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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의 山水畵 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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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 순 임*

1)

Ⅰ. 서언

Ⅱ. 樂山樂水와 山水畵

Ⅲ. 山水自然의 觀照精神 1. 養性之資

2. 窮理盡性 3. 幽情美趣

Ⅳ. 산수화의 미학적 의미

Ⅴ. 제언

Ⅰ. 서언

산수화(山水畵)란 본래 산수자연(山水自然) 그 자체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대하여 보고 느낀 감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화가에 게는 산수에 대한 관조정신과 더불어 표현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게 하고, 감상자에게는 산수자연의 그림을 통해 정신적인 위안과 활력을 돋우어 주는 작용 을 하기에 우리 인간에게 좋은 정서를 함양하게 하는 회화장르이다.

이러한 산수화가 독립된 회화장르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 데, 이때의 회화는 대부분 중국 양식을 모방하여 취하였지만, 조선 초기(약1392~

* 상명대학교 조형예술학부 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1년 가을 정기학술대회(2011년 10월 22일, 홍익대학교 와우 관 세미나실) 지순임 교수 정년퇴임기념 강연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2)

약1550) 산수화부터는 자연을 사랑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밀 접한 관계를 가지고 독자적인 한국 화풍을 성립시키기 시작하였다. 조선 중기(약 1550~약1700)를 거쳐 후기(약1700~약1850)에 이르면 산수화가 한국적 회화정신 을 담아 전통산수화로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특히 진경산수화는 한국적 양식으로 서 창의성 돋보이는 산수화로 손꼽게 되었다.

한국산수화는 시대적으로 변천하는 동안 중국 회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으나, 중국과 구분되는 독자적 특수성을 지닌 뚜렷한 전통을 형성 하였 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수자연이 중국과 다르고 또한 한국인의 미의식이 중국인 과 다른 까닭에 중국산수화를 무조건 따라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 에서 ‘오늘날 우리가 국제 문화의 조류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고 있는 글로 벌한 시대에 살고 있다하여도 우리의 미의식을 살려 독자적 특수성을 지닌 전통 적인 문화 국가로 유지, 발전하려면 기존의 전통을 잘 이어가면서 새로운 외래문 화를 어떻게 선별하여 수용하여야 멋진 전통문화로 발전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이에 진정한 한국전통산수화는 산수자연에 어떠한 미적 관조정신이 작용하 였으며 우리만의 독자적 특수성 있는 산수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미학적 시각에서 밝혀 보려는 것이다.

Ⅱ. 樂山樂水와 山水畵

樂山樂水란 論語의 雍也篇 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사 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사람은 장수한다.”1)는 구절에 기인하여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개념어이다.

산수는 누구나 좋아하는 美的觀照의 대상이다. 특히 君子의 소양을 지닌 德 行을 갖춘 사람일수록 산수자연을 좋아하고 즐긴다. 왜냐하면 산수자연에 내재한 이치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이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인데, 그 기본내용이

1) 論語 雍也 篇 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

(3)

곽희의 임천고치 , <산수훈>에 군자가 산수자연을 좋아하는 까닭과 더불어 산수 의 근본바탕을 보는 방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취지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기본적 인 소양을 키울 수 있는 전원에서 거처하고 싶기 때문이고, 노래하고 자유 로이 즐길 수 있는 곳이 샘과 바위 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원숭이나 두루미 가 울고 날으는 모습을 보며 숨어 사는 즐거움이 고기 잡는 어부나 나무하 며 한가하게 사는 나무꾼과 같기 때문이며, 인간이라면 가까이하고 싶고 언 제나 친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곳인 세속에 얽매인다 는 것은 어느 인간이고 항상 싫어하는 일이다. 구름과 안개 피어오르는 곳 에 사는 신선이나 성인들은 누구나 항상 만나보기를 원하지만 쉽게 볼 수 없다. 훌륭한 임금과 자상한 부모가 사는 태평성세에 오직 자기 한 몸만을 깨끗이 하고자 세상을 등진다면, 태평성일을 당하여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마음이 다 깊은데, 자기 한 몸만을 위하여 세상을 버리고 산다면 인간의 절 조(節操)와 도의(道義)가 어긋나지 않은가? 이러한 때에 어찌 어진 이가 멀 리 물러나 은거하며 세속을 떠나는 행동을 할 것인가? 어찌 기자(箕子), 허 유(許由)처럼 성품을 똑같이 하고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와 더불어 명성을 같이할 것인가? 시경(詩經)에 실린 백구(白駒)의 시2)나 악부(樂府) 의 자지가(紫芝歌)3)를 읊은 일은 모두 부득이 멀리 떠나가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임천을 동경하는 마음이나 안 개와 노을(煙霞)과 벗 삼으려는 생각은 꿈속에서나 있을 뿐이요, 생생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현실에서는 단절되어 있다. 이제 훌륭한 솜씨를 얻 어서 생생하게 산수를 표현하면 집과 뜰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앉아서 산봉 우리와 골짜기를 오르내릴 수 있고, 원숭이와 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마치 귀에 들리는 듯 할 것이며, 산수의 광경이 눈에 흘리듯 황홀하게 보여 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뜻을 기쁘게 하지 않으며 진실로 나의

2) 詩經, 小雅 ,

皎皎白駒 皎皎白駒 … 皎皎白駒 食我場苗 食我場藿 … 在彼空谷 縶之維之 縶之維之 … 生芻一束 以永今朝 以永今夕 … 其人如玉 所謂伊人 所謂伊人 … 母金玉爾音 於焉消遙 於焉嘉客 … 爾有遐心.

3) 樂府, 琴曲歌辭 .

(4)

마음을 사로잡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그림 속의 산수를 귀하 게 여기는 까닭의 참뜻이라 하겠다. 만약 이 같은 것을 주로 하지 아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수화에 임한다면 어찌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할 수 있겠 으며 맑은 바람을 더럽히지 아니 하겠는가?4)

이상은 군자(君子)가 산수를 좋아하고 아끼는 이유와 더불어 산수화를 그리 는 목적을 밝히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그의 자연관을 이해할 수 있다.

산수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인간 심성의 바탕을 기르고, 자연과 벗하여 본래 의 천성을 찾는 즐거움을 맛보며, 소박한 생활 속에 은거하면서 인간 심성을 쾌 적하게 하고, 산수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성정과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인격수 양의 방편으로 본 것이다.

