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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이중 구조와 남성 서술자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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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김은석*

목 차 1. 서론

2. 서사의 이중 구조로서 삽입 서사

3. 남성 서술자와 여성의 타자성 - 「감정이 있는 심연」

4. 여성 육체의 기호화 - 「천사」, 「그대로의 잠을」

5. 결론을 대신하여 – 남성 서술자의 의미

<국문초록>

이 논문은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에 실린 한무숙의 단편 소설을 대상으로 소설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서사의 이중 구조와 남성 서술자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무숙의 소설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중심 플롯을 강화하는 삽입 서사를 활용함 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암시하거나 주제를 부각시킨다. 주로 과거의 전설, 미신, 세간의 이야기 등으로 구성된 삽입 서사는 주인공의 욕망의 좌절과 체념을 간접적 으로 지시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사회의 인습과 인간 삶의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소설들에서 활용되는 삽입 서사 는 교훈적이고 암시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소설의 주제, 특히 남성 인물 의 도덕적 각성을 보충하고 강화하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유수암」을 제외한 한무숙의 소설은 일인칭 남성 서술자를 선택함으로써 남성 의 시선에서 재현되는 여성들을 등장시킨다. 사랑 이야기가 전경화된 소설에서 일 인칭 남성 서술자는 여성에 대한 관찰자로서 여성이 놓인 사회적 조건들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남성 서술자는 여성과의 관계의 실 * 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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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를 통해 삶에 대한 체념과 자기 각성을 하는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특징을 지닌 다. 하지만 소설에서 여성의 존재는 격리되거나 사라지게 되며 그 이후 도덕적 윤 리적 각성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남성 인물의 몫이 된다. 한무숙의 소설 에서 여성 인물은 가부장적 규율과 억압 속에서 고통 받는 존재로 여성의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의 불가해한 타자로서 여 성을 그려내는 의미 있는 계기를 만들지만, 여성 인물들은 서사를 주도하는 남성 인물의 주체화 과정에서 주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남성 서술자가 등장하는 한무숙의 단편들이 남성 주체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서사를 갖고 있는 것을 반 증하는 것이다.

주제어 : 삽입 서사, 남성 서술자, 여성의 재현, 가족 경험, 육체의 기호화

1. 서론

한무숙의 소설은 여성들의 삶과 현실의 문제들을 주로 다뤄왔다. 그의 소 설에서 표현된 현실은 전통적인 가치들과 현대 사회의 특징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인물의 삶에서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 통과 현대의 문제는 한무숙의 소설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상 반된 시대 개념으로, 그의 소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랑과 인간의 윤리라 는 주제와도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 한무숙의 소설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가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 주인공들 은 여성의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들과 결부되어 왔다.

한무숙의 소설에 대한 평가는 종종 전통과 현대라는 대립적 가치 위에서 여성 인물들이 보여주는 양가적 특징에 맞춰져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전통적 여인상의 전형에서 벗어나 성적 욕망을 비롯한 여성 의 욕망을 보여주고 현실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무숙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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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전통적 여인상은 절약과 부덕의 미를 부정하지 않고 현대적 삶 속에 서는 여성의 정당한 욕구가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의 계승과 현대 문화의 수용이라는 균형과 조화의 정신으로 평가되었다.1) 그 러는 한편, 전통적인 것을 존중하되 그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나 사랑이 인간 성 회복과 정면배치될 때, 그 전통성 자체를 허위라고 설파하는 면도 동시 에 갖는다.2)

전통과 현대라는 상반된 가치는 그의 소설에서 재현된 여성 인물이 지니 는 긍정적 의미이자 한계점이기도 하다. 한무숙을 규수작가의 한계 내에서 성의 금기에 도전한 여성작가로, 여자에게 상호 적대적인 범주였던 ‘신(新)’

