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
*
42)Ⅰ. 서론
Ⅱ. 광개토대왕비의 건립배경과 내용
1.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발견 2. 내용과 연구 성과 및 의의Ⅲ.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고구려 민족성과 예술성
1.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민족성 2.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예술성Ⅳ. 결론
【국문요약】
고구려는 지리 문화적으로 광활한 영토와 강인하고 씩씩한 기상을 가진 700년 이상을 존속한 대제국이었다. 건국신화에서 보여주듯 天 孫에 의하여 건국되어 왕위가 이어졌음은 왕실의 신성함을 내세우 고, 고조선과 부여를 있는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더욱 고구려인들의 정체성을 자신감 있게 나타내는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 민족의 웅혼 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 동방대학원대학교 동방문화학과 교수
이처럼 우리 민족 패기의 상징인 태왕비문은 상고사 연구의 귀중 한 금석문이며 아울러 당시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러 한 현실에서 본 논문은 태왕비문에 나타난 고구려 문화와 비의 형태 그리고 비문 글씨의 예술성과 고유성을 살펴보았다.
4세기 이후 고구려의美는 곧 힘이었다. 힘이 없는 곳에 그들의 美 는 성립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힘을 美로서 승화시켜 거대한 자연석 위에 펼쳐 보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주관적 구상은 線으로 나타나 있다. 웅대한 기상에서 나온 직선의 力動美와 고구려 자연을 기반으로 한 여유로운 自然美가 그것이다.
주제어: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자연미. 역동미
Ⅰ
. 서론정치와 군사적으로 제국적인 성격을 가진 강력한 연합국가(5부족) 였던 고구려는 古朝鮮과 夫餘를 계승한 많은 종족들의 집합체로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완성시 켰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 문화는 중국문화 등 주변의 문화를 비판적 으로 수용하여 개성 있게 재해석하였고, 중국문화에 자극하고 영향 을 주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동아시아 문화에 활력과 개방성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天孫이라 부르며 하늘을 진심으로 숭배하였으므 로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령스러운 건국 신화를 만들었다.
아울러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말을 타고 끝없는 벌판을 내달렸던 강인함과 매서운 겨울 추위와 강풍에도 굴하지 않 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험하지 않는 산과 거칠지 않
는 물길의 자연에서 나타난 부드러운 선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독특한 지리 문화적 특성과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개방적이었고, 보편성을 지닌 세계관을 가졌다. 아울러 자기 집단과 문화에 대한 자아의식이 강하여 종족 정체성에 충실하였다. 이렇듯 포 용력 있는 문화와 씩씩한 기상, 그리고 자유를 끝없이 희구하는 정신 성은 고구려인들을 상상력이 풍부하고 웅장하며 낙천적이게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廣開土大王碑나 강서고분의 사신도, 중원 고구려비 등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 들은 모두 정열적이고 패기가 있으며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더욱 한 국에서 가장 큰 비석인 광개토대왕비는 우리 민족사의 자긍심을 일 깨워 주는 최고의 유산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문화를 가진 고구려를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우 리 역사에서 지우려는 노력이 보이며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가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되는 논의가 한ㆍ중 양국 간에 한창이다. 아 울러 일본은 ‘辛卯年’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고대한일관계의 본질 을 왜곡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정체성에 대한 현재의 논쟁은 우리 에게 역사 사실 이상의 의미와 충격으로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광개토대 왕비를 중심으로 유전되고 발굴된 사료, 그리고 선행연구자의 연구 결과 등을 바탕으로 4-5세기 고구려 문화와 예술미의 특징을 고찰해 보겠다. 고구려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우월적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가운데 광개토대왕비는 이러한 정체성을 자신감 있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Ⅱ
. 광개토대왕비의 건립배경과 내용 1.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발견고구려는 1세기경 渾江과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흥하여 668년 멸망할 때까지 700년 이상을 존속했다.
1)
그리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이었다. 청동기 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로 돌괭이를 비롯한 농기구와 곡식을 찌는 시 루가 발견되었고, 또한 시조 주몽의 어머니로 받드는 神이 농업신 이 었다2)
는 점 등에서 고구려는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三國志동이전 고구려조에서 고구려의 발상지역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농경지가 부족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어 도 배를 채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부족한 식량은 주변 지역을 침략 하거나 복속시켜 이들로부터 보충하였다.3)
그러므로 고구려는 생존 을 위한 전쟁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정복 활동은 서기 전후 무렵부터 전개 되었으나 자체적으로 강력한 집권력을 구축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리왕의 손자인 6대 태조왕(47∼165, 재위: 53∼146)대부터는 고구려 민족의 통합에 따른 국력의 분출로 지속성적인 대외 정복 활동이 시 작되었다.
이 시기의 대외적 팽창은 漢郡縣이 설치되어 있는 비옥한 농경지
1) 여호규,
「
고구려의 기원과 문화기반」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동북아역사
재단 (2007), 20쪽.서영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07, 8쪽 재인용.
고구려가 800년 존속했다는 설(삼국사기권6
新羅本紀6 文武王10年). 900년
존속했다는 설(唐會要및 新唐書에 인용된 高麗秘記, 삼국사기高句麗本紀
말미의史論)도 있다.
2) 서영대, 전게서, 10쪽.
3) 서영대, 전게서, 10쪽.
대인 요동ㆍ현토ㆍ낙랑과 동해안의 옥저, 그리고 동예 방면이었다.
