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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古中世 石刻資料 解題 및 譯註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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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 고대사 역사학 연구자에게 한정된 자료는 역사적 상상력 을 자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연구의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 고고학의 발전과 그에 따른 발굴의 진행으로 연구에 새로운 활기가 더해지고 있다. 특히 先秦·秦漢史 분야에서 최 근 몇 년 간 이뤄진 문자 자료의 지속적인 출토와 발굴은 그간 문헌 사료가 제공하지 못했던 생생한 통치의 현장감을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전면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심각했던 자료 부족의 문제가 어 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굴 자료가 주로 법률 문 서였기 때문에 다양한 역사상, 특히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적 측면을 들여다보기에는 자료의 한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발굴된 법률 문서가 주로 漢初까지에 집중되어 있는 점도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동아시아 역사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는 석각 자료가 주목된다. 墓碑를 비롯하여 墓表, 墓闕, 賣地券, 墓誌, 造像記 등 다양한 석각 자료는 다양한 형태만큼이나 다양한 계층이 목적을 달 리 하며 조성하였기에 그것이 제작된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 그리고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학 연구에 있어 석각 자료의 적극 적인 이용은 사료 부족이란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이고 보다 다채롭고 입체적인 역사상의 구축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석각 자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과는

달리 여전히 문헌 사료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부족을 메우는 보조적인

자료로 한정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석각 자료가

역사 연구 자료로 사용될 수 있게 가공되어 있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될

것이다. 자료의 보고라고는 하나 표점도 되어 있지 않고 진위마저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으며, 결락과 파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들도

(2)

많다. 또한 그 분량의 방대함과 내용의 다양함으로 연구자 개개인이 다루기가 어렵고, 독특한 형식과 문체로 인해 느끼는 생소함도 석각 자료를 여전히 ‘자료의 보고’로만 남겨두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를 위해서는 석각 자료에 대한 본격적이면서 종합적인 연구가 시급하다. 특히 최근 중국과 일본학계 에서 석각 자료에 대한 자료 집성과 釋讀 작업이 새로운 연구 영역으 로 등장하고, 석각 자료를 통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을 염 두에 두면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석각 자료에 대한 총 합적인 대응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中國 古中世 石刻資料 解題 및 譯註>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 유한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동아시아 석각자료 연구회’를 결성 하여 작업한 결과의 일부다. 석각 자료의 특성상 다양한 전공자들의 지식과 상상력이 결합될 때 총합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판단에 중국 고 중세사 연구자들과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중국불교사, 동 양철학, 동양서예사 전공자들이 독회를 결성하였고 정기적인 독회를 통해 미흡하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釋文들을 상호 대조하고 사진 자료의 판독 을 통해 보다 정확하고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완 전하지 못한 자료들과 생소한 용어들 사이에서 석각 자료의 패턴을 찾 으려고 각 석각 자료 마다 해제를 작성하였다. 가능한 독자들에게 석 각 자료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가독성 높은 역문을 제시하는 것이 독회 참여자들의 바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제와 역주 안에 는 여전히 미비한 점투성이다. 앞으로 지속적인 보완이 있을 예정이 다. 많은 지적을 바란다.

일러두기 1.해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제목, ②각석시기, ③출토시기 및 장소, ④재료, ⑤외형 및 행자수,

(3)

<前漢河平三年(전 26)麃孝禹刻石>

河平三年八月丁亥,」

平邑□里

麃孝禹.

【墓碑 구성】

❶刻日 ❷本籍 ❸(墓主)姓名

【해제 구성】

①<麃孝禹刻石>, <麃孝禹碑>, <河平石碣> ②河平 3년(전 26) ③同 治 9년(1870). 山東省 費縣 平邑鎭(현재 평읍현) ④石 ⑤圓首形. 높 이 133㎝·너비 44.5㎝(탁본 기준). 총2행, 매 행8자. 隸書 ⑥북경 국 가도서관 軸309 ⑦八瓊室金石祛僞; 十二硯齋金石過眼錄; 函靑閣 金石記; 校碑隨筆 ⑧八瓊室金石祛僞; 增訂寰宇貞石圖解說; 山 東漢畵像石選集; 北京圖書館藏 中國歷代石刻拓本滙編; 中國書法 全集 7-秦漢石刻 卷1; 漢代石刻集成 圖板·釋文篇; 漢魏六朝碑刻 校注; 漢碑全集; 中國歷代名碑釋要 ⑨後漢時期 墓碑가 처음 등 장했다는 일반론에 맞서 楊寬은 前漢時期의 기년을 이 각석을 최초의

⑥탁본 유무, ⑦題跋, ⑧著錄, ⑨설명, ⑩소장정보, ⑪관련 논저

2.석각의 구성과 해제와 관련한 내용은 각주를 이용하여 설명하였고, 원문 해석에 대한 설명은 역문에 주를 기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3.석각의 제목은 <왕조명+연호(서력)+묘주명+묘비(묘지, 조상기)>의 형태로 표기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석각명은 해제에서 설명하였다.

4.해제에서 인용 문헌은 제목만으로 표기하거나 필요에 따라 (저자, 연 도, 쪽수)의 형태로 표기한다. 생략된 서지 사항은 서두의 <참고문헌>에 서 밝혔다.

5.역문에서 꺽쇠[]는 모두 역자의 필요에 의해 이용된 것이다.

6.역문은 한글(한자) 병기를 원칙으로 하며, 지명·인명 등 고유명사에 는 밑줄을 책이름에는 기울기를 적용하였다.

<墓碑 3種>

洪 承 賢 (서강대)

(4)

묘비로 이해하였다(楊寬, 2003) ⑩山東省博物館 ⑪徐三玉, 「西漢石刻 文字初探」, 文物1964-5.

<新天鳳三年萊子侯刻石>

始建國天鳳」三年二月十」三日,

萊子侯

」爲支人爲封,

使偖子良等

」用百余人,

後」子孫毋壞敗.

【墓碑 구성】

❶刻日 ❷(墓主)姓名 ❸刻石 목적 ❹동원 인력 ❺종결 문언

【해제 구성】

①<萊子侯刻石>, <萊子侯封田刻石>, <萊子侯贍族戒石>, <天鳳刻 石> ②天鳳 3년(16) ③嘉慶 22년(1817). 산동성 鄒縣 남쪽 臥虎山

④石 ⑤높이 37㎝·너비63㎝(탁본 기준). 총7행 매 행5자. 隸書 ⑥북 경 국가도서관 顧18 ⑦八瓊室金石補正; 十二硯齋金石過眼錄; 函 靑閣金石記; 枕經堂金石書畵題跋; 寶鴨齋題跋; 金石續編 ⑧八 瓊室金石補正; 增訂寰宇貞石圖; 漢碑全集; 中國書法全集 7-秦 漢石刻 卷1; 漢魏六朝碑刻校注; 漢代石刻集成 圖板·釋文篇; 中

하평(河平) 3년(전 26) 8월 1일 정해(丁亥),

1)

평읍□리(平邑□里)

2)

표효우(麃孝禹).

3)

1) 기년은 ‘연호+월수+日干支(朔旦干支와 일수가 생략)’의 방식으로 기재되었다.

연구자에 따라 ‘亥’자 이후 글씨를 각석한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漢魏六朝碑刻校注에 따르면 ‘卒’자와 유사하다고 한다.

2) 평읍□리[平邑□里]: 판독이 분명하지 않은 이 글자에 대해 山東漢畵像石選 集은 ‘平邑□里’를 ‘平邑成里’로 읽었고, 校碑隨筆과 漢魏六朝碑刻校注에 서는 ‘平邑侯里’로 읽었다.

3) 표효우[麃孝禹]: 楊寬은 이 각석을 <麃季禹刻石>이라고 하여, 대부분의 연구 자들이 ‘孝’로 읽는 것과 달리 ‘季’로 보았다(楊寬, 2003, p.156). ‘禹’는 十二 硯齋金石過眼錄에는 ‘象’으로 되어 있다.

(5)

國歷代名碑釋要; 秦漢刻石選譯; 濟寧全漢碑; 北京圖書館藏 中國 歷代石刻拓本滙編 ⑨後漢時期 유행하는 石闕의 선구적인 형태를 띠 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묘비로도 보지만 封土境界石으로 보는 경 우도 있다. ⑩鄒縣 孟廟 ⑪徐三玉, 「西漢石刻文字初探」, 文物

1964-5.

<後漢建武二十八年三老諱字忌日記>

1)

(右一段) 三老諱通,

字小父,

庚午忌日,

祖母失諱,

字宗君,

癸未忌日.

