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같은 분단국인 우리로서는 독일의 통일을 부러워했으며 우리도 통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환호했다.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첫째,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되었다. 둘째, 민주적, 합법 적 절차에 따라 동·서독 정부 간의 합의에 의해 달성되었다. 셋째, 경제적·사회적·정 치적 통합이 동시에 추진되었다. 넷째, 주변국의 지지와 동의를 받아 통일되었다. 마지막 으로 서독 정부와 국민들은 통일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나 재정적·행정적
·외교적 능력으로 짧은 시간에 통일을 이루어냈다. 따라서 우리는 예멘의 사례와 달리 합의에 의한 통일도 가능하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 통일의 사례와 달리 평 화적 통일도 가능하다는 기대도 갖게 되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잘 사는 동 독이 붕괴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북한의 붕괴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막대한 통일 비용, 동독 기업의 도산과 대량 실업, 동·서 독 주민들 간의 심리적 격차 등 독일 통일의 후유증이 과도하게 알려지면서 통일이 반드 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통일은 천천히 하는 것이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도 팽배하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이 상호 교류와 협력을 통 해서 경제력 격차를 줄여나가면서 단계적으로 통일해야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독일식 ‘흡수통일’은 엄청난 비용과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는 것이 과거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했다. 필자는 독일 통일 후 약 1년 반 후인 1992년 4월부터 약 3년간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통일에 참여한 고위 관리들과 학자들을 만 나고 동독 지역 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동독 주민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부정적 평가는 독일에서 듣고 본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우리 언론에 서 독일 통일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더 크게 부각되는 데에 매우 놀랐다.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킨 것은 우리의 통일 과정에서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같은 실수를
1. 잘못 알려진 독일 통일
독일처럼 우리도 통일을 할 수 있다
양 창 석 통일부 상근회담대표 정치학 박사
2. 독일 통일의 교훈
우리는 지금까지 독일 통일이 많은 후유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일처럼 통일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후유증이 없는 통일’이 아니라 ‘올바른 통일’을 목표로 준비를 해나가는 것이다. 독일 통일의 교훈을 되짚어보고 우리의 통일 준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물론 서독 사람들은 서독 수 준의 복지 제도를 한꺼번에 동독 주민에게 적용하여 통일 비용이 증가했고, 그 비용을 자 신들의 호주머니에서(부가세 인상 등) 부담한 데에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독일은 통일을 달성하여 1,700만 동독 주민들에게 자유와 풍요라 는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전체 독일 국민에게는 통일로 완전한 주권이 회복 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전승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이 베를린과 독일 전체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주 권국이 아니었다. 주권 회복과 동독 주민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지고한 가치이기 때문에, 실수나 후유증으로 평가절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통일 과정이 독일과 반드 시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했고 65년 이상을 서로 다른 체제 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의 통일 과정은 어쩌면 독일 통일보다 더 큰 도전과 희생을 요구 할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독일 통일의 교훈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잘된 것은 우리에게도 적용하도록 준비하고, 잘못된 것은 ‘전차복철(前車覆轍) 후차지계(後車之戒)’
로 삼으면 될 것이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핵심 과제와 쟁점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 살펴봄으로써 우 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생각해보기로 한다.
첫째,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 통일이 평화적으로 달성된 배경을 살펴보면, 시 민혁명을 주도한 시위자들이 평화 시위가 되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 니콜라 이 교회와 베를린 겟세마네 교회에서 평화 예배를 드리고 시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평화 시위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각오가 강했다. 또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무력 대응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동독 군대는 소련군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독자적 명령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동구 위성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해온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시위자들이 매우 단합되어 있었고 그 숫자가 10만 명에 이르자 경찰이 무력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도 평화적 통일 달성의 배경이다. 당시 내독성 차관보였던 도 비예씨는 “시위 군중 숫자가 갑자기 불어났기 때문에 동독 보위부도 대량 학살을 각오하 지 않고는 발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민주적·합법적 절차를 거쳐 통일을 이루어냈다. 1989년 5월부터 헝가리를 통해 동독 여행자들의 탈출이 시작된 후 탈출민이 계속 증가하자 서독의 콜 수상은 탈출민 전 원을 서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동독 정부에게는 서독은 ‘동독의 상황이 불안정 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독일의 통일을 우려하는 주변국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통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했다. 다만, “동독인들이 그들 자신의 미 래를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콜 수상의 자결 권 존중은 서독의 기본법(헌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기본법 전문은 “전체 독일 민족 은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완성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 었다. 또한 콜 수상은 동독 정부와 신생 정당들과 접촉을 통해 동독의 정치적 민주화와 개혁을 유도해나갔다. 동독의 ‘원탁회의(정부와 신생 정당단체로 구성된 협의체)’는 1990년 3월 자유 총선을 통해 민주 합법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서독은 자유 총선 거를 통해 구성된 드메지어 정부와 협상을 통해 화폐통합 조약과 통일 조약에 합의했다.
