 책을 보면 방송의 힘이 란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는 5년 전 서점에 우연히 구입해 참으로 재미 없게 읽었었는데, 방송 출연 한 번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말이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로서 일했다. 그리 고 1961년 4월 11일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예루살렘 지방법원에 15가지의 죄목으 로 서게 된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살인죄에 대해 자신을 기소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 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 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여하튼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중략) 그 일은 그냥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해야 한 적이 없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74쪽]
아이히만의 이 말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지 이에 대해 분노하지 않 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변호사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답변 은 예루살렘을 더욱 혼란스럽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아이히만은 지시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 그 결과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 악인으로 처벌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재판과 관련해 실시한 정신감정에서 도 아이히만은 매우 정상적이고 심지어 좋은 이웃이자 훌륭한 시민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와 같은 재판의 혼란 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evil)’의 판단에 있어 사고의 문제를 꺼내든다.
규칙과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 생겨난 ‘악(evil)’의 행위에 대해 그 개인은 책임이 없는가? 그 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사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듯 행하는 것 자체가 ‘악(evil)’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생각 없는 행동, 그렇다면 무엇이 아이히만을 사고를 멈추게 한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용하는 말에 주목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의미에 대해 고민되지 않고 상 투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이히만을 사고를 멈추게 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판단했다.
세계 2차 대전 시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나치는 ‘대량학살’이라는 용어 대신 ‘최종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 ‘재정착’과 같은 우회적 용어들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했다. 아이히만은 이 용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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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실제적 의미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모호하여 그 의미와 실체를 가린 말들로 작성된 문서는 아이히만에게 어떤 죄책감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러한 말들을 사용하여 사고함에 따 라 아이히만은 양심에 따른 그 어떤 판단도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말이 그의 사고를 가두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말’에 사고의 산물이라는 종속적인 자격만을 부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생 각해서 만들어낸 ‘말’이 나의 사고를 조작하고 가둔다는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 지만, ‘말’과 사고는 이러한 일방적인 종속관계가 아니다. 말은 사고의 도구이다(Vygotsky, Thought and Language, 1986). 우리는 도구를 활용한다. 우리가 도구에 영향을 주어 그것의 상태를 변화시 킬 때 그 도구 역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상태를 결정하게 된다. 지금 혹시 의자에 앉아 있다면 자신의 자세를 살펴보자. 그 자세는 자신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의자의 형태 에 의해 결정된 것인지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도구가 우리의 상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 이것을 환경의 차원까지 확장시켜 개념화한 것이 ‘행동유도성’ 또는
‘어포던스(affordance)’라고 한다. 이처럼 도구는 우리의 상태에 영향을 준다. Vygotsky는 그의 저 서 ‘생각과 말’에서 사고의 도구인 말 역시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교사라는 일상에서 나는 얼마나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학생들은 얼마나 다 양한 세상들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인가? 내가 교사라는 일상에서 만나는 이 다양성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학생들의 세상에 대한 고민 없이 교사로서 나는 너무나 상투적인 말들로 학 생들을 만나 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상투적인 말들은 나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학생들의 세상 을 재단하고 단순화하여 편협하게 이해하도록 나의 사고를 조작한 것은 아닌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읽는 동안 나는 자신을 계속해서 아이히만의 입장에 세우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끝에 다다르고 그의 사형장에서 한나 아렌트는 상투적인 말과 그로 인 한 사고의 불능이 ‘악(evil)’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야드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 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 긴 기과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 신을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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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 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 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야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 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8쪽]
한나 아렌트는 이 마지막 순간에 아이히만이 주는 교훈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요 약했다. 즉, 상투적인 말과 멈춰진 사고로 인해 우리 모두가 ‘악(evil)’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훈은 ‘나 역시 학생과의 만남에서 아이히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선의 자리가 아닌 악의 자리에 서있지는 않았을까?’라는 질문으로 나를 이끌었고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 책은 교육방법이나 교육철학 등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과의 소 통에서, 학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교사가 하게 되는 말과 생각에 대해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만나게 되는 학생들의 문제에 대해서 습관처럼 내뱉는 교사의 무수한 말들은 오 히려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실한 대화를 통해서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일반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현재 교사로서 나는 이를 얼마나 실 천하고 있는가? 교사라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는 동안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