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_2018.12.10 심사기간_2019.01.01-16 게재확정일_2019.01.23
키치가 주는 안락함과 소외감을 통한 미적 경험 -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의 심리학”을 중심으로 -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Comfort and Alienation of Kitsch
- focused on “Psychology of Kitsch” by Abraham Moles -
정새해,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 이현진(교신저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Chung, Sae Hae_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nd Arts, Yonsei University /
Lee, Hyun Jean_(Corresponding author)_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nd Arts, Yonsei University
차례 1. 서론
1.1. 연구 배경 및 목적 1.2. 연구 방법 및 의의
2. 미적 계기로서의 키치 2.1.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키치 2.2.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 담지자 2.3. 키치의 감정 상태인 안락함과 소외감
3. 워홀 작품에서의 키치의 미적 경험 3.1. 키치 담지자로서의 공간
3.2. 키치 담지자로서의 사물
4. 결론
참고문헌
키치가 주는 안락함과 소외감을 통한 미적 경험 -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의 심리학”을 중심으로 - Aesthetic Experience through Comfort and Alienation of Kitsch
- focused on “Psychology of Kitsch” by Abraham Moles -
정새해,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 이현진(교신저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Chung, Sae Hae_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nd Arts, Yonsei University /
Lee, Hyun Jean_(Corresponding author)_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nd Arts, Yonsei University
요약 본 연구의 목적은 시각예술 분야에서 주로 통용되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와 키치” 글에
제시된 키치 개념과 동시대의 키치의 미적 경험 담론을 검토하는 것에 있다. 20세기 중반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순수성, 실험정신, 초월성 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대척점에 키치를 두고 이를 통 속적이고 대중에게 싸구려 감성을 자극하는 모방품으로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현대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그가 이분법적 태도로 정의한 키치 개념만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키치가 보다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그린 버그의 키치 개념을 보완하고자 사회심리학자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 이론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연 구 방법으로 먼저 그린버그의 키치 개념을 분석하여 미적 경험 담론에서의 이론적 유효성을 검토하고, 이어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방식으로서 키치를 정의했던 몰르의 논의를 살펴본다. 특히 세부적으로 키 치의 안락함과 소외감의 감정 상태를 분석하여 키치 미학의 주요 특징들을 도출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앤디 워홀의 초기 전시와 작품 분석에 적용하며, 이들을 통해 사물과 공간의 층위에서 키치가 어 떠한 미적 경험에 이르도록 하는지 탐색해 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워홀의 작품들에 몰르 가 논한 안락함의 감정이 담겨있다고 보며, 키치를 새롭고 확장된 시각에서 재접근하고자 한다. 본 연구 가 현대미술에서의 키치의 미적 경험 연구와 담론이 풍성해지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길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sit the concept of kitsch presented in Clement Greenberg's
"Avant-Garde and Kitsch" and contemporary aesthetic experience discourse of kitsch. In the mid 20th century, Greenberg criticized kitsch to emphasize the purity, experimentation, and transcendence of avant-garde art and regarded kitsch as a vulgar imitation that leads the public to fall into sentimentality. However, in the contemporary art scene, we encounter various kinds of kitsch that are so much more complex and fluid than ever and that cannot be contained in Greenberg’s kitsch. Therefore, in an effort to examine the concept of Greenberg’s kitsch, this study focuses on the kitsch theory of Abraham Moles, a social psychologist. In a method to carry it out, Greenberg's kitsch is first analyzed to examine its theoretical validity in the aesthetic experience discourse. Then this study turns to look into Abraham Moles's kitsch that is defined as a relationship between human beings and things. Particularly, this study tries to derive key features of kitsch aesthetics by examining the kitsch feelings of comfort and alienation.
Finally, the result of these theoretical approaches is applied to the analysis of Andy Warhol's early artworks and exhibitions, through which this study explores how ‘kitsch’ derives its unique aesthetic experience on the layers of things and space. In conclusion, this study opines that Moles’ comfort is contained in Warhol’s artworks. Reapproaching kitsch from a new and broader perspective, we hope this study will help enrich the discourse of aesthetic experience of kitsch in contemporary art.
중심어
키치 키치 담지자 키치의 안락함 키치의 소외감 아브라함 몰르 클레멘트 그린버그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
ABSTRACT Keyword
Kitsch Kitsch-träger Comfort of Kitsch Alienation of Kitsch Abraham Moles Clement Greenberg Andy Warhol Brillo Boxes
이 연구는 연세대 미래융합연구 원(ICONS) X-미디어 센터의 지 원을 받아 수행된 논문임.
1. 서론
1.1. 연구 배경 및 목적
앤디 워홀의 예술은 미술사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어 왔다. 그 주요이유 중 하나는 워홀의 이미 지 차용과 이를 통한 표현방식에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수퍼마켓 상품이나 통속잡지 속의 사진, 광고, 꽃 그림 등이 원색의 색 조합과 평면화된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대상과 표현 방법을 일컬어 흔히 키치1) 혹은 키치적인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워홀은 키치적 표현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서의 팝아트 계보를 만들었다. 더불어 많은 이들에게 키치 스타일이라는 미적 취향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고 그의 예술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로 각종 디자인 산업 분야에 팝이라는 고유한 스타일을 이루었다.