곧,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항상 잠재되어 있 는 것을 전제로 하여, 현자(賢者)들이 밟았던 길인 것을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실 천하기 어렵다는 것을 밝혔다. 더구나 위진(魏晋) 현학(玄學)시대에 현자들의 은 둔이 어지러운 난세의 상황에서 불가피하였던 것이라고 한다면, 태평성세에 와서 는 반드시 그 길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군주에 봉사하며 인륜을 돕는 길도 남아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요산요수(樂山樂水)에 대한 욕구 충족은 사모하 는 산수를 그림 속에 묘사함으로써, 실제의 산수와 방불한 감정을 얻을 수도 있 고, 한가롭게 즐기고 싶은 산수나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산수를 회화로 창조하 였을 때는 더욱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기에 산수화는 동양 인이 지니고 있는 자연관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예술적 표현으로서 창의력의 대표적 구현체(具現體)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산수화는 다른 회화 장르보다 인 간의 사상이나 철학적 생각들을 보다 다양하게 작품에 담아왔을 뿐만 아니라, 인 간의 창의성을 민감하게 반영하면서 동양인의 미의식을 나타내는 데 첨단을 걸어 왔다.5) 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이 모두 산수 자연에 거처하며 살고 있고, 이 산수자연은 자연 만물인 산, 바위, 물, 돌, 나무, 풀, 계곡 등과 같은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커다란 물체이기도 하여, 그 내용 또한 풍부하기 때문 에 이러한 대자연을 예술적소재로 하였던 것이다.

4) 郭熙, 林泉高致 , 山水訓, 藝術叢書 第4版影印本, 藝文印書館.

5) 지순임, 산수화의 이해, 일지사, 1990, p. 26.

M. Sullivan, The Arts of China, University of Califonia, 1979, p. 156.

(5)

동양인들은 자연을 보는 관점이 서양인과는 다르게 산수자연을 우주의 근본 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인체처럼 살아 꿈틀대는 생명체로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산의 바위를 천지(天地) 자연의 뼈로, 물은 핏줄로, 나무와 풀은 머리털로, 구름과 안개는 입김으로 비유해서 생각했다. 인간이 생동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인간적 가치를 가지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듯이, 산수화도 화가가 실 제 산수자연을 순수하게 보고 깨달은 마음을 자신의 상상적 세계와 함께 산수자 연에 깃들어 있는 정신과 생명의 가치를 제대로 표현했을 때에 비로소 의미 있는 회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산수화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역사적 소산물로 써 사상, 문화, 가치관, 생활 습관 그리고 자연 환경이 인간의 머릿속에서 사유하 면서 응고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산수화 관념은 동양인의 산수자연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동양예술정신의 핵심을 이룬다.

산수화는 비록 그림 속에서는 산수 형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정신적 차원에서 매개체 내지 통로로서 존재하기에, 인간에게는 산수화라 는 예술미와 함께 산수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감상하며 즐길 수 있게 해준 다.6)

산수화가 이렇게 의미를 갖게 된 사상적배경은 동양인이 자연을 ‘도법자연 (道法自然)’이라 하여 모든 생성 변화의 소유 법칙이 되는 자연을 최고 개념인 도 (道)로 보고 있으며,7) 자연 전체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다. 그리하여 동양인들은 인간과 우주의 근원은 바로 도(道)라고 생각했고, 이 도 (道)는 천지자연 조화(造化)의 이법(理法)이요, 이 세계를 일관하는 질서(秩序)라 고 보았다.8)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를 막론하고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서는 안심 (安心)하고 살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유가는 도(道)를 인륜 도덕 실천의 근본으 로 보았고, 도가는 도(道)를 자연 질서 자체로 보면서 인간 정신의 근원을 파악하 였다.

동양철학의 특성은 인문주의(人文主義)이다. 동양 인문주의는 인간이 자연과 합일合一되어 서로 융화하는 것이고, 인간의 생명은 우주적 생명과 서로 관통되 6) 笠原仲二, 中國人の自然觀と美意識, 創文社, 昭和 57年, p. 27; 賀天健, 中國山水畵 美學 問題, 法仁文化社, 1988, p. 285; George Rowley, Principles of Chinese Painting, Princenton University Press, 1974, pp. 31-32.

7) Chang Chung Yuan, Creativity and Taoism, The Julian Press Inc., 1963, p. 109.

8) 지순임, 산수화의 이해, 일지사, 1990,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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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는 까닭에 자연과 인간 본성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고 보았다.9) 훌륭 한 문화 전개로서의 역사는 인간을 위대하게 기술하고, 자연을 아름답게 서술한 다. 자연, 인간 그리고 역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운행된다고 보는 것이 동양 의 인문주의적 성격이다.10) 여기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곧 문화임을 알 수 있다.

문화는 자연과 인간의 미덕(美德)이 작용하여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창조 의 결과이다. 이 자연과 인간의 미덕(美德) 관계는 함께 참여하여 창조하는 도 (道)라고 할 수 있다.11) 대자연(大自然)이라고 하는 산수는 개별적인 자연이 모여 서 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개별적인 자연의 독립적인 존재 가치를 잊어버리고, 대자연이라는 새로운 큰 아름다움을 형성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술은 인간 의 문화 창조이다. 그리고 예술의 사명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미완성을 이상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예술의 의미가 있는 것 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이상적인 인격 형성과 더불어 인간에게 인간다운 정서를 지니게 한다. 동양에서 산수는 어진 자(仁者), 지혜로운 자(智者)의 덕을 가장 잘 상징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산수화에 표현된 산수자연 하나만 보더라도 화가들의 표현적 성격이 은연중 깊고 그윽하게 드러나서 재료적 측면에서부터 대부분 깊고 그윽한 맛을 주는 수 묵水墨을 사용했고, 표현적 측면에서도 산수자연의 본래적인 성격과 화가자신의 성정을 잃지 않으면서 특수함 속에서 보편을 추구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동양화가들은 자유와 초일(超逸)에 대한 도가적인 성향이 강했음에도 불구 하고 서양화가들과는 달리 화가의 중요한 요건 하나로 문인적(文人的)인 지적 측 면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학자(學者)와 화가(畵家)가 한 사람인 경 우가 많았다. 동양화는 인문주의적 기질과 동양 회화의 선비다운 성격이 조화를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양면적 위치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학문에 손을 댔던 공자조차도 선비의 관심은 광범위하고 인문주의적 이어야 함을 요구했었다. 그러기에 동양의 화가들은 견문보다도 인격 수양을 비 교적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12) 그리고 그들은 인간들의 경험을 이성 위에다 놓 9) T. H. Fang, The Chinese View of Life, The Union Press Hong Kong, 1957, pp. 20-21;

方東美, 中國人生哲學, 黎明文化事業公社, 1985, p. 95.

10) 何懷碩, 中國之自然觀與山水傳統, 大陸雜誌社, 第31卷 第1期, p. 6.

