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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텍스트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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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비적 고찰

1. 예비적 정리와 해석의 문제들

1.3. 예술작품과 텍스트

1.3.2. 작품과 텍스트의 관계

이렇게 작품은 텍스트와 개념적으로 구별되며, 대상의 측면에서 작품의 정체성과 텍스트의 정체성 또한 구별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모든 이론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영미권의 미학적 논의에서는 작품과 텍스 트의 관계를 생각하는 관점에 있어 상이한 입장들이 있다. 우선 작품의 정체성이 텍스트에 밀접하게 의존하며 때로 극단적으로는 작품과 텍스트 를 동일시하는 입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와 구별되는 작품의 고유한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특히 해석의 개입과 관계적 속성들을 강조

16) J. Margolis, Art and Philosophy : Conceptual Issues in Aesthetics (이하 AP), Humanities Press. 1980, p.39. 마골리스의 표현을 따르면, 작품은 텍스트 안에 “구현된 ”(embodied) 것이다. 이 구현 개념은 작품과 텍스트의 이러한 관 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관점이다.

17) 문화적 개체로서의 예술작품의 개념과 지향적 속성에 관해서는 이 논문의 II장에 상술되고 있다.

하는 입장들이 있다.

전자의 입장을 텍스트중심주의(textualism)18)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 는데, 작품은 텍스트와 함께 독립된 대상으로서 완결되며 작품의 의미를 텍스트에 대한 숙독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비어즐리(M. Beardsley)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비어즐리는 문학 작품의 단어 연쇄 자체가 작품 정 체성의 핵심이 된다고 보면서, 의도나 창작의 맥락과 같이 지각적으로 직접 확인되지 않는 측면은 작품 내적인 본질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경 우 작품에 대한 접근은 텍스트에서 지각 가능한 것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작품과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입장은 작품과 텍스트의 정체성의 구조 면에서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텍스트 자체가 작품 인 강한 입장과 해당 텍스트들의 집합을 작품으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 다.19)

작품과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관점의 가장 강한 형태로서는 굿먼(N.

Goodman)과 엘긴(C. Elgin)의 입장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작품과 텍 스트를 동일시한다. 굿먼은 문학 작품을 텍스트, 즉 특정 언어로 된 고

18) 일반적인 텍스트중심주의 및 해석 문제에 관한 비어즐리의 입장은 본 장의 2.1.1.1 을 참고하라.

19) 의도나 맥락을 고려치 않고 작품과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관점을 커리는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작품을 텍스트들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이다. (Currie, Gregory, Arts and Minds, Clarendon Press, Oxford, 2004. pp.11~18.) 이 경우 같은 의 미를 가지지만 번역본이나 사소한 차이를 가지는 판본들의 경우 텍스트의 차이가 상이한 작품을 낳게 되지 않는다. 이 때 작품은 유형이고 텍스트는 그 징표가 되는 것이다. 유형-징표 간의 귀속 관계에서 징표의 우연적 속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 용이 있다. 그러나 굿먼과 같은 경우 징표인 텍스트의 차이는 다른 작품을 낳게 되 며, 한편 텍스트 외적 속성들은 작품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일반적인 텍스 트중심주의는 굿먼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보다 전자와 같은 입장들이 널리 받아들여 진다. <햄릿>의 창작 당시 원본과 현대 영어로 된 판본, 불어 번역본, 소설체 개작 판본 등은 텍스트 상의 차이가 있지만 각기 다른 작품이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 이다. 유사한 사고 실험적 예로서, 제인 오스틴의 1803년작 <노생거 사원>은 고딕 소설에 대한 풍자인데, 앤 래드클리프라는 저자에 의한 동일한 텍스트의 1793년작 고딕 소설 <노생거 사원>이 차후에 발견되었다고 하자. 두 저자는 상대 작품의 존 재를 모르는 채로 집필을 했다고 하더라도 굿먼에 의하면 제인 오스틴은 래드클리 프의 작품과 동일한 작품을 단지 다시 썼을 뿐이지 새 작품을 창작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 텍스트에서의 작가의 행위, 의도와 장르적인 특징은 두 텍스트가 동일함에도 다른 작품으로 만드는 중요한 미적 속성이 된다.

