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代의 功勞制度
석사과정 유창연
1. 들어가며
中國 考課制度의 원초적 모습은 『周禮』에서 볼 수 있다. 『周禮』의 成書年代도 다소 의문 스러운 점이 있고 그 내용도 온전히 西周時代의 실상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周王이 책 봉한 封君이 다스리는 지방을 周王이 통제하는 방법으로 歲會가 언급된다. 西周時代에는 歲會가 열려 1년에 한 번 모든 吏들이 모여서 각자의 성과를 평가받는다는 상황이 서술되어 있는데, 평 상시에는 日(1일)의 성과와 月(1달)의 성과도 정리하여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1) 春秋戰國 時代의 상황을 전하는 각종 문헌사료에서도 秦을 비롯한 나라에서는 郡守와 縣令이 군주에게 上 計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군주에게 地方官 자신의 치적을 각종 통계문서의 형태로 써 보고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2)
秦은 商鞅變法 이래로 郡縣制를 비롯한 정밀한 地方統治·人事管理 制度를 확립하였고, 考課制 度도 그와 함께 비교적 높은 수준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秦의 철저한 文書行政 원칙 은 수많은 考課 관련 文書를 기반으로 한 考課制度가 정착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구체적 인 모습을 살펴보기에 앞서, 統一 이후 秦에서 공포된 考課 관련 문서들의 上報 규정을 적시하 면 아래와 같다.
●縣官上計執灋, 執灋上計冣(最)皇帝所, 皆用筭橐□, 告 (巂)已, 復環(還)筭橐, 令報縣官.
計□□□ [缺簡 22] □其不能者, 皆免之. 上攻(功)當守六百石以上, 及五百石以下有當令者, 亦免除. 攻勞皆令自占, 自占不〼 〼實, 完爲城旦. 以尺牒牒書, 當免者人一牒, 署當免狀, 各 上, (A)上攻所執灋, 執灋上其日, 史以上牒丞【相】·御史, 御史免之, 屬·尉佐·有秩吏, 執灋免 之, 而上牒御史丞相後上之恒與上攻皆(偕), 獄史·令史·縣官, 恒令令史官吏各一人上攻勞吏員, 會八月五日. (B) 上計冣(最)·志·郡<羣>課·徒隸員簿, 會十月望. 同期, 一縣用吏十人, 小官一 人, 凡用令史三百八人, 用吏三百五十七人, 上計冣(最)者, 柀兼上志羣課·徒隸員簿. (C) ●議 : 獨令令史上計冣(最)·志·羣課·徒隸員簿, 用令史四百八十五人, 而盡歲官吏上攻者…3)
위의 문서는 각종 考課文書의 上報에 대한 여러 규정 및 일부 규정을 의논하여 약간 수정한 상황을 함께 정리하고 있다. 밑줄을 친 (A) (B) (C)의 내용을 통해 秦代 考課文書의 上報를 설명한 이 단락은 크게 ①功勞文書(功勞吏員簿)의 보고 대상·보고 기한·보고 인력과 관련된 조치 ②計冣(最)·志·羣課·徒隸員簿를 보고하는 기한과 각 縣에서 문서들을 바치는 데 이용한 인력의 설명 ③計冣(最)·志·羣課·徒隸員簿를 보고하는 데 사용될 令史의 숫자는 총 485명으 로 약간 줄인다는 의논으로 구성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計冣(最)’는 里
1) 『周禮·天官·宰夫』 “歲終, 則令群吏正歲會 ; 月終, 則令正月要 ; 旬終, 則令正日成. 而以考其治. 治 不以時擧者, 以告而誅之.” ; 『周禮·天官·司會』 “以参互考日成, 以月要考月成, 以歲會考歲成.”
2) 대표적 사례로는 『史記』 卷79 「范睢採擇列傳」, p.2415, “昭王召王稽, 拜爲河東守, 三歲不上 計.” ; 『韓非子』 《外儲說左下》 “西門豹爲鄴令, 淸克潔慤, 秋毫之端无私利也, 而甚簡左右, 左右因 相與比周而恶之, 居期年, 上計, 君收其璽.” ; 『韓非子』 《外儲說右下》 “田嬰相齊, 人有說王者曰 : 終歲之計, 王不一以數日之間自聽之, 則无以知吏之奸邪得失也.” ; 『呂氏春秋』 《審分覽》 “趙襄子 之時, 以任登爲重牟令, 上計, 言於襄子曰……”을 참고할 수 있다.
3) 『嶽麓秦簡(肆)』, pp.209-211, 簡346-352.
耶秦簡에서 보이는 作徒簿와 관련된 ‘冣’의 내용을 고려하면, 통계문서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문서양식이라 파악되는데, 志도 縣에서 생산하는 수많은 장부들을 모종의 연관성에 따라 취합하여 한 데 모은 문서양식을 상징한다. 羣課도 ‘課文書’를 모아 정리한 문서로, 徒 隸員簿는 縣에서 사역하는 徒隸들의 인원수와 그 자세한 현황을 정리한 문서라 해석할 수 있다. 즉, 위의 규정에서 언급되는 모든 문서들의 양식과 내용은 縣의 1년 운영을 총결산한 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에 근거하면, 秦代 縣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에 대한 考課 의 근거자료는 功勞文書·計文書·課文書 및 그에 부가되는 각종 簿籍文書로 귀납할 수 있다.