본 연구는 이렇듯 워홀의 예술에 있어서 키치가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보는데, 특히 워홀의 작품에서 키치의 계기가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또 어떠한 미적 체험을 제공하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실 키치 개념은 앤디 워홀보다 이전에 모더니즘 미술사에서부터 일찍이 다루어져 왔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키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의 키치는 모더니 즘 미술담론에서 주로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척점에 위치한 대상이자 반-예술로서 주로 다뤄 졌고, 대중을 기만하고 예술 세계를 흐리는 악동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특히 현대미술에서 키치 개념이 이토록 부정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은 1940년대에 미술사가 클레멘트 그린버 그의 글, “아방가르드와 키치”2)의 영향이 컸다. 당시 그린버그가 밝힌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개념은 이후 미술 제도권 내에서 중요하게 회자되면서 키치에 대한 정의가 문화 발전을 저해하 는 모방적 문화 산물로서 제한되어 논의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 워홀의 예술이 등장하고 팝아트 논의가 생기면서 키치 개념이 다시금 논의 될 수 있었지만 차용이라는 표현방법론에 대한 연구나 제도권 내에서의 예술의 재정의3) 논의 들이 그 중심을 이뤘고 미적 언어로서의 키치와 그 의미에 대한 재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팝아트라 불리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 리처드 해밀튼의 작품을 논할 때 표현 전략으로서의 키치의 차용을 논의할 뿐이었으며, 오히려 키치를 팝아트의 오브제 정도로 의 전유물이자 하위 개념으로서 고정시켜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키치는 아직도 그린버그가 선고했던 ‘반-예술’으로서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오늘 날까지 미술담론 안에서 ‘나쁘고’ ‘가벼운’ 대상으로서만 다뤄졌다.
물론 키치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에도 일면 유효한 부분이 있다. 자본을 먹고 증식한 거대문화 산업은 그린버그를 비롯한 많은 문화 이론가들이 우려했던 대로 대중의 예술적 취향과 판단력 을 마비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키치가 현대미술에서 차용 되어 미적 언어로 기능할 때 어떤 미적 경험을 주는지는 많이 논의되지 못했다. 키치는 다양하게 차용되고 변형되어 오늘날의 예술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00년 전후의 근대미 술에서부터 오늘날 현대미술까지 페인팅 및 조각, 각종 오브제를 활용한 설치미술과 장소-특 정적 작품들, 퍼포먼스나 상황적 해프닝들, 그리고 영상, 게임 등의 다매체적 미디어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많은 경우에 과거에 일반적으로 키치적이라 판단했던 사물이나 이미지뿐만 아니 라, 키치적인 상황이나 태도까지 다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날 키치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린버그의 키치 이론을 재고하여 그 유효성을 검토하고
1) 양효실, 「키치」, 『현대의 예술과 미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pp.371-372. 양효실은 이 글에서 키치라는 용어는 1860년대 무렵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보지만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소개한다. 그 중 흔히 알려진 바는 독일에서 ‘싸게 만든 다’는 의미의 독일어 verkitschen의 축약에서 유래되었다는 관점인데, 당시 값이 비싸지 않고 시장성이 좋은 미술품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추측된다. 20세기에 와서 키치는 전문적인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부르주아 중산층이나 프롤레타리아 하층민 모두 의 문화 향유 방식, 오락으로서의 대용문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2) 「아방가르드와 키치(Avant-Garde and Kitsch)」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39년 『파티잔 리뷰(Partisan Review)』에 기고했던 글 이다. 이후 1961년 그의 다른 에세이들과 함께 『Art and Culture』라는 책에 실렸다. 본 논문은 이 책에 실린 글을 참고하였다.
3)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역, 미술문화, 2004.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논의는 예술이 사회적 합의로 규 정된다는 주장을 담은 책으로 워홀의 <Brillo Boxes> 작품 분석을 중심으로 논지를 펴고 있다. 이러한 예술의 재정의 담론 중에서 는 작가가 일상적이거나 키치적인 사물 및 이미지를 차용하여 작품을 통해 소격효과를 일으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의 근본 적인 개념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진다.
미적 언어로서의 새로운 키치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본 논문은 작품 연구대상으로서 앤디 워홀의 초기 작품과 전시를 선정하였 다. 이는 첫째, 워홀의 초기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실험들과 이러한 실험들이 그 당시에 미술계 에 일으킨 영향과 반응을 보다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워홀의 명성이 알려진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미적 경험과 비교할 때, 놀라움과 당혹감을 안겨 주었던 첫 시도들에서 키치의 계기를 보다 면밀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이다. 그리고 둘째, 워홀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작품 철학과 실험정신이 그의 초기 작품에서 다듬어 지지 않은 가장 날 것의 상태로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작품에 드러난 고민의 흔적들을 통해 우리는 워홀의 예술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키치의 미적 계기가 불러일으키는 미적 경험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키치를 재조명하는 유사한 시도는 이미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대표적으로 1960 년대에 발표된 수잔 손택의 “캠프에 대한 노트들(Notes on Camp)”4)이라는 글에서 키치와 밀 접하게 연결되는 논의가 시도되었다. ‘캠프’는 “비정치적인 감수성이자 스타일”로서 “철 지난 것들에 대한 애착”이자 “대중예술의 조악함에서 쾌”를 느끼는 “천박함을 사랑하는 감성”이었 다.5) 캠프 취향의 대상이 곧 키치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으나 손택이 캠프를 굳이 구별하려 했던 이유는 캠프라는 미적 취향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를 공식화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 그녀의 논의는 미적 판단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미적 취향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받는다.6) 이외에도 양효실, 박성봉, 토마스 크로와 같은 미 학자부터 문화 이론가까지 키치의 개념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유의미한 연구들이 존재 한다.7)
본고의 연구 목적은 키치의 계기가 우리에게 어떠한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 분석하고 이를 워홀의 초기 미술 작품 분석에서 밝히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를 이성을 통한 미적 판단으 로의 접근을 피하고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의 경험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본 연구자 는 기존의 모더니즘 키치 개념과 논의만 가지고 키치의 미적 경험을 분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이에 아브라함 몰르(Abraham Moles)의 키치 개념을 빌려와 키치가 불러일으키 는 정서와 미적 체험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특별히 키치가 불러일으키는 안락함과 소외감이 라는 감정 상태가 어떠한 미적 경험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로써 현대미술의 키치적 미적 경험으로서의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2. 연구 방법 및 의의
본 연구는 미적 경험에 대한 관점을 중심으로 그린버그의 키치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키치에 대한 확장된 이해와 미적 경험 담론에 적용할 이론적 토대를 위해 아브라함 몰르라는 사회심리학자의 키치 개념을 살펴본다. 몰르의 논의를 바탕으로 키치 의 감정 유형의 두 축인 안락함과 소외감을 살펴보고 이를 워홀 예술에서의 미적 경험 분석에 적용하여 키치의 계기를 통한 미적 경험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첫 번째 분석 대상은 모더니즘 미술사에서 키치를 규정하는 데에 토대가 되었던 그린버그의 글, “아방가르드와 키치”이다. 이 글에서 그린버그가 키치를 바라보았던 관점을 살펴보고 당시 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논의가 갖는 의미를 분석하고자한다. 이를 통해 모더니즘 키치 개념이 동시대의 미술담론에서 갖는 유효성과 한계점들을 짚어볼 것이며 키치 의 계기로 인한 미적 경험 담론의 풍성한 논의 가능성에 대해 닫혀있는 문을 열어보는 데에 그 이론적 기반을 다지고자 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몰르의 키치 개념을 “키치의 심리학(Psychology of Kitsch)”8)을 중심으로
4) Susan Sontag, 「Notes on “Camp”」, 『Against Interpretation and Other Essays』, Penguin, 2013.