과 ‘구(舊)’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예외적인 작가로 보는 박정애의 평가 역시 이러한 경향을 짚고 있다.3) 여성작가로서 한무숙의 소설이 지닌 양가 성은 그의 소설에서 일관되게 다뤄진 사랑의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송인화 는 한무숙의 작품에 나타난 낭만적 사랑이 가부장적 지배담론을 승인하면 서도 동시에 그것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한무숙의 소설 이 전통적 인습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여성의 몸과 성(性)적 욕망에 정당한 인식을 촉구했지만 그럼에도 여성의 육체와 성을 사회적, 역사적 문 맥에서 접근하지 않고 체념과 체관이라는 내면적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4) 한무숙의 소설의 한계는 여성의 사회역사적 현 실에 대한 전면적인 갈등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정재원은 한무숙 의 소설이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한 여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1) 홍기삼, 「균형과 조화의 원리」, 한무숙재단 편, 한무숙 문학연구, 을유문화사, 1996, 73면.

2) 정영자, 「한무숙론-절대순수의 추구와 한의 세계」, 권영민 엮음, 한국현대작가연구, 문학사상사, 1991, 150면.

3) 박정애, ‘女流’의 기원과 정체성-50·60년대 여성문학 연구, 학술정보원, 2006, 110면.

4) 송인화, 「1960년대 여성소설과 ‘낭만적 사랑’의 의미」, 여성문학연구 11호, 2003, 248 면. ; 송인화, 「성애(性愛)의 승인과 체관의 시선」, 구명숙 외, 한무숙 문학의 지평(地 平), 예림기획, 2008, 206~2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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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되지 못하는 욕망을 어떻게 승화해나갈 것인가라는 개인적 문제에 초 점을 맞췄다고 보고 있다. 정재원은 고립된 내부 세계이긴 하지만 자신의 말을 찾지 못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개인적인 장소는 사회적 투 쟁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5) 개인적 차원으로만 머무 르지 않는 소설의 윤리에 관해서 권예린은 한무숙 소설에서 감정의 윤리가 수치심, 동정, 사랑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주체와 타자에 대해 균등하게 집 중하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됨을 설명한다.6)한무숙 소설에 관한 기존의 연 구들이 보여주고 있듯, 한무숙은 여성 인물들의 삶의 조건과 사랑의 문제를 일관되게 다뤄오면서 여성 의식을 보여준 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행 연구에서 한무숙의 소설이 전통의 굴레에 갇혀 있던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고 승인했다는 점은 거듭 지적되어 왔다. 다양한 계층과 지위 를 지닌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이 한국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 서 여성의 경험을 다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한무숙의 소설이 형식적 측면에서 삽입 서사를 반복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성 서술자에 의해 주도된 서사의 패턴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본 논문에서 다룰 한 무숙의 단편소설은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초반에 걸쳐 발표된 것으로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1967년 한국여류문학인회가 발간한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은 근대 여성문 학의 기원을 설정하려는 여성작가들의 독자적인 정전 만들기의 결과물이 었다.7) 한무숙은 1942년 뺷신시대(新時代)뺸를 통해 등단했고 해방 후에는 1948년 뺷국제신문뺸 현상 모집에 장편 <역사는 흐른다>로 당선되어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에 이르면 강신재, 박경리 등과 함께 활발한 작품 활동을

5) 정재원, 「말과 침묵 사이에서」, 구명숙 외, 위의 책, 154~155면.

6) 권예린, 「한무숙 소설의 윤리성 연구」, 겨레어문학 제52집, 2014, 27면.

7) 김양선,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 장의 형성, 소명출판, 2012, 2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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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준 여성작가로 문단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1960년대 여성작가들만의 문학전집은 여성 문학의 위상 변화와 여성 문학인 집단의 성장을 보여주는 출판물로 “작가 자신들이 엄선한 力作들의 總合인 만큼, 다양하고 광활하 고 심각한 작품 세계의 정확한 선택”8)이 반영되었다. 이 전집에는 한무숙 의 작품들 가운데 1957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한 「감정이 있는 심연」(1957) 을 포함하여 「돌」(1955), 「천사」(1956), 「그대로의 잠을」(1958), 「유수암」

(1963)이 실려 있다.9) 이 소설들은 작가 스스로 선택한 대표작들이며,10)

