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는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여겼고, 각 민족의 오랜 전통으로 계승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혼인의례는 인간이 한생을 살면서 치르는 의례 중 가장 큰 의식으로 혼 인대례(婚姻大禮)라고 한다. 혼례는 몇 십 년 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남녀가 합쳐 가정 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인류의 번영을 이루는 것으로, 우리 인간에게 생애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자, 인간만이 행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혼례는 단순히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만남, 서로 다른 가풍과 가풍의 만남, 그 리고 남과 여라는 음(陰)과 양(陽)의 조화이다. 이렇듯 작게는 남녀 개개인에서 크게는 집안, 문화 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혼례이다. 따라서 혼례를 치를 때 갖추는 예는 단순한 형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배우자와 배우자 집안 어른들에게 올리는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혼례는 한 인간과 한 집안에서 가장 큰 경사인 셈이다. 새로 사람을 맞아 가족으로 받아 들이는 것만큼 중요하고 경사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가족, 친지,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약을 맺고, 이들에게 따뜻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일생 최대의 행복이다.
혼례 음식에 담긴 소중한 의미(1)
이춘자 한양여자대학 식품영양과
혼인의 역사적 배경
상고시대 혼인의례를 살펴보면 부여(扶餘)에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 로 맞이하는 관습이 있었고, 예(濊)에서는 동성(同姓)끼리 혼인하지 않았다. 한편 진한(辰韓) 에서는 혼인을 예(禮)로 행했으며, 남녀의 지위와 구실을 구별했다는 기록이 있다. 옥저(沃沮) 에서는 여자 나이 10세가 되면 약혼을 하고 남자 집에 데려다 양육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본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남자 집에서 여자 집에 일정한 재물을 준 후에야 혼인이 성립되는 민 며느리 제도를 행하였다. 고구려의 혼속(婚俗)은 남녀의 교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서로 좋아하면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혼인이 가능한 경우와 중매에 의한 혼인 풍속이 공존 했음을 벽화나『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와의 자유 혼인에 의한 출생이었다. 이때 유화의 부모는 중매혼(中媒婚)이 아니라는 이유로 꾸짖고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 편, 고구려에는 서류부가(壻留婦家)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이를 통해 혼인할 때 여자보 다 남자가 꽤 어려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녀 간에 혼담이 성립되면 남자는 여자 집 뒤 꼍에 거처할 서옥(壻屋 : 사위집)을 짓고 해가 저물면 그 부모에게 동숙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는다. 이때 돈과 옷감을 여자 부모에게 준다. 남자가 그 집일을 해주면서 처가살이를 하다 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그때 비로소 남자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남자가 장인(丈人)의 집에 서 일을 해주면서 시작하는 혼인의 풍습에서‘장가든다’라는 말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 사회에서는 상류 귀족층에서 친족혼이 많이 행해졌으며, 왕족 역시 혈통을 잇는 방편 으로 대부분 혈족 혼인을 했다. 민가에서도 근친혼과 동성혼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혼인의례 에는 술과 음식을 쓰되 빈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보 면 신문왕 3년(683년)에 왕이 부인에게 납채(納采)하게 한 품목이 나오는데 폐백이 15수레,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젓갈이 135수레, 벼가 150수레였다. 이렇듯 신라의 경우 남자 쪽에서 혼수를 성대하게 마련해 여자 쪽에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신라에서 는“혼인에 불용폐(不用幣)했다”라고 되어 있다.