그러므로 秦代 考課制度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 3개 종류 文書들의 정확한 의미와 작성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위의 규정에서 언급된 功勞吏員簿의 존재에 집중하여 秦代 考課制度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부터는 秦漢 代 功勞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본 뒤에 功勞文書가 완성되는 과정을 다루어 보고자 하였다.
2. 功勞의 의미와 산정과정
春秋戰國時代부터 ‘功’과 ‘勞’는 모두 爵祿으로 포상되는 개념4)이었으며, 또한 ‘閥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司馬遷은 春秋戰國時代부터 존재하였던 ‘功’의 개념을 5가지로 일별 하여, ①勳 ②勞 ③功 ④伐 ⑤閱로 정리하였다.5) 그가 말하는 勞는 ‘文治’, 즉 文官이 세운 것이고 ‘功’은 각종 武功에 해당한다. 伐은 ‘功’을 쌓은 결과물이고 閱은 ‘경력 ; 근속 연한’
의 의미를 가진다. 사마천은 勳을 시작으로 功·勞·閥·閱을 각각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 勳 은 그 함의가 정말 중요했기 때문에 실제 秦漢代의 고과제도에서는 오히려 사용되지 않은 용어였으며, 功·勞·閥·閱이 주로 사용되었다. 功·勞·閥·閱도 사마천의 설명처럼 엄밀하게 나 누어져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으며, 주로 功과 勞가 합칭되고 伐과 閱이 합칭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사마천의 설명과는 달리 功이 勞보다 중요시되었으며, 功勞는 閥閱과 등치되는 경우가 많았다.6)
秦漢代 문헌사료에서 功은 軍功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을 장려 할 때에도 功을 논하여 封土와 작위를 하사하였다. 또한, 戰役에 동원된 士卒들도 자신이 사살한 적의 숫자에 따라 田宅과 금전 및 신분 상승의 기회 등을 사여하였으며, 이는 ‘勞賜’
로 통칭되었다. 따라서 그 둘을 병칭한 功勞도 장군들의 대외원정 및 군사적인 성과와 그에 뒤따르는 포상만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보아도 잘못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功勞 의 의미와는 별개로, 漢代 居延 지역에서 출토된 簡牘에서는 그 곳에 설치된 봉수대 혹은 관부에서 근부하는 吏卒들이 변경 수비와 관련된 수많은 업무를 수행한 시간을 ‘功’과 ‘勞’
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서들은 일반적으로 ‘功勞文書’로 통칭되는데, 아래의 3개 문 서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居延甲渠候史公乘賈通 : 中功一勞一歲九月□日. (E.P.T56:99)
(居延縣 甲渠候官의 候史 公乘 賈通 : 中功一+中勞一歲+9개월 □일[만큼을 근무함.])
4) 『管子』 卷27 「地圖」 “論功勞, 行賞罰.” ; 『戰國策』 「秦策三」 “勞大者其綠厚, 功多者其爵 尊.”
5) 『史記』 卷18, p.877, 「高祖功臣侯者年表序」 “太史公曰 : 古者人臣功有五品, 以德立宗廟定社稷 曰勳, 以言曰勞, 用力曰功, 明其等曰伐, 積日曰閱.”
6) 『漢書』 卷83, p.3401, 「周博傳」 “博復移書曰 : 王卿憂公甚效! 檄到, 齎伐閱詣府.”에서 안사고가
“伐, 功勞也. 閱, 所經歷也.”라 설명하였다.
張掖居延甲渠塞有秩士吏公乘段尊 : 中勞一歲八月廿日能書會計治官民頗知律令文. (『居延 漢簡』 簡57:6)
(張掖郡 居延縣 甲渠塞의 有秩士吏 公乘 段尊 : 中勞一歲+8개월 20일[만큼을 근무함.]
書·會計·治官民에 능하고 律令文을 잘 알고 있음.)
●居延甲渠第四隧長公乘陳不識 : 中勞二歲九月七日能書會計治官民頗知律令文年廿六歲⍁
(竹簡 E.P.T52:36)
(●居延縣의 甲渠第四隧長 公乘 陳不識 : 中勞二歲+9개월 7일[만큼을 근무함.] 書·會計·
治官民에 능하고 律令文을 잘 알고 있음. 그는 26세이고…)
위의 문서들은 居延縣 甲渠候官 소속 관리들의 功勞文書이다. 1번째 문서는 관리의 신상명 세와 功·勞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하의 문서들은 功勞뿐만 아니라 해당 관리가 갖춘 능 력을 비교적 상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각 관리들이 세운 功勞가 歲 (年)·月·日이란 시간개념으로 표시되어 있어, 漢代 서북 변경지역에서 작성된 官吏들의 功勞 文書는 ‘日’을 가장 낮은 단위로 한 ‘期間’을 중심으로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1번 째 문서에서 보이는 ‘功’이 ‘勞’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별한 軍功을 획득한 결과물인지, 아 니면 ‘勞’와 같이 시간의 축적을 통해 획득할 수 있었는지는 이론이 있었다. 胡平生은 이 문 제를 염두에 두고 功勞文書 중 하나인 徐譚功將簡에 근거하여 관리의 근무일수와 功·勞의 계산문제를 조금 더 확실히 규명하였다. 그는 徐譚이 吏가 되어 근무한 시간에 病家·秋射의 增減을 반영한 시간을 功과 勞로 환산하였다고 판단한 뒤, 관리가 정상적으로 360日을 근 무하면 1勞로 전환되었으며, 1勞를 4번 축적한 결과물인 4勞는 다시금 1功으로 전환되었음 을 계산하고 논증하였다.7) 이에 근거하면, 功과 勞는 모두 개인의 근무시간을 기반으로 하 여 계산되었으며, 서로 간에 일정한 환산방식이 존재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관리가 入 仕한 뒤로 근무일수는 계속 늘어났을 것인데, 睡虎地 11호 秦墓의 피장자인 喜의 사례와 같 이 비교적 오랫동안 官界에 몸담은 사람의 근무일수를 숫자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숫자 기 록의 번거로움 내지는 착오를 유발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기록 중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방비하고 보다 편리하게 근무일수를 통한 관리의 考課를 측정하기 위해 功과 勞라는 어휘를 사용하여 시간 표현을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다.