‘여류문학전집’의 수록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학 세계를 집약해서 보여주 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기적으로 한국전쟁과 4·19 혁명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들은 현 실과 관련된 여성의 삶을 보여주면서 사랑 이야기를 전경화한다는 공통점 을 지니고 있다. 결혼과 가족이 여성의 정체성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도 여성 인물의 특징 중 하나이다. 가장 두드러진 서술상의 특징은 다양하게 인용되는 삽입 서사인데, 한무숙의 소설에서 삽입 서사는 삶에서 요구되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환기시키며 소설의 결말과 주제를 암시하고 보충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일인칭 남성 서술자는 여성 인물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설명하며, 남성 인물이 겪는 사랑의 실패는 삶의 문제들

8) 박화성, 「서문」, 한국여류문학인회, 한국여류문학전집 1, 영문출판사, 1967, 2면.

9) 본 논문에서 다룰 한무숙의 단편은 한국여류문학전집 2(영문출판사, 1967)에 수록된 것으로 본문의 인용은 면수로 표기한다.

10) 대표작 선정의 기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한무숙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감정이 있는 심연」, 「축제와 운명의 장소」, 「유수암」을 말하면서 그 중에서도 「유수암」에 더 애착이 간다고 말한 바 있다. (한무숙, 「나의 인생, 나의 문학」, 한무숙재단 편, 앞의 책, 358면) 한무숙은 1957년 창작집 감정이 있는 심연을 발표했고, 표제작 「감정이 있는 심연」은 “발표당시 벌써 의식세계를 현실과 결부시켜 파들어간 무게있는 작품으로 호 평이 있었지마는 「천사」도 이에 못지 않은 역작(力作)”으로 평가되었다. (안수길, 「한무 숙 著 감정이 있는 심연」,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 4면) 「그대로의 잠을」의 경우 당시 “苦心작의 자취가 현저하며 또한 今年度에 남을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 철, 「1958年文化界決算 文學(中)」, 동아일보, 1958년 12월 14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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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유수암」을 제외한 작품들은 일인칭 남성 서술자에 의해 서술되며 그들 은 여성 인물에 대한 사랑과 그 좌절을 이야기한다. 여성 인물들은 계층적 으로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이자 그 욕망을 좌절 시킨다는 점에서 양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사랑 이야 기는 여성과 남성의 불완전한 관계가 주를 이루며, 사랑의 실패와 좌절에 따르는 삶의 윤리의 문제가 결말에 제시되는 흐름을 갖고 있다. 뺷한국여류 문학전집뺸이라는 맥락 속에서 삽입 서사와 남성 서술자라는 반복적인 패턴 은 소설의 주제와 관련해 특정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서사적 특성을 규명하고 그와 관련하여 여성의 삶이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그리고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서술자로 설정된다는 것이 어 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볼 것이다.

2. 서사의 이중 구조로서 삽입 서사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에 포함된 한무숙의 소설들은 모두 사랑에 관한 이 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랑이라는 주제를 핵심에 놓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의 현실에 관한 심도 있는 관찰과 진술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일인칭 남성 서술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통해 사랑을 경험하고 실패하며 결국 삶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돌」,

「감정이 있는 심연」, 「천사」에서 남성 주인공의 내면 심리는 사랑으로 고양 되며 이들이 경험하는 사랑은 사회적 인습에 가로막히거나 신분과 계급의 차이에 의해 좌절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사랑의 실패는 남성 인물에게 삶 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돌」에서 주인공은 한국전쟁 중에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잃고 삶의 공백감 과 죄의식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요양차 들어간 옥수암에서 혜정스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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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딸인 영란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영란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 때문에 부잣집의 후취로 들어갔지만 가족이 거의 죽거나 흩어져 혜정스님 에 의지하게 된 상황이었다. 작중 인물들은 외부적 요인으로 가족의 해체를 경험하거나 가족으로 인한 불행을 떠안고 있다. ‘나’는 영란의 가련한 처지 에 마치 배신이나 당한 것처럼 노여움을 느끼고 그녀의 천연한 태도를 안 타까워한다. 옥수암은 ‘나’가 경험하는 여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영란 과 속세의 사연이 있는 혜정스님, 절간의 노파 등은 옥수암을 절이라기보다