11) ibid, 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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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동양화가들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 려 “나는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창조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사유 과정에서 자연은 언제나 인간과 예술의 어머니였다. 자연 환경에 따라 사람 도 달라지고, 사람이 다르면 그 미의식도 달라진다. 미의식이란 심리학적 입장에 서 보면 미적 태도 또는 의식 과정을 말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미적 가치 와 관련된 직접적 체험을 의미한다.13)

동양회화에 있어서 산수자연은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서 바라보며 완상(玩 賞)하거나, 지나가거나, 거주하고 싶은 정서를 일으키는 큰 자연물이다. 사람도 자 연물의 하나이고 산도 자연물의 하나라는 총체성 속에서 볼 때, 오히려 사람은 자연적으로 태어나 스스로 성장하면서 변화하여 자생자화(自生自化)하는 무위(無 爲)로운 존재로서 산이나 물보다 오히려 열악한 자연물이 된다. 이러한 열악한 조 건의 자연물인 인간이 보다 우월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산수자연을 아무리 조 형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산수자연을 자의로 훼손하거나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이 나오게 된다. 인간이 자연을 위대한 모성과도 같은 존재로 생 각하고 있고, 또한 자연에서 태어나서 결국 그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사고 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수자연에 내재한 원리에 인간을 접목시키고 일체화시키는 동양적 사고는 자연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14)

화가는 산수화를 그릴 때에 산수자연의 실재를 예술작품 속에서 변화시켜, 미적 향수의 방법인 미적 관조의 체험을 통해 의(意)를 널리 펼치고 진일보하여 창조적 만족까지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15) 또한 자연을 잘 파악하여 자연에 새 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동시에 자기의 생명도 확대하며, 파악된 자연을 취사선택 한 자연과 예술가의 주관적 생각이 서로 융합하여 승화까지 얻어지는 과정을 거 쳐서, 화면의 공간구성에 따른 구도 등 빼놓을 수 없는 회화적 요인을 연구하여 예술적인 산수화로 표현하게 된다. 이렇게 해야만 산수화의 예술미가 자연미와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을 초월하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16) 이렇게 형성된 산수화

12) George Rowley, Principles of Chinese Painting, Princenton University Press, 1974, p.

15.

13) 竹內敏雄, 美學事典, 弘文堂, 昭和 52年, p. 156.

14) 김병종, 중국회화의 조형의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9, p. 16.

15) 화가의 의(意)를 펼치는 세계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펼친 세계와 같은 맥락이다.

16) 지순임, op. cit., p. 152.

(8)

는 화가가 자연과 인생에 대해 최고의 이상을 갖고 청아(淸雅)하면서도 초탈(超 脫)한 경계로 들어가 산수자연이 지닌 정신 풍취(風趣)가 순수하게 물상(物象) 이 상으로 초월함을 표현한 것이 되고, 이렇게 표현된 산수화의 아름다움은 서양의 풍경화와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다른 정취(情趣)를 지니게 된다.17)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작가가 산수자연에 내재된 정신 풍취를 자연 물 상 이상으로 초월하여 표현하려면 산수자연의 구조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데, 그렇게 되려면 해부학적 구조와 색채과학을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해부학적 구조는 우선 각종 생물을 인간과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지름길인데, 옛 사람들은 이미 산수자연을 인간의 몸에 비유하여 산의 돌과 바위는 인간의 뼈로, 산의 물은 혈맥으로 비유하고, 풀과 나무는 머리카락으로 삼고, 안개와 구름은 인 간의 정신과 안색으로 비유했으며 산 속의 흙은 인간의 살에 비유하여 산수자연 을 파악했다.18) 이렇게 파악된 자연을 실제로 화면에 옮길 때 동양의 화가들은 산의 주름 같은 굴곡을 표현할 수 있는 기법으로 준법(皴法)을 화가 나름대로 만 들어 그 형상을 표현했다.

동양의 산수화는 색채표현에 있어서도 서양화에서 보는 것 같이 다양한 색 을 사용하지 않고, 통상적으로 일곱 가지 색(흑묵(黑墨), 혁석(赫石), 화청(花靑), 등황(藤黃), 주표(朱膘), 석청(石靑), 백색(白色))을 사용하였다. 게다가 대개는 일 곱 색 모두를 사용하지 않고 극히 일부만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이기도 하다.19) 자연계의 형상은 기이하고 다양하지만 산수화는 검은 묵색(墨色)을 기조로 하여 단순하게 표현하여도 계절, 시기, 기후 등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 면 산수화에서 사용하는 묵색(墨色)은 우주 간의 모든 사물을 표현할 때 농담만 으로도 오색(五色)의 효과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수묵(水墨)자체의 후중(厚重)한 현색(玄色) 느낌과 더불어 여백(餘白)의 광채(光彩)가 그 순결한 맛을 드러내는 독특한 효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정신이 함유된 필정묵취(筆情墨 趣)가 더해지게 되면 모름지기 두루 생명을 갖추게 되어 예술적 아름다움의 생명 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작품화된 산수화는 화가의 단순한 붓끝의 움직임인 솜

17) 지순임, 산수화의 이해, 일지사, 1990, p. 145.

18) 郭熙, 林泉高致, 山水訓 , “山以水爲血脈 以草木爲毛髮 以煙雲爲神彩”.

19) 伍蠡甫編, 山水與美學, 丹靑藝術叢書 圖書有限公同, 中華民國 76年, p. 195.

(9)

씨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과 깊은 관계를 가지기에 결국 산수화는 화가의 진실한 인격 표현이 된다.20) 여기에서 화가 자신의 진실한 인격 표현이란 화가가 마음껏 산수자연을 즐기며 본 자연 속에서 이치를 파악하고, 정신적으로 소요(逍遙)를 가능하게 한 자연을 통해 형성된 정신적 힘으로 예술의 숨은 모습 을 발견하고, 화가자신의 잠재력까지 동원해서 창작을 실천하는 것이다.21) 그리하 여 화가가 진실한 인격을 드러낸 산수화는 감상자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활력을 돋우어 주는 역할을 한다.22) 결국 산수화는 한 위대한 예술가의 인격적인 정신과 산수자연을 통해 관조된 정신이 조화를 이룬 예술 세계이고, 또한 화가의 인격 수양을 통한 표현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회화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산수화는 청동기시대부터 자연 현상의 일부를 청동기에 선각 화(線刻畵)로 묘사한 흔적이 있었고, 고구려 고분벽화인 <수렵도> 배경으로 산수 형상을 묘사했었지만, 산수화가 독립된 회화로서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3~1146)때의 화원 이녕李寧(12세기)이 <예성강도(禮成江圖)>

와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그렸던 때라 볼 수 있다.23) 그리하여 11세기 중엽에는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실경산수화가 그려졌고 한편으로는 중국 에서 모형화되고 규범화되면서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던 정형산수화(定型山水畵)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고려의 ‘착색산수도’들이 이미 중국으 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찬(撰)한 고려사(高麗史) 이녕(李寧) 조(條)에 있는데, 고려 중기에 문종(文宗, 1040~1083) 은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는 왕이었기에 중국 문물을 많이 받아 들였다. 그리고 재위 28년에는 중국에 가는 사신들로 하여금 산수화를 구입해오게 한 기록이 있 음으로 보아 고려의 산수화는 중국 회화작품들 중에서 풍격을 갖춘 수준의 작품 들을 모방한 것이라 생각된다.24)

20) 福永光司, 藝術論集, 朝日新聞社, 昭和 52年, p. 313.