(右二段) 掾諱忽,

字子儀,

建武十七年, 歲在辛」丑,

시건국(始建國) 천봉(天鳳)

1)

3년(16) 2월 13일,

내자후(萊子侯)를 대신하여 족인(族人)

2)

들이 봉(封)

3)

을 만들었다.

차자량(偖子良)

4)

등 백여

5)

명의 인력을 동원하였다.

이후 자손들은 파괴하지 말지어다.

6)

1) 시건국천봉[始建國天鳳]: ‘始建國’과 ‘天鳳’ 둘 다 新의 연호다. 시건국은 9~13년, 천봉은 14~19년에 해당한다. 두 개의 연호를 적은 이유는 분명치 않 으나 ‘天鳳三年’이라는 기년이 각석된 것에 따르면 ‘始建國’은 불필요하다. 李 檣은 이것을 당시 인민들이 時政에 어두웠던 증거라며 당시인들이 ‘始建國’을 국호로 이해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국호+연호+날짜를 쓰는 습관에 의해 연호 앞에 국명으로 이해한 ‘始建國’을 쓴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李檣, 2009, p.13).

2) 족인[支人]: 支庶를 의미한다. 즉, 族人을 말한다.

3) 봉[封]: 封墳(中國古代陵寢制度史硏究), 田界(十二硯齋金石過眼錄), 祭壇(

金石續編)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로 인해 이 刻石을 봉토경계석으로 보는 이견이 존재한다.

4) 차자량[偖子良]: ‘偖’는 ‘諸’의 異體字로 판독되기도 하고(金石續編), ‘俻’로 읽히기도 한다(八瓊室金石補正·漢魏六朝碑刻校注). 漢魏六朝碑刻校注에 서는 ‘良’을 ‘食’으로 보았다.

5) 여[余]: ‘余’는 ‘餘’다.

6) 파괴하지 말지어다[毋壞敗]: 초기 석각에 등장하는 종결 文言으로, 석각 보존 에 대한 당부의 말이다.

(6)

四月五日辛卯忌日.

母諱捐,

字謁君,

建武廿八年, 歲在壬」子, 五月十日甲戌忌日.

(右三段) 伯子玄曰大孫,」 次子但曰仲城,」 次子 紆曰子淵,」 次子提餘曰伯老,」 次子持侯曰仲雍,」 次子盈曰少河. (右 四段) 次子邯曰子南,」 次子士曰元士,」 次子富曰少元,」 子女曰无名,」

次女反曰君明.

(左段) 三老德業赫烈, 克命先己, 汁稽履仁, 難名兮, 而右九孫. 日月虧代, 猶元風力射.」

及所識祖諱, 欽顯後嗣. 蓋 春 秋 義, 言不及尊, 翼上也. 念高祖至九子未遠, 所諱」 不列, 言事觸忌,

貴所出嚴及□, 敬曉末孫, 冀 副祖德焉.

【墓碑 구성】

❶諱 ❷字 ❸卒年卒日 ❹世系 ❺頌辭(정형화되기 전의 銘辭2)) ❻ 建碑者3) ❼건비의 목적 ❽후세에 대한 당부

【해제 구성】

①<三老諱字忌日記>, <三老碑> ②建武 28년(52) ③咸豊 2년 (1852). 浙江省 餘姚縣 客星山 ④長方形. 높이 87㎝·너비63㎝(탁본 기준). 우 4단 좌 1단 구성. 우 각 단 4~6행, 매 행 4~9자. 隸書 ⑤ 石 ⑥북경 국가도서관 軸329 ⑦有萬憙齋石刻跋; 八瓊室金石補正;

結一廬遺文; 函靑閣金石記; 雪堂金石文字跋尾; 校碑隨筆 ⑧

八瓊室金石補正; 增訂寰宇貞石圖; 漢碑全集; 中國書法全集 7- 秦漢石刻 卷1; 漢魏六朝碑刻校注; 漢代石刻集成 圖板·釋文篇;  中國歷代名碑釋要; 秦漢刻石選譯; 漢碑集釋; 北京圖書館藏 中國 歷代石刻拓本滙編 ⑨정형화4)된 최초의 묘비로 지목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5) 묘비로도 보지만 題記로 분류하기도 한다. 銘辭를 보유한 가장 이른 시기의 묘비 ⑩杭州 西冷印社 ⑪方愛龍, 「東漢·三老諱字忌

1) 제목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三老諱字忌日記>를 그대로 사용하였 다. 묘비의 제목은 <묘주의 이름+비> 혹은 <관직+묘주의 이름+비>형태로 지어지는데, 이 각석의 경우 묘주의 관직과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三老 諱字忌日記>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이것은 이 각석이 後漢代 유행하는 일반 적인 묘비, 즉 死者에 대한 追念과 頌德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先祖의 기일을 후손에게 기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 인다.

(7)

日碑」 (杭州師範學院學報(社科版) 2008-1); 胡迪軍, 「《漢三老諱字 忌日碑》散記」 (書法 2012-5).

조부 삼로(三老)

1)

의 이름

2)

은 통(通)이고 자(字)

3)

는 소부(小父)로 경 오일(庚午日)이 기일이다.

4)

조모의 이름은 알지 못하고 자는 종군(宗君)으로 계미일(癸未日)에

2) 흔히 정형화된 墓碑의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銘辭다.

명사는 墓主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 序와는 달리 묘주의 功業을 表彰하 기 위해 韻文으로 작성되었다. 그런데 <三老諱字忌日記>에서 보이는 頌辭는 이후 등장하는 명사와는 달리 분명한 운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다. 따라 서 정형화 전의 명사로 이름 하였다.

3) 정형화된 묘비에서 建碑者는 대개 碑陰에 각석되었다. 이와는 달리 畵像題記 및 石闕題記에는 건비자들이 각석되어 있어 묘비와 제기 사이의 연관을 염두 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해를 위해 화상제기 하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은 데, 분석하고 있는 <三老諱字忌日記>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永和六年食堂畵像題記>

(左段) 永和四年四月申朔卄七日壬戌(卒年卒月卒日), 桓孨(墓主)終亡, 二弟文山, 叔山(建碑者), 悲哀治此食堂(記念物), 到六年正月卄五日畢成(기념물의 완성일), 自念悲 (右段) 通, 不受天祐少終, 有一子男伯志, 年三歲却, 到五年四月三日終 (가족관계), 俱歸皇[泉], 何時復會, 愼勿相忘, 傳後世子孫, 令知之(후세에 대한 당부)

4) 墓碑의 정형화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지만 대략 ① 碑額, ②諱, ③字, ④本籍, ⑤家系, ⑥品行, ⑦官歷을 중심으로 하는 履歷, ⑧卒 年月日, ⑨享年, ⑩追贈, ⑪葬日 혹은 立碑日, ⑫銘辭를 그 정형화의 구성요소 로 보고 있다. 窪添慶文, 「墓誌の起源とその定型化」 (立正史學 105, 2009), p.2.

① 碑額 ②

諱 ③ 字 ④

本籍 ⑤ 世系 ⑥

品行 ⑦ 官歷 ⑧

卒年 ⑨ 享年 ⑩

追贈 ⑪ 葬日 ⑫

銘辭 三老諱字忌日記(52) × ○ ○ × ○ × × ○ × × × ×

謁者景君墓表(114) × × × ○ × × × ○ × × × ○ 國三老袁良碑(131) × ○ ○ ○ ○ × ○ ○ ○ × × ○ 北海相景君碑(143) ○ × × ○ × ○ ○ ○ × × × ○ 武斑碑(147) ○ ○ ○ × ○ ○ ○ ○ × × × ○ 劉修碑(171) × ○ ○ × × ○ ○ ○ ○ × × ○ 5) 李德品 「論東漢墓碑文的發展分期」 (師範學院學報 11-3, 2009), p.34. 참고

로 정형화된 최초의 묘비로 지목된 것들과 그 구성요소를 표로 구성하면 다음 과 같다.

(8)

돌아가셨다.

연(掾)

5)

이셨던 부친의 이름은 홀(忽)이고 자는 자의(子儀)로 건무(建 武) 17년(41), 신축년(辛丑年) 4월 5일 신묘일(辛卯日)

6)

에 돌아가셨다.

모친의 이름은 연(捐)이고 자는 알군(謁君)으로 건무 28년(52), 임자 년(壬子年) 5월 10일 갑술일(甲戌日)

7)

에 돌아가셨다.