“박행의 가인이 인생을 비켜 사는 산장(山莊)”(245)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 가 불화(佛畵)에 그려진 오백나한(五百羅漢)이나 불상을 보며 자비의 보 살 대신 인간의 번뇌와 슬픔을 간직한 여인의 운명을 보는 것은 여성의 삶 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옥수암은 그에게 심신을 치유하는 외딴 절이면서 삶에서 고통 받은 여성 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공간이다. 여성들의 불행과 슬픔은 결혼과 가족의 문제에서 비롯하며, ‘나’는 영란이 “풍유한 외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보다 본질적인 것을 젖혀 버렸”(248)기 때문에 그녀의 희생이나 결혼이 무 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영란의 잘못된 결혼은 그녀의 가난 때문에 발생한 불 행인 것이다. 그는 영란을 사랑하면서, 그녀가 겪는 불행의 관찰자가 된다.

남성 서술자의 관점으로 서술되는 영란의 삶은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부 당한 결혼과 희생을 보다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한다. 여성 현실을 재현하 는 데 있어 남성 서술자를 선택하는 것은 여성 인물의 상황을 관찰자의 시 선으로 조망함으로써 여성이 놓인 사회적 조건들을 환기시킨다는 의미가 있 을 것이다. 「돌」에서 남성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부당하게 이뤄진 결혼이나 가족이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희생을 설명함으로써 전개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한무숙 소설은 남성 인물이 경험하는 사랑과 실패라는 이야기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대부분 이야기의 결 말이나 인물의 성격을 암시하는 삽입 서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유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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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닌다. 마스터 플롯을 강화하는 보충적 이야기로서 삽입 서사(embedded narratives)11)는 「돌」, 「천사」, 「감정이 있는 심연」, 「그대로의 잠을」에 명 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소설 속의 삽입 서사는 과거의 전설(「돌」), 누군가에 게 듣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감정이 있는 심연」, 「천사」), 세간의 미신 (「그대로의 잠을」)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면서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거나 암시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을 작품에 부여하고 있다.

예컨대 「감정이 있는 심연」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연인의 정신병으로 결혼과 미국 유학이 모두 좌절된 후, 어렵게 발급받은 비자가 자신에게 의 미가 없음을 깨닫는 대목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악덕 상인이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동안 모은 돈을 바람에 날려버렸다는 이야기는 출세의 욕망으로 혈안이 되어 얻어낸 비자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 가 바뀌었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천사」에서 주인공은 부잣집 소녀에 대한 사랑을 품고 그 집까지 찾아나선다. 이 소설에는 돌아갈 수 없 는 집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는 행위에 관한 어느 북구(北歐) 작가의 작 품 내용이 삽입 서사로 들어가 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썼던 시고(詩稿)를 바친 소녀를 그리워하며 그 이야기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낙향한 지식인 남성인 그 는 자신의 과거에 고착되어 무지한 아내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고 소녀에 대 한 사랑에 도취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그대로의 잠을」에서는 태어날 때 이상(異狀) 분만으로 피 세례를 받은 사람은 살인을 하게 된다는 세간에 떠도는 미신에 관한 에피 소드가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성공한 의사이지만 자신의 삶이 언 제나 외부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 른 후 자신의 삶이 출생부터 미신의 주술에 걸려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리석고 근거 없는 미신이 삶을 속박하고 주체성을 박탈해 객체로 살게

11) H. 포터 애벗 지음, 우찬제 외 옮김, 서사학 강의, 문학과지성사, 2010, 1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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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던 것이다. 이 미신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성장을 방해하고 자주성 을 빼앗는 사회적 터부와 제약을 의미하고 있다.

특정한 삽입 서사가 나타나지 않는 「유수암」의 경우에도 기생들의 잡가 (雜歌)와 주인공 진경이 읊는 ‘가시리’의 가사가 인용되어 있다. 이 노래들 은 임을 향한 사랑과 고통, 기다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그 자체 로 기생의 애환을 보여주고 진경의 일편단심을 예고한다. 이처럼 한무숙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활용되는 삽입 서사는 인물의 심리나 소설의 결말과 주 제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되고 있다.