그 후 중국이 삼국으로 나누어지자 고구려는 揚子江 이남 吳나라와 도 통교하는 등 보다 폭넓은 국제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 정복활동은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이는 대내적으로 왕권 과 집권력의 강화를 가져왔다. 3세기 중반 魏나라 毌丘儉의 침공으로 대외 활동이 주춤하였으나 중국이 5호 16국시대로 접어드는 4세기 대혼란 시기를 맞아 고구려는 다시 크게 팽창하였다.
15대 美川王(?∼331, 재위: 300∼331)대부터 낙랑 대방군을 병합하 고,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권 쟁탈을 치열하게 벌여나갔다. 특히 잇달 아 흥기하는 遼東지역의 유목민족과 遼西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鮮 卑族의 慕容氏가 세운 前燕(337-370), 後燕(384-409), 北燕(409-436)과의 첨예한 경쟁이 벌어졌다.
4)
미천왕 이후 일련의 팽창은 16대 故國原王(재위: 331∼371)대에 이 르러 서ㆍ남방에서 한때 저지되었으므로 새로운 지배체계와 질서가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17대 小獸林王(?∼384, 재위: 371∼384)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며 太學을 설립하는 등의 개혁을 단 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대내외적인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제 도적 개혁과 동시에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시기의 동아시아 정세는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로 국제 정세 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국가가 국제 정세를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못하였고 여러 세력들이 균형적인 상태를 유지 하였다. 고구려 역시 서쪽으로 요서지방을 사이에 두고 선비족 拓拔 氏가 세운 北魏(386-534)와 대치하였고, 남쪽으로는 新羅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북으로는 말갈족 대부분을 복속시키고, 동쪽으로 동부 여 지역을 병합하였다. 특히 소수림왕의 동생인 18대 故國壤王(?∼
4)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었고, 남쪽에서 백제가 북으로 팽창해 371년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까지 하였다.
391, 재위: 384∼391)을 거쳐 19대 廣開土大王(375∼413, 재위: 391∼
413)과 20대 長壽王(394∼491, 재위: 413∼491)시대의 고구려는 강력 하고 안정적인 통치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 권을 구축하였다.
마침내 고조선을 계승하려는 역사적 사명으로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불태운 고구려는 이 시기에 이르러 뜻을 이루었다. 중국 북부 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세력이 미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마련하였고,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기틀을 쌓게 되었 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정치적 안정과 성장은 여러 종족 집단들 간의 교류와 융합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대외관계에서 동아 시아 여러 나라와 문화적인 교류를 병행하였고, 이를 통하여 고구려 사회는 더욱 성장되고 발전되었다.
5)
이와 같이 고구려는 5세기 들어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영토가 확대되고, 문화가 질적으로 성숙해 졌으며 보다 다양성을 띄게 되었 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장수왕은 甲寅年(서기 414년) 9월 29일 乙酉에 父 王을 山陵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리고,
6)
아울 러 守墓의 煙戶를 명기한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그러나 우리 민족 패기의 상징인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1500여년의 긴 시간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 져 있다가 19세 기 말에야 재발견되었다. 물론 한국문헌에서 광개토왕비에 대한 언 급은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보인다. 그리고 고려사,
7)
용비어천5) 유전된 고분벽화에서 그 면모를 볼 수 있듯이 국제교류를 통하여 사회발전 에 따른 제반 문물을 수용하고, 기존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이들을 융합시 켜 독자적이면서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6)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勛績, 以示後世焉.
7)
聞太祖來 移保亏羅山城……東至皇城. 北至東寧府 西至于海 南至鴨綠 爲之一
空 (高麗史
卷42, 恭愍王 世家)
가,
8)
태조실록9)
등에서 亏羅山城의 기록이 보인다.10)
여기의 亏 羅山城은 지금의 중국 桓仁縣 동방 20여 리 지점에 있는 五女山城이 다. 皇城11)
은 당시의 고구려 고도인 오늘날의 集安으로 이 성의 북측 7리 지점에 비가 있고, 그 북측에 돌로 쌓은 두개의 능이 있다. 이 비 가 현존하는 광개토대왕비를 가리킨다.12)
이렇듯 문헌의 기록은 있 으나 비문을 확인한 경우는 없었다.다시 말해서 고구려가 멸망한 후 渤海가 건립되고 遼代를 거쳐 시 대를 지나오면서 광개토대왕비는 차츰 잊혀졌다. 17세기 이후 淸시 대에서도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주거금지 조치(封禁制 度)를 시행하니 광개토대왕비는 잊혀 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하여 재발견되었다.
13)
이로부터 탁본이 나오게 되고, 전문적인 연구되기 시작되었다.2. 내용과 연구 성과 및 의의
414년에 새워진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인 廣開土大王碑는 중국 吉 林省 集安縣 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391∼413)의 陵碑이다. 일반적으로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8)
兀刺亏羅山城 自平安道理山郡央土里口子……至北刺山城 在大野之中. 四面 壁立高絶 唯西可上. 距離山郡二百七十里 (龍飛御天歌
제39장주)9)
東至皇城 北至東寧. 西至海 南至鴨綠江. 爲之一空. 皇城古女眞皇帝城也 (太 祖實錄
卷首)
10) 권오엽,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제이엔씨, 2007, 104∼105쪽.
11) 권오엽, 전게서, 105쪽. 당시 일반인은 皇城을
大金皇帝城
으로 불렀다.12)
朴時亨, 전게서, 35쪽. 권오엽, 전게서, 105쪽.
13) 권오엽, 전게서, 93쪽.