5) 강태희, 「워홀, 팝, 캠프」, 『현대미술사연구』17권, 2005, p.172.
6) 양효실, 위의 글, pp.379-380.
7) 양효실, 위의 글, 박성봉, 『대중예술의 미학』, 동연, 1995. 토마스 크로,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 전영백 역, 아트북스, 2005. 참고.
8)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란 무엇인가?: 행복의 기술』(엄광현 역, 시각과언어, 1995)의 독어 원제는 “키치의
살펴보겠다. 대부분의 키치 논의가 예술 혹은 문화 산업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다면, 이 저서에는 문화적 관점에서부터 경제적, 사회심리학적, 역사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에서 키치를 고찰한다. 몰르는 인간과 사물의 상관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삶의 태도나 방식으로 키치를 정의했기 때문에 키치로부터 느끼는 심리와 키치로 인한 경험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좋은 이론적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앤디 워홀이 본격적으로 미술 분야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한 전시라고 평가되는 Bonwit Teller 매장에서의 전시와 <Brillo Boxes> 작품이 발표되었던 전시를 중심사례로 키 치의 미적 경험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워홀의 전시와 작품에서의 키치 요소를 사물과 공간으로 나누어 검토한 다음, 키치의 계기가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해당 감정이 수반되는 미적 경험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워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석의 범주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서의 키치 논의를 넓혀보려 한다.
2. 미적 계기로서의 키치 2.1.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키치
현대 미술 담론에서 통용되는 키치 개념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 클레멘트 그린버 그의 글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기여가 크다. 사실 그린버그의 ‘키치’는 ‘아방가르드’를 정의하 고 명확히 하기 위해 그 대척점에 위치시킨 개념이었다. 그렇다보니 키치는 예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진정한 문화를 갉아먹는 해충과 같은 존재로 비유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린버그의 견해가 오늘날까지 키치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린버그가 키치의 사례로 제시한 구체적인 대상들은 로마시대의 문학적 정체기로 불리는 알 렉산드리아니즘 양식, 근대의 구체적 사례로서 유럽의 아카데미즘 미술을 대표하는 에꼴드 보자르 풍 미술과 로마 조각들, 신고전주의 건축양식 등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유사한 대상이 수백 가지의 변형들로서 모방되거나 기계적으로 생산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단순히 상위 예술의 모방의 차원에 머무를 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 발전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대상이었고 이 때문에 그의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9) 그리고 그린버그는 앞서 언급한 역사적 키치의 계보를 잇는 당대의 키치로 “대중적인 광고예술, 천연색 도판 인쇄의 문학책들, 잡지책 표지, 삽화, 광고지면, 번지르르하고 선정적인 통속소설, 만화, 팀 팬 앨리 음악, 탭 댄스,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 등”을 지목한다.10) 이것은 모두 도시 문화 산물로서 대중이 소비 하고 향유했던 것으로 보았는데, 구체적으로 대중은 도시에 정착한 소작농 계층, 그리고 노동 자와 자본가 중간 계급인 소상인, 수공업자, 하급 봉급생활자, 하급공무원들, 프티부르주아 혹은 프롤레타리안의 소시민과 하층 중산계급의 시민들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린버그가 대중문화를 키치로 보고 비판했던 또 다른 이유는 키치는 대중이 일상에서 느끼는 지루함을 달래고 안락함(comfort)을 선사할 대상으로 시장의 요구에 의해 탄생한 문화 산물이 었기 때문이었다.11) 여기서 우리는 키치가 일으키는 감정에 대해서 그린버그가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여가를 즐기고 안락함을 누리는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린버그는 여가와 안락함(leisure and comfort)을 제공한다는 이유 때문에 키치를 비판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가와 안락함을 민속문화, 대중문화, 전통문화 등 모든 문화의 주요한 존재 목적 중에 하나로 여겼고 그 문화의 향유층이 소수 엘리트집단이든 대중이든 간에 그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여겼다. 다만 그는 각각의 문화가 제공하는 여가와 안락함이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하나는 교양의 함양이나 특정 분야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반면, 다른 하나는 지각과 감성 능력이 둔감해지거나 기능할 수 없는 상태 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즉 유희와 위안의 정서가 불러일으킬 부정적 효과를 경계했던 것이다.
심리학(Psychologie du Kitsch)”이다. 본고에서는 ‘키치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논의내용에 더 적합한 표현으로 판단하여 사용했 음을 밝힌다.
9) Clement Greenberg, 「The Avant-Garde and Kitsch」, 『Art and Culture』, Beacon Press Boston, 1961, p.4.
10) Clement Greenberg, 위의 글, p.9.
11) Clement Greenberg, 위의 글, p.10.
특히 키치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감각의 마비상태(insensibility)가 될 수 있으며 “진정한 문화 (genuine culture)”의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고 보았다. 문화를 향유할 줄 아 는 지각과 감성이 무뎌져서 예술 감각의 능력마저 퇴보될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즉 키치가 주는 안락함은 대중의 문화 선별 능력을 상실케 한다는 것이 그린버그의 관점이었다.