큰 아들의 이름은 현(玄)이고 자는 대손(大孫)이다. 둘째 아들의 이 름은 단(但)이고 자는 중성(仲城)이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우(紆)고 자 는 자연(子淵)이다. 넷째 아들의 이름은 제여(提餘)

8)

고 자는 백로(伯 老)다. 다섯째 아들의 이름은 지후(持侯)고 자는 중옹(仲雍)이다. 여섯 째 아들의 이름은 영(盈)이고 자는 소하(少河)다. 일곱째 아들의 이름 은 한(邯)이고 자는 자남(子南)이다. 여덟 째 아들의 이름은 사(士)고 자는 원사(元士)다. 아홉 째 아들의 이름은 부(富)고 자는 소원(少元)이 다. 딸의 이름은 무명(无名)

9)

이다. 둘째 딸의 이름은 반(反)이고 자는 군명(君明)이다.

조부이신 삼로의 덕(德)과 공업(功業)은 밝게 빛나고 성대하도다.

10)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분투하심을 자신의 몸보다 먼저로 삼으셨으 며

11)

잘 살피시고 자애로우셨으니

12)

[그 위대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구나.

13)

[그 분의 신령이] 아홉 명의 손자를 보우하신다.

14)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15)

여전히 선조의 덕택은 후대에까지 미친다.

16)

일곱째 손자인 한(邯)

17)

이 조부의 이름을 알게 되어, 후손들에게 공경 하게 하고 환히 알게 하고자

18)

[이 비를 세운다]. 대개

춘추(春秋)

의 의리

19)

는 선조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이 선조를 공경하는 것이 다.

20)

[그러나] 조부이신 삼로로부터 우리 아홉 손자가 멀리 떨어지지 않음을 생각하니 피하는 바를 드러내 않는다면

21)

[후세가] 말과 행동 에 금기를 범하게 될 것이다.

22)

우리들 출자(出自)한 바의 위엄과 □ 를 귀중히 여기며,

23)

정중히 후손들

24)

에게 이르노니 바라건대 선조의 덕행에 부합하도록 하라.

25)

1) 삼로[三老]: 周代에 설치했다고 알려져 있는 三老五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

(9)

려져 있다(禮記 「文王世子」, “適東序, 釋奠於先老, 遂設三老·五更·群老之席位 焉.”<鄭玄注: “三老五更各一人也, 皆年老更事致仕者也, 天子以父兄養之, 示天下 之孝悌也. 名以三五者, 取象三辰五星, 天所因以照明天下者.”>). 漢高祖 2년(전 205) 지방행정조직인 鄕에 50세 이상 덕망 있는 자를 선발하여 三老로 삼고 교화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鄕三老 중에서 1인을 선발하여 縣三老로 삼았 다(漢書 卷1, 「高祖紀」, “擧民年五十以上, 有脩行,能帥衆爲善, 置以爲三老, 鄕一人. 擇鄕三老一人爲縣三老, 與縣令丞尉以事相敎, 復勿繇戍.”). 이는 건비자 조부의 관직으로 漢代石刻集成 圖板·釋文篇에서는 이를 鄕三老로 보았다(永 田英正, 1994b, p.12).

2) 이름[諱]: 부모나 손위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린다는 것에서 유래하여 죽은 이의 생전의 이름을 의미하게 되었다.

3) 자[字]: 고대에는 이름[名]과 字를 모두 사용하였는데, 자는 흔히 인품을 나 타낸다고 여겼다. 顔之推에 따르면 이름은 본인이 죽으면 부르는 것을 피했지 만, 자는 손자대에는 氏로 삼을 수 있었다고 한다(顔氏家訓 「風操」, “古者, 名以正體, 字以表德. 名終則諱之, 字乃可以爲孫氏”).

4) 경오일이 기일이다[庚午忌日] : 조부모 이후 서술되어 있는 부모의 경우 연월 이 서술 된 것과는 달리 조부와 조모의 경우 날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高文은 春在堂隨筆의 의견에 따라 曆術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민간에서 사 망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일로 추정하였다(高文, 1997, pp.2-3). 忌日은 부모나 조부모와 같은 親屬의 사망일을 말한다(禮記 「祭義

」, “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鄭玄注: “忌日, 親亡之日.”>). 그날에는 음주 나 음악의 연주와 같은 일을 꺼리기에 기일이라 한다.

5) 연[掾]: 고대 官府에서 일을 나누어 보좌하던 관리의 통칭. 흔히 단독으로 掾 으로만 표기될 경우에는 縣의 掾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高文, 1997, p.3;

李檣, 2009, p.19).

6) 건무 17년 신축 4월 5일 신묘[建武十七年, 歲在辛丑, 四月五日辛卯]: 建武라 는 연호는 중국 역사상 모두 여섯 차례 등장한다. 후한 光武期(25~56년), 西 晉 惠帝期(304년), 東晉 元帝期(317년), 後趙 石虎期(335~348년), 西燕 慕容 忠期(386년), 南齊 明帝期(494~498년). 이 중 건무 17년(41)과 28년(52)이 있는 것은 광무제시기 뿐이다. 그런데 광무제 건무 17년 4월 5일은 二十史朔 潤表에 따르면 庚午日에 해당하여 辛卯日이라는 비문과 부합하지 않는다.

7) 건무 28년 임자 5월 10일 갑술[建武廿八年, 歲在壬子, 五月十日甲戌]: 二十 史朔潤表에 따르면 건무 28년 5월 10일은 庚子日에 해당하여 甲戌日이라는 비문과 부합하지 않는다.

8) 제여[提餘]: 뒤에 나오는 持侯와 더불어 특별한 경우로 여겨진다. 각석된 모 든 사람들의 이름이 單字인 것은 당시 王莽이 전국에 두 자 이름을 금지했던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漢書 卷94下, 「匈奴傳」, “時, 莽奏令中國不得 有二名, 因使使者以風單于, 宜上書慕化, 爲一名, 漢必加厚賞.”). 따라서 提餘와 持侯라는 두 자 이름은 특별한 경우로 생각된다.

9) 무명[无名]: 장녀의 이름으로 보이지만, 왕망시기 두 자 이름이 금지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혹 “이름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0)

10) 덕과 공업은 밝게 빛나고 성대하도다[德業赫烈]: 德業은 덕과 공업을 의미한 다(易 「繫辭上」, “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 至矣哉.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赫烈’은 밝게 빛나고 성대한 상태를 말한다.

11)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분투하심을 자신의 몸보다 먼저로 삼으셨으며[克命先 己]: 자신보다 우선하여 일을 奉行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克’은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左傳 「宣公八年」, “冬十月己丑, 葬我小君敬嬴, 雨, 不克葬. 庚寅, 日中而克葬.”<杜預注: “克, 成也.”>).

12) 잘 살피시고 자애로우셨으니[汁稽履仁]: ‘汁’은 ‘協’ 또는 ‘叶’과 통한다(周 禮注 「秋官·司寇·鄕士」, “汁日音協, 本亦作協.”). ‘稽’는 ‘考’를 의미한다(管子

「弟子職」, “旣拚反立, 是協是稽.”<尹知章注: “協, 合也. 稽, 考也. 謂合考書義 也.”>). ‘汁稽’는 잘 생각한다는 의미다. 八瓊室金石補正과 漢魏六朝碑刻校 注에서는 ‘仁’을 ‘化’로 읽었다.

13)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구나[難名兮]: 공업이 커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 움을 의미한다. ‘兮’는 어조사로 감탄사에 해당한다.

14) 아홉 명의 손자를 보우하신다[而右九孫]: ‘右’는 ‘佑’ 또는 ‘祐’와 통한다. ‘九 孫’은 ‘伯子玄’ 이하 삼로의 아홉 명의 손자를 말한다.

15)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日月虧代]: 해와 달이 차고 이지러지고를 반복함을 의 미한다. 여기서는 긴 시간이 흐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6) 여전히 선조의 덕택은 후대에까지 미친다[猶元風力射]: ‘元風’은 상서롭고 좋 은 遺風을 의미한다. 선조의 훌륭한 유풍이 먼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는 의미로,

漢代石刻集成 本文篇에서는 후세까지도 일족이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 석하였다.

17) 한[邯]: ‘邯’은 비문에서 언급한 일곱 째 손자로 建碑者다.

18) 후손들에게 공경하게 하고 환히 알게 하고자[欽顯後嗣]: ‘欽’과 ‘顯’ 모두 사 역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後嗣’는 후세를 의미한다.

19) 춘추의 의리[春秋義]: 여기서 말하는 春秋의 의리란 穀梁傳 「桓公二年

」, “二年, 春, 王正月, 戊申. 宋督弒其君與夷, ○桓無王, 其曰王, 何也? 正與夷 之卒也. 及其大夫孔父. ○孔父先死, 其曰及, 何也? 書尊及卑, 春秋之義也. 孔父 之先死, 何也? 督欲弒君, 而恐不立, 於是乎先殺孔父. 孔父閑也. 何以知其先殺孔 父也? 曰, 子旣死, 父不忍稱其名; 臣旣死, 君不忍稱其名. 以是知君之累之也. 孔, 氏; 父, 字諡也. 或曰, 其不稱名, 蓋爲祖諱也. 孔子故宋也.”에서 온 것으로 곡 량전에서는 宋의 군주와 함께 살해된 孔父의 이름을 孔子가 쓰지 않은 것을 찬미하며 尊屬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춘추의 의리로 보았다.

