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라틴 34호 (2016년 9월) 4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위기와 부활의 조건
김기현
1980년대 말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는 외채위기 극복을 위해 가능한 유일한 선택으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반복되는 외환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심화 등의 문제를 야기했고, 그에 대 한 반발로 1990년대 말부터 좌파 정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8년 12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2000년대에 는 한때 멕시코와 콜롬비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 들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이들 좌파 정부는 때마침 불어 닥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경제적 호황을 누리면서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일부 좌파 대통령은 헌법을 수정해 재선, 삼선에 성 공하거나, 아니면 같은 당의 후계자에게 권력을 승계하기도 했다.
이러한 좌파 바람에 역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지난 해 아르헨티나의 페론당이 대선에서 패배함으로써 2003년부터 2015년까지 13 년 간 이어온 키르치네르 부부 정권의 막이 내렸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작
년 12월 총선에서 여당인 차베스주의 통합사회당이 16년 만에 처음으로
야당인 민주연합에 패배했다. 현재 차베스의 후계자인 마두로 대통령은 심각한 경제위기로 인해 임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정권을 상실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있다. 금년 6월에는 페루 대선에서 중도우파의 쿠친스키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좌파 우말라 정부가 물러났다. 브라질에서는 2003년 부터 집권한 노동자당의 룰라 대통령을 계승한 호세프 대통령에 탄핵 절
왼쪽부터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페루의 우말라 전 대 통령 (출처: http://www.infobae.com)
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때 80%대였던 칠레 사회당 바첼레트 대통령에 대 한 지지율도 최근 2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좌파 정부의 이러한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언론에서 흔히 지적되는 것이 부패이다. 하지만 부패가 좌파정부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 는 없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부패는 항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부패 문제 의 제기는 이미 위기에 처한 좌파 정부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결정타를 날리는 것이지, 좌파 정부의 위기가 부패로 인해 야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위기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2000년대 좌파 정부의 성공요인이 상당 부분 원자재 가격의 상승에 따른 경제적 호 황에 있었듯이 이들의 위기도 근본적으로 원자재 가격의 하락에 따른 경 제적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해 그의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교역조건이 2011년 정점에 다다른 후 2012 년부터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2015년에는 교역조건 지수가 2006년 이전 수준까지 떨어졌다. 교역조건의 악화는 경상수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그에 불안을 느낀 자본이 유출되거나 신규 자본 유입이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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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경제적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좌파로서 본질적 한계를 지닌 정부가 적절 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경제적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기축통화를 가진 선진국은 이자율을 낮추고, 통화 량을 확대하면서 자국의 경제 침체를 완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방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개도국에서는 쉽게 적용될 수 없다. 만약 라 틴아메리카 국가가 유사한 정책을 취한다면 현지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자본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되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야기될 것이다. 그 것은 훨씬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도 국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은 평가절하를 통해 경상수지를 개선하고, 이자 율 상승과 재정 긴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자본 유출을 막고,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원자재 수출 의존 경제에서 외국자본 유입 의존 경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대중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어서 좌파 정부가 쉽게 선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는 경제 적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결국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정부는 경상수지 악화에도 불구하고, 평가절 하 대신 수입제한 정책을 펼치면서 저환율을 유지했다. 그 결과 페소화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으며, 시중에서 거래되는 환율과 공식 환율 사이 에 차이가 커지면서 이중환율 문제가 발생했다. 복지에 대한 지출도 유지 됨으로써 재정적자가 심화되었고, 실질 인플레이션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 렀다. 외국 채권자와의 협상도 거부함으로써 부분적 디폴트가 발생했고, 외국자본 유입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감 소했으며, 경제성장률도 2014년 0.5%로 하락했다. 결국 원자재가격의 회복 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지금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는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을 증가하고, 긴축을 통해 재정적자를 감소하 고, 국제자본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외국자본을 유입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좌파 정부의 정치적 기반을 고려할 때 쉽게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좌파 정부 위기의 본질이 바로 여
2000-2014년 아르헨티나 수출품목 비중의 대부분이 원자재 (출처: Harvard Atlas of Economic Complexity, http://atlas.cid.harvard.edu)
기에 있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부가 처한 상황도 아르헨티나의 경우와 유사 하다. 마두로 정부는 저소득층 물가 안정을 위해 다중환율제를 적용하고,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서비스 지출도 유지함에 따라 빈곤층을 여전히 지 지 세력으로 남아 있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제는 GDP 성장률이
2014년 -4.0%, 2015년 -7.1%로 최악의 상황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을 야기
한 데에는 유가하락과 정부 정책의 실패 외에 베네수엘라 경제를 불신하 는 자본의 해외유출도 큰 몫을 차지한다. 베네수엘라의 자본 유출은 2013
년 98억불, 2014년 87억불에 달했다. 이는 총 수출액 각각 889억불과 740
억불의 10%에 달하는 액수이다. 이렇듯 외국자본 유입을 통한 경제성장
모델이 필요한 때에 베네수엘라에서는 좌파 정부를 믿지 못하는 자본이 오히려 유출되고 있다.