“아방가르드와 키치” 글에서 저자가 키치의 사물이나 문화와 같은 ‘대상’만을 비판하는 것 같지 만 궁극적으로는 키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제작자와 수용자의 ‘태도’를 비판한다. 대중에게 즉각적이며 일회적인 감정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순간의 유희를 제공하는 그 제작 목적과 유희 와 위안의 감정에 머물러 안주하는 수용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을 기만하 고 무비판적 문화 소비자로만 전락시키는 대중문화산업은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고, 그럴수록 예술이 계몽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성적 사유와 논리적 비판으로 이끄는 계몽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감정이 앞서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린버그 는 키치를 통해 얻는 안락함에는 유익이 없다고 여겼고 키치에 의한 위안과 쾌의 감정을 비생산 적이고 무가치하게 여겼으며 일종의 ‘나쁜’ 감정으로서 치부해버리는 결론에 이르렀다.
2.2.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 담지자
아브라함 몰르는 그의 저서 “키치의 심리학”12)에서 사회심리학의 관점으로 키치를 다각도로 유형화하여 분석하였다. 사물로서의 키치 유형과 더불어 현상과 태도로서의 키치에 대하여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깊이 통찰하였다. 이러한 지점들이 몰르의 키치 분석 이론을 키치 미학에 접목하여 그린버그의 키치 개념을 사회심리학 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동시대 미술의 이해와 해석의 범주를 넓히 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몰르의 키치 관점이 갖는 중요한 특징은 키치를 실체를 갖는 사물로서 제한하여 보지 않고
“인간과 사물의 관계방식”으로 본다는 것이다.13) 여기서 ‘사물’은 소비될 수 있는 모든 유무형 의 대상들을 포함하고 이 관계가 발생하는 환경은 소비사회와 대중사회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일상생활이라는 시공간적 틀 안에서 인간과 사회를 구체적인 사물들이 매개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의식주에서부터 문화 향유까지 삶의 모든 필요조건들 속에 있는 유무형의 키치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로써 키치를 인간과 사물의 관계방식으로 정의하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몰르는 키치 사물을 색이나 모양 등으로 외연적으로 특징화하거나 보편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 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사물로서의 키치는 어떤 “정신상태의 결과로서 사물 속에 결정화”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그 관계에 따라 키치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음악과 마네의 그림이 ‘예술’로 분류된다고 해서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예술’을 향유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예술로 향유되거나 키치로 소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용자의 태도 에 따라 유동적이다 보니 키치는 외연적으로 특징화될 수 없을 뿐더러 특정 형식이나 장르로 구분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사물과 문화형태는 언제든지 ‘키치 담지자(Kitsch- träger)’로서 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14)
이러한 분석은 키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소비문화와 대중이라는 틀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일상생활의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사물로부터 사회제도나 시장경제 등의 보이지 않는 사회 시스템까지 키치 담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시켜보면 키치를 연구하는 것은 곧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유무형의 대상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12) 아브라함 몰르, 『키치란 무엇인가?: 행복의 기술』, 엄광현 역, 시각과언어, 1995 (원서: Abraham Moles, 『Psychologie du Kitsch』, Mediations, 1971).
13)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32.
14)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13. “시각예술, 회화, 조각, 문학, 오브제, 음악, 건축, 이것들 모두가 키치의 담지자이다.” 키치 담지자(Kitsch-träger)에서 träger는 사전적 의미로 어떤 물건을 나르거나 운반하는 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이다. 그래서 키치 담지자를 키치를 잠시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운반하고 전달하는 유무형의 사물로 이해하였다.(네이버 사전 참고).
연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아브라함 몰르가 키치를 연구했던 목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효실이 “키치나 캠프 개념은 오늘날 예술이 자본주의 사회와 비판적인 거리 를 유지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15)라고 지적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몰르는 현대사회에서의 일상적인 생활환경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사물들이 만들 어낸 공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더 인공적인 것으로 변화”해간다고 하였는데, 이는 소비사회의 시스템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즉, 필요에 의해서 생산으로 이어지는 시스템 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면 이전의 소비된 상품은 폐기되는데, 소비와 폐기의 순환이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사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공적인 환경이 만들어 진다. 이러한 인공적 환경을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으로 보았던 몰르는 수많은 사물과 관계 맺으며 영위되는 인간의 삶에서 키치가 소비 시스템에서 필연적으로 점차 더 견고한 기반을 획득한다고 보았다.16)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예로서 우리가 사용하는 주거공간 내의 가구의 생산방 식을 살펴보겠다. 근대사회 이전에는 가구를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튼튼하게 사용하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장인들이 공방에서 직접 제작하였 다. 한번 구입한 가구는 대를 물려가며 같은 주거공간이자 가족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반면 근대 산업사회에서의 제조 주체라 할 수 있는 공장은 수많은 익명의 노동자를 거쳐 대량으로 가구를 생산한다. 공장은 대량으로 판매되어야 유지가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산하지 않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은 직업을 잃고 결국 시장이 멈추게 된다. 그래서 새로 운 소비를 만들어내고자 약간의 기능들이 추가된 업그레이드 물건들을 주기적으로 생산하고, 각기 다른 기능을 조합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면서 유행을 만들어낸다.17) 이러한 인공적인 환경에서 사람은 본능적인 욕구에 점점 인공적인 욕구가 추가되어 살아간다. 그가 인공적이라 고 하는 대상은 상품 물건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사회와 정치 이데올로기까지 폭넓게 해당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대상들에 의해 인간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이 정해진다고 본 것이다.18)
2.3. 키치의 감정 상태인 안락함과 소외감
몰르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키치적 안락함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보았 다.19) 이들은 소비의 대상을 향하여 소유욕을 품고 소비하며 이 때 소유의 행복감을 느끼는데 이 행복감의 내부를 살펴보면 키치적 안락함이 전제한다. 안락함은 사물을 소유함으로서 맛보 는 짜릿한 행복감의 정도와 비교했을 때 보다 미지근한 상태의 감정이지만 소비의 매순간의 행복감이 축적되어 감정의 기반을 만들어낸 기본 바탕이기 때문에 소비의 행복감과 안락함은 원인과 축적의 결과로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20)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상품을 소비한 후 주거 공간으로 돌아와 그 물건들을 배치하면 이전부터 축적되었던 다른 상품들과 함께 안락
15) 양효실, 위의 글, p.380.