이 삽입 서사들은 소설에 포함된 다른 층위의 이야기로 이중의 서사 구 조를 만든다. 각 작품은 사랑 이야기를 핵심으로 하면서도 특정한 주제와 메시지를 함축하는 삽입 서사를 통해 주인공의 심리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삶의 윤리의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아득한 옛날 장자못 자리에 박장자라는 간악한 일족이 번영하여 그 영화가 사위에 떨쳤다. 금력과 권세는 동요가 되어 무심한 초동의 입에까지 오르곤 하 였으나, 박장자 집에서는 좁쌀 한 줌의 적선도 한 일이 없었다. 어느날 지나던 늙은 중이 시주를 청함에, 박장자는 크게 노하여 하인을 불러 손찌검까지 하였 다. (…) 한 여인이 옆에 와서 몹시 죄스러운 듯이 고개를 수그리며 무엇인지 수 건에 싼 것을 내미는 것이었다. 여인은 장자 일족 중, 단 하나의 어진 마음을 가 진 며느리이며, 수건에 싼 것은 자기 몫으로 정하여진 보리밥 덩어리였다.

궁상스럽던 중의 얼굴에 갑자기 위엄이 서렸다. 사흘 후, 한낮 좀 지나 해무리 가 있을 것이니, 그 조짐을 보거든 일순의 여유도 말고 혼자 집을 뛰어 나가, 뒤 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결코 돌아보지 말라는 늙은 중의 말은 그대로 명 령이었다.

그 사흘 동안을 장자집 며느리가 어떻게 지났다는 것은, 전설에는 없다. 다만 그는 대사의 영을 그대로 지켜, 과연 해무리가 시작되자 어쩔 수 없는 힘에 끌리 어 집을 뛰쳐 나갔던 것이다. 허위 단심 느티나무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깨어지는 듯하는 벽력 소리가 뒤에서 일어났다. 찰나 그녀는 대사의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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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잊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기가 버리고 온 집―고래등 같은 와가는 간데 없고, 보지 못하던 못이 음침하게 하늘의 해무 리를 어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자신은 그 순간의 충격으로 돌로 굳어가고 있었다. (242)

「돌」에서 ‘나’는 영란과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면서 옥수암 가는 길에 있는 돌과 못의 전설을 들려준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돌의 전설은 간악한 박장자 일족에 관한 것으로 어진 마음을 가진 며느리가 박대당하는 늙은 중을 도와 집에서 탈출할 기회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런 종류의 전설 가 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로 변한 아내를 기리는 망 부석(望夫石) 이야기일 것이다. 작품에 인용된 돌의 전설은 늙은 중이 집 을 뛰어나가라고 명령하지만, 며느리가 그만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돌이 되 어버렸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이야기가 된다. 며느리의 탈출과 좌절 을 이야기하는 돌의 전설은 권선징악이나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가리키고 있지만, 간악한 일족 가운데 죄 없는 며느리는 불행한 결 혼 생활에 시달렸던 영란과 겹쳐진다. 또한 집을 떠나지 못한 며느리의 이 야기라는 점에서 돌의 전설은 ‘나’와 영란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기가 버리고 온 집’을 뒤돌아보고 돌이 되어버린 며느리의 이야기는 집 떠나는 여자에 대한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다. 돌의 전설에 대해 ‘나’

는 전설 속 며느리가 선(善)이라는 관념 자체였다고 말하지만 영란은 “그 렇게 착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돌이 되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 이었나 보지요”(252)라며 운명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영란이 돌이 된 며느리를 두고 “선도 악과 같이 벌을 받은 것”(252)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 간의 힘으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나’의 사랑 이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나’가 전설 의 돌과 겹쳐지는 영란의 실루엣을 보며 사랑의 실패를 예감하는 것은 이

(11)

