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이후의 주석서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노학사(中國老學史)에 따르면 이 시대에 저술된 노자 주석서는 총 .. 사이에서 노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고조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 다.3) 양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주석가들의 신분이나 지적 배경 역시 매 우 다양화되었다. 고 할 정도로 설혜의 해석에 공감하였으며, 초횡(焦竑) 역시 노자익(老 子翼)에서 그의 해석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노자집해는 조선 으로 건너와 광범위하게 유통됨으로써 조선시대 유가들에게 노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제공하기도 하였다.8).
그러나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다방면에서 활용하는 이런 집해 형식에 도 불구하고, 설혜 자신은 자서(自序)에서 “지금 세상에 전하는 것들 중 에 노자의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 없다”라고 단언함으로써 기존의 노 자 이해와 주해서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9) 노자집해에 인용된 자료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후대의 도교의 양생술에서 ‘성명’은 넓은 의미로는 생명을 가리키지만 ‘성명쌍 수(性命雙修)’의 수양론에서 ‘성(性)’은 편의상 인간의 심성을, ‘명(命)’은 형체를 가진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12) 설혜는 도교에서처럼 양생이나 장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성명지학(性命之 學)의 목표는그것들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노자를 읽은 뒤 어렸을 때부터 연구한 신선․장생의 술은 “방사들의 하찮은 술수에 불과할 뿐 성명지학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 하는가 하면 방사들이 양생을 추구하면서 성명 외적인 것에 천착하는 현 상들을 비판하기도 한다.13) 설혜가 노자 해석의 관건으로 간주한 성 명 개념은 장자나 도교적 맥락의 성명 개념이 아니라 송대의 유가들이 유학의 핵심 가치로 보았던 성명 개념임이 분명하다. 이때서야 나는 비로소 성인의 도[聖人之道]를 지향하고 성명의 이치[性命之理]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15.
명(命)이라는 것은 도(道)가 사물에 부여된 것이 마치 명령해서 그런 것 과 같다는 것이다”19)라고 설명함으로써, 기본적으로는 우주본체가 개별 적 사물들의 본질을 구성하며 그것이 성명지리(性命之理)라는 정주학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특히 노자는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40장)라고 주장함으로써 무를 유의 근원 으로, 즉 우주만물의 근거로까지 격상시키고 있다. 주자(周子)는 ‘고요하여 무이고 움직여서 유이다’라고 말했다.
설혜가 체․용 개념을 사용해서 노자의 ‘도’를 설명하는 것 역시 주자의 비판에 대한 반론의 의도를 담고 있다. 體用一源, 顯微無間)”이라는 명제이다. 있는 별개의 실재가 아님을 명시함으로써, 정이천은 이(理)의 내재적 주 재성을 존재론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36) 또한 그는 현상세계로부터 독 립해 있는 것으로 간주된 무(無)를 이(理)로 대체함으로써, 사실상 무의 차원을 유의 차원 속에서 해소시키고자 한다. 이와 같이 정이천이 정식화해낸 “체와 용은 근원이 하나이고, 드러남과 은미 함은 간격이 없다”는 명제는 주자를 비롯한 이후의 유가들의 사고방식 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주자도 설혜도 이 명제를 전제로 하여 세계를 바라본다.
비어서 형체가 없다.” 이것은 도의 본체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래서 유학에서 노자를 물리칠 때 이 점을 최우선 사항으로 보았다”53)라고 언급한 것은 그가 노자와 유가사상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노자의 도와 유가의 인의예지 개념의 관계를 단순 히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 이상으로 새롭게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 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따라붙어야 할 요소들이 바로 19장의 이어지는 문장에서 제시된 “흰 바탕을 드러내 고 통나무를 껴안으며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인다[見素抱樸, 少私寡欲]”는 것이다.
나오는 말
과도한 이단의식을 벗어나 노자를 새롭게 독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동시에 유가와 도가의 사상적 경계짓기가 가져온 학문적 부자유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분위기에서 나온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t was in the Ming Dynasty that most of the commentaries on the Laozi were written in China. Several Neo-Confucian commentators tried to comment favorably on the Laozi, breaking from the view that Laozi was heresy.
Xue Hui(薛蕙) was the first commentator in the Ming Dynasty that interpreted the Laozi from a Confucian viewpoint, and his Variorum Laozi(老子集解) became an exemplary commentary to subsequent Neo-Confucians who tried to embrace positively Laozi’s thought. This paper studies the way that Xue Hui connected Laozi’s thought with ‘the learning of human nature and mandate’(性命之學) of Neo-Confucianism. Dao is identifiable as the principle of human nature that is rooted in cosmological substance.
However, most Neo-Confucians, including Chu Hsi, criticised Laozi for neglecting the aspect of ‘being’ of Dao and the. 無) as the substance(體) of Dao and ‘being’(有) as the function(用) of it, and regarded the two aspects as inseparable. His theory of substance and function is based on Cheng Yi’s idea that “substance and functions come from the same source, and there is no gap between the manifest and the hidden.” Even though the two aspects of Dao are inseparable, Xue Hui stressed the importance of non-being and substance, and thus demanded the self-cultivation of ‘emptiness and tranquility’(虛靜).
Furthermore, he thought that the relation between Laozi’s Dao and Confucian moral norms was that of substantial quality(質) and ornamental accomplishments(文), but Laozi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former to prevent the latter from destroying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