21) 鄭昶, 中國畵學全史, 中華書局, 1975, p. 325; 徐復觀, 中國藝術情神, 學生書局, 中華民國 70年, p. 334.

22) M. Sullivan, The Arts of China, University of Califonia, 1979, p. 156; 지순임, op. cit., p.

139.

23) 安輝濬, 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p. 114.

24) 鄭麟趾等撰, 高麗史, 卷122, 列傳 卷35, 方技篇 李寧條.

(10)

그림 1. 이제현, <기마도강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채색, 38.8x4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화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문인화가였던 이제현(李齊賢, 128 7~1367)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 圖)>와 공민왕(恭愍王, 1330~

1374)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수렵 도(狩獵圖)>의 잔편(殘片)이 있다.

이제현의 그림 1. <기마도강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으로 사람들이 강 언덕에서 말을 타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인데, 북송의 평원 산수화 형식으로 겨울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험한 절벽에 매달린 남송(南 宋) 원체화풍(院体畵風)의 소나무와 그 밑에는 강을 건너려는 기마 인물 세 명이 호복을 입고 있다. 전반적으로 구도는 매우 세련되게 조화된 느낌을 주나, 비탈진 언덕표현이 부족한 처리 방법으로 애매하게 보이며, 또한 필치가 어설픈 데가 있 어 아마츄어적인 솜씨를 엿보게 한다. 이 그림의 분위기에는 한국적인 정취가 엿 보이기는 하지만 구도나 화법은 중국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수렵도>는 세 조각의 그림으로 분리되어 전 해지고 있어 구도나 기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25)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중국 의 형호(荊浩), 동원(菫源), 이성(李成), 곽희(郭熙), 미불(米芾) 등이 꾸준히 활동 하여 중국 산수화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들 작품 양식들을 전적 으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후, 실경산수화가 초기의 실용적 기능에서 점차 감상적인 와유물(臥遊物) 로 이행되면서 우리 산천의 빼어난 실물 경관의 산수를 그리면서 산수자연의 참 된 본체인 진경(眞境)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정형산수화는 고전화 된 가상경의 틀을 통해 주로 자연의 본질미(本質美)를 추구했었다.26) 이러한 산수화 에 대한 인식적 흐름은 당시의 유가적 이념과 한문학적 교양을 토대로 문인사대 부들의 친자연(親自然)․귀자연적(歸自然的) 의식세계와 밀착되어 본격적인 발전 25) 안휘준, op. cit., p. 123.

26) 洪善杓, 朝鮮時代繪畵史論, 文藝出版社, 1999, p.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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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게 된 것이다. 즉, 문인사대부들은 산수를 합자연(合自然)의 이상적인 삶을 자각하고 확충할 수 있는 이념적 심미 대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산수자연을 그린 산수화를 누워서 즐길 수 있는 와유지자(臥遊之資)로 삼아 적극적으로 선용 하였다. 그리하여 문인사대부들이 역사와 문화를 이끌며 조선 왕조 개창의 주역 으로 나섰던 14․15세기에 이르러서는 산수화가 우리 회화사를 주도하며, 성행하 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문인 사대부들은 중국 문화를 보편문화로 받아들였 기 때문에 우리의 자연관과 함께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화를 오묘한 자연미의 고 전적 이상경으로 애호했었다.

조선 초기(약1392~약1550)에는 성리학이 발흥했던 강남 지역의 소상팔경과 옛 성현들이 거닐며 신적 경지에서 道를 즐기는 창신락도(暢神樂道)했던 명경들, 그리고 현묘한 자연 현상 속에서 무궁한 이치를 지닌 경관이 그려졌었다. 이러한 정형산수화는 북송대의 이곽파(李郭派) 양식에서 점차 남송대의 마하파(馬夏派) 양식이 가미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15세기에 이르러 안견(安堅)에 의해 조 선화풍으로 종합되었다.27) 중국에서는 이 시기에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같이 현 묘한 자연 현상과 무궁한 이치를 구유한 경관을 팔경八景이라 이름 지어 그린 산 수화가 그려졌었다.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중국의 상강(湘江) 중하류에 있는 여 덟 곳의 시적(詩的)인 풍경의 총칭으로서 송대로부터 이름 날렸던 아름다운 곳이 다. 남송의 화가 송적(宋迪)이 이곳을 경유하면서 <소상팔경도>을 그렸는데, 이 시기의 화가이면서 학자였던 미불(米芾)이 그림마다 일일이 시를 첨부하여 찬(讚) 하였다고 한다.28) 아름다운 경치에 비, 노을, 연기, 종, 바람, 연꽃, 눈, 달 등을 경 물로 하여 정경(情景)을 상생(相生) 시키는 시적(詩的) 이미지와 그림이 조화를 이루도록 한 소상팔경도는 당시 각기 아름다운 장소마다 다른 팔경을 꼽는 유행 을 이루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안견의 전칭 작품인 사계절의 변화를 초봄 부터 늦겨울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가 그 려졌던 것도 이러한 유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 산수화부터는 자연을 사랑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호연지 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크게 성장하기 시작하여 우리 한국 고유의 산수화가

27) ibid., p. 453.