정된 구문론적 연쇄와 동일시한다. 텍스트란 굿먼과 엘긴에게 있어서 하 나의 시나 소설을 이루는 단어 연쇄, 기재(inscription)들이고, 따라서 작품은 그러한 기재들을 가진 텍스트이다. 작곡 과정에서 기보를 마쳤을 때, 화가가 그림을 끝냈을 때, 시나 소설의 텍스트가 완성되었을 때 작 품이 생겨난다.20) 이것은 다른 이론들이 문학 작품을 텍스트들의 집합 혹은 그것을 묶어주는 개체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작품이 텍스트나 스 크립트 자체라고 본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21)

이렇게 작품과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입장에서는 다른 두 작가가 우연히 똑같은 텍스트를 제작했다면 그 두 텍스트는 동일한 작품이 된다. 특정 작가에 의한 창조의 행위는 구별되지만 텍스트가 동일하기 때문에 두 작 품은 구별불가하다. 이 관점에 의거하면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와 그 것과 텍스트적으로 동일한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동일한 작품이 되며, 어떤 작품의 번역본은 원본과 다른 텍스트로서 구별되며 다른 작품이 된 다.22) 또 동일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두 문학 작품 중 하나는 아이러니

20) Goodman, Nelson. Languages of Art: An Approach to a Theory of Symbol.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1969. p.114, p.209.

21) 이러한 굿먼의 입장은 작품의 개념을 외연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작품은 텍스트로 서 해석과 구별된다. 이것은 작품을 텍스트와 밀접하게 관련지어 생각한다고 하더 라도 작품 정체성에서 텍스트 자체 외에 해석적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른 관 점과 차이가 있다.

22) Elgin, Catherine Z. & Nelson Goodman. Reconceptions in Philosophy and other Arts and Sciences, Indianapolis, Hackett, 1988. pp.57~59. 굿먼의 작품 과 텍스트 개념에 의거하여 본 이러한 결과는 다소 반직관적인 데가 없지 않다. 그 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굿먼의 이 입장은 작품과 텍스트의 정체성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강점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굿먼처럼 작품과 텍스트를 동일시하 는 입장은 해석적 속성을 반영하여 작품을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동일시하는 입장 에 비해 작품 정체성 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동일하다면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때, 또는 상충되는 해석들 이 있을 때 그 해석들이 모두 다른 작품들을 낳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지의 문 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굿먼은 작품 정체성의 문제는 명확하게 결정지 으면서, 해석은 작품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다양하게 허용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해석에 있어서 굿먼은 다원론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장 의 2.1.2.2에서 서술하고 있다. 한편 작품 정체성과 해석에 관한 굿먼 이론의 면 모는, 황유경. "문학에 있어서 해석의 상대성과 작품 정체의 문제" 『미학』 23.

(1997) pp. 133-161을 참고할 수 있다.

로 의도되었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을 때, 일반적으로는 이 두 작품은 상이한 작품이다. 그러나 굿먼과 같은 경우는 텍스트 상의 속성이 아닌 아이러니와 같은 속성을 작품 자체에 귀속시키지 않기 때문에 두 작품은 구별되지 않는다. 굿먼의 입장은 작품 정체성 문제를 명쾌하게 제시한다 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예술 작품에 대한 종합적인 개념적 설명으로서는 선뜻 우위에 놓기 어렵다.