한편, 위에서 인용한 모든 功勞文書에서는 ‘中勞’란 용어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漢代 공 로문서 속의 勞 앞에 부기된 ‘中’은 상급자의 認准을 거쳐 법적으로 공인된 것을 증명하는 표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中勞’ 뒤에 부기된 구체적인 시간은 해당 관리가 그 누구에게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관리로서의 공식적인 이력에 해당한다. 中勞는 睡虎地秦簡에서도 정당한 勞의 산정과 관련된 律의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8), 秦代에도 漢代와 같은 勞와 功 의 산정이란 개념이 존재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래 里耶秦木牘의 내용은 이 추측을 구체적으로 검증해 볼 단서를 제공한다.
〼□〼□ (第一欄) 凡□□□□, 爲官佐六歲, 爲縣令佐一歲十二日, 爲縣斗食四歲五月廿四日, 爲縣司空有秩乘車三歲八月廿二日, 守遷陵丞六月廿七日, 凡十五歲九月廿五日凡功三∠三歲九 月廿五日 (第二欄) □□□鄕廿二年□□, □功二, □勞四∠三九月廿五日 ⦁□凡功六三歲九月 廿五日, □□遷陵六月廿七日定□□八月廿日, □□可□屬洞庭, □五十歲居內史七歲□□ (第三
7) 胡平生, 「居延漢簡中的“功”與“勞”」, 『文物』 1995-4, 文物出版社, 1995.
8) 睡虎地秦簡 《秦律雜抄》 “•敢深益其勞歲數者, 貲一甲, 棄勞. ⦁中勞律”
欄)9)
이 문서는 신상명세와 入仕時期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어떤 관리의 이력을 기록하고 있는 데, 그가 실제로 거친 직책들을 살펴보면 모두 文職에 해당한다. 위의 기록을 통해 秦漢代 의 功勞는 文·武와 상관없이 모든 관리들이 근무한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확정지을 수 있다.10) 이 木牘은 서로 다른 3개의 欄으로 분리되어 서술되어 있고 2번째 欄의 내용 이외 에는 명확히 알 수 있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3명의 관리의 이력을 비교적 상세 히 기록한 것일 가능성과 한 사람의 이력만을 자세히 서술하였을 가능성이 병존하고 있다.
1번째 欄의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어떤 한 사람의 신상과 자세한 이력이 기록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3번째 欄의 내용도 1번째 欄만큼은 아니지만 缺字가 많아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비교적 내용이 분명한 2번째 欄을 살펴볼 수 있다. 2번째 欄은 官佐로 官界에 진입하여 守遷陵丞에 도달한 한 관리의 이력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 직무를 맡은 근무일수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2번째 欄의 마지막 行에서 보이는 ‘凡十五歲九月廿五 日’은 위에 열거된 각 관직에 종사한 日數를 더한 숫자와 정확히 일치하며, 이하 3번째 欄 의 내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1) 2번째 欄의 마지막 행의 내용은 ‘凡十五歲九月廿五日凡功 三∠三歲九月廿五日’이다. 이 구절은 ‘전체 15년 9개월 25일을 근무함 : 전체 功三∠三歲九 月廿五日’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란 기호는 功을 표기하는 ‘功三’ 부분과 勞를 표기한
‘三歲…’ 부분을 구분하기 편하도록 새겨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구절의 전체 근무연한과
‘3功 3歲 9개월 25일’을 비교해 보면, 4년이 1功으로 환산된다는 漢代의 공로제도와 정확 히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漢簡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功勞의 산 정방식도 秦代의 그것을 원용한 것이란 결론이 도출된다. 비록 이 行에서는 功만이 언급되 고 勞는 전혀 언급되지 않아 功勞制度가 존재하였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3번째 欄 에 ‘勞’라는 용어가 언급되어 있다는 점과 功勞 산정방식 속의 1歲와 1勞는 표현 방식만 다 를 뿐이고 실제 계산 속에선 똑같은 가치를 가지는 점을 고려하면, 秦代에도 근무일수에 입 각한 功勞의 산정이 존재했단 점은 분명하다.
다만, 단순히 入仕하여 직책을 부여받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고과평가가 올라가는 것은 관리 개개인의 평상시 업무태도를 태만하게 만드는 등 각종 부작용이 발생할 소지가 있으며, 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래서 秦이 강구한 해결책은 모든 관 리들이 어떤 직책에 부임한 뒤의 모든 시간을 功勞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공무 를 정상적으로 수행한 시간만을 철저히 계산하여 평가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官吏의 入仕 혹은 승진·강등과 동반되는 ‘업무 시작일’은 이후에 보고해야 할 각 관리의 ‘從事 期間’이 측정되는 출 발점이 되므로 다른 어떤 숫자보다도 엄밀하게 계산되었고, 그 전후 절차는 각종 法令들을 통해 최대한 정밀하게 구성되었다.