청나라
盛京省 懷仁縣 洞溝(通溝)에서 1875년(光緖 初年, 明治8년)에 재발견
되었다. 당시 회인현의 知縣인章樾
은 금석문에 관심을 가진關月山
을 보내 광개토태왕비를 발견하고 몇 글자를 手拓하였다.는 諡號를 줄여서 ‘광개토대왕비’라고도 한다. 4면에 글을 새긴 비는 角礫凝灰岩으로 높이는 6.39m이며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 부분이 약간 좁다.
14)
碑의 각 면은 먼저 행의 줄을 맞추기 위한 세로 선이 쳐져있으며 비문은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음각 되어 있다. 한 행의 글자 수는 대체로 41자로 제1면은 11행, 제2면 10 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으로 모두 1,775자에 이른다. 글자의 크기 는 대략 세로 9∼12cm, 가로가 10∼12cm이다.15)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다. 제1부분은 天帝之子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降世하여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의 신화와 전 설, 그리고 왕위계승과 광개토대왕의 行狀을 간단히 기술하였다.
제2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에 의해 이루어진 대외 정복활동으로 碑 麗와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를 구하고 왜구를 물리쳤으며 동부여 등 을 정벌한 8번의 정복기사를 연대순으로 적고 있다. 이는 신화적인 왕통의 권능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며 아 울러 그것은 조상의 수호가 후손들의 통치를 보장한다는 사실까지도 의미한다.
16)
그리고 이 부분은 중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귀중한 사료 의 역할을 한다.제3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내린 교언(存時敎言)에 근거 해서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의 來援 및 가구 수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는 조상의 수호와 보장에 대한 후손의 보은 의례를 후손의 守墓活動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17)
있는 것이다.14)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다.
15)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25-26쪽.
고광의,
「고구려의 금석문과 서체」,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동북아역사재
단, 2007, 435쪽.16) 권오엽, 전게서, 63쪽.
17) 김병기, 전게서, 26쪽; 권오엽, 전게서, 63쪽.
이와 같이 조상의 후손수호와 광개토대왕의 훈적, 그리고 이에 대 한 후손의 보은의례 등의 비문 내용들은 상고사연구에 중요한 자료 를 제공한다. 더욱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금석문이다.
1883년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하던 일본군 포병중위 사코 우 카게아키(酒勾景信)는 비문의 <雙鉤加墨本>
18)
을 가지고 귀국하 였고, 이를 일본육군참모본부는 극비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리고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는 1889년 會餘錄5집에 「高句麗古 碑考」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ㆍ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 었다. 그는 비문 내용 중 일부를 “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19)
라 읽고 해석하였다. 이를 근거로 일본학자들은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日本書紀에 나오는‘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일본에 의해 기획된 뚜렷한 연구목적은 비문의 ‘辛卯年’조를 자의 적으로 해석하여 고대한일관계의 본질을 왜곡하는 일이었다. 즉 일 본은 ‘任那日本府說’이라는 황당한 강변을 비문의 고구려와 왜의 관 계에서 구하고 있었다.
일본에 의한 독점된 연구시기를 지나 한국에서의 연구도 진행되었 다. 1908년 간행된 增補文獻備考에 광개토대왕비문이 수록되었 다.
20)
申采浩는 그의 저서 朝鮮上古史에서 비문의 “缺字에 석회를 18)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19)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와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20) 1770년(영조 46년)에 간행된 東國文獻備考를 모태로 1790년(정조 14년)에 개편을 완수하고, 다시 1831년(순조 31년)에 증보하여 增補東國文獻備考 146권을 간행하였으나 많은 문물제도의 변화를 반영하여 1908년 1월에 250 권 50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태왕비문은 제32권(與地考24)
西間島疆界
에 실 려 있다.권오엽, 전게서, 107쪽.
발라 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眞을 失함을 恨한다”고 언급하 였다.
21)
그리고 1930년대 말 鄭寅普는 기존의 ‘辛卯年조’를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聯侵新羅以爲臣民 以六 年 丙申 王躬率水軍 討利百殘”22)
라 해석하였다. 즉 ‘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았으며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는 한국의 연구자에게 근본을 제공 하여 부분적으로 수정되거나 정정되면서 발전 연구되어 왔다.이렇듯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하게 된 후, 남ㆍ북한의 많은 연구자 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여 일본의 통설을 부정
23)
하였다. 특히 1970 년대 在日학자 李進熙는 참모본부에 의해 태왕비문이 석회로 조작되 었다는 ‘개찬설(改竄說, 石灰塗付作戰說)24)
’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 으켰다.본고에서는 제국주의 실현으로 고대사에서 일본의 우위를 극대화 하려는 이미 설정된 이들의 연구과정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왜냐하 면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상의 대립은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 며 또한 자국의 민족적 이익에 치우쳐 그 순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태왕비문에 나타난 고구려 문화의 사료적 가 치와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의 형태와 비문의 예술성을 중심으로 살펴 보겠다.
21)
申采浩, 朝鮮上古史
(1948년 판); 권오엽, 전게서, 108쪽에서 재인용.22)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 묘년에 고구려에 침입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이 때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에 침입하니, 백제는 원래 고구려의 신민이라 영락 6년 병신에 광개토왕이 친히 백제를 정벌하였다. 권오엽, 전게서, 110쪽.
23)
朴時亨, 전게서; 金錫亨, 古代韓日關係史
,勁草書房, 1969 등; 권오엽, 전게
서, 15쪽, 110쪽 재인용.24)
李進熙, 「廣開土王陵碑文
의謎一初期日朝關係硏究史上
의問題点」
思想 제
575,岩波書店, 1972년 5월호.