28) 소상팔경은 소상야우(瀟湘夜雨), 동정추월(洞庭秋月), 원포귀범(遠浦歸帆) 평사낙안(平沙落 雁), 연사모종(煙寺暮鐘), 어촌석조(漁村夕照), 산시청람(山市晴嵐), 강천모설(江天暮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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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지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약1550~약1700)를 거쳐 후기(약1700~약1850)에 이르면 이 회화작품들은 시대정신에 따른 진경산수화로 발전하는 기틀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기틀을 통해 창의성이 돋보이는 진경산수화를 탄생시킨 화가가 바로 정선(鄭敾, 1676~1759)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한국고유의 자연산수와 여기에서 유발되는 미적 정서를 드러나게 하여 산수화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게 하 였다. 이러한 산수화의 표현은 자연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한국 미술이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향권 내에서 주요한 미술 양식을 수용해 왔으면서도 전적으 로 중국화하지 않았던 것은 높은 문화적 독자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중국 의 자연 환경과 한국의 자연 환경이 서로 다르다는 점도 원인이 된다.29) 중국의 미술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다른 민족들의 경우처럼 전적으로 받아들여 중국화하 지 않고, 토착적 미감 속에서 한국적인 풍토에 조화되도록 수용한 점은 중국과는 다른 자연 환경 조건을 지니고 있는 이유와 함께 한국인이 중국과 다른 우리의 산수자연과 동화(同化)하려는 물아일체적(物我一體的) 자연관을 지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산수화는 우리의 자연특성을 잘 파악하여 미감적으로 표현한 회화 장르 이다. “우리 한국은 ‘산고수려(山高水麗)’하여 고려(高麗)라 일컬어져 왔고, 아침이 맑은 나라이어서 조선(朝鮮)이라 불리었다. 한국의 자연은 요란스럽게 우뚝 선 고 령이 있어 위압하거나 도도히 흐르는 대하가 있어 웅장한 느낌으로 사로잡지 않 는다. 바다는 모두 내해(內海)로서 평화로운 기분을 자아내니, 한국인은 남달리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왔다.”30) 맥쿤(E. McCune) 여사가 그의 한국미 술(The Arts of Korea: Illustrated history)에서 지적한 한국미의 특징도 같은 맥 락인데, 그녀는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보수성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한국인이 일을 할 때는 모두 집 밖에서 자연을 벗 삼아 행하는 모습들이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돋보였던 것이 다. 농민들은 ‘마당’에서 모든 일을 행하고, 귀족들은 ‘정자’에서 행하는 것이 그 보편적인 모습이었고, 음악과 무용이 다 집 밖에서 행해지는데, 그것은 아시아의 다른 민족보다 더욱 특징적인 것이라고 본 것이다.”31)

29) 全海宗, 歷史上의 韓國人의 對外觀 , 韓國과 中國, 知識産業社, 1979, pp. 38-41.

30) 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03, p. 206.

31) Evelyn B. McCune, The Arts of Korea: Illustrated History, Aaia Humanities Press, Berkeley, 1982, pp.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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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의 산은 대체로 노년기의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토파(土波)로 되 어 있어 중국의 화북 지방에 있는 산처럼 웅장한 기암괴석과 바라보는 사람을 혼 절시킬 만한 극적 장면의 연속성은 보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나라 호남 지방의 산세(山勢)나 기후, 풍광조건(風光條件)과 조선남종화(朝鮮南宗畵)가 조화를 이루게 되어 근대에 이르러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조야(粗野)한 양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자연 환경과 관련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 여 한국미술이 단아함과 비정제성(非整齊性)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도 한국 의 자연 조건으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32)

즉, 한국인은 중국 문화권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고는 있었지만, 우리는 한국의 산수자연 속에서 살고 있고, 화가들은 이 산수자연을 토대로 한국적 자연 풍토에 맞는 산수화를 그렸기 때문에, 우리만의 독자적 특수성이 드러나는 산수 화를 그려 전통산수화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우리 문화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사상은 뿌리이고 산수화 작품은 꽃 에 해당된다고 보아야하는데,33) 이 산수화의 뿌리에 해당되는 사상은 그 당시의 시대정신과 산수자연을 관조하며 사유하는 物我一體的인 자연관이 핵심을 이룬 다.

Ⅲ. 山水自然의 觀照精神

1. 養性之資

양성지자(養性之資) 는 자기의 天性을 길러 잘 자라게 돕는다는 뜻으로 산 수자연에 내재된 이치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자연관조적 태도를 말한다.

산수자연을 표현하는 산수화가 동양회화의 핵심적 장르가 된 것은 동양예술이 정 신과 물질의 두 세계 속에서 특별히 정신세계의 수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상한 예술품은 정신의 정중한 표현, 물질의 타당한 운용이 성취될 때에 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이 고상한 작품을 제작하는 화가는 마땅히 32) 김병종, 중국회화의 조형의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9, p. 9.

33) 崔完秀, 朝鮮王朝 書畵史 槪說 , 澗松文化 46(1994), 韓國民族美術硏究所,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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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수양이 선행되어야 좋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34)

산수자연을 인격수양의 도구로 보았던 곽희는 <산수훈>에서 작품을 제작할 때에 작가는 자연과 인생에 대해 최고의 이상을 갖고 청아(淸雅)하면서도 초탈(超 脫)한 경계로 들어가 자연이 지닌 정신 풍취(風趣)가 순수하게 물상(物象)이상으 로 초월하여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곽희는 회화 창작시의 정신적 측 면을 다음과 같은 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붓을 쉽게 놀려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 그 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장자가 말하기를

“화가가 옷을 벗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림을 그리니 이것은 진실로 화가의 법을 터득한 것이다.”라 하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인위적인 허울을 벗고 본연의 자세로 마음속을 너그럽고 유쾌하게 그리고 의사가 사리에 맞 도록 수양해야 한다. 그러면 소위 昜(평탄하며), 直(바르고), 子(사랑스럽고), 諒(신실해진다)의 마음이 생긴다.

이와 같이 여유 있고 침착한 마음이 생기면 곧 사람이 웃고 우는 모습이 마음 안에서 움직이고 마음 밖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물의 뾰족함, 기 울어짐, 옆으로 누움의 모양들도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터득되어져서 저절로 표상이 떠올라 그림으로 나타난다.35)

이 글 중에서 “그림 그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라는 것 은 회화예술이 단순한 붓끝의 움직임인 솜씨로써만 하는 일이 아니라, 화가의 마 음과 깊게 관계를 가진 화가 자신의 진실 된 인격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손끝 솜씨로서의 기술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쉬운 활동이 아니라, 화가의 예술적 혼인 예술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곽희도 옛 사람들과 같은 견해라 하지만 그림을 <마음의 그림(心畫)>36) 로 보고 마음의 순수함(素直)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화가의 눈을

34) 譚旦冏編/金基珠譯, 中國藝術史, 悅話堂 1985, p. 44.

35) 郭熙, 林泉高致, 畫意.

世人只知吾落筆作畫, 都不知畫非易事. 莊子說畫史解衣?礴, 此眞得畫家之法. 人須養得 胸中 寬快意思悅通, 如所謂易直子諒, 油然之心生, 則人之笑啼情狀, 物之尖斜偃側, 自然布列於心 中, 不覺見之於筆下 .

36) 福永光司, 藝術論集, 朝日新聞社, 1977. p. 313, 孫過庭, 書譜, p.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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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강희안, <高士觀水圖>,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23.5x1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37)

이러한 정신이 강조된 산수화를 그린 문인화가가 바로 강희안(姜希顔, 141 7~1464)이다.