9) 里耶秦簡博物館 等 編, 『里耶博物館藏秦簡』, 中西書局, 2016, p.196, 簡10-15.
10) 卜憲群은 漢代의 ‘功’이 ‘武功(軍務官吏)’과 ‘事功(行政官吏)’으로 나누어진다고 설명하였다. 秦帝國 末부터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漢帝國 初에는 인사제도에서 ‘武功’이 중시되었지만, 武帝 이 후에는 儒生·文吏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事功’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설명하였다.(卜憲群, 「西漢東 海郡的个案硏究」, 『秦漢官僚制度』,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1, pp.336-337) 그의 설명에 의거 하면, 簡10-15는 ‘事功’의 범주를 보여주는 功勞文書라 할 수 있다.
11) 다만 3번째 欄에서 보이는 숫자가 2번째 欄에서 보이는 숫자와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서 로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인지는 확실히 판단하기 어렵다. 2번째 欄과 3번째 欄의 내용은 서로 관 련이 없다고 추정한 의견은 존재한다. 張忠煒, 「里耶秦簡10-15補論 – 兼論睡虎地77號漢墓功次文 書 - 」, 『中國古代法律文獻硏究』(第十三輯), 中國政法大學法律古籍整理研究所, 2020, p.102.
秦漢代에는 官吏가 자신의 직무를 처리하는 것을 視事 혹은 見事라고 통칭하였다. 視事는 秦漢代 簡牘, 특히 人事管理 관련 내용에서 주로 등장하고 있어 비교적 고정적인 의미로 사 용된 행정용어 혹은 전문용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다른 人事管理보다도 官吏의 경력 혹은 특정 직책에 종사한 시간을 표시할 때에 視事란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視 事는 官吏의 入仕 혹은 인사이동 절차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入仕부터 視事 까지의 모든 절차들은 순서에 따라 그에 적용되는 法令 혹은 준수해야 할 법적 조건이 존재 하였고, 이 절차들을 거쳐야만 법적으로 공인되는 관리의 視事가 시작될 수 있었다. 우선, 관리의 入仕와 視事 사이의 관계는 아래의 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除吏, 尉已除之, 乃令視事及遣之 ; 所不當除而敢先見事, 及相聽以遣之, 以律論之.
(吏를 임용함에, 尉가 [대상자를] 정식으로 임명한 이후라야만 비로소 그로 하여금 직권을 행사하게 하거나 취임하도록 파견할 수 있다. 만일 임용이 부당함에도 감히 먼저 직권을 행사하거나, [임용권자와 피임용자가] 서로 사사로이 모의하여 피임용자를 임지로 파견하 여 취임하게 한다면, 법률에 의거하여 논죄한다.)
인용한 置吏律의 규정은 尉가 관리의 임용에 일정한 직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 여준다. 여기서의 尉는 일반적으로 縣尉라 생각되는데, 지방 吏員을 임용할 때에는 縣令·縣 丞의 승인보다도 縣尉의 승인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縣尉의 승인이 이루어 진 후의 단계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는 관리의 원적지·원 근무지가 새로이 발 령받은 근무지와 같아서 곧바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경우로서, 위의 簡文에서도 그 경우 는 곧바로 視事를 허가한다고 규정하였다. 두 번째는 그 반대의 경우인데, 이때의 절차는 縣尉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특정 職에 임명된 사람이 근무지로 이동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漢代에 西北 邊境地域으로 발령이 된 타 지역 관리들은 임명문서에 근거한 일종 의 신분증 혹은 통행증을 지참하고 발령받은 근무지로 이동하였다. 秦代에도 당연히 그러한 절차를 보여주는 통행문서가 존재하였을 것이다.12)
그런데 관리의 원적지 혹은 원 근무지가 새로이 발령받아 가게 된 근무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면 당연히 근무지로의 이동 기간도 길어질 것이며, 視事를 시작하는 시점도 늦춰진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이 단순한 이동 기간을 視事日數로 포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縣官 내에서는 縣尉를 비롯한 縣廷의 정식 임명이 끝나고 난 뒤에 官府에 연락하여 새로이 배속된 관리의 視事 시작일을 보고하라고 통지하는 절차도 존재하였다. 아래의 簡文을 참고 할 수 있다.
廿六年八月庚戌朔壬戌, 廐守慶敢言之 : 令曰 : 司空佐貳今爲廐佐, 言視事日. ⦁今以戊申視 事. 敢言之. 貳手. (簡8-163)
([秦始皇] 26년 8월 庚戌朔 壬戌日, 廐守 經이 감히 말씀 드립니다. : 명령하시길 ‘司空佐 貳를 廐佐로 임명하였으니, 그의 視事日을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가 戊申日부 터 視事하였음을 보고 드립니다. 감히 말씀드렸습니다. 貳手.)
위의 簡文은 遷陵縣 소속 司空佐가 廐佐로 전임된 상황과 그에 수반된 행정 처리를 비교적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 문서에서 보이는 遷陵縣의 司空佐 貳는 근무 장소가 원 근무 장소에
12) 朱紅林, 「里耶秦簡視事簡硏究」, 『出土文獻與法律史硏究』(第四輯), 法律出版社, 2015, pp.14-15를 참조.