16)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20.
17)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p.266-279. 장 보드리야르, 『사물의 체계』, 배영달 역, 백의, 1999, pp.174-176, 이를 가제트라 하 는데 가제트는 키치의 전형적인 예이다.
18)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19. “19세기 말 무렵까지 소비는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불과했으나, 그 후 점차적으로 문화현상 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마침내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키치라는 현상은 소비사회에 근거한다. 소비사회란 소비를 위한 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을 위한 창조적 당위성이 주장되는 사회이며 창조 à생산 à소비 à창조 à생산 à소비의 순환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반복되는 사회이다.”
19) 임병희, 「안락함과 미에 대한 욕구 충족으로서의 키치」, 『독어교육』 (55), 2012. p.298-p.299. 키치의 현상학(Phanomenologie des Kitsches)을 쓴 루드비히 기츠(Ludwig Giez)도 모든 사람에게 키치적 성향이 내재한다고 보았다.
20) 임병희, 위의 글, p.300. “...(중략) “안락함에 대한 열망 Drang nach Gemütlichkeit”은 공적인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민계 층의 소망인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 소외에 대한 보상욕구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안락함으로 번역되는 ‘Gemütlichkeit’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는 쾌적하다는 뜻도 포함되며, 마음이 편하고 느긋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네이버 사전 참고).
함의 상태로 물들어가는 것과 같고 소비자가 사물들에 둘러싸여있어서 편안하면서도 친숙한 안락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안락함은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환경과 사물을 대하는 평상시의 감정 상태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있는 상태의 감정이다. 또 다른 예로 안락함이란 사회 전반의 문화와 통념에 맞추어 살아가는 상태이기도 하다. 사회적 관습을 따르고 유행을 따르는 일련의 행위들은 키치의 안락함을 유지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한편 키치적 안락함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소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구입한 물건에 싫증이 날 때, 구매한 물건으로부터 기대했던 감정이 실망으로 전환 될 때, 아름답다고 여긴 물건이 유행이 지남에 따라 촌스러워 보일 때 소외의 감정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주위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을 자기 자신은 갖지 못할 때, 대중이 공유하는 문화를 공유 혹은 공감하지 못할 때 소외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21) 소외 감은 사물로 가득 채워진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특정적인 감정으로서 안락함과 더불어 자본주 의 체제 내에서만 존재하는 감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22) 달리 보자면 소외는 안락함의 이면에 있는 감정 상태로서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안락함을 향한 욕망이 너무 강해지면 소외를 느끼는 강도도 비례하여 세어진다. 이러한 경우 인간은 사물로부터 소외당하고 자신의 환경으 로부터 소외당하는 처지가 되며 이는 인간이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인간을 규정”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23)
몰르의 키치 유형 분석에서 등장하는 안락함과 소외감의 개념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기반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는 공급과 수요가 발생할 수 있도록 공급자 가 만들어내는 이상과 소비 욕구의 심리적 작동 기제이다. 이 제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안락 함을 유지하고 소외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계속 소비하고 축적하며 살아가게끔 시스템화 되었 다고 본다. 이는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과 사고방식까지 해당된다. 그렇게 부지 불식간 물들어버린 상태가 키치이며, 안락함은 키치의 기본적인 감정의 상태인 것이다.
몰르의 키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 사람들이 현대 사회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한, 키치로부 터 떠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키치가 우리의 욕망과 감정에 관여하여 삶의 적극 적인 이상인 안락함과 소극적인 이상인 소외감을 형성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치는 “일상 생활을 둘러싼 환경의 존재상태”로서 “원죄와 같이 미래영속적인 것”으로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24) 이러한 관점을 키치의 미적 경험에 적용하면 관객은 키치를 계기로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인공적인 환경과 욕망 등을 마주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 그동안 키치로 인한 대표적 감정으로 즐거움, 행복감, 슬픔, 연민, 향수, 카타르시스 등을 많이 떠올렸다. 또한 이러한 키치적 감정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거리 없음’을 전제로 감상성만 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으로만 여겼다.25) 그래서 대부분 감상적인(sentimental) 정서로 불리는 데, 감상성 혹은 감상주의는 “거짓된 또는 피부적 정서, 근거 없는 느낌, 슬픔과 비탄의 자기 도취적 포즈, 달콤한 자기 연민”26)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잠시 느끼다가 없어진다고 하여 일종의 ‘가짜’ 감정이라 여겨져 왔다.
그런데 몰르를 통해 키치적 감정에서 ‘안락함’이라는 새로운 감정의 상태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감정은 일시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위의 여타 일반적이고 감상적인 감정과 달리 일정하게 유지되는 기본적인 심리적 ‘상태’라고 해석될 수 있다. 구체적인 안락함의 감정으로 예를 들면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고 늘 보아왔기에 어쩐지 익숙하고 친밀하게 느끼는 감정을
21)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49, p.53. “행복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적극적인 이상과 소외의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소극적인 이상 이 바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현상 형태이다. ...(중략) 키치를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유형들은 각각 그 안에 소 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행복에 대한 강한 기대감도 그 안에 함께 내포하고 있다.”
22)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20.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역으로 사물에 소외당하는 경우에 대하여 몰르는 “인간이 사물세계의 포로 가 되어 평생을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포로로 만드는 커다란 사물세계를 구축해가는 태도”라고 설명하였다.
23)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48.
24)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48.
25) 임병희, 위의 글, p.299. “향유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로 인한 반성적 희열을 통해 얻어지는 미학적 향유와 달리 키치적 향 유는 ‘거리 없음’, 즉 향유의 직접성과 감정의 극대화를 통해 감상성을 강화한다.”