브라질 호세프 정부의 상황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와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정부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호세프 정부는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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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14년 베네수엘라 수출은 광물성 자원에 의존적 (출처: Harvard Atlas of Economic Complexity, http://atlas.cid.harvard.edu)
임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2014년 대선 승리 이후 호세프 대통령은 시카고 대학출신으로 민간은행 브라데스코 이사를 지낸 호아킨 레비를 노동자당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 고 재무부 장관에 임명했고, 그를 통해 정부 재정 지출을 삭감하는 등 필 요한 개혁을 단행했다. 호세프 정부의 이러한 시장과의 타협을 두고 좌파 인사들은 ‘무늬만 좌파’라고 비난했다. 내부적으로는 그런 우파정책으로의 선회에 반대하여 노동자당 내부의 주요 지지기반인 사회운동파가 대거 호 세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레비의 개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본 이탈을 막기 위해 이자율을 올림으로써 공공채무 서비스가 크게 증가했다.
2015년 브라질의 1차 재정수지 적자는 GDP의 0.7%임에도 불구하고 총재
정수지 적자는 GDP의 8.3%에 달했다. 재정수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리거나 정부지출을 대폭 삭감하는 수밖에 없지만, ‘임금연동법’, 빈곤층 복시 서비스인 ‘보우사 파밀리아’ 등의 지출이 헌법으로 보장된 사
브라질의 GDP 추락
(출처: http://business-news.biz)
항임으로 정부 지출의 삭감은 쉽지 않다. 브라질 공공 지출의 90%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 고, 또 그의 개정은 다당제 시 스템으로 인해 매우 어렵다. 레 비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지 못 하자 성장률은 2014년 0.1%에 이어, 2015년 -3.5%로 추락했 다. 국가 신용등급도 투자부적 격으로 추락했고, 인플레이션도 2013년 5.9%에서 2015년 9.9%
로 증가했다. 결국 경제적 위기 를 극복하기 위해 브라질에서 는 연금개혁, 노동개혁, 공공부문 개혁 등 고강도 개혁이 필요하지만 본질 적으로 좌파인 호세프 정부가 그러한 고강도 개혁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호세프 정부 아래에서 브라질이 국제 자본의 신뢰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내부적으로 사회운동파의 지지기반을 상 실하고, 국제자본으로부터도 외면당한 호세프 정부는 결국 탄핵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외국자본의 유입에 의존하는 경제모델로의 전환에 있어서 좌파인 호세프 정부는 국내외 투자가들에게 가능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지 지 않는다.
세 나라의 사례는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던 라틴아메리카 경제가 원자 재 가격이 급락함으로써 외국자본 유입을 통한 경제 활성화 모델로 전환 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좌파 정부는 더 이상 존재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국자본 유입을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을 적용하기 위해 서는 외국자본이 신뢰할 수 있는 정권이 필요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부의 위기는 결국 원자재 가격이 상승할 때 그의 수출에 기대 분배에만 치중했던 한계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한편 외국자본 유입을 통한 신자유주의식 성장모델에 어울리지 않는 좌파는 이 제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대안은 무엇보다 생산구조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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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관저를 떠나는 호세프 대통령. 2016년 8월 31일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상원에서 가결되었다.(출처: http://f.i.uol.com.br)
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원자재 수출 의존경제에서 탈피해 자원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생산 모델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 필요한 세제개혁도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 원자재 붐이 끝난 시점에서 더 이상 그의 수입만으로 사회적 서비스를 유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실질적 세제개혁안을 제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안들을 다양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절차 에 따라 실제 정책에 적용할 수 있는 협상력과 실천력을 키울 필요가 있 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틀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제 도 안에서 사회적 논리 사고의 틀을 쟁취하는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재집 권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김기현 ― 선문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