서 멀리 떨어져 있을 리 없는 遷陵縣 소속의 廐官으로 근무지가 이동되었을 뿐이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廐官守는 縣廷의 명령대로 신임자의 視事 시작일을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이는 秦代의 視事 시작시점에 대한 측정은 상당히 까다로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연히 새로운 근무지가 원적지·원래 근무지와 전혀 다른 행정구역에 속한 경우는 더 까다롭게 그 사람의 현재 위치 혹은 신상과 視事 시작일을 함께 조사하고 검증, 정리하였을 것이다. 이 조사결과는 당연히 縣廷의 속하 吏員들에 대한 人事管理와 이후 보고받게 될 각 관리들의 履歷 혹은 근무보고서의 재검토를 위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상술한 과정은 지위의 고하·임관 경력과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집행되었다. 秦의 視事 시 작일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관리는 전국의 모든 官吏들이 받게 될 고과평가의 정당성을 담 보하기 위한 조치이다. 또한, 功勞의 정당성에 대한 검토의 중요성은 秦漢代의 法令에서 관 리들의 功勞와 관련된 문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하도록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구할 수 있 다.13) 이 때문에 관리의 ‘功勞’에 대한 산정도 그 신뢰성 담보를 위한 視事日數의 구체적인 산정 방법이 존재하였다. 물론 관리 개개인의 부정확한 산정 혹은 고의적인 조작을 막기 위 해 각 행정기구의 지속적인 정보 수집과 취합 및 보고자(吏 개인)-諸官長-상급 기관 간의 교차검증은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功勞의 구체적인 산정 방법은 상술한 視事日數의 公認과 계산을 중심으로 하되, 별개의 과정도 존재하였다. 관리들이 정상적으로 자신의 근무지에서 정상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한, 그의 視事日數는 법적으로 인정을 받고 관련 통계자료로 사용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도 정상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지 않은 시간은 視事日數 의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관리의 근무지 이탈을 들 수 있다. 秦代 관리 는 특정 기간 내에 5일 이상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별도의 처벌을 받았고,14) 이 규정에 해당하는 日數는 공로의 산정에도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규정은 고의성의 여부 와 관계없이 관리의 일탈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기에 視事日數의 산정 문제는 규정을 어긴 관리의 처벌과 관련될 뿐인 부차적인 문제에 가깝다. 그러므로 視事日數의 유효성에 직접적 으로 관련된 규정 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의 문서는 정상적인 근무일수와 그렇지 않 은 日數가 명확히 구분되었음을 보여준다.
冗佐八歲上造陽陵西就曰駋, 廿五年二月辛巳初視事上衍. 病署所二日. ⦁凡盡九月不視事二日,
⦁定視事二百一十一日. (正面) 廿九年後九月辛未行計, 即有論上衍. 卅年□不視事, 未來. (背 面) (簡8-1450)15)
(冗佐로서 8년간 근무한 上造 신분의 [원적지가] 陽陵縣 西就인 駋는 [秦王 政] 25年 2 月 辛巳日에 처음으로 上衍縣에서 視事하였다. 病으로 인해 2일 동안 視事하지 않았다. ⦁ 凡 : 視事日數는 9月까지였지만, 그 중 2일은 視事하지 않았다. ⦁정식 視事日數는 211日 이다. [秦始皇] 29년 後九月 辛未日에 上計하러 갔는데, 上衍縣에서 논죄될 사안이 있었 다. [秦始皇] 30년, □不視事, 未來.)
이 文書는 上造 駋의 신상명세 및 視事日數의 산정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문서의 正面에는 上造 駋가 上衍縣에서 근무한 상황을 숫자로 계산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 며, 背面에는 그 내용이 명료하지는 않지만 上衍縣에서 어떠한 論處와 관련된 사안이 있었
13) 『嶽麓秦簡(肆)』 簡347-348 “功勞皆令自占, 自占不⍁⍁實, 完爲城旦.”
14) 『嶽麓秦簡(伍)』 271簡, p.188, “【不】視事毋過五日, 過五日, 貲二甲. •遷吏令甲廿八”
15) 陳偉 主編, 『里耶秦簡牘校釋(第一卷)』 , 武漢大學出版社, 2012, p.329, 簡8-1450.
음이 기록되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내용은 正面에 기록된 上造 駋가 秦王 政 25 년에 上衍縣에서 視事한 日數를 계산한 방법이다. 上造 駋는 冗佐로 入仕하여 2월 辛巳日부 터 9월 말까지 대략 7개월이 약간 넘는 시간을 근무하였지만, 病으로 인해 視事하지 않은 2일을 뺀 211日만을 그의 視事日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漢代에는 病으로 인해 視事를 멈추고 自家에서 요양이 필요한 경우에는 ‘病書’란 문서를 제출하여 소속 관부가 이를 수리 하면 그 날짜부터 視事日數에서 제외되었으며, 관리가 요양을 마친 후에 다시금 “病廖” 혹 은 “有廖”이란 용어를 사용한 문서를 제출하여 정상 근무를 시작하였다고 보고하는 절차가 존재하였다.16) 따라서 病廖書가 상부에 보고되는 시점이 관리가 다시금 視事日數를 축적하 기 시작하는 기준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減算 상황은 고의성이 있든 없든 언제까지나 개인의 특수한 사정 으로 인해 빚어지고 처리된 결과이며, 더욱이 정기적으로 꾸준히 일어날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秦漢代에 국가가 선제적으로 규정한 奪勞 상황이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秦代에도 상술한 漢代의 ‘奪勞’ 규정이 똑같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는 확언하기 어 렵다. 지금까지 공표된 秦漢初의 簡牘에서는 그 대략적인 서사시기를 불문하고 관리의 犯法 에 대한 징계 조치는 肉刑·貲奪·爵이 종종 언급될 뿐이고 奪勞가 언급된 사례는 전혀 존재 하지 않는다. 그 대신 勞가 쌓인 결과물인 功을 빼앗는 조치가 존재하였다.