26) 박성봉, 위의 책, p.354.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키치적 감상성의 감정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고 충동적 이고 극적인 반면, 안락함은 은근하고 잔잔하다고 할 수 있다.27)
본 연구자는 지금까지 현대예술의 담론에서 익숙함의 반대라고 볼 수 있는 ‘생경함’ 혹은 ‘낯설 음’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안락함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미적 경험에 수반되는 감정 전반에 대한 연구에서 안락함의 감정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생경함을 이해함과 더불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안락 함의 감정과 미적 경험의 과정을 워홀의 작품 분석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
3. 워홀 작품에서의 키치의 미적 경험 3.1. 키치 담지자로서의 공간
앤디 워홀은 Bonwit Teller라는 백화점 매장의 쇼윈도 공간에서 한 전시를 진행하였다. 단토 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워홀이 본격적인 미술 활동을 펼쳤다고 평가한다.28) 산업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그답게 전시에는 광고 이미지들이 감각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잡지에 실리는 광고 이미지를 선택하여 크게 확대하거나 일부 편집하여 재배치한 그림들을 마네킹이 서있는 뒤편에 높이와 깊이를 달리하여 설치하였다. <그림 1>을 보면 만화의 일부 컷을 담아 낸 이미지, 코 성형의 전과 후를 묘사한 여성의 얼굴 그림, 제품 브랜드로 추측되는 텍스트 로고와 코카콜라 로고 이미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워홀이 차용한 이미지들은 구체적으로
“육체노동자들이 보는 뉴스페이퍼의 마지막 페이지나 선정적인 타블로이드 판 신문의 커버페 이지, 싸구려 저속만화, 팬 잡지, 광고문구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재 우리에게 워홀의 작품 은 많이 알려져 있는데다가 팝아트 스타일의 디자인 역시 오늘날 흔하여서 당시의 전시 풍경이 익숙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워홀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서 단토는 그의 작품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앤디 워홀의 이미 지들이 버내큘러(vernacular)29)하고 익숙 하고 특색이 없는 이미지들”이었다고 회상한 다.30)
혹시 워홀의 이 전시를 통해서 키치 담지자 로서의 이미지와 공간이 관객에게 어떤 영 향을 주는지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전 시는 두 종류의 키치적 표현과 태도, 즉 키치 적 감정을 형성하고 담고 있는 인자들, 다시 말해 키치 담지자를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 는 잡지에 실려 있을법한 광고, 상표 로고, 만화의 한 장면과 같은 키치적 이미지들이
27) 임병희, 위의 글, p.299.
28) Arthur C. Danto, 『Andy Warhol』,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16-17. 아서 단토는 Bonwit Teller 매장 쇼윈도에서 진행한 전시를 워홀의 팝 아티스트로의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본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이 전시가 상점의 의뢰를 받아 꾸며진 쇼윈도였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어 성공적인 ‘상업 작가(commercial artist)’로서의 활동으로 보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이 전시를 워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 활동으로 평가하는 단토의 입장을 수용하며, 광고 이미지를 차용하여 제작한 5개 페인팅의 표 현방식과 제작의도에서 워홀의 진지한 예술적 고민과 철학이 발견된다고 보는 입장임을 밝힌다. 1950년대 워홀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전시리뷰 글을 참고 바란다. Paul Mumme, 「Adman: Warhol before Pop (review)」, 『Journal of Asia-Pacific Pop Culture』 Volume 2, Number 2, 2017, pp. 244-249. “...(중략) it would have been nice to see paintings like <Superman> and <Before and After> (both 1961), which Warhol later installed in the same window and which indicate Warhol’s eventual transition into pop quite effectively.”
29) Darron Dean, 「A Slipware Dish by Samuel Malkin: An Analysis of Vernacular Design」, 『Journal of Design History』
Vol.7, No.3, 1994, p.153. ‘버내큘러’하다는 개념은 본래 향토적이고 지방색을 가지며 토착민의 생활과 연관된 성향이라는 의 미를 갖는데, ‘버내큘러 디자인’은 사람들의 문화나 환경적 요인이 반영되어 자연히 생성되는 디자인을 가리킨다. 여기서 단토의 글의 맥락에서는 프롤레타리아층 도시민 삶의 환경과 문화를 가리키는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다.
30) Arthur C. Danto, 위의 책, pp.16-17. 단토가 워홀의 이미지 출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그린버그가 키치라고 가리켰던 대상 들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단토는 이러한 대상들을 워홀 작품에서의 미적 경험의 계기로서 바라보았다.
<그림 1> Bonwit Teller 윈도우 매장에서의 워홀 작품 전시, 5개의 페인팅, 1961, 사진 Nathan Gluck © Estate of Nathan Gluck. Courtesy of Luis De Jesus Los Angeles
고, 다른 하나는 백화점 매장의 쇼윈도라는 키치적 장소이다. 워홀이 자신의 실험적 작품들을 당시 백화점 매장의 쇼윈도에서 첫 선을 보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워홀의 전시 공간 인 쇼윈도는 작품을 보는 행위와 백화점 상품을 보는 행위 간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쇼윈도의 장소적 특성으로 인해 관객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소비사회의 시장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고 관객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비의 욕구와 감정을 자극받는 상황에 노출 되는 것이다. 쇼윈도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내는 소비 유혹의 장이며 동시에 대중의 욕망이 투영되는 창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브라함 몰르가 백화점을 가리켜 “키치의 신성한 성전”이 라고 불렀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31) 이러한 맥락에서 워홀이 작품의 전시 장소를 백화점의 쇼윈도에서 진행하게 된 사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당시 광고 이미지를 편집해 재배치한 그림 가운데 코 성형 이미지를 차용한 <Before & After (전과 후)> 작품 역시 코를 고침으로서 쉽고 간단하게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32) 이는 자본주의에서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하나의 욕망과 이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이 이미지를 보는 이들은 자신의 코가 사회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에 가까이 위치하는지 가늠하며, 어떤 이들은 안도감과 우월감, 혹은 만족감과 안락함을 느끼겠지만 대부 분의 사람들은 불만족을 느끼고 소외의 상태가
될 수 있다. 또한 <Before & After> 작품이 백화점 쇼윈도에 걸리게 됨으로서 누군가 백화 점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달라지는 모습을 상상하게 될 수도 있다. 현대 도시문명 을 처음 접한 부시맨과 같은 원주민이 있다고 가정하고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이전과 이후를 상상해보면 그의 자연적인 상태와 인공적인 상 태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보다 확실하게 상상 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몰르가 이야기하듯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서 생산과 소비의 순환 시스템 유지를 위해 끊 임없이 공급자가 만들어내는 이상과 소비 욕구 의 심리적 작동 기제를 안락함이라고 볼 때, 오 늘날 백화점에 진열된 수많은 상품들은 사람들 에게 안락함의 감정을 제공할 것이다. 이 상태 가 키치의 안락함이 극대화되는 감정의 상태이 며 부지불식간 물들여진 감정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관객은 백화점이 제시하는 신상품을 통한 유행과 오늘날의 미적 기준을 받아들이
며,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비추어본다. 이 사회가 인공적으로 생산하는 삶의 기준이자 그 삶의 이상적 이미지를 백화점이라는 장소와 공간을 통해 화인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그 기준에 뒤떨어지지 않게 적절히 맞추어 가는 것이다. 이는 키치 담지자로서의 백화점 공간이 계속 사람들에게 안락함의 상태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키치의 신성한 성전’으로 역할 하는 부분 이다. 이처럼 백화점이라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워홀의 전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일상을 둘러 싸는 환경의 존재’인 소비 시스템과 그 저변에 위치한 욕망을 마주하게 하고 이들에게 미적 경험으로 연결되도록 시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상생활의 경제적 틀 내에서 키치 담지자를 찾아내었던 몰르의 키치 이론은 예술이 우리의
31) 아브라함 몰르, 위의 책, p.9. “백화점은 한 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제품이 매매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키치란 생산된 조악한 물건이고, 백화점은 기차역과 마찬가지로 키치의 신성한 성전이다.”