「廣開土王陵碑硏究史上
의問題点-1910년까지 중국에서의 연구를 둘러싸고 」
고고학 제58-1, 1972년 7월.
Ⅲ
.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고구려 민족성과 예술성 1.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민족성민족성은 시대성에 의한 도덕적 윤리를 바탕으로 공통적인 善의 실현과 그 시대가 바라는 목표에서 起因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대와 주어진 여건에 따라 유동적인 민족성의 특성이 발현된다. 그 래서 민족정신은 독자적 인간성의 공통점이 집합되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시대성에 따른 민족정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궁 극적인 민족정신을 연구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 민족성을 분석ㆍ고찰하여 궁극적인 민족정신을 정립하고, 이를 우리 고유의 정통성으로 지향하여야 한다.
아울러 문화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으로 이는 전파와 수 용에 의해서 발전한다.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중국, 서북쪽으로는 유 목 민족 등 문화 계통을 달리하는 여러 세력들과 경계를 맞대고 있 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다양한 문화들과 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더욱 외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데 적극적이 었고 능동적이었다.
25)
그러므로 고구려 문화는 그들의 고유성과 또 다른 한편으로 주변의 문화와 공통적이거나 흡사한 부분도 많다.1) 정통성과 고유성의 발전
고구려는 새롭게 출현한 고대국가가 아니라 선행하였던 고조선과
25) 1977년 집안시에서 기원전 289년에 제작된 전국시대 趙國의 청동단검이 발 견되었다. 조국은 전국칠웅의 하나로 지금의 山西省 河北省 일대에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의 대외 교섭은 일찍부터 또 상상 이상으로 광 범위하게 이루어 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張福有, 「集安出土趙國陽安君靑銅短劍及相關問題再探」
東北史地
5,長春 :
東北史地雜誌社, 2006, 23-25쪽, 43쪽.
부여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 성장하였다. 기원전 2세기 압록 강 일대에 거주한 주민 집단을 ‘句麗’라 불리고, 이것이 고구려라는 국가로 고정되었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말 압록강 중ㆍ상류 일대의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수립한 집단을 고구려의 모체로 보고, 이를 ‘原 高句麗社會’로 지칭하기도 한다.
26)
이와 같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배경으로 한 고구려는 건국신화에서 天帝之子인 시조 鄒牟王으로부 터 유류왕, 대주류왕을 거쳐 17세손인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 이 후까지 왕통의 연계성을 태왕비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옛날 시조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는 北夫餘에서 출생한 天帝의 아들이며 河伯의 딸이 어머니였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 부터 聖스러운 德이 있었다…. 남쪽으로 순행하 는 길에 夫餘의 奄利大水 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나루터에 이르러 “나는 皇天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으로 무리를 짓게 하여라.” 라고 하였다. 이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가서, 沸流谷 忽本 서쪽 산위에 성을 쌓 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세상의 지위를 즐기지 아니하여 (하늘이) 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영접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타고 昇 天하였다. 遺命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은 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 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17 세손에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 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太王이라 하였다.
27)
이는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 출신으로 천제의 아들이면서 하백의 외
26) 송호정,
「高句麗
의族源
과濊貊」
高句麗硏究
第27輯, 高句麗硏究會 編,
2007, 123쪽.27)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
有聖德□□□□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
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于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于忽本東
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손자이고,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옴으로써 신성성이 있었으며 남쪽으로 순행하여 새로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신화의 내용이다. 그리고 추모왕 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의 王統은 유류왕 대주류왕을 거쳐 17세손인 광개토대왕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간략한 유류왕과 대주류왕의 기 술에 비해, 추모왕과 광개토대왕의 기술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약술되거나 생략된 왕들이 기술된 왕들보다 그 비중이 열등하거나 낮 다는 것은 아니다. 즉 자세한 왕통을 기술하지 않았지만 신화적인 추 모왕과 사실적인 광개토대왕의 활동은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태왕비문의 내용은 그 당사자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왕통을 계승한 모든 조상과 후손이 공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 시 말해서 태왕비문은 추모왕이나 광개토대왕의 독자적인 기술을 목 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두 왕의 기술을 통하여 왕통의 유래나 권 능을 구체화시키고, 그 왕통을 계승하는 조상과 후손의 혈연관계를 확인하여 왕통을 계승하는 왕들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중국 문헌에 유독 고구려에 대해서 “淫祀를 무척 좋아한다.”
28)
또 는 “음사가 많다.”29)
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이 ‘음사’라 표현하는 것 은 고구려의 토착 신앙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처럼 토착신앙에 대 한 믿음이 많았다는 것은 고구려인이 天神의 후손으로서 敬拜의 풍 습이 성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시대 부터 至高神으로서 하늘의 신령인 천신, 즉 檀君 할아버지인 桓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태왕비문에 보인 天帝, 皇天, 昊天, 天이란 표현28) 周書
卷49 異域傳 (上) 高麗.
29) 서영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07, 44쪽 재인용.
北史
卷94 高句麗傳; 舊唐書
卷199 (上) 東夷傳 高麗; 新唐書
卷220 東 夷傳 高麗
음사란 음란한 제사가 아니라 올바르지 못한 제사를 의미한다. 여기서 올바 르다, 올바르지 못하다 는 것을 가르는 기준을 유교이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옳지 못한 제사가 음사라는 것이다.