●令曰 : 御史節發縣官吏及丞相·御史·執灋發卒史以下到縣官佐·史, 皆毋敢名發. 其發治獄者 官必遣嘗治獄二歲以上. 不從令, 皆貲二甲, 其丞·長史·正·監·守·丞有(又)奪各一攻(功), …17) (●令曰 : 御史大夫가 [節로써] 縣官의 吏를 징발하는 것 및 丞相·御史[=御史大夫]·執灋이 卒史 이하인 縣官의 佐·史를 징발하는 것은 모두 감히 [징발 대상자의] 이름을 지정하여 징발해서는 안 된다. 그 중 獄事를 다스리는 데 징발되는 관리는 반드시 이전에 2년 이상 의 治獄 경력자로 보내야 한다. 令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貲 2甲이고, 그 중 丞(御史中 丞)·長史(丞相長史)·正·監[郡監]·(郡)守·(郡)丞은 더하여 각각 1功을 빼앗고, … [下略])
위의 令文은 중앙정부 소속 高官들이 縣에 소속된 少吏들을 징발할 때에는 일정한 익명성 내지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 및 그 중에서도 獄事를 맡는 관리는 ‘2년 이상’의 獄 事를 담당한 이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令文은 대략적으로는 高官과 縣吏 간 의 私的 유착관계 형성을 막기 위해서 제정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獄事를 위한 징발에 부가된 조건도 같은 맥락에서 사적 관계를 빌미로 한 부적격자의 선발을 막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犯令에 가담한 중앙의 御史中丞 등과 함께 郡守·郡丞에게 는 ‘一功’, 즉 ‘勞四歲’를 추가로 빼앗는다는 규정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秦代에는 貲罰·奪爵 혹은 免官·廢官을 통해 관리를 징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令文만은 예외적으 로 奪功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漢代의 여러 개별적인 奪勞 규정과 비교해 보아도 무거운 수준이다. 관리의 功勞에 대한 징계는 결국 해당 관리의 이력을 부정하고 이후의 승진에 제 약을 준다는 점은 분명하다면, 수많은 지방 小吏들 중 일부인 郡의 卒史 내지 縣 내부의 嗇 夫·佐史層보다는 지방의 長吏層에게 奪功 관련 징계가 치명적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은 존 재한다. 이는 官職에 따라 규정된 秩祿·특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少吏層에 속하는 佐 史·斗食·有秩 간에는 명확한 상하관계가 존재했으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俸祿의 차이는 1년
16) 朱紅林, 위의 논문, 2015, pp.24-25.
17) 『嶽麓秦簡(伍)』, pp.110-111, 簡128-130.
을 기준으로 하여 각 등급 간 20~40石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少吏層에서 가장 낮은 지위의 佐·史일지라도 有秩級과 같이 養·僕을 분배받는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少吏의 功勞를 빼앗아서 결과적으로는 그가 직위의 강등을 겪게 되더라도, 그 실효성은 비교적 떨 어진다. 그와 반대로, 위의 규정에서 언급된 御史中丞·丞相長史를 비롯한 高官들은 奪功을 통해 功勞가 밀림으로써 더욱 높은 직위로의 승진이 지체되거나, 中央政府로의 진출이 늦춰 질수록 손해가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위의 秦令은 이를 의식하고 朝廷 내 高官 들의 功을 삭감하겠다고 규정한 것이다.18)
이와 더불어, 각종 奪勞에 상응하는 增勞 규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秦代 자료에서는 縣 내부의 목축과 관련하여 포상 격의 增勞를 주었다는 규정이 존재한다.
以四月·七月·十月·正月膚田牛. 卒歲, 以正月大課之, 最, 賜田嗇夫壺酉(酒)束脯, 爲旱<皂>者 除一更, 賜牛長日三旬 ; 殿者, 誶田嗇夫, 罰冗皂者二月. 其以牛田, 牛滅絜, 治(笞)主者寸十.