삽입 서사가 등장 인물의 태도는 물론 소설의 주제 의식과 연결되는 중요 한 서사적 구성 요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은 불가해(不可解)라는 인간의 중핵(中核)에 부딪쳐 버린 것이라 할지라 도, 나는 사랑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체험했다는 것은 목숨을 체험한 것이고 주체스러운 「나」를 모아, 완전한 「나」를 갖추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무도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 앞에 서 완전히 「나」였었고, 또한 그 「나」는 상기 내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이기에 이제와서 허망한 것을 허망한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고, 선(善)도 역시 악(惡)과 같이 벌(罰)받는 것이라는 역리(逆理)를, 몸부림치는 일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240)

영란과의 사랑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무기력에 빠진 ‘나’에게 완전한 자기 자신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나’는 영란의 처지에 분노하며 그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품었지만, 영란이 운명에 수긍하듯 삶의 역리(逆理)를

‘몸부림치는 일 없이’ 따르는 길을 선택한다. 남성 인물은 자신의 욕망이 실 패로 끝났더라도 운명에 수긍하는 태도를 자기 자신을 갖추는 주체의 경험 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영란은 전설의 돌과 하나가 된 실루엣으로 비춰짐으 로써 전설이라는 상징적 세계에 남는다. 영란의 실루엣은 전설이 지시하는 인간 삶의 교훈이 체현된 것으로 ‘주체스러운’ 완전한 ‘나’를 찾은 남성 인물 과 대조되고 있는 것이다.

「돌」은 ‘여류문학전집’에 수록된 한무숙의 소설의 특징으로서 삽입 서사 와 남성 서술자의 기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사의 이중 구조를 만 드는 삽입 서사는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소설의 주제나 인물의 내면 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소설의 주제를 강화하고 보충한다. 이 때 소설의 이야기를 주도하는 남성 서술자는 「돌」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여성의 현실을 서술하는 전달자이면서 자기 각성을 통한 주체로 설정된다. 남성 서술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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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각성의 장면은 소설의 결말에 놓여 있어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로 연결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남성 서술자는 여성을 통해 사랑과 욕망의 좌절을 경험함으로써 뚜렷한 의식의 변화의 계기를 얻게 되며 이는 여성 인물과 서사적으로 비대칭적 관계를 이룬다.

3. 남성 서술자와 여성의 타자성 - 「감정이 있는 심연」

한무숙 소설의 여성 인물들은 사회적, 계급적으로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다.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감정이 있는 심연」, 「천사」)에서부터 무식한 촌 부(「천사」), 매춘부(「그대로의 잠을」), 기생(「옥수암」)에 이르는 여성 인물 들은 특정한 계층과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여성들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여성들은 결혼과 가족의 불행, 가난의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며 이는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돌」의 영란이 결혼과 가족의 문제로 고통받는 여성이라면 「감정이 있는 심연」의 전아는 여성의 불안한 정체성과 타자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남성 서술자가 그려내는 여성의 타자성은 가족 경험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한국 사회의 가족은 근대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가 병존하며, 이 둘은 때 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조정과 전략을 통해 상호 변형됨으로써 기존의 서구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국 가족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에 잔존 하는 가부장적 전통은 한국 여성들의 특유의 가족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이 다.12) 한무숙의 여성 인물들은 이러한 한국적 맥락의 가족 경험과 관련되 어 있는데, 「돌」의 영란처럼 그것은 순조롭거나 조화롭게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감정이 있는 심연」은 기독교적 억압 속에서 자라난 전아가 죄악망상 증이라는 정신병에 걸리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발표 당시 탁월한 심리소

12) 이재경, 가족의 이름으로-한국 근대가족과 페미니즘, 또하나의 문화, 2003, 1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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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은 여성의 억압된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억압의 기원에 기형적 가족 경험이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소설의 무대는 정신병원이다. 주인공은 병원에 들어가 의사와 면담하 고 병원을 나오기까지의 과정에서 전아와 ‘나’에 관한 일들을 회상한다. 시 골뜨기였던 ‘나’는 성공의 열망으로 공부해서 대지주의 딸인 전아와 연인으 로 발전하게 되고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하지만 비자 발급을 기다리 던 도중 전아가 정신병에 걸려 앞날이 불투명해진 상태이다. 어린 시절 전 아의 집은 팽팽한 창호지, 정연히 놓인 검은 장정의 종교서적들로 꾸려져 부유함과 격식이 갖춰진 상류층으로 가난했던 ‘나’를 매료시켰다. 계급적으 로 우월한 지위에도 전아의 집은 추문이 많았던 집으로 등장한다. 형편이 어려워 전아의 집에 붙어살았던 ‘나’는 그 사실에 쾌감을 느낀다. 그러한