콜 수상은 탈출과 시위 등 동독의 사태 발전에 대해 신나고 흥분된 반응을 자제하고 신중 하게 접근함으로써 동독과 소련을 자극하지 않은 가운데 통일을 달성했던 것이다.
셋째, 기본법에 의거해서 ‘기회의 창’이 열려 있을 때 신속하게 통일을 추진해나갔다.
기본법에는 통일로 가는 두 가지 헌법적 근거를 규정하고 있었다. 제23조에서는 “기본법 은 당분간 바덴, 바이에른, 브레멘… 등 서독 지역의 주에만 적용되고 독일 기타 지역에 대해서는 그들이 가입한 후에 효력을 발생한다”라고 규정했다. 한편 제146조에서는 “이 기본법은 독일 국민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의결된 헌법이 효력을 발생하는 날에 그 효 력을 상실한다”라고 규정했다. 즉 제23조가 규정하고 있는 “가입(Beitritt)”의 방법 또는 제146조가 규정하고 있는 새로운 헌법 제정에 의한 방법, 이 두 가지에 따라 통일을 달성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콜 수상은 1989년 말까지만 해도 동독과 5~6년간의 국가연합적 구 조를 통해 단계적으로 통일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와 동독 탈출민 의 증가, 동독 경제의 파탄과 동독 정권의 통제력 상실, 동독 주민의 신속한 통일 요구,
고르바초프의 실각 가능성 등의 요인 때문에 조기 통일로 선회했다. 연방 재무성의 검토 결과 당시 서독은 제23조에 의한 ‘충격요법’의 조기 통일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재정적 능 력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제146조에 따라 통일을 추진할 경우 통일헌법 제정을 위한 정 치적 논쟁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법적인 불안정성은 서독 내의 투자를 위축시 키고 이에 따라 구동독 지역으로의 재정 이전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서독 정부는 재무성의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제23조에 의해 통일을 추진하고 첫 단계로서 화 폐·경제 공동체 창출을 위한 동·서독 간 국가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동독 에서는 2월 12일 월요 데모에서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거기로 간다”라 는 구호가 등장했다. 콜 수상의 조기 통일 입장 표명은 서독 수준의 풍요를 기대하는 동 독 주민의 호응을 받았다. 화폐통합이 조기에 실현될 경우 동독 주민들의 예금 가치가 올 라가고 소득에 따른 구매력 역시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3월 자유 총선거에 서 조기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독일 동맹’이 승리했다. 총선을 통해 구성된 드메지어 정부가 1990년 3월 22일 기본법 제23조에 의거한 통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동독 인 민의회는 8월 23일 찬성 294표, 반대 62표, 기권 7표에 따라 10월 3일자로 동독이 서독 기본법의 적용 영역에 가입한다고 의결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헌법적 조건이 달성되었다.