백제의 혼인의례는 중국의 예를 본받기도 하였으며,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는 다처혼(多妻 婚)을 행했다고 한다. 또 나라의 안위를 위해 인근 국가인 신라₩중국₩일본과 정략혼인도 행했 으며, 여인의 정절 풍습을『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예의(禮儀)’가 제정되었고. 『상정고금례』50권이 편찬되었으므로 혼인의례 의 규범을 짐작할 수 있다. 혼인의례는 일부다처제와 근친혼, 족외혼(族外婚)이 있었다. 고려 태조는 국가 기반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각처 토후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18명의 왕비를 두기 도 했고, 자신의 혈통을 엄격히 보존하기 위해 18명의 비에게서 얻은 자녀들을 서로 혼인시키 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근친혼이 금기되었다. 고려 말에는 국가의 주요 제도를 유교적 의식
절차로 개편했으며, 혼인의례 규범도 이 시기부터『주자가례(朱子家禮)』의 유교적 색채가 가 미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혼례 절차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간단히 전안례(奠雁禮)만 드리고 신부를 신랑 집에 데리고 와서 혼례를 행하는 남자 집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유교적 혼인의례가 우리와는 다른 절차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고려 말부 터 조혼(早婚) 풍습이 성행했다. 원(元)나라에 보내기 위한 고려 조정의 빈번한 공녀(貢女) 징 발로 인해 민가에서는 성인이 되기 전에 정혼하는 조혼 풍습이 생겨났다. 공녀를 처녀 중에서 선택했기 때문에 징발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의 혼인 연령이 점차 낮아졌고, 나중에는 딸을 낳자마자 정혼해두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선사회에서는 국가 시책으로 강력하게 추진했는데도 불구하고 상장례와 제례에 국한되 던 유교적 의례가 혼례에까지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개 17세기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 다. 유교적 의례는 중국 실정에 따른 것으로 생활의례에서 우리 민족의 예식과 규범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실정에 맞는 예서(禮書)로 편찬한 것이 바로『사례편람(四禮便 覽)』과『상례비요(喪禮備要)』등이다. 조선 시대 중반에 의례의 유교화(儒敎化)가 진전되는 과 정에서 그 의례 절차에 관해 이견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사색당파 사이의 이해관계의 상충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 혼속에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식 을 올리고 해묵이를 한 후 신랑 집에 들어가는 절차가 있는데, 이것이『주자가례』의 친영(親 迎 : 남자가 여자 측에 가서 신부를 데려다가 예식)을 올리는 절차와 다르기 때문에 수용하기 가 어려웠던 것이다. 유교적인 혼인은 당사자보다 두 집안의 결합에 의의를 크게 두어 가문을 중요시했다. 또 의례를 중요시하던 조선 사회에서는 혼례가 매우 호사스러운 행사로 행해졌 다. 이러한 혼인의례는 혼란하던 조선말과 개화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일제강 점기와 서구 문화의 전래, 그리스도교의 영향 등으로 전통 혼례에서 벗어나 이른바‘신식’혼 례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전통 혼례복이 아닌 웨딩드레스와 면사포의 등장과 함께 신부 집이나 신랑 집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혼례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회나 개신교회에서 행하는 종교의식 등 사회 환경이 생활 풍속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급변하는 현 대 문화 속에서 혼례 문화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혼인의 어원
혼인의례는 다른 말로 이성지합(二姓之合)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혼인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에는 혼인을 어두울 혼(昏) 자를 사용해 혼례(昏禮)라고 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혼인을 저 녁에 거행했는데 이는 우주와 만물을 상징하는 음양오행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와 여
자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는 일도 양(陽)과 음(陰)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의식 시 간도 양인 낮과 음인 밤이 만나는 시각이어야 하고, 하루에 두 번 있는 음양의 교차 시간 중 날이 저무는 해 질 무렵 저녁 시간을 택한 것은 혼인이 부부가 한몸을 이루는 데 목적이 있으 므로 혼인 예식 후 첫날밤을 치르기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또‘혼(昏)’은 남편(사위 : 壻)을 뜻 하고, ‘인(姻)’은 아내를 이르는 것으로 여인이 남자를 만나 성례(成禮)한다는 뜻이 담겨 있 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표현보다는 남녀 결합을 뜻하는 혼인이 더 적합한 말이다. 또 남자가 아내를 맞는 일을‘장가(丈家)든다’라고 하는데, 이때 장가는 아내의 아버지 집, 다시 말해 처 가를 뜻한다. 이 말은 일찍이 모계성이 강하던 상고시대의 풍습으로 고구려에서는 남자가 장 가를 들려면 여자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혼인의례에 쏟는 정성
전통 사회에서의 혼인은 남녀 간 개인적 결합과 함께 양가(兩家)의 인연이 맺어지고, 또 일 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선택하는 일이므로 한번 정하면 도중에 바꿀 수가 없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행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예이다. 따라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예가 혼인이 다 보니 평생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가 애틋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기울 이게 된다.