도 천신을 가리킨다. 단지 이처럼 여러 가지 표현으로 천신을 가리키 는 것은 이때까지 통일된 고유어가 없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고구려에서의 천신은 자연의 운행과 전쟁의 승패 그리고 자손을 점 지하는 등 인간사의 여러 일을 관계하였다.
물론 고구려에 토착신앙 숭배만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小獸林王 2년(372년)에 불교가 수용되면서 고구려 왕실은 불교를 지배이념으 로 활용하고자 했다. 사찰을 짓고
30)
승려를 육성하며 북방불교의 특 징인 ‘王卽佛’이라는 사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했다. 이는 토착신앙 인 천신보다 보편적인 불교를 통해 보다 수직적 권위를 과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다만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도 제천대회나 시조 묘 제사 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 천신신앙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아 울러 소수림왕 2년에 太學이 세워졌으며 소수림왕 3년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유학적 정치이념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불교가 왕실의 권 위를 강조하는 데 활용되었다면 유학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이념으 로서 君臣간의 충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의미를 가졌을 것이 다. 또한 말기에는 도교까지 전래 수용되어31)
儒ㆍ佛ㆍ道 三敎가 고 구려의 지배이념으로서 활용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 착신앙은 외래 사상의 전래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봉되어 신화 와 제의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특히나 4세기 이후 고구려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세계라는 天下 觀을 인식하고 있었다. 고구려왕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하면 30) 372년(소수림왕 2)
順道
가前秦
의 사신과 함께 와서 불경과 불상을 전하면 서 고구려에서 불교의 공식적인 수용이 시작되었다. 374년 阿道가 오고, 375 년 초문사(肖門寺 혹은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機寺)를 짓고서 각기 순도와
아도를 거처하게 해 불교를 홍포하게 하였다.31) 영류왕 7년(624)에 처음 전래된 도교는 보장왕 때 적극 수용됐다. 특히 연개소 문이 보장왕 2년(643) 왕에게 고하기를 “삼교(儒佛道)는 솥의 발과 같아, 그 하 나라도 없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성하나 도교는 그렇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을 당 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국인(國人)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서 하늘과 직접 통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東盟이란 祭天儀禮를 거행했고, 王中王이란 의미를 지닌 太王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또한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했으며, 自國을 세상에서 제일 신성한 나라라 고 자처하면서 주변의 국가나 사회에 대해서는 오랑캐(夷)라 불렀 다.
32)
이는 고구려의 국력이 크게 신장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자기 문 화에 대한 자부심이었으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더욱 정통성 을 공고하게 한 것이다.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기존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고 아울러 이를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재창조하고 발전시키는 문화적 능력의 소유자 들이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양식인 積石塚은 주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 는 고구려의 고유한 문화형태로 시신을 지상에서 일정 높이 떨어진 墳丘 가운데 안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고구려에서 기원전 3세기경 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이후에는 지배적 묘제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지만 압록강 이북에서는 발해시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또 다른 고유한 문화로 왕이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都城)과 전시에 거주하는 山城의 이원적 王都체제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은 왕과 그 일족만이 거주하였지만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은 군대와 백성들까지 함께 하였으므로 규모 면에서는 산성이 평지성보다 훨씬 컸다.
33)
물론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를 지 키는데 만 그치지 않고, 이를 끊임없이 개량하고 발전시켜 나아갔다.적석총도 초기 형태는 둥글둥글한 강돌을 평면 원형으로 쌓아 올리
32) 태왕비문뿐만 아니라 ‘牟頭婁墓誌’에서 시조 朱蒙을
天帝
의 아들이요,河伯
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자국이 천하 의 중심임을 자부한 것이다. ‘中原高句麗碑’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라 기술하 고 있다.33) 첫 수도인 환인에서는 오녀산성과 하고성자(下古城子)토성, 두 번째 수도인 집안에서는 산성자산성(환도산성)과 국내성, 세 번째 수도인 평양에서는 대 성산성과 안학궁(또는 청암리토성)이 각각 짝을 이루고 있다.
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할 墓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다시 강돌을 덮어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쌓아올린 돌 들이 흘러내리면서 무덤이 허물어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점을 보 완하는 한편 죽은 이에게 보다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제 공하고자 적석총을 개량해 나갔다. 즉 평면은 원형에서 방형으로 바 꾸어 나갔고, 돌은 다듬어 사용하였다. 그리고 돌이 허물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덤 밑에 다듬은 돌로 基壇을 설치했다.
34)
또한 사후 에도 보다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묘곽을 묘실로 확장하는 등 끊임없이 개량하고 발전시킨 결과가 바로 장군총이다.이와 같이 고구려 사람들은 국력신장의 바탕에서 고유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정통성을 지키고, 아울러 그들의 문화를 보다 효율적으 로 개량하면서 발전시켰다. 이는 정통성울 잃지 않으면서도 고유한 문화를 부단히 발전시켜 상호 상승작용으로 성장하였음을 말한다.
2) 개방성과 진취적 기상
고구려는 건국하자마자 자신들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역사적 사명과 경제적 목적으로 고토회복에 나서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였 다. 그들은 전투에 임하여 이기는 것, 아니면 싸우다 죽는 것, 이 두 가지만을 생각하는 두려움 없는 용감하고 씩씩한 기상을 가진 민족 이었다. 말과 사람을 완전히 철로 무장시켜 돌궐과 거란도 이길 수 있는 고구려만의 鎧馬武士
35)
를 예로 보더라도 이를 증명한다.고구려는 중국과 주변의 여러 종족들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영토를 확장한 반면에 또한 그 영토를 수성하기 위해 수많은 외적 침입을
34) 기단은 처음에는 1단이었으나 차츰 단의 수를 높여 무덤 전체를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35) 개마무사는 병사와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무사라는 뜻으로 광개토대왕 때 에 더욱 발전하여 5만에 이르렀고,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의 주력이 되었다 고 한다.