32) Arthur C. Danto, 위의 책, p.16.
<그림 2> Andy Warhol, <Before and After I>, 1961, Casein on canvas, 68 x 54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Gift of Halston, 1981 © 2012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삶과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보았던 단토의 워홀 논의를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단토는 워홀의 작품을 기점으로 미술사의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전에는 ‘예술세계 내에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질문했다면, 이후로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세계 내에서’ 예술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고 보았다.33) 즉 그는 인간의 상태와 조건(human condition)을 반영 하는 것이 예술의 전제 조건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워홀의 쇼윈도는 사람들의 삶에 내재된 욕망을 반영한 세계였기에 가치 있는 예술로 승인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34)
3.2. 키치 담지자로서의 사물
이러한 단토도 워홀의 <Brillo Boxes>가 발표되었던 당시에 직접 전시를 보고 당혹감을 느꼈 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평소에 수퍼마켓에서 늘 보았던 세제가 갤러리에 버젓이 놓여 있었고 이것이 진짜 브릴로 세제 상자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았던 이유에서였다. 또, 창고의 풍경을 연상시키듯 많은 수량의 세제 박스가 쌓여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갤러리 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기 때문이다.35) 사실 오늘날의 워홀 회고전이나 소장품전 등을 보면 워홀의 <Brillo Boxes>가 하나의 입체물, 다시 말해 단수형 브릴로 ‘박스’로서 전시가 되어있 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상 워홀의 전시 당시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설치방식이 다. <그림 3>의 1964년 당시 <Brillo Boxes>를 처음 선보였던 전시 모습을 보면 워홀의
의도했던 바를 좀 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 다.
워홀은 브릴로 세제 상품 이외에도 캠벨 수프, 하인츠 케첩, 캘로그 시리얼 등 여러 가지 제 품의 상자 모양을 본떠 박스 시리즈 작품을 제 작했고 이를 사람의 키보다 높게 쌓아올려서 설치하거나 바닥에 가득히 메워 진열하였다.
과연 워홀은 <Brillo Boxes> 전시를 통해 관 객에게 어떠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을 까? 우리는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 특별 한 미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 그렇지만 알록달록한 색상들로 화려하게 디자인된 상품들을 구경하고 구입하는 과정 에서 소비자는 일종의 즐겁고 들뜬 경험을 하 는 것은 분명하다. 수퍼마켓에 진열된 수많은 제품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잔잔한 설레임과 같은 감정은 앞서 밝혔듯 소 비사회에서 소비자로서 안락함의 감정 상태 에 놓인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워홀의 전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물 론 일부의 사람들은 갤러리 공간 안에서의 브 릴로 박스들과 마주하는 낯선 경험을 할 수도 있으나, 이내 이러한 수퍼마켓 유사 환경으로 인한 안락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 연구자는 워홀 작업에서의 낯선 경험만큼 이나 소비의 안락함의 경험이 <Brillo Boxes>의 미적 경험과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다. 즉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이 그동안 부지불식간에 느꼈던 일상의 감정 상태를 다시금 새롭게 느끼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토마스 크로우가 워홀의 작품에
33) 아서 단토, 『일상적인 것의 변용』, 김혜련 역, 한길사, 2008, pp.57-60.
34) Arthur C. Danto, 위의 책, p.23.
35) 아서 단토, 『무엇이 예술인가』, 김한영 역, 은행나무, 2015, p.66.