강희안의 그림 2. <고사관수도(高士 觀水圖)>는 절벽을 배경으로 턱을 고인 채, 바위 위에 엎드려서 물을 바라보고 있 는 고결한 선비(高士)를 그린 그림이다.38) 인물에 역점을 두고 산수는 배경으로 간략 하게 처리하였으며, 필묵법(筆墨法)이나 준 법(皴法) 등에서는 절파(浙派)의 소경산수 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의 중심부에서 화의(畵 意)에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고사(高士)의 초 탈한 자태는 혼탁한 속세를 피해 자연 속 에서 마음을 닦고 심성을 수양하고자 했던 당시 선비들의 고아(高雅)한 풍모를 보는 듯하다. 이는 곧 속진(俗塵)에 찌든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저 한가로운 강호(江湖)

에 나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싶거나, 공사(公事)에 얽매인 관계로 정신만이라 도 명리(名利)에 얽힌 세상사를 떠나 자연 속에서 거닐며 그 본성을 회복하고 싶 어 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39) <고사관수도>는 이러한 사대부 작품 의 예이다. <고사관수도>의 구도는 바위 절벽과 화중인물(畵中人物), 암반(岩盤), 그리고 수면(水面) 등이 대각선상에 놓여 있어 기본적으로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 畵風)의 변각구도(邊角構圖)를 취했으나,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은 제한된 작은 공간임에도 대단히 여유로운 공간으로 느껴지게 한다. 그것은 생명감 느껴지는 바위를 닮은 선비와 화면의 공간이 일체감을 느끼게 하여 바위와 선비가 함께 살 아 있음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먹 선으로 그은 나무 덩굴 가운데 옆에서 짙

37) 福永光司, 藝術論集, 朝日新聞社, 1977. p. 313.

38) 안휘준, 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p. 130.

39) 洪善杓, 朝鮮時代繪畵史論, 文藝出版社, 1999, p.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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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툭 쳐 올린 획이나 끝부분에서 허공을 슬쩍 그어댄 획을 보면 살랑살랑 바람 이 분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이 바람은 잔잔하던 물 위에도 작용하여 결 이 고운 파문을 일게 한다.40) 결국 <고사관수도>에 보이는 선비가 바라보고 있 는 물, 이것은 옛 부터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색의 대상으로 삼았던 물이다. 물은 옛 부터 만물의 근원으로 모든 자연생명의 동적(動的)인 것을 상징하였고,41) 최고 의 선(善)42)으로 생각하였던 자연물이다. <고사관수도>에 그려진 선비는 인적이 없는 고요한 산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물을 자신의 벗으로 삼아 한가로움을 즐 기면서 우주적 차원의 관조 세계에 깊게 빠져있었던 것이다. 절벽의 자연 경물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서 턱을 고이고 있는 고사(高士)의 모습을 사대부들의 이상적 모델로 하여 활달하며 강렬한 필치로 표현함으로써 자연 속의 분위기들과 물아일 체(物我一體)된 마음이 되어 자연과 동화된 상태로 보이며, 그 순진한 자연의 성 정을 익히고자 하는 태도까지 그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강희안은 화격(畵格)이 뛰어난 서예가이면서 학자였고 시인이기도 했던 사대부 화가로 당대 제일로 꼽힌 선비였다. 그는 자연에 동화된 즐거움을 <고사관수도>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그림은 자연의 조화와 짝 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구현하기 위해 천지만물 (天地萬物)의 생성 이치와 특성을 탐구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 (士大夫)들은 그림 자체를 사물의 이치에서 구현하여 하늘이 준 본연의 자연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일을 귀하게 여겼다.43) 그리하여 15세기 중엽 경까지 산수화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터득하여 자연본성에 따르면서 자연과 동화되는 즐 거움의 하나로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사대부 교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의 산수화는 산수자연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자신의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養性之資를 구하려는 관조정신의 구현이었으며, 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라 화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림 속에서 자연과 자기(自 己) 자신을 동일화(同一化)하는 예술 세계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시기의 산수화 작품에서는 선비화가들이 자연과 자기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예술의 지를 보여준 것으로써 조선의 산수화가 대부분 物我一體的인 자연관의 표출이었 음을 발견할 수 있다.

40)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솔출판사, 2002, p. 30.

41) 管子, 水地 , “水者 萬物之本原也 諸生之宗室也”.

42) 老子, 道德經 ,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43) 洪善杓, 朝鮮時代繪畵史論, 文藝出版社, 1999, p.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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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산수화를 그린 화가의 인격수양 과정은 자연을 직접 접하면서 의 (意)를 널리 펼치고 또 자연의 이치를 잘 파악하여 자연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 여야 한다. 동시에 자기의 생명도 확대하며 화가의 주관과 파악된 자연의 객관이 서로 융합하여 승화까지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화가는 작품에 표현된 의경(意境) 과 더불어 자연에 깊게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수양적인 면을 이루게 되는 것이 다.44)

자연의 새 생명은 인간의 미적 관조로 인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세속의 여러 가지에 대해 해탈(解脫)․초월(超越)을 희구하는 정신으로 산수자연에서 인 간의 시각이 정신을 집중하였을 때 얻어지는 것이며, 이 때 비로소 산수의 기묘 함과 영묘함을 통찰할 수 있으므로 산수의 예술성을 발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즉 산수자연을 요산요수하는 마음으로 미적 관조하여 얻어지는 정신적 근거45) 통해 자연에서 실컷 놀고 실컷 보면 가슴 속에 산수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떠올라 서 뚜렷하게 그림으로 그려진다. 이것이 바로 미적 관조의 확대와 심화이고 주객 합일의 物我一體의 상태이다. 서복관(徐福觀)은 산수를 통해 얻어진 정신적 근거 를 예술의 숨은 모습, 잠재력이라고 불렀다. 이때 화가의 마음속에 그려진 산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화가의 수양에 의한 표현적 충동이며 예술의 숨은 모습으 로 내용이 된다.46)

결국 화가의 내적 정신으로서 수양은 산수 대자연의 관조를 통해 그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고, 외적 표현으로서의 수양은 많은 필묵의 연습을 통하여 기법을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작품은 한 위

44) 林泉高致, 山水訓.

嵩山多好溪, 華山多好峯 … 奇崛神秀, 莫可窮其要妙. 奪其造化, 則莫神干好, 莫精於勤, 莫 大於飽遊飫看, 歷歷羅列於胸中, 而目不見絹素, 手不知筆墨, 磊磊磕磕, 杳杳漠漠, 莫非吾畫.

… 今執筆者所養之不擴充, 所賢之不淳熟, 所經之不衆多, 所求之不精粹, 而得紙拂壁, 水墨遽 下, 不知何以掇景於煙霞之表, 發興於溪山之顚哉 .

45) 徐復觀, 中國藝術精神, 學生書局, 1983. p. 333.

46) 鄭昶, 中國畫學全史, 中華書局 1979, p. 325. ; 徐復觀, 中國藝術精神, 學生書局, 1983, p.

334.