방어 하여야 했다. 특히 고토회복을 위한 多勿
36)
사상은 고구려의 정 신적 뿌리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고구려가 인접한 沸流國37)
을 병합하고 그곳의 이름을 多勿都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옛 땅을 회복 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5세기에 들어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인의 소망을 이루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 다.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세력이 미침으로써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 8번의 구체적 정복활동 사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영락5년과 마지막 기사 인 영락20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永樂 5년(395년) 乙未해에 碑麗
38)
가 잡혀간 고구려인을 돌려주지 않으므 로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富山, 負山을 지나 鹽水에 이 르러 3개 부락 6∼7백 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 말, 양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왔다.□
城, 力城, 北豊에 이르러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영토를 시찰하고 사냥을 한 후에 돌아왔다.39)
20년(410년) 庚戌해에 東夫餘는 옛적에 추모왕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군대가 餘城(동부여의 왕성)에 다다르자, 동부여는 놀라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36) ‘多勿’은 舊土의 회복이라는 고구려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고조선의 광 활한 영토를 되찾자는 고구려 건국이념이라 볼 수 있다.
37)
沸流國
은 BC 1세기경佟佳江
유역의小國
으로多勿國
혹은沸流那
로 기록 되기도 하였다. 비류국의 지배층도 夫餘에서 이동해왔으나 삼국사기에 비 류국 왕인松讓
과 주몽은 주도권을 다퉈 주몽이 이겨 그곳을 ‘多勿都(國)’라 하고 송양을 國主로 봉하였다고 한다.38)
碑麗
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39)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 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遊觀土境, 田獵而還.
왕의 은덕이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자, (왕은) 이에 돌아왔다. 이때에 왕 의 교화를 흠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가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
社婁 鴨盧, 肅斯舍鴨盧,□□□
鴨盧였다. 무릇 64성 1400촌을 공파하였다.40)
이렇듯 고구려는 중국세력이 한반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중 국의 입장에서는 이 교통로를 확보해야만 낙랑군 등 한반도의 여러 집단을 유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중국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러 므로 중국세력의 극복 없이는 국가로서의 성장이 불가능하였던 지정 학적 요인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영토 확장만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넘어서 고조선이 추 구했던 천하 질서를 회복하려는 기상의 발로였다. 물론 이러한 요인 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인들이 어느 정도 전투적이며 尙武的 기풍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주변의 이질적인 종족 들을 자국으로 편입시켜 상생하였고, 그들의 문화를 고구려 문화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모두를 만족시키는 보편적 문화로 발전시켰다. 또한 군사력이 강한 북방 유목종족들이나 강대한 중국의 여러 나라 들과 줄기차게 공방전을 펼친 강력한 나라였다. 그리고 그들의 강역 은 만주일대와 한반도 중부 이북에 이르는 가장 광대한 영토 및 광 범위한 해양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었다.
비문에서 보듯이 광개토대왕은 정복한 지역에 용서와 은혜를 베풀 며 모든 것을 개방하여 그들을 위무하였다.
41)
또한 중국에도 적극적 인 외교정책을 보였으며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때는 남북의 세력들40)
卄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擧國駭 服
.獻出□□□□□□王恩普覆, 于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 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41)
太王恩赦始迷之愆, 錄其後順之誠
과 각각 관계를 맺었다. 또한 북방 민족인 鮮卑, 柔然, 突厥, 鐵勒 등 과 저 멀리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까지 사절을 파견하여.
42)
문 화수용을 활성화했다. 물론 이는 국제관계를 이용하여 국가의 존립 과 국력의 신장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외교사절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목적도 있었고, 외교적 인 목적에서도 사신의 왕래가 문화교류에 일익을 담당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이처럼 고구려는 상당히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문화를 가지게 되었 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개방성과 포용성은 고구려로 하여금 다채 로운 문화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모방하는데 그친 것 이 아니라 수용된 문화를 재인식, 또는 재개발하여 나름대로 고구려 의 독자성 갖게 하였다.
43)
그리고 이와 같이 형성된 고구려의 수준 높은 문화는 주변 지역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2.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예술성
광개토대왕비는 인공적으로 채석하여 가공한 흔적이 별로 없는 불 규칙한 사각기둥의 형태로 세워졌다.
44)
비문의 글씨는 동시대 중국의 어느 서예자료와도 다른 독특한 서체로 쓰여 졌다. 이렇듯 광개토대42) 서영대, 전게서,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18쪽 재인용.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鳥羽冠을 쓴 고구려 사절의 그림이 있 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 사절이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행하던 사절도를 옮긴데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43) 김일권,
「
한국 고대인의 천문우주관」
강좌 한국고대사 8, 가락국사적개발 연구원, 2002, 66-75쪽.중국 천문학을 상당 부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는 달이 북두칠성ㆍ 남두육성ㆍ心房육성ㆍ參伐육성을 사방의 標識的 별자리로 삼는 ‘사방위 천 문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천문학 체계를 구축한 점.
44) 고구려연구재단, 환인ㆍ집안 지역 고구려 유적 지질조사 보고서, 고구려 연구재단, 2005, 100쪽.