“반감과 증오감은 전아의 집이라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아 의 집이 대표하는 어느 계급에 향했던 것”(262)이었고, 전아와의 미국 유학 은 ‘나’에게 필생의 비원이나 다름 없는 기회였다.

‘나’는 전아의 기이한 성장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녀가 걸린 정신병의 전 말을 보여준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추문으로 손가락질 받았던 전아의 집은 딸이 잘 안 되는 집안으로 여성의 성적 일탈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 버지를 잃은 전아는 기독교 광신도인 큰고모 아래 “사랑이라는 말보다 「죄」

라는 말을 먼저 들”(263)으며 자라났다. 전아의 작은 고모는 부정(不貞)을 저질러 법정에까지 서게 되고 큰고모는 ‘죄의 끝’을 봐야 한다며 어린 전아 를 법정에 데리고 가 실신하게 만든다. 전아의 정신병은 그 트라우마적 기 억으로 인해 생긴 것이며, 그녀를 성에 관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만든다. ‘나’

가 전하는 전아의 가정 환경은 단란한 식탁 앞에서의 감사 기도가 마치 대 죄(待罪)하는 것과 같은 ‘기이한 광경’(261)으로 묘사된다. 큰고모는 기독교 적 심판자로서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으며 전아는 작은 고모처럼 감시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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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의 대상으로 자신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엄격한 기독교적 교리는 가부장제의 외피라 할 수 있으며 아버지를 대신하는 큰고모는 여성 역시 그 규율의 엄격한 수행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적 여성과 가족내 여성의 위계가 다른 여성에 게 억압과 구속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정이 있는 심 연」은 가족 경험이 여성의 기형적이고 불안한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문제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아의 가정 환경과 관련된 불안한 정체성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녀가 그린 그림이 “공포와 쾌감과 죄스러움의 불안한 교착(交錯)”(271) 상태를 보여준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런 그림을 본 일이 없었다. 억지로 말하면 그것은 의식(意識)의 심연 (深淵)에서 일어난 비사(秘事)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 공포와 쾌감 과 죄스러움의 불안한 교착(交着) ― 그 위를 칼끝 같은 섬광이 무슨 구원이나 처럼 새하얗게 번득이고 있는 것이다. (…) 그런 것들이 정신분석상으로 보면 성 기(性器)를 상징하는 것이고, 여자 환자는 특히 다소 음(淫)해진다는 것은 몇 번 드나드는 동안에 얻은 지식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그림에서 받은 불안의 정체가 어렴풋이 짐작되어지며 웬지 전아의 그림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참기 어려웠다기보다 그런 그림을 그린 그녀가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을 정시하려고 애쓰는 것같이 마음이 흔들렸던 것일지 모르겠다. (271)

미술을 전공한 전아에게 그림은 만든 사람이 하나의 의미를 구상시킨 것 (267)이다. 전아의 담당 의사와 ‘나’는 전아의 그림을 억압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읽고 있지만, 전아의 불안은 그들이 공유하는 정신분석학적 지식 으로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이 불안의 형태는 매우 낯선 것으로 ‘나’는 그런 그림을 본 적이 없다. 때문에 전아가 표현하는 불안의 정체는 ‘어렴풋 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 ‘나’는 ‘정상인’(263)이며 전아는 자기 감정의 경사(傾斜)를 끝까지 타고 내려가는 사람이다. ‘나’와 전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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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분석자-환자의 관계로 바뀌는 정신병원에서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정시하려는 자기 표현, 즉 ‘감정의 심연(深淵)’은 마음의 ‘비사(秘事)’로써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정상인들과 격리된 존재이기 때문 이다. 소설의 후반에서 전아의 그림은 큰고모가 다녀간 날 그려졌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는 불안의 근원에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해온 가족이 존재하 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규율 속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 과 불안의 형태는 전아의 그림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매우 모호하고 병리 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고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여성의 타자성 은 정신병원이라는 격리된 공간에 머물며 남성 인물에게 이해불가능한 것 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비자―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 화폐개혁 후의 구화(舊貨)가 한 장 뱅그르르 돌 았다. 뒤이어 누구한테선가 들은 어떤 일본의 악덕상인(惡德商人) 이야기가 상 기되었다. 북만주 시베리아를 훑다시피 하며, 가진 악독한 짓으로 거만의 돈을 벌은 그가 트렁크 몇 개에다 가득 루불화를 채워, 고국으로 떠나려던 아침, 혁명 이 일어났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 몇 개의 트렁크를 들고 미친 듯이 네 거리로 달려가서, 그때껏 모아온 돈을 모조리 바람에 날려버렸다 한다.