有(又)里課之, 最者, 賜田典日旬 ; 殿, 治(笞)卅. 廐苑律19)
(4월·7월·10월과 正月에 田牛의 상태를 평가한다. 만 1년을 기한으로 正月에 대대적인 심 사를 거행하는데, 성적이 우수한 경우, 田嗇夫에게 술 1병과 말린 고기 10가닥을 상으로 내리고, 소를 사육한 자에게는 한 차례의 更役을 면제해 주며, 소 사육의 책임자에게는 상 으로 근무 일수에 30일을 더해 준다. 성적이 열등한 경우, 田嗇夫를 질책하고, 소 사육 관 계자 모두에게는 벌로써 근무 일수에서 2개월을 삭감한다. 만일 소를 경작에 이용하여, 소 의 허리둘레가 줄어들었을 경우, 줄어든 치수 1寸마다 그 책임자에게 매를 10대씩 때린 다. 또한 里에서 소를 심사하여, 성적이 우수한 경우, 里典에게 평소의 근무 일수에 10일 을 더 근무한 것으로 산정해 주고, 열등한 경우는 매를 30대 때린다. 廐苑律)
위의 조문은 戰國時代 秦縣에서 실시된 농업용 소 사육평가에 대한 몇 가지 규정을 명시하 고 있다. 牛耕 농법은 戰國時代 初부터 널리 실행되어 농사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이었으 며, 秦에서도 우경에 이용되는 소의 건강에 대한 평가가 보편적으로 실시되었음을 보여준 다. 소의 상태에 대한 평가는 4월·7월·10월에 縣 자체적으로 실시되었고, 1년마다 돌아오는 正月에만 전국적인 규모의 縣 내부 소의 사육상태에 대한 심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점은 殿最에 기반한 田嗇夫 및 기타 소 사육에 동원된 사람들에 대한 考課 이다. 田嗇夫는 民間 소유 田宅과 田牛의 상태 및 漆園을 관리하였으며20), 각종 가축의 사 육·관리를 관장하는 ‘廐’와 ‘苑’에서 田牛를 대여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하였 기 때문에 업무계통이 다른 ‘廐苑律’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이다.21) 다만 여기서는 확 실히 관리의 列에 속하는 田嗇夫가 아니라 소의 사육과 관련된 신분이 불분명한 직역자들에 게만 ‘增勞’가 이루어지고 있다. 田牛의 사육 담당자 및 소를 대여받아 사용하는 里의 대표 인 里典은 근무일수를 받음으로써 이후 모종의 특혜를 받을 수 있는 발판으로 삼았을 것인 데, 구체적으로는 이후 자신이 책임져야 할 근무일수를 면제받는 것 혹은 軍人이 세운 斬首
18) 이성규, 『數의 帝國 秦漢 : 計數와 計量의 支配』, 대한민국 학술원, 2019, pp.470-472를 참조 할 수 있다. 이성규도 秦의 律令에서 奪勞는 그다지 확인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前漢 中期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는 西北漢簡의 내용들을 주로 인용하여 功勞制度 속의 奪勞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의 불균형적 현상이 단지 우연의 산물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秦漢初의 律令에서는 ‘奪勞’란 처 벌 자체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19) 睡虎地秦簡 《廏苑律》
20) 김종희, 「秦代 縣의 曹組織과 地方官制」, 『東洋史學硏究』 第128輯, 동양사학회, 2014, pp.83-91의 논의를 참조.
21) 이성규, 「秦의 山林水澤開發의 構造」, 『東洋史學硏究』 第29輯, 동양사학회, 1989, p.109.
의 功과 같이 정식 少吏로 入仕하는 신분전환의 근거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 秦代에도 考課制度를 운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功勞’란 개념이 존재했단 사실 을 바탕으로 하여, 功勞는 철저히 관리 개인의 공인된 근무시간과 별도의 增減요소를 근거 로 하여 功勞를 산정하도록 규정하였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히 해명되 지 못한 점은 지방 郡縣에 소재한 수많은 長吏·少吏들이 제출한 공로를 어떻게 ‘功勞吏員 (簿)’란 장부의 형태로 정리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는지의 문제이다. 국가가 임명한 정식 吏員이 배속된 秦代의 最低層 행정기구는 각 鄕에 설치된 鄕官이었으므로, 鄕官에서 근무하 는 鄕嗇夫 이하 鄕佐·鄕史가 직접 작성한 공로문서들이 함께 소속 縣으로 이첩되며, 縣에서 근무하는 관리들도 그 시간대에 맞추어 스스로 功勞文書를 제출하였다. 이 모든 공로문서들 은 각 관리들의 視事日數 및 기타 增減 사항이 기록된 문서들을 참고하여 별도 검증을 거친 뒤 정리되어 다시금 郡으로 제출되었다.22) 이러한 과정은 전국의 모든 각급 官府가 한 제도 아래 얽히는 거대한 행정작업이었는데, 大小 관리들의 수많은 功勞 기록을 일별하여 정리하 는 방법이 필요했음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 비록 漢初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최근 중국 湖 北省 雲夢縣 睡虎地 77號 墓에서 출토된 功勞와 관련된 일련의 木牘들을 참고할 수 있다.
(1) [十]五年功次 ⦁野 : 留功一·勞一歲八月, 粱人功一·勞一歲七月廿五日, □功一·勞一歲七月廿五 日, 忠功一·勞一歲七月六日, 嬰功一·勞一歲七月二日, 定邑功一·勞一歲六月廿八日, 越人功〼 申功
□〼 期功□〼 霸功〼 戎功一·勞〼 遂功一·勞〼
(2) 二年官佐功次 : 定邑功二·勞三月一日, 任成功二·勞三月, 救嬰功二·勞二月, 亡臣功二·勞一月六 日, 申功二·勞十一日, 何成功二·勞七日, 最功一·勞三歲七月十八日, 鄧豕功一·勞三歲四月十五[日].
(3) 三年功次 : 任成功二·勞一歲二月十日. 嬰功二·勞一歲一月廿日. 亡臣功二·勞一歲廿六日.
越人功二·勞一歲廿二日. 何成功二·勞一歲七日, •今休四日. 申功二·勞十一月廿七日, •四年告 丗日. □功二·勞八月廿五日. 簪功二·勞七月廿八日, •多五月十六日. 最功二·勞六月廿八[日].
午功二·勞六月十[六日]. 豕功二·勞五月十日. 安國功二·勞一月. 諶功二·勞廿六日. 霸功二·勞 十七日. 三年功盈二以上者凡十四人.23) (이상 簡文의 밑줄은 필자가 별도로 부기한 것이며, 人名이다.)