[그림 1] 광개토대왕비탁본
[그림 2] 광개토대왕호우
[그림 3] 전돌
왕비는 자연적인 모습과 독특한 서체 등으로 우리 들에게 많은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광개토대왕비의 형체와 글자에서 나타난 예술미를 살펴 여기에 나타난 예술성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들의 정리를 기반으로 4ㆍ5세기 고구 려 유물과 유적을 비교 분석하여 고구려 미의 고 유성을 찾고자 한다.
1) 碑文字體의 固有性 태왕비문의 글자 형태는 장방형이거 나 정방형이다. 정 방형은 가로와 세 로가 보통 12cm 정 도이며 장방형의 큰 글자는 한 변이 16cm 에 이른다.
45)
자체 는 隸書이며 그중 에서도 흔히들 波 磔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서한시대의 古隸書의 일종이라 했다. 그러나 약간 의 篆書와 楷書를 비롯하여 草書나 行書의 결구들도 함께 보인 혼합된 서체의 양상이다.
그래서 지금껏 비문의 서체를 古隸, 漢隸, 八分, 隸書, 또는 예서와 해서의 중간 서체, 眞書, 東晋隸書 등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왕비문의 자형결구와 특징을 45) 왕건군, 임동석 옮김, 광개토왕비 연구, 역민사, 1985, 34쪽.
가진 자료들은 오직 고구려와 유관된 곳에서만 보이고 있다.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에서도 이 같은 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 므로 태왕비문 서체는 4-5세기 고구려만의 고유한 서체이다. 그래서 이 비가 갖는 역사적 의의와 예술성 등을 포괄하는 서체 개념으로
‘광개토대왕비체’, ‘창조성을 띤 종합 서체’
46)
라 하는 등의 다양한 견 해가 제시되었다.아래는 태왕비문과 서체가 같은 자료를 살펴보겠다.
1946년 경주 壺衧塚에서 출토된 고구려시대 금속기인 廣開土大王 壺杅
47)
의 밑바닥에는 “乙卯年國 罡上廣開 土地好太 王壺杅十” 라는 16자의 명문이 양각으로 주조되어있다. 명문의 ‘乙卯年’이라는 간지 는 태왕비문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以 示後世焉”48)
에서의 ‘甲寅年(414년)’이라는 기록과 비교할 때 이 호우 가 주조된 것은 광개토대왕 안장 翌年에 해당된 長壽王3년(415년)에 재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49)
명문은 원형의 좁은 공간에 배치되었는데 자형의 크고 작음이 서 로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장법이며, 서예 미학적으로도 뛰어난 작품 의 하나이다. 더욱 명문의 자형결구 등이 태왕비문 서체와 흡사하며 고졸하고 웅대한 기상이 보인다.
광개토대왕비 부근에서 발견된 전돌에 ‘愿太王陵安 如山固如岳’
50)
46) 김병기, 전게서, p.89.
47)
金載元, 「壺衧塚과 銀鈴塚」
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
第1冊, 1948.
이 호우는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높이 19.4cm, 직경이 24cm이다. 글씨의 크기는 한 치 평방 정도로 작다. 고구려에서 제작된 이 호우가 어떻게 신라 지역에서 발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정치적 관계로 보 아 왕의 추모를 위해 사절로 참석하였던 신라 사신이 경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한다.
48)
甲寅年(414년) 9월 29일 乙酉에 왕을 山陵에 안장하였다. 이에 비를 세우고
왕의 공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니 그 내용은 이와 같다.49)
金元龍ㆍ安輝濬, 韓國美術史
, 서울대학교 출판사, 1993, 64쪽.50)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언덕처럼 견고하기를 바라나이다.
라 새겨진 기록이 있다. 이의 내용으로 보아 태왕비의 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비정한다.
51)
이 전돌에 새겨진 전체적인 자형은 다소 장방형으로 길게 쓰여 졌으며 부분적 으로는 해서의 체세도 간혹 보이나 기본적인 結構는 태왕비문과 비 슷하다. 물론 태왕릉에서 ‘辛卯年 好大王 〇造鈴 九十六’52)
의 문구가 1행에 3글자씩, 4행 12자가 있는 銅鈴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의 글씨는 鑄造가 아닌 기물 완성 후의 빠른 새김 글씨로 위의 자료와는 필획 의 굵기 등의 차이가 있다.이상의 자료들 태왕비문을 비롯하여 광개토대왕호우와 명문전 등 은 그 자형결구나 筆意로 보아 당시 고구려 동일 서예가의 작품으로 추정된 고구려만의 글씨이다.
이밖에도 423년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中原高句麗 碑
53)
가 있다. 그 모습이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해 놓은 듯 자연석을 그 대로 이용하였고, 四面에 글이 새겨졌다. 이는 광개토대왕비 형태의 유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이는 광개토대왕비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이다. 비문 글자는 가로획은 오른쪽이 위로 향하고 있으 며 삐침의 收筆방향이 왼쪽 아래로 향하고, 파임의 수필은 오른쪽 아 래로 향하고 있어 장방형의 해서로 보인다.이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태왕비문의 서체는 고구려의 고유
51)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p.186.
이 명문전의 제작 연대는 아무리 늦어도 414년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글자 의 특징에 따라 고졸한 것과 단정한 것, 필획이 가는 것과 뚜렷한 것 등 모 두 7종으로 나눌 수 있다.