20) 선조를 공경하는 것이다[翼上也]: ‘翼’은 공경함이다(詩經 「小雅·六月」, “有 嚴有翼.”<毛傳: “翼, 敬也.”>). ‘上’은 선조를 의미한다.

21) 피하는 바를 드러내 않는다면[所諱不列]: ‘所諱’를 漢碑集釋에서는 이름과 기일이라고 해석하였지만(高文, 1997, 4쪽) 문맥상 이름으로 생각된다.

22) 말과 행동에 금기를 범하게 될 것이다[言事觸忌]: ‘觸忌’는 선조의 諱나 字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3) 우리들 출자한 바의 위엄과 □를 귀중히 여기며[貴所出嚴及□]: 秦漢刻石選 譯에서는 詩經에 근거하여 문맥상 □는 ‘翼’로 봐야 한다고 하였다.

(11)

【墓碑 구성】

❶墓主의 관직, 본적 및 姓名과 字 ❷家學 ❸官歷 ❹卒年卒日 ❻葬 日

【해제 구성】

①<漢司徒袁安碑>, <袁安碑>, <袁安墓碑>, <司徒袁安碑> ②元初 4년 (117)1) ③원래의 출토지 및 시기는 未詳이나. 측면에 明 萬曆 26년(1598) 題字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즈음 河南省 偃師縣에서 출 토2)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해(1598) 3월 河南城 偃師縣 辛家村의 牛 王廟로 옮겨져서 廟 내에서 향로를 놓는 탁자로 사용되었다. 1928년 우왕묘가 村 小學으로 바뀌었는데, 1929년 한 아이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해 묘비로 밝혀졌다. 이때 村人 任繼斌이 탁본하여 세 24) 후손[末孫]: ‘末孫’은 후대의 자손을 의미한다.

25) 바라건대 선조의 덕행에 부합하도록 하라[冀副祖德焉]: ‘副’는 부합하다는 의 미다.

<墓碑 3種>

朴 善 姬 (선문대)

<後漢元初四年(117)袁安碑>

司徒公汝南女陽袁安召公,

授易孟氏[學],

❷」

永平三秊二月庚午, 以孝廉除郞中. 四[秊]」十一月庚午, 除給事謁者. 五秊四月乙�,」

遷東海陰平長, 十秊二月辛巳, 遷東平[任]城令. 十三秊十二月丙

辰, 拜楚郡[太]」守. 十七秊八月庚申, 徵拜河南尹. [建]」初八秊

六月丙申, 拜太僕. 元和三秊五[月]」丙子, 拜司空. 四秊六月己

卯, 拜司徒.」 孝和皇帝加元服, 詔公爲賓.

. 永元四秊[三]月癸丑

薨,

閏月庚午葬.

(12)

상에 알려졌다. 1934년 언사현 교육국으로 옮겨졌고, 이후 소재가 밝 혀지지 않았다가 1961년경 다시 발견되었다. ④石 ⑤長方形. 높이 139㎝·너비 73㎝(탁본 기준). 총10행, 매 행15자(본래는 16자인데, 마지막 글자 부분이 깨져서 15자만 남아있다). 5·6번째 행의 7·8자 사이에 穿이 있는데, 비의 가운데에 해당한다. 篆書3) ⑥북경국가도서 관 軸127 ⑦希古樓金石萃編; 集古求眞續編; 景邃堂題跋; 「漢袁 安碑」(河北第一博物院半月刊수록) ⑧北京圖書館藏 中國歷代石刻拓 本滙編 第1冊; 中國美術全集·書法篆刻編; 中國書法全集·秦漢刻石

; 中國書法藝術·秦漢; 漢代石刻集成 圖篇·釋文篇; 漢碑集釋 ;  漢碑全集; 凡將齋金石叢稿 ⑨묘표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묘비에서 벗어난 형태의 묘비로, 묘주의 관력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 형화된 묘비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문의 보존상 태가 비교적 온전하고 後漢書 卷45 「袁安傳」의 기사와 거의 일치 하여 석독에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⑩河南博物院 소장 ⑪楊頻,「袁 安碑系年問題及其他」,中國書畵2013-6; 王星光, 「袁安碑」, 檔案管 理2005-10; 河南省文化局文物工作隊, 「河南現存的漢碑」, 文物

1964-5.

사도공(司徒公) 여남(汝南) 여양(女陽)의 원안(袁安) 소공(召公)

1)

은 맹씨(孟氏) 역(易)을 전수받았다.

2)

영평(永平) 3년

3)

2월 경오(庚午)에

1) 최초로 <袁安碑>를 고증한 馬衡은 비의 각석시점을 비문 말미에 보이는 사망 및 장례년도인 永元 4년(92)이 아니라 아들 원창의 비가 세워진 영초 4년 (117)으로 추측하였다(馬衡, 1977). 그 근거로 원안의 비문에 보이는 ‘孝和皇 帝’라는 시호를 제시하였다. 시호는 화제 생전에는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화 제가 죽은 元興 원년(106) 이후에 사용 가능하다. 따라서 106년 이후에 각석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偃師縣에서 발견된 아들 袁敞碑와 서체가 동일하 며 내용·크기도 거의 같기 때문에 원창이 사망한 영초 4년(117)으로 보는 견 해가 다수이다. 그러나 중국의 書學 연구 분야의 저작물에서는 거의 대부분 영원 4년을 각석시기로 보고 있다.

2) 水經注 <원안비>條에 “彭城 성내에 漢司徒袁安碑와 魏中郞徐庶 등 여러 碑 들이 도로 오른쪽에 나란히 세워져있는데, 이들은 모두 일찍이 楚의 相이었 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 팽성(지금의 江蘇省 徐州)의 <원안비>와 언사의

<원안비>는 서로 다른 것으로, 원안이 楚郡 太守였던 것에 기인하여 세워진 비로 생각된다.

3) 일반적으로 후한시기 묘비의 서체는 隸書였다. 楊頻은 원안·원창 부자의 비문 이 篆書로 쓰인 것에 대해 조정으로부터 하사된 묘비기 때문이라고 하였다(楊 頻, 2013-6, pp.58-59).

(13)

효렴(孝廉)으로 낭중(郞中)에 제수되었다. 4년 11월 경오에 급사알자 (給事謁者)에 제수되었다.

4)

5년 4월 을�(乙�)에 동해군 음평현의 현 장(縣長)으로 옮겼다. 10년 2월 신사(辛巳)에 동평국 임성현 현령(縣 令)으로 옮겼다.

5)

13년 12월 병진(丙辰)에 초군태수(楚郡太守)를 배수 받았다.

6)

17년 8월 경신(庚申)에 불려와 하남윤(河南尹)을 배수받았 다. 건초(建初) 8년 6월 병신(丙申)에 태복(太僕)

7)

을 배수받았다. 원화 (元和) 3년 5월 병자(丙子)에 사공(司空)

8)

을 배수받았다. 4년 6월 기 묘(己卯)에 사도(司徒)를 배수받았다.

9)

효화(孝和)황제의 관례(冠禮)가 행해지던 때에 조(詔)를 내려 공을 빈(賓)으로 삼았다.

10)

영원(永元) 4 년 3월 계축(癸丑)에 훙(薨)하여 윤달 경오(庚午)에 장사지냈다.

1) 여남 여양 원안소공[汝南女陽袁安召公]: 後漢書 권45, 「袁安傳」에 “袁安字 邵公, 汝南汝陽人也.”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女’는 ‘汝’이고, ‘召’는 ‘邵’다. 여 남군은 현재의 河南省 여남현 동남쪽이다.

2) 맹씨(孟氏) 역(易)을 전수받았다[授易孟氏[學]]: 「원안전」에 “祖父良, 習孟氏 易, 平帝時擧明經, 爲太子舍人. 建武初, 至成武令. 安少傳良學, 爲人嚴重有威, 見敬於州里.”라고 쓰여 있다. 孟氏易은 전한의 孟喜에서 시작된 역학이다.

3) 년[秊]: 년은 ‘年’이 아니라 本字인 ‘秊’를 사용하고 있다.

4) 「원안전」에는 “初爲縣功曹...後擧孝廉, 除陰平長, 任城令, 所在吏人畏而敬之.”

라 하여, 비문의 ‘郞中’이나 ‘給事謁者’는 보이지 않는다.