<그림 3> Stable Gallery에 전시되었던 캠벨 토마토 주스 박스와 하인츠 케첩 박스 작품, 그리고 관객들의 전시풍경 (New York, April 21, 1964) Photo: Ken Heyman Artwork © 2014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담겨진 이미지들이 “감정의 솔직한 표현들”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과 마찬가 지로 말이다.36)
결국 워홀의 키치 담지자인 세제 상품 상자들은 생경함과 익숙함, 그리고 안락함과 소외감 사이를 오가며 사회 속에 시스템화 되어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키치 담지자를 통해 우리는 키치와 관계하는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이 속한 사회의 환경적 시스템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캠프에 대하여 연구했던 수잔 손택이 캠프의 감성 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랑”37)이라고 말했던 것은 캠프 취향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이와 유사하게 키치는 인간이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고 작품 속에서의 키치의 계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미적 경험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워홀이 이미지, 사물, 공간으로서의 키치 담지자를 차용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키치가 사람들의 삶에 가장 가까이 존재하고 그들에게 친숙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치적 이미지와 환경이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낯설게 느껴지거나 심리적인 거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워홀이 키치적 이미지들을 재현했던 방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Bonwit Teller 쇼윈도에 걸린 그림들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이 대부분 본래의 모양 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과 <Brillo Boxes>의 작품이 실제 브릴로 세제박스와 매우 유사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와 관련하여 워홀이 미술계에 입문하기 전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고민 하는 과정에서 멘토를 찾아갔던 일화도 함께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워홀은 코카콜라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린 뒤, 이들을 자신이 신뢰하는 벗이자 멘토인 다큐멘터리 감독인 에밀 데 안토니오(Emile de Antonio)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는 흑백의 코카콜라 병을 새 것처 럼 보이는 그대로 그린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대상을 물감의 흘러내림과 같은 추상 표현주의 페인팅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무엇이 더 좋은지에 물으니 안토니오는 새 것처 럼 그린 코카콜라 그림이 더 아름답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자의 그림에서 보는 이미지 가 바로 우리의 사회이며 그것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워홀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의 의견을 따랐다고 전해지는데,38) 이 일화에서 우리는 워홀 이 현실세계를 표현하는 방법과 태도를 재현적 측면에서 고민하며, 관객에게 그 세계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워홀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 속에서 키치가 우리의 삶을 둘러싼 키치적 안락함을 발견하는 미적 계기로서 작동하는 결과로 이어지 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4. 결론
본 연구는 오늘날 키치가 현대미술에서 어떤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현장에서는 키치적인 오브제, 스타일, 형식까지 다양한 모습의 키 치를 발견할 수 있다. 반면 키치와 관련한 미술 담론을 살펴보면 오늘날 예술적 표현 언어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새롭게 변형되는 것에 비해서 그 개념은 오래전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내린 정의에 머물러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 그린버그와 여러 문화 이론가들에 의해 아방가 르드 예술의 대척점으로 위치된 후로 키치는 예술 담론에서 악동과 같은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래서인지 모더니즘 예술 담론 이래로 오늘날까지의 동시대예술 논의에까지 당시의 예술작 품에서 키치적 요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주요담론에서는 주변부로 밀려나 제대로 재고되지 못했다. 그것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석과
36) Thomas Crow, 「Saturday Disasters: Trace and Reference in Early Warhol」(1987), in Serge Guilbaut, ed.,
『Reconstructing Modernism』, Cambridge: MIT Press, 1990, p.313, p.317.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 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역, 경성대학교 출판사, 2003, pp.198-199에서 재인용. 이뿐만 아니라 크로우는 “상품 물신과 미디어 스타라는 매혹적인 표면 아래에서 “고통과 죽음의 실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에 관련해서는 본 연구자 의 다음 키치 연구에서 심도 깊게 다루고자 한다. 토마스 크로의 글은 국내 번역서로 출판되어 있다. 토마스 크로, 『대중문화 속 의 현대미술』, 전영백 역, 아트북스, 2005. 참고.
37) Susan Sontag, 위의 책, p.291.
38) Arthur C. Danto, 위의 책, pp.24-25.
미적 경험에 대한 담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본 연구자는 키치 미학 연구의 첫 단추로 워홀의 키치가 관객에게 어떠한 미적 경험을 갖게 하는지 살펴봄으로써 키치의 개념을 재고하고 키치의 미적 경험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였 다. 키치 개념의 검토와 수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로 “키치의 심리학”을 저술한 아브라함 몰르의 논의를 빌려 기존의 예술담론 분야 내에서의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제한된 범주 안에서만 개념화 되었던 키치를 사회와 삶의 영역으로 확장시켜보고자 하였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방식 안에서 키치를 유형화했던 몰르의 관점은 동시대 예술에서 물성을 가진 재료부터 태도나 상황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하는 키치를 이해하는 데에 적절한 틀을 제공하였 다.
특별히 키치가 주는 안락함과 소외감의 개념은 우리가 워홀의 작품을 보면서 갖는 미적 경험을 해명해주는데 매우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워홀의 초기 작품과 전시에 등장하는 광고와 상품의 이미지, 백화점이라는 공간 및 전시 공간 내의 설치 방식은 이미지, 사물, 풍경, 장소의 키치 담지자로서 안락함과 소외감의 감정 상태를 느끼는 미적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있다 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브릴로 세제 박스와 수퍼마켓이나 코성형 광고이미지와 백화점 쇼윈도 는 우리에게 행복한 꿈과 욕망를 선사하였고 그 이면의 소외 상태까지 들추어내었으며 이를 감정 상태로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더 나아가 키치의 계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내에 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역할 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방식으로 키치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키치는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우리가 키치의 안락함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그 감정에 취해버리면 거울이라는 역할이 작동되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 속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얼굴이 비친 샘물에 빠져죽게 되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샘물이라는 중간 매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키치가 미적 계기로서 작동할 수 있는 전제는 우리가 키치와 거리를 두어 키치라는 매개를 인식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본 연구는 몰르의 사회심리학적인 키치 이론이 현대미술의 키치 미학에 접목되어 미적 경험에 대한 논의를 풍성히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더불어 앤디 워홀의 초기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실험들에서 사물과 장소로서의 키치 담지자로 인한 미적 경험을 면밀히 검토함으로 서 앤디 워홀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작품 철학과 실험정신을 밝히고자 했다.
본 논의는 그간 제한된 시각에서 읽혀왔던 키치를 우리 사회 내에서 다각도로 살펴보고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미학적 계기로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이론적 시도로서 의의가 있겠다.
물론 몰르의 키치 개념의 일부를 이론적 토대로 키치의 미적 경험의 가능성을 도출하는 시도가 다소 과감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키치와 키치 미학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을 통해 점차 심도 깊은 키치 논의를 형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로서 너그러이 보아주기를 바란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키치의 층위는 다양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키치는 현대미술에서 폭넓은 미적 경험의 계기를 제공하고 풍성하게 하는 개념으로 새로이 담론화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키치의 미적 계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모더니즘 시대의 아방가르드 예술작품들에서부터 동 시대의 복합매체(mixed media) 작품들까지 더욱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길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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