넷째, 서독의 우월한 체제를 그대로 동독에 이전하는 통일 방식을 택했다. 기본법 제23 조에 의한 통일은 서독의 법과 제도가 동독에 그대로 확대 적용되는 것을 의미했다. 특 히, 서독 통화(마르크)의 적용 영역이 동독 지역으로 확장되고 동독은 통화 주권을 상실하 는 것을 의미했다. 통일조약 협상 과정에서 서독 내무성은 통일 후 얼마 동안 동독법을 존속시키고 서독법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법무성은 서독 법을 동독에 즉시 적용하고 동독법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일정 기간 적용하자는 입장이 었다. 통일 후 독일에는 하나의 법규정만 있어야 한다는 근본 원칙을 내세웠다. 서독의 기업들도 동독 투자를 위해서는 동독법의 불확실성이 없어야 한다면서 서독법의 일률적 적용을 주장했다. 한편, 동독 정부는 1,600만 동독 주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동 독법이 유효한 것으로 존속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서독법을 적용하면서 서서히 서독법 을 동독으로 이전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결국, 법무성의 의견대로 서독법을 즉시 적 용하고 예외적 상황에서만 동독법을 과도기적으로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모자보 건법, 낙태허용법 등 일부 동독 법률은 과도기적으로 계속 효력을 지니게 했다.
다섯째, 화폐통합은 경제적 합리성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1990년 2월
경제성 장관과 연방은행은 가격 자율화 등 동독 경제의 개혁과 동독 마르크의 완전 태환 화를 거쳐 화폐통합을 실시하는 단계적 통합 방안을 제안했다. 이들은 시장경제체제로의 개혁을 통해 서독과의 생산성 격차를 해소해나가는 한편, 환율이라는 완충 장치를 통해 기업들이 국제 경쟁력을 어느 정도 갖게 된 후에 동독 지역에 마르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재무성은 각 단계의 경제 개혁이 서로 필요조건으로 연관되어 있 어서 순차적, 단계적 개혁으로는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 다. 화폐통합과 시장경제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계적 개혁의 핵심인 안정된 환율의 보장은 동독 정권에 대한 주민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했다. 동독 정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해가지 않도록 희망과 신뢰를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신호는 화폐통합이었던 것이다. 화폐통합 을 빨리 실시할수록 동독의 안정과 정치적 통일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1 화폐교환 비율의 결정도 경제 논리에 반한 정치적 동기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낮 은 임금에 의한 동독 기업의 경쟁력 유지에 정책 우선권을 두었으면 1:2 이상의 교환율을 택해야 했으나, 콜 수상은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억제하는 데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 에 1:1 비율을 선택했다. 드메지어 동독 수상도 화폐통합 협상 과정에서 저축, 임금, 연금 에 대한 1:1 교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는 “절대로 동독 주민들로 하여금 2등 국민이 된다는 감정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동독 주민들은 그들의 생활 조건이 신속히 서독 수준으로 개선되는 것을 원했다. 1:1 비율을 서독이 수용하지 않았으면 동독 이 화폐통합에 반대하거나 지연시켜 전체 통일 과정에 지장이 초래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1 교환 비율은 ‘실수’가 아니라, 서독 정부가 문제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 에도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현재 동독 재건을 담당하는 벤트만 내 무성 국장은 필자에게 “1:1 교환율을 통한 화폐통합은 정치적 측면에서 올바른 선택”이었 다면서, “통일을 위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준비해나가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독일 통일과 달리
‘후유증을 줄이는 통일’에 초점을 맞추어온 것이 사실이다. 독일 국민들은 통일이 독일 국민에게 자유와 주권을 가져다준 ‘기적’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자이트 주한 독일 대사는 필자의 저서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 독일 통일 주역들의 증언』 출판기념회에서
“독일은 적지 않은 통일 비용을 지불했지만 유럽연합 내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 로 부상했다”면서 “동독 주민들이 누리게 된 자유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3. 우리의 통일 준비
그러나 지금까지 독일 통일은 실수가 많아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게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 준비도 곧 독일식 통일을 피하는 것으로 인식되 어 왔다. 서로 다른 체제하에서 65년 이상 살아 온 남·북한이 별 문제나 후유증 없이 통 일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환상일 것이다. 우리는 ‘후유증이 없는 통일’이 아니라
‘올바른 통일’을 목표로 준비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통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 다. ‘어떻게 통일을 하느냐’를 고민하면서 구체적으로 행동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올바 른 통일’에 대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해본다.