5) 동해군 음평현 현장[東海陰平長], 동평국 임성현 현령[東平任城令]: 동해군 음평현(지금의 산동성 棗莊市의 남쪽) 縣長과 동평국 임성현(지금의 산동성 濟 寧縣)의 縣令이다. 漢은 一萬 戶 이하의 현에는 장관으로 縣長을, 일만 호 이 상의 현에는 縣令을 두었다(漢書 권19上, 「百官公卿表」, “縣令·長, 皆秦官, 掌治其縣. 萬戶以上爲令, 秩千石至六百石. 減萬戶爲長, 秩五百石至三百.”).

6) 초군태수를 배수받았다[拜楚郡[太]守]: 초군은 현재의 江蘇省 徐州에 있던 郡 이다. 후한 초기에는 광무제의 아들 楚王 英의 封國이었는데, 영평 13년 11월 반역을 기도한 죄로 영은 자살하고 국은 폐쇄되었다. 원안은 이 사건 직후 초 군태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수는 秩 이천석의 관리이다(漢書 권19上,

「百官公卿表」, “郡守, 秦官, 掌治其郡, 秩二千石...景帝中二年更名太守.”).

7) 태복[太僕]: 卿에 해당되며, 질은 中二千石이다. 황제의 車馬와 馬政을 장악하 며, 전한에서 小府 소속이었던 考工이 후한에서는 태복으로 이관되었다. 전한 에서부터 태복을 거쳐 御史大夫나 丞相으로 승진되는 예들이 보이며, 원안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또한 후한시기에는 대부분 명망 있고 공이 있는 대신 들로 충임되었고 司空이나 尙書令에서 전임되는 경우도 보인다.

8) 사공[司空]: 三公 중 한 사람으로, 水土의 일을 장악한다(後漢書 志24, 「百

(14)

<後漢元初四年(117)袁敞碑>

...��平,❶ 司徒公���...」...�月庚子, 以河南尹子,

�...

」...�五月丙戌, 除郞中, 九秊...」...�侍郞, 十秊八月丁丑, ...

」...十月甲申, 拜侍中, ...」...步兵校尉, 延平元...」...匠, 其十

月丁丑, 拜東...」...丙戌, 徵拜太僕, 五秊...」...初二秊, 十二月 庚戌, ...」❷...薨,❸ 其辛酉葬.❹

【墓碑 구성】

❶묘주의 字 ❷官歷 ❸卒年卒日 ❹葬日

【해제 구성】

①<漢司空袁敞碑>1) <袁敞殘碑>, <袁敞碑> ②元初 4년(117) ③ 1923년 하남성 언사현에서 출토 ④石 ⑤袁安의 비와 같은 장방형으 로 추정. 높이 75㎝·너비 68㎝(탁본 기준). 총10行. 상하 모두 깨져서 官一」, “司空, 公一人. 本注曰, 掌水土事. 凡營城起邑, 浚溝洫, 修墳防之事, 則 議其利, 建其功. 凡四方水土功課. 歲盡則奏其殿最而行賞罰. 凡郊祀之事, 掌掃除 樂器, 大喪則掌將校復土, 凡國有大造大疑, 諫爭, 與太尉同. 世祖卽位, 爲大司空, 建武二十七年, 去大.”).

9) 4년 6월 기묘에 사도를 배수받았다[四秊六月己卯, 拜司徒]: 後漢書 卷3, 「 章帝紀」, “[章和元年]六月戊辰, 司徒桓虞免, 癸卯, 司空袁安爲司徒”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桓虞의 면직으로 원안이 사도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비문과 간 지가 다르다. 元和 4년에서 章和 원년으로의 改元은 7월 壬戌이다. 司徒는 삼 공 중 한 사람으로, 인민 관련 일을 장악한다(後漢書 志24, 「百官一」, “司徒, 公一人. 本注曰, 掌人民事. 凡敎民孝悌·遜順·謙儉, 養生送死之事, 則議其制, 建 其度. 凡四方民事功課. 歲盡則奏其殿最而行賞罰. 凡郊祀之事, 掌省牲視灌, 大喪 則掌 奉安梓宮. 凡國有大疑大事, 與太尉同. 世祖卽位, 爲大司徒, 建武二十七年, 去大.”).

10) 화제의 冠禮 의식에서, 원안이 관례집행자인 賓의 임무를 담당하였다는 것을 말한다(後漢書 권4, 「和帝紀」, “(永元) 三年(91)春正月甲子, 皇帝加元服. <李 賢注: “元, 首也, 謂加冠於首. 東觀記曰 時太后詔袁安爲賓, 賜束帛乘馬.”>)

(15)

매 행의 남아있는 글자 수는 4~9字. 원안비와 마찬가지로 5·6행의 6·7字의 사이에 穿이 있다. 원창과 원안 두 碑의 형태 및 서체 등이 매우 유사하여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2) 篆書.

⑥북경도서관 各54 ⑦希古樓金石萃編; 松翁近稿 ⑧北京圖書館 藏 中國歷代石刻拓本滙編 第1冊; 漢魏六朝碑刻校注 第1冊; 中國 美術全集·書法篆刻編; 中國書法全集·秦漢刻石; 漢代石刻集成 圖 篇·釋文篇; 漢碑集釋; 中國書法藝術·秦漢; 漢碑全集 ⑨墓主의 사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는 시점의 묘비이다. ⑩遼寧省博 物館 소장 ⑪楊頻, 「漢袁敞碑全文考訂及其與袁安碑之書手同人問題」,  榮寶齋2013-9; 吕名軍, 「河南漢碑保存現象」, 鄭州工業大學學報(社 會版)2000-9

[사공공(司空公) 원창(袁敞) 숙]평(叔平)

1)

은, 사도공(司徒公)[의 소 자(少子)로 어려서 가학을 전수받았다.

2)

...�월 경자(庚子), 하남윤 (河南尹)의 아들로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제수되었다.

3)

...� 5월... 병 술(丙戌), 낭중(郞中)에 제수되었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9년(97)...

...[황문]시랑(黃門侍郞)

4)

에 [제수되었고], 10년 8월 정축(丁丑), [태 중대부(太中大夫)에 제수되었다.

5)

...10월 갑신(甲申), 시중(侍中)에 배수되었고,

6)

... ...보병교위(步兵校尉)[에 배수되었고]

7)

, 연평(延平) 원[년](106)... [장작대]장(將作大匠)[에 배수되었고]

8)

, 그 해 10월 정축(丁丑), 동[군태수](東郡太守)에 배수되었다

9)

. ... 병술(丙戌), 불 려와 태복(太僕)에 배수되었고, 영초(永初) 5년(111) [광록훈(光祿勳) 에 배수되었다]

10)

...[원]초(元初) 2년(115) 12월 경술(庚戌), [사공 (司空)에 임명되었다]

11)

. ...[4년 4월 무신(戊申)], 훙(薨)하였고,

12)

그 달 신유(辛酉)에 [삼공의 예로] 장사지냈다

13)

.

1) [사공공 원창 숙]평[...��平]: 後漢書 卷45, 「袁安傳附袁敞傳」(이하 「원 1) 秦漢石刻題跋輯錄 下에서는 <司徒袁敞碑>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원

창은 사도에 임명된 적이 없다.

2) 楊頻은 두 개의 袁碑가 조정에 의해 하사된 것이며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만 들어진 것이라 논증하였다(楊頻, 2013-6). 또한 楊頻은 <界格定位法>을 이용 하여, <원안비>의 형식과 내용 및 마형의 논증, 후한서「袁敞傳」및「和帝 紀」를 바탕으로 <원창비>를 복원하였다(楊頻, 2013-9).

(16)

창전」으로 칭한다)에 의하면 원창의 字는 叔平이다. 이에 따라 毛遠明은 ��

는 ‘字叔’에 해당하고, ‘字叔’ 위 부분은 ‘君諱敞’으로 추정하였다(毛遠明, 2008, p.91). 그런데 楊頻은 <원안비>와 거의 유사한 형식으로 문장이 구성되 었다고 가정하고, 비문의 시작이 관직명으로 시작할 것으로 보아 ‘司空公袁敞 叔’이라고 논증하였다(楊頻, 2013-9, p.110).

2) 사도공[의 소자(少子)로 어려서 가학을 전수받았다[司徒公���...]: 司徒公 은 父 원안을 가리킨다. 원안의 마지막 관직이 司徒이었다. 마형은 ‘사도공’ 다 음의 글자를 ‘之第三子’로 추측하였는데, 楊頻은 漢人의 “元子(長子), 中子(次 子), 少子, 季子”로 칭하는 습관에 비추어 ‘之少子’로 추정하였고, 또한 下缺 부분은 후한서「원안 ·원창전」의 내용 및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經學世家를 의미하는 ‘少傳家學’으로 추론하였다(楊頻, 2013-9, p.110).