이 문서들은 前漢 孝文帝 前元 15년(기원전 165년)~後元 3년(기원전 161년)에 걸쳐 작성 된 雲夢縣 소속 관리들의 功勞를 기록한 문서이다.24) 이 문서들에서 보이는 관리 모두 1勞 이상의 수치들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에, 기원전 165년에 축적한 功勞만을 기록한 것이 아 니라 적어도 孝文帝 前15년 이전부터 축적하고 있었던 功勞를 이 문서에 전부 합하여 기록 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누적된 功勞의 숫자를 집록하는 방식을 채택한 이 유는 분명하다. 단순한 행정상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새해의 시작부터 쌓은 (功)勞만이 功勞考課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해 시행되는 고과평가의 시점까지 각 관리들이 이
22) 陳偉 主編, 『里耶秦簡牘校釋』(第一卷), 武漢大學出版社, 2012, p.351, 簡8-1531, “二人與上功吏 : 皆·狼.”
23) 이상 3개 釋文은 陳偉·熊北生, 「睡虎地漢簡中功次文書」, 『文物』 2018-3, 文物出版社, 2018, pp.65-66에서 인용하였다. 해당 功次文書들의 圖板은 p.66-67에 첨부된 <圖一> <圖二> <圖三>
을 참고할 수 있다.
24) 문서의 표제에는 ‘功’만이 언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功’과 ‘勞’ 모두를 열거하고 있 어 功勞와 관련된 文書 속의 ‘功’은 功과 勞를 포괄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陳偉·熊北生, 앞의 논문, p.65.
전부터 쌓아 온 功勞를 기준으로 하였다는 설명이 보다 합리적이다. 또한 이 문서들은 ‘功 次’란 표제 아래 철저하게 功勞가 많은 관리들부터 순서대로 기록하였다. 모든 郡縣 관리들 이 스스로 보고한 功勞를 굳이 다시금 功勞의 축적순서대로 정리하여 보고한 이유도 ‘功勞’
로 상징되는 연공서열의 신뢰성을 보증하고 승진 혹은 현상 유지를 위한 근거로 삼았던 것 이다. 한편, (2)와 (3)의 격식은 (1)과는 달라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二年官佐功次》
는 功勞의 순서대로 정렬을 하되 특정한 官職을 맡은 사람들만 묶어서 확인하기 위한 功勞 文書였으며, 《三年功次》는 孝文帝 後元 3년 雲夢縣 소속 吏員들 중에서도 ‘2功’ 이상을 축적한 사람들만을 적록하고 있다. 縣·鄕의 관리들이 각자 功勞를 스스로 보고한 뒤에는, 縣 소속 모든 관리들의 功勞를 차례대로 정리한 文書가 작성됨과 동시에 관직 및 일정 숫자의 功을 기준으로 한 文書도 별개로 작성되었던 것이다. 이 둘의 내용까지 종합하면, 縣과 道 에서는 속하의 鄕에 속한 관리들이 스스로 계산해서 올린 功勞文書를 위와 같이 연도·직책·
功數별로 재정리를 한 뒤, 매년 8월 5일까지 각 縣에 소속된 獄史와 令史가 功勞文書들을 執灋에게 상보하는 것으로 功勞에 의거한 考課와 관련된 모든 사무가 마무리되었다고 정리 할 수 있다.
3. 나가며
功勞에 입각한 考課는 언제나 해당 관리가 받게 될 대우와 출세의 가능성을 결정짓는 요 소로 작용하였다.25) 실제로 前漢 中期의 상황을 전하는 문헌에서는 당시의 관료집단에서 관리 개인이 오랫동안 官界에 몸담아 온 것을 ‘功’으로 여겼다는 풍토를 엿볼 수 있다.26) 이를 증명 하듯, 漢代의 문헌사료 혹은 簡牘에서는 ‘積勞’에 의거한 보임·승진·강등 조치·규정이 다수 산견된다.27) 특히 尹灣漢簡의 일부 내용인 《東海郡下轄長吏名籍》은 功勞와 인사조치의 관 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문서는 東海郡 소속 長吏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長吏가 되었 는지를 언급하고 있어 주목되었다. 그 구체적인 승진 원인에는 문헌사료에서도 자주 보였기 때문에 당연히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되어 왔던 秀才察廉·孝廉·반국가 세력의 진압과 같은 요인들도 존재하였지만, 功과 功次가 차지하는 비율이 도리어 절반을 상회한다. ‘功次’를 통 한 승진비율은 전체의 7%이고 ‘功’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54%를 차지한다. 軍功과는 별다 른 관련이 없었던 漢代 중~후기의 內郡에서도 ‘(績)功’을 통한 승진조치가 활발히 이루어지 고 있었던 것이다. 尹灣漢簡의 내용은 어떠한 특수한 경우가 아닌 漢帝國의 일반적인 상황 을 보여주는 한 지표라 할 수 있으므로28), 功勞에 의한 관리의 인사조치도 당연히 漢帝國 내부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5) 『漢書』 卷62 「司馬遷傳」, p.2727, “外之, 不能備行伍, 攻城野戰, 有斬將攀旗之功 ; 下之, 不能 累日積勞, 取尊官厚祿……”
26) 『漢書』 卷56 「董仲舒傳」, p.2513, “以日月爲功.”
27) 安作璋·熊鐵基, 『秦漢官制史稿』, 齊魯書社, 2007, pp.404-410이 功次 혹은 功勞의 축적에 따른 補任·昇進·降等·同級 轉任과 관련이 있는 문헌사료를 열거하고 있다. 간독자료 속의 사례들은 이성 규, 앞의 책, 2019, pp.472-475를 참고할 수 있다.
28) 卜憲群, 「西漢東海郡的个案硏究」, 『秦漢官僚制度』,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1, pp.308-310의 논증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