전안례는 나무로 조각해 채색한 나무 기러기(木雁)를 드리는 예인데, 이는 혼인 불변의 언 약을 표현하는 예절이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정하면 암수가 떨어지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신 의와 순종, 정절이 깊은 길조(吉兆)이므로 이 상징을 혼수 이불이나 베개에까지 수를 놓아 원 앙금침(鴛鴦衾枕)을 만들어주었다. 옛날에는 혼수 이불을 신부 집에서 직접 만들었는데, 솜을 놓고 이불을 꾸릴 때 집안이나 동네 어른 중 손(孫)이 귀하지 않고 자식들이 반듯하며 다복하 고 부부 해로하는 분을 모셔다가 첫 바느질을 뜨게 했다. 이 또한 딸이 시집가서 잘 살기를 바 라는 마음에서다.
이렇듯 혼인의례에 소용되는 물품과 음식의 대부분은 풍요, 생산, 장수, 좋은 부부 금실(琴 瑟 : 거문고와 비파를 이르는 것으로, 부부 사이의 다정하고 화목한 즐거움 또는 부부 사이의 애정을 뜻함), 복의 기원 등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혼례 떡에 주로 쓰는 차진 찹쌀은 부부의 금실, 붉은팥은 벽사의 의미, 대추와 밤은 자손 번창과 재물의 결실, 음과 양의 조화를 나타낸 다. 봉치 떡의 경우 함을 받는 절차를 마친 후에는 신랑 신부에게 이 떡을 먹이고 또 바깥으로 떡을 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우리 민족은 농경 사회에서 비롯된 공동체 의식이 강했 고,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정이 깊은 민족인데 이 떡만큼은 이웃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신랑 신부에게 들어올 복이 밖으로 새어나가 는 것을 방지했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지만, 혼례의 대사에 그만큼 신중을 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함을 보낼 때 목화 몇 송이와 팥 몇 알을 넣어 보내기도 했는데, 이 역시 풍요와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함을 받아 펼쳐볼 때 오복을 두루 갖춘 사람에게 함을 열게 했는 데, 이 또한 신부에게 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간혹 혼인의례와 관계되는 모든 기복 신앙을 미신적이고 주술적이며 낡은 풍습으로 해석 하는 시각이 있으나, 자식의 풍요로운 삶을 바라는 부모의 정성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좋지 않을까? 다시 말해 자식이 한생을 살면서 앞으로 겪게 될 여러 가지 풍파가 피해가기 를 바라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 결집된 미풍양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 하다.
혼례 때 잔치 음식 마련 풍경
혼인은 남녀의 결합으로 새 가정을 꾸리고 가업 계승과 조상을 숭배하며, 자녀를 낳아 대대 로 집안을 번성하게 하는 데 기본이 되는 의례이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성대한 의식을 치른 다. 혼인은 두 남녀가 사회적으로 공인을 받는 하나의 과정이므로 일정한 의례를 거쳐서 잔치 를 베풀며 행하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통례이다. 혼인은 인생에서 가장 성대한 의례이므 로 큰 잔치를 베푼다. 또 한 집안의 경사이면서 온 동네의 경사였다. 우리의 오래된 전통으로 동네에 대소사가 있을 경우 일손을 모아 너도나도 서로 협력해 일을 처리하곤 했다. 혼인 역 시 동네의 경사로 큰 잔치를 치른다.
혼인날이 정해지면 먼저 접대할 손님 수를 가늠하여 떡에 소용되는 쌀의 수량부터 몇 근 나가는 돼지가 몇 마리 필요한지 등등 잔치에 필요한 기명(器皿)과 식품의 모든 물목을 파악 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이웃의 도움과 품앗이로 진행한다. 잔치 음식 준비에서 돼지를 잡아 삶 고 써는 일은 남성이 하고, 국수를 삶고 전을 부치는 등의 음식 만들기는 여성이 하는 등 남녀 의 공동 협력과 역할 분담 속에 차질 없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일을 도맡아 하는 이웃들을 잘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경상도의 한 풍습으로는 잔치 도우미로 온 이들을 배려해 콩나물 잡 채나 무전, 배추전 등을 넉넉히 만들어 대접하여 먼저 배를 불리고 흡족하게 한 뒤, 본격적인 잔치 음식을 장만했다. 또 돼지고기를 삶은 솥에 선지와 우거지를 넣고 해장국을 만들어 한잔 술을 곁들여 잔치 일을 하는 이들을 먼저 먹이는 국밥의 풍습도 있었다. 이 풍성한 음식 대접 에는 곧 장만하게 되는 혼인 음식 절약의 의미도 숨어 있다. 잔치 음식 도우미에게 대접하는 애벌 음식은 비교적 조리하기 쉽고 많은 양의 조리에 적합하며 에너지원이 되는 음식으로 장 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