3) 하남윤의 아들로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제수되었다[以河南尹子, �...]: 「 원창전」, “以父任爲太子舍人”으로 미루어 보면, �는 ‘除’로 추정되고 下缺 부 분은 ‘太子舍人’으로 보인다. 창이 태자사인에 제수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비 문에 의하면 父 원안이 하남윤에 재임하던 기간(74~83년)의 일이다.

4) [황문(黄門)]시랑[�侍郞]: 漢의 시랑은 黄門侍郎 뿐이며, ‘시랑’의 위의 글자 는 불분명하지만 ‘門’字의 劃이 남아있다. 황문시랑은 秩 6백석이다(後漢書

志26, 「百官三」, “黃門侍郞, 六百石. 本注曰, 無員. 掌侍從左右, 給事中, 貫通中 外. 及諸王 朝見於殿上, 引王就坐.”) 시랑은 郎官의 일종으로 본래 宫廷近侍의 직인데, 후한이후 尚書의 属官이 되었다. 初任者는 郎中, 만 일년이 되면 尙書 郎, 3년이 되면 侍郎이라 한다. 「원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5) 10년 8월 정축,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제수되었다][十秊八月丁丑, ...]: 영 원 10년 제수된 관직을 즉 下缺 부분을 楊頻은 ‘太中大夫’라고 추증하였다. 「 원창전」의 “和帝時, 歷位將軍·大夫·侍中, 出爲東郡太守, 徵拜太僕·光綠勳.”에 보 이는 ‘大夫’는 비문에서 바로 앞의 황문시랑과 다음에 보이는 시중의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秩 천석의 ‘태중대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楊頻, 2013-9, p.111).

6) 시중에 배수되었고[拜侍中]: 시중이 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98년 이후 화제 의 제위 기간(~105년) 중 이었을 것이다. 시중은 질 比이천석이다(後漢書

志26, 「百官三」, “侍中, 比二千石. 本注曰, 無員. 掌侍左右, 贊導衆事,顧問應 對.”).

7) 보병교위[에 배수되었고][...步兵校尉]: 楊頻은 ‘보병교위’를 「원창전」의 ‘장 군’에 해당한다고 추증하였다. 後漢書 志27, 「百官四」의 北軍五營 즉 城門校 尉·屯騎校尉·越騎校尉·步兵校尉·長水校尉 중 하나인 보병교위를 장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楊頻, 2013-9, p.111). 보병교위는 秩 比二千石으로, 宿衛兵 을 장악한다. 毛遠明은 本傳의 ‘將軍大夫’를 ‘將作大匠’의 誤記가 아닐까 의심 하였다(毛遠明, 2008. p.91).

8) 연평 원[년] 장[작대장에 배수되었고][延平元...匠]: 연평 원년은 殤帝에서 安帝로 교체되는 해이다. 7행은 위부분이 깨져서 ‘匠’字부터 보이는데, ‘將作大 匠’일 것이다(後漢書 志27, 「百官四」, “將作大匠一人, 二千石. 本注曰..承秦., 曰將作少府, 景帝改爲將作大匠. 掌修作宗廟·路寢·宮室·陵園木土之功, 幷樹桐梓

(17)

<後漢元初二年(115)子游殘碑>

...賢良方正, 魏郡鄴...允, 字子游,

於傳載...」...中葉, 有陵相

之類列于道側.”).

9) 동[군태수]에 배수되었다[拜東...]: ‘拜’字 아래의 글자는 ‘東’字의 半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 「원창전」에 보이는 그의 官歷을 보면 ‘東’字 다음은 ‘郡太守’일 것이다. ‘동군’은 현재의 河南省 濮陽縣이다.

10) [영초] 5년 [광록훈(光祿勳)에 배수되었다][永初五秊...]: ‘오년’은 永初 5 년이다. 이때 배수된 관직은 역시 그의 관력으로 보아 光祿勳일 것이다. 後漢 書 卷5, 「安帝紀」, “永初五年正月...己丑, 太尉張禹免, 甲申, 光祿勳李脩爲太 尉.”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李脩의 후임으로 광록훈에 임명된 것이다(後漢書

志25, 「百官二」, “光祿勳,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宿衛宮殿門戶, 典謁署郞 更直執戟, 宿衛門戶, 考其德行而進退之. 郊祀之事, 掌三獻.”)

11)[원]초 2년 12월 경술,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初二秊 十二月 庚 戌...]: 後漢書 卷4, 「安帝紀」, “[元初二年十二月]己酉, 司徒夏勤罷, 庚戌, 司空劉愷爲司徒, 光祿勳袁敞爲司空.”의 기사에 따르면, 초 2년은 원초 2년이 되고 이때 광록훈에서 사공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2) [4년 4월 무신(戊申)], 훙하였고[...薨]: 後漢書 卷45, 「袁敞傳」, “明年 (元初四年), 坐子與尙書郞張俊交通, 漏泄省中語, 策免, 敞廉勁不阿權貴, 失鄧氏 旨, 遂自殺.” 및 卷4, 「安帝紀」, “[元初四年]夏四月戊申, 司空袁敞薨.”의 기사 를 통해 그의 卒年은 원초 4년으로 확인된다. 원창은 당시 권세를 자랑하던 외척 鄧氏로 인해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그런데 원창이 면직되고 자살하였 으나, 「안제기」에는 사공 원창이 훙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다음 13)에 서 보듯이 死後 관직이 회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3) 그 달 신유에 [삼공의 예로] 장사지내다[其辛酉葬]: 자살하였으나, 관직이 회복되어 삼공의 예로 장사지냈다(後漢書 卷45, 「袁敞傳」, “朝廷由此薄敞罪 而隱其死, 以三公禮葬之, 復其官.”). 楊頻은 이 부분에서 원안과 원창의 비문이 다른 비문들과 달리 예서가 아닌 篆書로 각석되었는지를 설명한다. 漢의 공문 서에서 전서와 예서는 서로 다른 지위와 용도를 가지고 있다. 예서문서는 전 서문서에 비하여 級이 낮아 ‘파면문서’등을 포함하여 일반문서에 사용된다(富 谷至, 2007, pp.72-73). 반면에 황제가 제후왕 및 삼공을 임명하는 책서 등은 전서체로 존중을 표시한다(胡平生·馬月華, 2004, pp.41-42). 楊頻은 위의 두 논증을 바탕으로 원창이 이미 죽은 상황이기 때문에 조정은 무의미해진 전서 체의 ‘復官의 策’ 대신 ‘篆書刻石’을 하사하여 장례 중에 建碑하도록 하였다고 하면서, 여기에서 <원안비>의 각석시기도 해결하였다. 원창의 비와 함께 원안 의 비도 전서로 각석하여 하사하여 부자 삼공에 대한 고도의 긍정과 존중을 표하였다는 것이다(楊頻, 2013-6, pp.58-59).

(18)

重, 遭...奚之難, 扶危翊�. 文...」..., 至莒郡太守荊州牧, ...載 不隕, 以傳于...」

...行篤言忠, 否則獨善...�右書不倦. 是...」

仕就職, 瘠馬羸車, 道..., 事人犯而勿欺, ...」...佐州. 戊戌詔書, 以有...�, 廣延術士. 永初...」...將公, 徵應時屢旋, 不...惠, 可 不之閒.

是...」...元初二年六月卯卒.

...庶閔悼, 遠近同哀.

載...」...�古人, 不貪榮爵之...而貴不朽之名. 故勒斯...」...考 明守是, 保亢謀聖, ...甫

我漢道. 厥甫

伊何, ...」...昔乃顯祖節義 高明. ...在聖漢, 有莒有荊. 君...」...乃喪. 世亡英彦, 國...