董虞評李咸熙的一段話, 也正說出了上面的意思. 他說 “咸熙蓋稷下諸生. 其於山林泉石, 巖棲 而谷隱, 層巒疊翠, 蓋生而好也. 積好在心, 久則化之. 凝念不釋, 神興物忘(按卽主客合一). 則 磊落(嶔)奇蟠於胸中, 不得遁而藏也. 他日忍見羣山橫於前者, 櫐櫐相負而出矣, 嵐光煙霽, 相興 一一而上下, 漫然放於外而不可收也. (按此數語指醞釀成熟, 乃見語創作而言). 蓋心術之變而有 出, 則托於畫以寄其放, 故雲煙風雨者皆山也, 故能盡其道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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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화가의 예술정신과 표현정신의 조화인 내적인 수양과 외적인 수양이 동시에 길러져 이상적으로 합일되는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양이 善한 인간의 자연관조적 태도이고 또한 자신의 天性을 길러 잘 자라게 돕는 養性之資 인 것이다.

2 窮理盡性

궁리진성(窮理盡性) 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타고난 본성을 다해 천리 (天理)에 이른다는 뜻으로 주역(周易)에서 나온 용어이다. 주역의 체계 안에 서 해석되던 이 말은 송대(宋代) 성리학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학문의 방법론으 로 채택하면서 새롭게 중요한 의의를 부여받게 되었다. 주희는 궁리(窮理)를 진정 한 앎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 했고, 진성(盡性)은 바른 실천을 목표로 하는데, 이 실천에는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궁리의 과정은 산수자연을 형성하 고 있는 모든 사물에 내재된 이치를 바탕으로 자연의 이치를 궁극에까지 이르도 록 밀고 나가 미지(未知)의 원리를 깨우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전통적 자연 관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을 수기치신(修己致身)하는 도구로 요수요산(樂山樂水)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있는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여 터득하는데 목적 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인식의 차원에서는 한걸음 나아간 것이다. 그리하여 ‘즉물 궁리(卽物窮理)’의 성리학적 자연관이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산수경물을 관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화가는 궁물진성(窮物盡性)의 정신을 가지고서 곡진히 하려 하 는 진경산수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화가는 산수의 질(質)을 취하기 위해 산수를 가까이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산수의 세(勢)를 관찰하기 위해 산수를 원거리에서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산수가 지닌 물정(物情)을 곡진히 하고, 동시에 원세(遠勢)를 파 악하여 통일된 산수를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47)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주자 성리학이 조선 성리학으로 기틀을 확립하게 되 고,48) 이 시기부터 예술적 표현 양식들이 우리 고유의 색채를 드러내는 진경문화 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율곡 이이의 유가적인 도덕적 관념이 산수 자연을 통해 47) 葉玉靜, 郭熙林泉高致之硏究 , 中國文化大學校, 1984, p. 155.

48) 崔完秀, 朝鮮王朝 書畵史 槪說 , 澗松文化 46(1994), 韓國民族美術硏究所,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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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치신(修己致身)할 수 있고, 문인사대부들의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실제 산수 자연의 체험으로 충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문인사대부들은 실재의 우리 산수자연을 소재로 하는 眞景詩를 읊게 되었고, 그림은 진경화법을 요구하게 되 었다.49)

진경화법을 처음으로 구사한 정선(鄭敾, 1676~1759)은 자연을 철저하게 인 식하고 자연그대로를 개체적 현상으로 보아 완상하는 태도로 실제 체험하며, 산 수자연에 따라 각각 지니고 있는 성격이 다름을 파악하였고, 그 파악된 자연에서 본질적 특성을 잘 살려 자연의 성정을 진실하게 잘 드러냈다. 정선이 우리 산천 의 실재 경치를 진(眞)의 경지로 표현하기 위해 준법(皴法), 화면 구도, 그리고 음 양 관계 등에서 스스로 얻어낸 창작 방법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정선은 <금강전 도(金剛全圖)>를 비롯한 내금강산의 여러 산과 바위들을 올려다보는 앙시(仰視) 와 수평시각의 눈높이에서 보는 평시(平視) 그리고 여러 시점에서 산수 경물을 파악하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의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중요한 것만을 뽑아서 보는 요람(要覽)의 효과를 높이면서 진경산수화 양식을 확 립시켰다. 그리고 어지러운 나뭇가지 같은 모양의 난시준(亂柴皴) 등으로 지칭되 던 수직 각필(角筆)과 골기(骨氣)로 나타낸 뾰족한 수직선 모양의 수많은 봉우리 의 수직준 표현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 부드러운 토산(土山)의 표현을 어둡고 밝게 대비시켜 우주적 음양원리의 이치에 맞게 조형화한 산수화를 그렸다.50)

정선의 작품으로 1734년에 그린 그림 3. <금강전도>는 대화가(大畵家)다운 풍모를 독보적으로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금강전도>는 한 폭 의 좁은 공간에 금강산 일만 이천봉우리를 압축해 놓은 그림으로 산수 전체의 형 상을 내려다 본 이미지의 부감법(俯瞰法) 그림인데, 화면을 재구성한 기법이 이전 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로 탁월한 회화적 표현을 보여준다. 또한 정선은 다양한 농담을 적절하게 구사한 용묵(用墨)을 사용했고, 원경과 중경에 금강산 자 태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자신 특유의 자연 관조를 통해 금강산에 내재되 어 있는 신운(神韻)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정선은 한국 산수자연의 정기를 여실 히 표현한 작가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49) 智順任, 眞景山水畵와 朝鮮性理學 , 한국학연구 30(2009),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p.

43.

50) 유홍준, 조선시대화론 연구, 학고재, 1998, p. 304.

(20)

그림 3. 정선(1676~1759),

<금강전도>, 조선후기, 1734년 종이에 담채, 130.6×94.1cm,

호암미술관 소장

또한 정선은 그 자신이 이미 남종화법을 소화하고 있었음으로 필묵 담채의 방법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이치를 실제로 구유하며 실물 경관에서 촉발된 흥취와 정취를 세속을 초월하고 티끌을 멀리하는 탈속원진(脫俗遠塵) 의 동국이상경(東國理想景) 또는 선경(仙境)으 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의(意)’를 펼쳤다. 특히 각필(角筆)과 크고 작은 습윤한 횡점 그리고 짙고 힘찬 묵법(墨法)과 유현(幽玄)하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담채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진경 화법을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다.51)

이 무렵에는 사실적인 회화이론들이 강하 게 전개되었는데,52) 이 이론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화보(畵譜)를 보면서 옛사람의 화법을 맹 목적으로 모방하지 말고 직접 산수자연의 대상

을 관찰하여 자신의 흉중구학(胸中丘壑)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라는 내용이다. 이는 정선의 진경산수화작품과 같이 사실성에 근간을 두면서도, 경직된 형사(形似)의 논리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흉중구학의 내면적 진실을 담아내기 위한 변형과 과 장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여 차원 높은 사실 정신을 드러낸 점을 강조한 이론들이 다. 이러한 회화 정신이 산수자연의 형태성은 물론 자연의 이치와 소통되는 진경 산수화에 잘 반영되었기에 회화적 진실성을 강조할 수 있는 窮理盡性의 미적 특 질이 드러났다고 하는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법 완성에 대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대상의 형 태를 닮게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그 사물의 ‘진경’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고 보 고, 초상화에서처럼 실물과 머리털 하나의 오차도 없이 꼭 닮게 정확하게 그릴 것을 강조했다.53) 그러나 이러한 이형사신(以形寫神)의 형사적(形似的) 전신론(傳 51) 洪善杓, 朝鮮時代繪畵史論, 文藝出版社, 1999, p. 305.