그러나 후자와 같이 해당 텍스트들의 집합을 작품으로 보는 관점의 경 우는 작품을 텍스트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고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투사 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입장은 위에서 언급한 세르반테스와 피에 르 메나르의 예나 아이러니나 풍자의 읽기 방식이 적용되는 텍스트에 대 해, 이 작품이 속하는 범주나 읽기 방식을 고려할 것이다. 이 입장은 텍 스트 내적으로 의미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텍스트중심주의이지만, 작품의 정체성을 텍스트라는 기호적 외연만으로 결정하지 않으며 텍스트 자체에 귀속되는 미적 속성들 간의 사소한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 전의 현대어 판본, 외국어 번역본, 발췌본이나 일부 개작본 등은 외연적 기호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텍스트들이 가리키는 의미 및 관련 속성 들은 일정 범위로 수렴된다. 작품은 이러한 본질적 속성들을 귀속시킬 수 있는 개체로 투사된다. 즉 이 입장에서는 사소한 차이를 가진 일정 스펙트럼 내의 여러 텍스트들의 집합, 그 텍스트들을 묶어줄 수 있는 투 사된 개체가 작품이다. 작품과 텍스트를 밀접하게 관계짓는 관점도 굿먼 과 같은 엄격한 입장보다는 이러한 관점이 더 온건한 것으로서 널리 받 아들여진다.

한편 작품과 텍스트를 보다 더 명확히 분리하여 작품에만 귀속되는 문 화적, 관계적 속성을 강조하는 입장들이 있다. 우선 작품의 기반을 텍스 트에 두지만, 징표인 텍스트로서의 작품이 창조될 때의 행위와 맥락을 작품의 본질과 정체성에 중요한 요인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완 결된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일차적으로 주목하지만, 작품 생산과 기원 의 역사가 미적 속성을 결정한다고 본다. 의도, 맥락 등을 강조하는 레

빈슨(J. Levinson), 스테커(R. Stecker), 월하임(R. Wollheim), 캐럴 (N. Carroll) 등의 예술 작품 개념은 정의적으로 이를 반영하고 있 다.23) 텍스트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장르의 구분 및 작품 읽기 의 방식 등은 창작의 행위와 함께 결정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세르 반테스와 피에르 메나르의 동일 텍스트의 예는 물론, 예술사적 맥락에서 결정되는 미적 속성을 가진 작품들도 그러하다. 브람스 음악의 독창성은 베토벤이 역사적으로 실존한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 있어서 다른 의 미를 가진다. 텍스트 상의 전시적, 표면적 특질에만 의거하여 작품을 생 각하는 입장은 이 점을 놓치게 된다.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 작품 정체성에서 문화적 측면을 한층 더 강조하 는 입장들이 있다. 이 입장들은 상대적으로 작품 내적이고 지각적인 측 면보다 대상의 외부에서의 규정을 더 강조한다. 이 입장에서는 작품과 텍스트는 확연히 구별된 개체이며 작품은 텍스트가 갖지 않는 관계적, 문화적 속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규정된다. 즉 작품은 특정한 문화적 맥 락에서 비로소 예술 작품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인식되는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디키(G. Dickie) 등의 제도론자와 단토(A. Danto), 마 골리스(J. Margolis) 등의 이론에서 이러한 사고를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다.

미학적 논의에서 이러한 텍스트와 예술작품의 구별은 언어를 매체로 하 는 문학뿐 아니라 음악이나 시각 예술 등 모든 예술에 걸쳐서 일반적으 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오직 물리적/자연적 속성만을 가진 대상과 관행- 의존적/문화적이고 지향적인 속성을 가진 대상들 간의 일반적인 구별과 도 유사하다. 이 구별이 논의상 필요한 것은, 텍스트에 비해 예술작품이 더욱 특징적으로 가지는 문화적, 지향적 측면의 본질적인 중요성 때문이 다. 문화적 대상들 중에서도 예술작품은 특히 해석을 요청하고 해석이 중요한 대상으로서, 작품의 많은 중요한 의미들이 표현적, 재현적 성질 을 비롯한 미적 성질들과 관계하기 때문이다.24)

23) 작품의 미적 속성 중 관계적 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맥락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드러 나며, 의도주의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의도주의와 맥락주의에 대해 서는 이 장의 2.1.1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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