【墓碑 구성】

❶묘주의 신상 ❷世系 ❸이력과 품행 ❹卒年卒日 ❺建碑의 목적

【해제 구성】

①<子游殘碑>, <賢良方正�允字子游殘碑>1)(別名: 상단부 ‘賢良方 正殘碑’, 하단부 ‘子游殘碑’) ②元初 2년(115) ③本碑의 하단부는 淸 嘉慶 3년(1798) 하남성 안양현의 西門豹2)의 祠에서 발견되었다3). 상 단부는 민국 2년(1913) 발견되었고4), 劉承幹에 의해 <자유잔비>의 상단부로 확인되었다. ④石 ⑤비의 상·하·좌·우와 가운데 부분이 깨져 있어 총 행수와 매 행의 字數가 모두 불분명하다. 남아있는 행은 총 12행, 매 행 글자 수는 14~17字로 일정하지 않다. 상단부 높이 41

㎝·너비 57㎝(탁본기준). 하단부 높이 42㎝·너비 55㎝(탁본 기준). 隸 書. ⑥북경도서관 顧21·各10049 ⑦蘇齋題跋; 平津讀碑記; 希古 樓金石萃編; 雪堂金石文字跋尾; 雪堂所藏金石文字簿錄; 校碑隨 筆 ⑧北京圖書館藏中國歷代石刻拓本滙編 第1冊; 漢魏六朝碑刻校 注第1冊; 金石萃編; 八瓊金石補正卷7 ;增訂寰宇貞石圖卷1 ;  中國美術全集·書法篆刻編一; 中國書法全集·秦漢刻石; 漢代石刻集 成 圖篇·釋文篇; 北京大學圖書館藏歷代金石拓本菁華; 中國書法藝 術·秦漢; 漢碑全集 ⑨묘비의 구성요소가 정형화되어 가는 과정에 서 銘辭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소를 갖춘 비문이다. ⑩하단부 安陽市 文化館 소장, 상단부 天津市藝術博物館 소장 ⑪吕名軍, 「河南漢碑保 存現狀」, 鄭州工業大學學報(社科版)2000-9; 河南省文化局文物工作 隊,「河南現存的漢碑」,文物1964-5.

...현량방정(賢良方正)

1)

, 위군(魏郡) 업(鄴)...윤(允), 자(字)는 자

(19)

유(子游)이고, 전(傳)에 ...실려 있다. ...중엽, 릉상(陵相) 중(重)

2)

이 있는데, ...해(奚)의 난(難)

3)

을 만나 위기를 구하고

�를 도왔다4)

. 문 (文)...거군(莒郡)태수·형주목(荊州牧)에 이르고

5)

, ...빠뜨림 없이 기 록하여, ...에 전하였다. ...행실은 진실 되고 말은 충직하며, 잘못이 있다면 홀로 수양하여 선(善)하게 하고,

6)

...[왼쪽에는 거문고] 오른 쪽에는 서책

7)

을 두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출사하여 직책에 나가..., 비척마른 말에 초라한 수레[를 이용하는 소박함], 도 (道)...,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는 [사안에 따라서는] 무례를 무릅쓰고 라도 직간(直諫)하고 거짓되게 하지 않았다.

8)

... ...주(州)의 업무를 도왔다. [영초(永初)5년(111) 3월] 무술에 조서를 내려

9)

...�가 있 고, 술사를 널리 초치하였다.

10)

영초... ...將公 , 징조가 때로 자주 반복되고, ...은혜가 베풀어지거나 그렇지 못한 사이에 ...않았다. 이 ... ... 원초(元初) 2년 6월 [모]묘([某]卯)에 졸(卒)하였다.

11)

...

사서(士庶)가 슬퍼하고

,12)

원근(遠近) 지역에서 함께 애달파 하였다.

...�고인(古人) ...실어, 부귀영화와 벼슬의 ...를 탐하지 않고 길 이 전해져 없어지지 않을 이름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 ... 새 기어, 밝음을 고찰하고 옳은 것을 지키며, 높은 기개를 보존하고 성스 러움을 도모하고, ..., 우리 한(漢)의 도(道)를 펼침

13)

을 ... 그 펼쳐 짐이 이 어디인가? ...소(消), ...

석(昔) 이에 조상의 절의(節義)와 고명(高明)을 드높인다. ...성한(聖 漢)에서 거군태수였고 형주목이었다. 군(君)이 ... ... 죽어 사라졌 다. 세상은 이 빼어난 인물을 잃었고, 국(國)은 ...

1) 容媛 (2009), p.1591.

2)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 때의 정치가. 업(鄴: 河北省 臨漳縣 서 쪽의 고을)의 장관(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2개의 수로를 파서 논으로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사업을 하여, 농업생산 증대에 이바지하였다.

3) <자유잔비>와 함께 <一四六 正直殘碑>, <一四七 劉君殘碑>, <一四八 元孫殘 碑>이 발견되어, 이 碑들을 ‘安陽殘石四種’이라 칭한다.

4) 毛遠明은 상단부가 먼저, 하단부가 그 이후에 발견된 것으로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毛遠明, 2008. p.87).

(20)

1) 현량방정[賢良方正]: 漢代 察擧의 한 과목이다. 이 선발방식은 전한 文帝 2년 (전 178)에 시작되었다.

2) 중[重]: 본 역문에서는 ‘중’을 인명으로 보았는데, 永田英正은 이 부분의 표점 을 有陵相, 重遭...奚之難로 하여 ‘重’을 重遭로 연결하여 ‘거듭하여’의 의미로 보고 있다(永田英正, 1994b, p.30)

3) 해의 난[奚之難]: 毛遠明은 後漢書 卷4 「安帝紀」에 보이는 ‘永初·元初年間 先零羌의 丁奚城 難’ 기사를 여기의 ‘奚之難’과 같은 것인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毛遠明, 2008, p.87). 羌族의 난에 해당하는 이 사건은 영초 원년(107) 에 시작되어 원초4년(117)에 진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子游가 115 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 일은 자유의 先代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4) 위기를 구하고 �를 도왔다[扶危翊�]: �에 대하여 毛遠明은 艱으로 보고, 永田英正은 放으로 보았는데(毛遠明, 2008, p.87; 永田英正, 1994b, p.30), 비 문의 자형으로 볼 때 ‘放’으로 생각된다.

5) 거군태수·형주목에 이르고[至莒郡太守荊州牧]: 모두 子游 先代의 官歷이다. 莒 郡은 후한대 행정구역에 보이지 않고, 荊州는 지금의 湖北省 中南部에 위치한 다.

6) 잘못이 있다면 홀로 수양하여 선하게 하고[否則獨善]: 否則獨善의 ‘독선’은 窮 則獨善其身에서와 같이 ‘홀로 자신의 몸을 선하게 하고’의 의미이다(孟子

「盡心章句上」, “古之人, 得志澤加於民, 不得志修身見於世, 則獨善其身, 達則 兼善天下.”)

7) [왼쪽에는 거문고] 오른쪽에는 서책[�右書]: �의 윗부분도 깨져서 없는 상 태이지만, ‘右’ 바로 위의 글자는 아랫부분 일부 남아있는데 ‘琴’으로 추정된다.

‘琴’으로 보게 되면 그 위의 글자는 琴 다음의 ‘右書’와 연결하여 볼 때 ‘左琴 右書’로 볼 수 있다. 전한 말 劉向이 쓴 列女傳에 “左琴右書”가 보인다. 한 편 毛遠明은 ‘右’를 ‘著’로 보고 있는데(毛遠明, 2008, p.87), 漢魏六朝碑刻異 體字典에 보이는 字形(p.1118)으로 볼 때도 ‘右’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 각된다.

8)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는 무례를 무릅쓰고라도 직간(直諫)하고 거짓되게 하지 않았다[事人犯而勿欺]: ‘事人犯而勿欺’에서의 ‘犯’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直諫하 는 것이다(論語 「憲問」, “子路問事君, 子曰勿欺也而犯之.”<朱熹注: “犯謂犯顔 諫爭”>).

9) [영초(永初) 5년 3월] 무술에 조서를 내려[戊戌詔書] : 안제의 永初 5년 3월 무술에 내려진 조서이다(後漢書 卷4, 「安帝紀」, “[永初五年 三月] 戊戌, 詔 曰,··· 其令三公·特進·侯中二千石·二千石·郡守·諸侯相, 擧賢良方正·有道術·達於 文化·能直言極諫之士各一人.”). 碑의 첫머리에 보이는 ‘현량방정’으로 보아 子 游는 이때 현량으로 推擧되었던 듯하다.

10) 널리 초치하였다[廣延]: 널리 인재를 초치하는 것이다.

11) 원초(元初) 2년 6월 [모]묘([某]卯)에 졸(卒)하였다[元初二年六月卯卒]: 六 月’과 ‘卯’字 사이에는 한 글자가 빠져 있다. 長曆에 의하면, 원초2년 6월은 乙

(21)

酉朔이고, 7일은 辛卯, 19일은 癸卯가 된다. 따라서 빠진 글자는 ‘신’과 ‘계’

중의 하나이다(毛遠明, 2008, p.87).

12) [사]서가 슬퍼하고[...庶閔悼]: 모원명은 ‘庶’ 바로 위의 글자를 ‘士’로 추정 하고 있다(毛遠明, 2008, p.30). 따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뒤에 이어 지는 내용 중의 ‘遠近同哀’에 미루어 보면 ‘士庶閔悼’로 볼 수도 있다.