52) 유홍준, 조선시대화론 연구, 학고재, 1998, pp. 149-184, 조선 후기 사실적인 회화 이론은 다음과 같다. 이하곤의 寫眞論 - 두타초頭陀草, 조영석의 寫生論 - 관아재고觀我齋稿, 이익의 寫眞論 - 성호사설星湖僿設, 강세황의 寫實畫法論 - 표암유고豹菴遺稿.

53) 姜世晃, 豹菴遺稿 券 4, 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 홍선표, op. cit., pp. 306-307.

(21)

그림 4. 강세황, <백석담>, 송도기행첩, 종이에 담채, 32.8X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神論)은 진정하게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외형만 정확하게 닮게 그리고, 자연에 내재된 신운(神韻)이 드러나지 못하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림은 산 수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크기 때문이다. 또 실재의 풍경을 그리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닮게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실경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실제와 다른 것을 숨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직접 보지 못한 지역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 것은 억측으로 닮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54)

이상과 같이 강세황은 진경(眞景)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뚜렷하게 정착시켰 다.

본인 작품도 송도기행첩에 있는 그림 4. <백석담(白石潭)>을 보면 수묵 위주로 원근에 따라 농담 구별이 분명한 필선, 그 위에 과감 한 생략을 통한 담백한 화면 구성, 산세나 바위 처리에 있어 선염에 의 한 묵색의 변화로 입체감을 주는 등 서양화법을 수용하였음에도 주체성 을 잃지 않는 참신한 작품을 남겼 다. 특히 강세황은 일종의 크로키

같은 작업으로 실물 경관의 시각적 이미지를 잘 짜여진 구도, 문기(文氣) 넘치는 필치, 그리고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강렬한 분위기, 단일 시점에 의한 3차원적 공 간의 구축과 선염(渲染)에 의한 바위의 입체감 표현이 화면의 질서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窮理盡性한 합리적인 남종 문인화를 발전시키는 진경화풍(眞景畵風)을 창 출했다. 그리고 당시의 화가들 작품에 관해 개척자적인 회화 비평을 하였다. 강세 황은 회화 비평에서도 작품상에 드러나는 필치, 화면의 구성, 소재와 표현 기법 등은 물론 문인적 취향의 산수화 정신적 측면인 자연스러움, 고상함, 운치, 특별한 맛 등의 화면 전체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미적 정서를 그 자신의 미적 판단으 54) 유홍준, op. cit, p. 174. 夫畵 莫亂於山水 以其大也 又莫難於寫眞景 以其難似也 又莫難於寫

我國之眞境 以其難掩其矢眞也 又莫難於目所未見之境 以其不可臆度而取似也.

(22)

로 비평하여 기록에 남겼다.55)

이상의 고찰에서 보면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조선성리학적 자연관에 의 해서 발달하게 되었고, 실재 자연산수를 대상으로 사생하는 산수화이면서도 표현 적으로는 두 유형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정선의 작품과 같이 직접 체험한 산수자연의 현장감, 현실감을 중요시하면서도 흉중구학의 내면적 진실을 담아내기 위한 변형과 과장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여 차원 높은 리얼리티를 추구 했던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강세황과 같이 문인화의 법도를 중시하는 가치 기준 에서 화면의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생(寫生)을 하되 남종화법으로 그리고, 산수 자 연물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성과 이치를 파악하여 천일합일(天人合一)하는 경계에 서 자연과 인간이 물아일체(物我一體)되는 표현을 중요한 덕성으로 보는 회화 유 형이다.

이들 진경산수화는 회화소재의 선택에서 이미 실경의 사실적 묘사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당시 화론에서도 사실성이 강도 높게 전개되었지만, 이 작품의 내 용은 단순한 산수자연의 형사적 묘사뿐만 아니라 산수자연에 내재된 본질적 이치 를 중요시하는 窮理盡性의 미적 내용이 전신(傳神) 가치를 지키면서 사실성을 구 현한 이론의 전개이었다.

결국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 산수자연을 직접 체험하고 느낀 산천 형상을 사실성에 근거하면서 산수자연의 이치를 궁구하고 자연의 본질적 진면목을 신운 (神韻)이 느껴지게 그려낸 (窮理盡性)의 진실이 표현된 회화이다.

3. 幽情美趣

유정미취(幽情美趣) 는 그윽한 정서를 느끼는 조용한 기분과 뛰어난 맛이 다. 幽情은 깊은 생각, 조용한 마음의 적막한 감정을 의미하며, 美趣는 좋은 뜻과 아름다운 형세를 의미한다.

우리 인간이 산수자연을 미적인 대상으로 향수하면서 관조(觀照)할 때에 화 가는 관조와 더불어 창조(創造)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같은 자연산 수를 미적 체험으로서 요산요수하며 관조한다 할지라도 일반인과 화가는 차이가 55) 지순임, 강세황 산수화의 예술적 가치 , 미학예술학 연구 7집(1997), 한국미학예술학회,

p. 22; 변영섭, 표암 강세황 연구, 일지사, 1988, p. 168.

수치

그림 1. 이제현, &lt;기마도강도&gt;, 고려 14세기, 비단에 채색, 38.8x4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화로 현재 우리나라에전해지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문인화가였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lt;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gt;와공민왕(恭愍王,1330~1374)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lt;수렵도(狩獵圖)&gt;의 잔편(殘片)이 있다.이제현의 그림 1
그림 2. 강희안, &lt;高士觀水圖&gt;,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23.5x15.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37) 이러한 정신이 강조된 산수화를 그린 문인화가가 바로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다.강희안의 그림 2
그림 3. 정선(1676~1759), &lt;금강전도&gt;, 조선후기, 1734년 종이에 담채, 130.6×94.1cm, 호암미술관 소장또한 정선은 그 자신이 이미 남종화법을소화하고 있었음으로 필묵 담채의 방법을 통해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이치를 실제로 구유하며실물 경관에서 촉발된 흥취와 정취를 세속을초월하고 티끌을 멀리하는 탈속원진(脫俗遠塵)의 동국이상경(東國理想景) 또는 선경(仙境)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의(意)’를 펼쳤다
그림 4. 강세황, &lt;백석담&gt;,  송도기행첩, 종이에 담채, 32.8X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神論)은 진정하게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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