첫째, 교류와 협력, 또는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 경제력을 키워가면서 점진적 통일을 하 는 것이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북한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 스템은 실패한 것이다. 이 체제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돈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콜 수상의 얘기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남·북한 간의 경제력 격차 는 더 커질 것이고 그만큼 통일 비용도 증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은 빠를수록 비 용이 적게 들어갈 것이다. 경제적 통합 부문에서 미리 준비해두어야 할 항목은 무수히 많 다. 여러 가지 가정에 따른 시나리오를 다 마련해두어야 한다. 북한 경제 재건의 기본 원 칙으로 동독의 경우처럼 시장 기능에 맡길 것인지 아니면 1861년 이탈리아 화폐통합 이 후 낙후된 남부의 ‘메조기오느노’ 지역처럼 국가가 재정지원을 통해 구조 조정에 적극 개 입할지에 대해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 물론 후자는 경제적 낙후를 극복하는 데 실패 했다. 제2차 대전 후 서독의 기업들에게 했던 것처럼, 북한 산업을 완전히 다 부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경쟁력 있는 기업을 살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산업 재건 방안 을 마련해봐야 한다. 북한 경제 수준을 남한 수준으로 올리는 기간을 얼마로 잡을지에 따 른 다양한 통일 비용 시나리오도 마련해봐야 할 것이다.
둘째,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붕괴하면 곧바로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생각 또한 현실적이 지 못하다. 북한 정권이 붕괴한다 해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 다. 국제법적으로 볼 때 남북한은 유엔 회원국으로 별개의 주권국가이다. 그러나 남북 기 본합의서에서는 ‘남과 북은 나라와 나라 사의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우리 헌법 제3조에 따라서 우리는 ‘자결권’ 차원에서 북한의 상황에 개입할 수 있 다. 우리의 헌법 제4조 통일조항에 ‘자결권’을 명문화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봐야 한다.
우리는 북한의 상황 전개에 따라 민주적, 합법적으로 통일로 유도해나가는 로드맵을 작 성해보아야 한다. 북한 주민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때, 자유와 풍요를 위한 성공적
모델로 입증된 우리의 제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미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지원과 협조를 바탕으로 중국과 러 시아의 지지를 받아내는 외교적 시나리오도 필요할 것이다. 주변국들은 현실주의적 접근 에 따라서 국가 이익을 바탕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통일을 위해 어떻게
‘trade-off’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의 법과 제도를 북한에 확대 적용한다는 가정하에 준비해야 한다. 우리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 리의 법과 제도를 북한에 적용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먹고 먹히는’ 제도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우월성이 이미 입증된 우리의 제도로 통일 되어야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식의 낡은 제도에 의한 통일 은 안하는 것보다 못한 통일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독일은 세계 최고의 사회복지 수준을 그대로 동독에 이전한 결과 20년간 전체 통일 비용의 52%가 사회복지 분야에 투입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 논쟁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남한의 사회복지 비용 증 가는 곧 통일 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 점을 감안한 정책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합리성보다는 정치적 판단을 앞세워야 할 경우를 가정해서 준비를 해야 한 다. 앞에서 독일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화폐·경제 통합의 방법, 즉 단계적으로 하느냐 일시적으로 하느냐의 문제, 또는 화폐교환 비율 등의 쟁점들이 반드시 경제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재산권 반환 문제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현재 우리 학계와 정부 내에서는 독일식의 “보상보다 반환” 원칙이 반환 을 둘러싼 소송으로 동독 투자를 지연시켰고 동독 주민들의 배신감을 초래했다고 판단하 고 우리는 “반환보다는 보상”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독 일의 경우 반환 우선 원칙이 동독의 경제재건 과정을 지연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법에서 정한 사유재산권 보호 규정과 반환하지 않을 경우 원소 유주들의 헌법소원 제기 가능성을 고려하여 그렇게 결정했던 것이다. 통일과 관련된 많 은 쟁점들에 대해 합리성 측면에서는 문제점과 후유증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라는 큰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정치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나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것이다.
편집자 주 / 양창석은 통일부 상근회담대표이며, 최근 출간된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