13) 펼침[甫攵]: 永田英正은 ‘敷’로 보고, 모원명은 ‘補’로 보았다(毛遠明, 2008, p.30; 永田英正, 1994(a), p.50).

〈墓誌 3種>

梁 鎭 誠 (연세대)

<後漢延平元年(106)馬姜墓誌>

1)

惟永平七年七月廿一日, 漢左將軍特進膠東侯」第五子賈武仲卒, 時年 廿九.」

夫人馬姜, 伏波將軍新息忠成侯之女,」 明德皇后之姊也.

生 四女, 年廿三而賈」君卒.」 夫人深守高節, 劬勞歷載, 育成幼媛, 光□」

祖先. 遂升二女爲」顯節園貴人. 其次適鬲侯朱氏, 其」次適陽泉侯劉氏, 朱紫繽紛, 寵」祿盈門, 皆猶」夫人. 夫人以母儀之德, 爲宗族之覆.

春 秋」七十三, 延平元年七月四日薨.」

皇上閔悼, 兩宮賻贈, 賜秘器以禮 殯, 以」九月十日葬於芒門舊塋.

□□子孫, 懼不」能章明, 故刻石紀□

...

1) 본 석각의 銘文에 별도의 題名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즉 銘文상에 墓誌라는 표현은 없다. 이 때문에 이 銘文에 대한 題名은 論者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 다. 趙萬里의 漢魏南北朝墓誌集釋, 毛遠明의 漢魏六朝碑刻校注에서는 본 銘文을 ‘賈武仲妻馬姜墓記’라 했고, 楊樹達의 積微居小學金石論叢에서는 ‘漢 賈武仲夫人馬姜墓門石記’라 하였으며, 高文의 漢碑集釋, 楊殿珣의 石刻題跋 索引에서는 ‘賈武仲妻馬姜墓記’라고 하였다. 한편 北京圖書館 中國歷代石刻 拓本匯編에서는 ‘賈武仲妻馬姜墓誌’, 趙超의 漢魏南北朝墓誌彙編에서는 ‘馬 姜墓誌’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본 銘文이 후대의 墓誌와 구성, 내용면 에서는 유사하나 ‘墓誌’라는 명칭이 확인되지 않는데서 비롯한 것이다. 趙萬里,

(22)

【墓誌 구성】

❶墓主 배우자의 신상 ❷墓主의 家系 ❸墓主의 生平, 品行 및 자손 의 이력 ❹墓主의 卒年卒日 ❺墓主의 葬日과 葬地 ❻刻石 목적

【해제 구성】

①<賈武仲妻馬姜墓誌>, <賈武仲妻馬姜墓記>, <馬姜墓誌> ②後漢 延平 元年(106) ③1929년 洛陽 邙山 王窯村 出土2) ④紅沙石3) ⑤높 이 46cm·너비 58.5cm(탁본 기준). 15행. 매 행당 글자수는 2~19字 로 일정하지 않음. 隸書 ⑥北京圖書館藏 志14) ⑦遼居稿; 積微居小 學金石論叢; 漢魏南北朝墓誌集釋; ⑧漢碑集釋; 北京圖書館 中國 歷代石刻拓本匯編; 漢碑全集; 漢魏南北朝墓誌彙編; 漢魏六朝碑 刻校注 ⑨‘墓誌’라는 공식 명칭은 銘文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 銘文의 내용과 형식, 작성 의도 등이 후대 墓誌의 체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墓誌의 기원으로 평가됨.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墓誌의 원형 이라고 할 수 있음5) ⑩원석의 존재 유무는 확실하지 않음6)

楊殿珣은 ‘墓記’라는 題名을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그 범주는 ‘墓誌’로 분류하였 다. 羅振玉은 이 銘文에 대해 ‘漢賈夫人馬姜墓石記’라고 하였으나, 이것을 후대 墓誌의 시원으로 평가하였다(羅振玉, 遼居稿, 石刻史料新編 4輯 1冊 所收 本, p.21左). 李發林은 磚이나 石에 망자의 姓名, 生平, 德行 등의 내용을 刻하 고 이를 무덤 내에 안치한 것을 墓誌銘이라 정의하고, 이러한 묘지명은 이미 漢代부터 이미 그 단초를 보인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 그 본문의 銘文을 예로 들었다. 비록 그는 본문의 墓誌를 ‘賈武仲妻馬姜墓記’라고 명명하였으나 이 석 각이 墓誌라는 정식명칭만 없을 뿐, 실제로는 이미 墓誌의 속성을 갖춘 것으 로 보았다(李發林, 中國古代石刻叢話, 濟南: 山東敎育, 1988, pp.92-93). 趙 超 역시 이 銘文이 당시에 ‘墓誌’라고 불려지지만 않았지 실은 墓誌와 같다고 하였다(趙超, 古代墓志通論 (北京: 紫禁城, 2003), p.44). 이상을 종합하면 비록 論者에 따라서 題名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본 석각의 銘文을 墓誌로 이 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견해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 상과 같은 분류 및 견해에 입각하여 본 석각의 銘文을 ‘墓誌’로 표기한다.

2) 洛陽出土石刻時地記에 따르면 이 석각은 1929년 음력 6월에 발견되었는데 그 자리에 무덤이 있었으며 原石은 그 크기가 상당히 컸고, 형태는 棺槨을 에 워싸는데 쓰는 黃腸石과 같았으며 글자는 石端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 나 工人들이 글자가 새겨진 부분만 떼어내고 그 나머지 부분은 버렸다고 한 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원래 이 묘지의 크기는 탁본상으로 전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가능성이 높다(郭培育․郭培智 主編(郭玉堂 原著), 洛陽出土石刻時地

(23)

영평(永平)

1)

7년(64) 7월 21일 한(漢) 좌장군·특진·교동후(左將軍·特 進·膠東侯)의

2)

다섯 번째 아들인 가무중(賈武仲)이 사망하니

3)

나이 29세였다. 부인인 마강(馬姜)은 복파장군·신식충성후(伏波將軍·信息忠 誠侯)의

4)

딸로 명덕황후(明德皇后)의

5)

누이이다. 딸 넷을 낳았고, [그 녀의] 나이 23세때 가군(賈君: 가무중)이 사망하였다. 부인은 고매한 절개를 독실하게 지키면서 여러 세월에 걸쳐 힘써 노력하여, 어린 딸 들을 키워내었으니 조선(祖先)에 대해 광□(光□)를 한 것이다. 마침내 두 딸을 현절원(顯節園)의 귀인(貴人)으로

6)

올렸고, 차녀는 격후(鬲侯) 주씨(朱氏),

7)

그 다음 차녀는 양천후(陽泉侯) 유씨(劉氏)에게

8)

시집을 갔다. 존귀한 이들이

9)

떠들썩하게 모이고, 은총과 봉록은 문전에 가득 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부인의 덕택이었다.

10)

부인은 귀감이 될 만한 어머니의 덕으로 宗族들을 아울렀다. 춘추 73세 무렵인 연평(延平)

11)

원년元年)(106) 7월 4일에 사망하였다.

12)

황상(皇上)께서

13)

애도를 표하시고, 양궁(兩宮)께서

14)

부의로 비기(秘器)를

15)

하사하시어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게 하셨다. 9월 10일 망문(芒門)에 있는 옛 묘역에

16)

안장하였다. □□자손들에게 [이러한 사실들이] 현창되지 않을까 염려 하였기에 돌에 새겨 기록하다. [이하 결락]

記, 鄭州: 大象出版, 2005; 原刊1941, p.3).

3) 郭培育·郭培智 (2005), p.3.

4) 본문에서 저본으로 삼은 탁본은 北京圖書館藏 中國歷代石刻拓本匯編(이하  匯編으로 약칭) 1冊에 수록된 탁본이다. 匯編의 해제에 따르면 이 탁본은 본문의 첫 행인 ‘惟永平’ 세 글자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출토당시의 初拓本으 로 원래 北平圖書館(舊北京圖書館)에서 소장했다. 北京圖書館藏 中國歷代石刻 拓本匯編, p.36.

5) 趙超 (2003), p.43.

6) 이 墓誌에 대한 毛遠明의 해제에 따르면 이 묘지의 原石은 현재 洛陽市博物 館에 보존중일 수도 있고, 어쩌면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그 또한 탁본만 확인했을 뿐, 原石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毛 遠明, 漢魏六朝碑刻校注 第1冊, p.77). 한편 匯編의 해제에 따르면 民國 18년(1929), 낙양에서 原石이 발견된 후, 그 原石은 羅振玉에게 보내졌고, 현 재는 이미 훼손되어버렸다고 하였다(匯編, p.36).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墓 誌 原石의 존재유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