52) 광개토대왕의 즉위축하용 동령으로 96개의 만들었는데, 마지막에 만든 96번 째 동령에 명문을 새긴 것이다. 함께 출토된 다른 2개의 방울에는 명문이 없 다. “신묘년(서기 391년)에 즉위하신 호태왕께 축하드리며,
崚에서
96번째 방울을 만듭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라는 뜻이다.53)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1979년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높이 126~144cm, 폭 31~55cm로 각 면의 높이와 폭이 불규칙하고, 글자의 크기도 약 3~5cm로 일 정하지 않다.
한 서체였음이 증명된다. 여기에는 고구려 민족의 소박하면서도 여 유롭고 독특한 고구려만의 미감이 보이며, 고구려인의 생명 흐름이 있다. 이것은 또한 그들만의 정통성에 따른 독자적인 고유성을 잘 나 타내고 있는 것이다.
2) 여유로운 자연미
태왕비문에서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을 天孫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제작한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마치 용이 하늘로 솟구쳐 비상하는 기세와 너그러움이 보인다. 아울러 잘 다 듬지도 않는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글씨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세련돼 보이지는 않지만 평범함 가운데 무궁무진한 맛과 깊이를 간직하고 있 다. 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인의 여유와 고구려의 자연이 보여 준 순수한 아름다움
54)
이 모태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인 들의 큰마음에서 우러난 자유로운 힘이며 자유에 대한 추구이다.태왕비문 이외에도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고 발견된 유물에서 고구 려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식과 추구하고자하는 세계관, 그리고 그들만의 이상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고분벽화마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신들은 위엄이 아니라 뛰고 있으며 사람 들의 옷깃은 바람에 휘날리고, 물고기는 하늘에서 헤엄치며 움직이 고 있다. 기하학적인 문양 등이 다양한 아름다움과 의미를 가지고 그 려져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온 이들의 공통된 느낌은 동 적인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움직임 속에 美를 표현하고 있으며 美안에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음이다. 또한 관념적이지도 않고 형이상학적이 지도 않으며, 자연스러움과 넉넉한 여유 속에 動中靜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이다.
54) 고구려의 산과 골짜기, 강과 물길은 깎아지르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는 부드 러운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무용총 벽화에서는 사람과 동물 모두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있다. 또한 새 등에 올라타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렇듯 그들의 하늘은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었 으며 자유로움 가운데 있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나드 는 자유, 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며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자유를 그들은 추구하였다.
이들의 추구는 단순한 움직임인 공간의 물리적인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의 대립 이 사라진 대상과의 합일이며 자유스러운 평화의 공간이다. 자유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아름다운 나라였고, 고구려인들은 아 름다움과 자유를 즐기고 누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유로운 아름다 움은 고구려인들의 마음의 표현이며, 이상이었다.
김원룡은 고구려 미술을 중국의 漢나라와 화북지방의 미술들에 비 해 경쾌한 리듬과 장식성이 부족하며 완전 完璧에 대한 潔癖의 결여 가 보인다고 하며 그것이 한국적 특색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55)
고 하였다. 태왕비문의 글씨 역시 동한의 八分예서에 비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평범 가운데 깊은 맛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과 가장 가까운 미의 표현이며 미추를 초월한 미 이전의 미이고, 미추의 세계 를 완전 이탈한 자연미이다. 그래서 김원룡이 한국미의 탐구에서 말 한 ‘無作爲, 無技巧의 해탈’을 이해 할 수 있다.그러므로 고구려인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한 자유주의, 그리고 고구려 예술의 배경이 되고 무대가 된 고구려의 자연, 여기서 나온 ‘미’
를 한마디로 고구려의 미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자연미이다.
3) 직선의 力動美
직선의 미는 미술이나 건축 등의 작품에서 단정하며 소박하고, 간 55)
金元龍ㆍ安輝濬, 전게서, 13쪽.
결하며 힘찬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고유의 직선은 부드러움과 비교 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단순하게 보이나 절대로 초보 적인 것이 아닌 전통의 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광개토대왕비는 아 무런 수식도 없고, 다듬어지지도 않는 거대한 크기의 자연석에 직선 의 필획으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다시 말해서 단순하면서도 단호함 이 보인 태왕비문의 글자들은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간결한 직선을 통한 절제된 선으로 나타난다. 이는 직선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전절(轉折)의 모서리가 밖으로는 예리한듯 하면서도 안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같은 시기의 그 어떤 비석보다 거대한 광개토대왕비와 그리고 같 은 시간대의 집안 소재 적석총 가운데 천추총, 태왕릉 등은 그 규모 가 대단히 크다.
56)
왕궁으로 추정되는 안학궁의 중궁전은 앞면의 길 이가 87m, 측면이 27m로 한국의 목조 건물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57)
이에 걸맞게 안학궁의 용마루를 장식했던 鴟尾도 높이 210cm, 너비 180cm로 발해 동경성 출토 치미의 2배의 크기로 웅장하다.58)
이들은 고구려 문화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다.우리민족에겐 강인한 생명력이 있는 반면에 현상유지를 타파할 역 동성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는 힘 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 해 이러한 역동적인 아름다움은 그들이 남긴 넓이의 미학 흔적이요, 끊임없는 숙련에 의한 힘의 미학이다.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 장천1호분에는 무려
56) 천추총은 한 변의 길이가 71m, 태왕릉은 63m, 서대묘는 62m이다.
57) 리정남,
「안학궁의 성격에 대하여」 대성산일대의 유적을 통하여 본 고구려
의 강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5, 22쪽. 일본에서 제일 큰 도다이사(동대 사)가 앞면 57m,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의 함원전의 앞면이 59.2m, 명나라 고 궁 태화전의 앞면이 63.96m이다.58) 대성산의 고구려 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243-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