못을 꽂아 놓은 병원문을 나오면서, 나도 그 악덕상인과 같은 흉포한 충동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272)

전아의 정신병으로 ‘나’의 욕망은 좌절된다. 가난하지만 야망 있는 청년 인 ‘나’는 미국 유학 비자를 받고 기적을 바라지만, 의사와 면담 후에 그것 이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말에 인용된 어느 악덕 상인에 관한 삽입 서사는 ‘나’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그가 호주머니에서 꺼낸 비자는 출세 와 신분 상승이 상징이었지만 ‘화폐개혁 후의 구화(舊貨)’로 전락하고 만다.

이 이야기를 상기함으로써 주인공은 ‘악덕상인’처럼 자신이 품었던 기회주 의적 욕망의 무상함을 깨닫고 있다. 그의 욕망이 기적을 바라는 희망을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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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극적인 변화를 겪는 것은 정신병원을 나오면서부터이다. 전아가 가부 장적 규범의 희생자로서 불가해한 타자로 묘사되는 반면 세속적 욕망의 좌 절 속에서 ‘나’는 내면의 새로운 도덕적 각성의 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4. 여성 육체의 기호화 - 「천사」, 「그대로의 잠을」

남성 서술자의 관점에서 그려지는 여성 인물들의 정체성은 그들의 사회 계급적 특징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천사」와 「그대로의 잠을」에서 부르주 아 여성과 하층민 여성은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 다. 「천사」는 ‘송선생’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가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무위도식하는 가운데 부잣집 소녀에게 연정을 품고 결국 체념한다는 이야 기이다. 그는 교편을 잡은 일이 없지만 가난한 농군의 자식이라는 계급적 콤플렉스로 열심히 공부해 서울의 명문 대학을 다녔다. 당시 명문가의 자제 S와 교류하며 시집 출판을 꿈꾸던 문학 청년이었지만, 민족운동을 하던 S 와 함께 옥고를 치르고 일경(日警)의 앞잡이가 된 친구의 배신으로 S의 죽 음까지 겪게 된다. 그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자신의 삶이 기차의 속도만큼이나 빨리 퇴색해 가는 것을 느낀다. 그의 낙향은 청춘의 희망과 열정의 상실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아내의 연방 빙글거리는 입술 밑의 지저분한 이, 얼쑹덜쑹한 얼굴, 지리뚱한 허리, ―차라리 여러 아이가 빨아서, 늘어져 버린 쇠불알만한 추악한 젖통까지 내 놓았으면―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추악해져야만 무 엇인가가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자꾸만 솟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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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푸는 저 무지하고 추한 여자가 내 아내란다. 왼눈이 썩어 굴같이 희뿌옇 게 된 귀염성 없는 저 촌 아이놈이 내 아들이란다. 이 돼지울 같은 방이 내 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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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내 자신은 또 이 돼지우리 속에서, 짜장 돼지처럼 먹고 자고 자고 먹고―얼마 든지 뜻있게 보람있게 지낼 수도 있었던 세월을 헛살아왔다. 무엇인가가 내 내 부에서 터졌다.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내의 뺨을 후려 갈기고 있었다. (…) 이 찌들은 처참한 방이 그대로 나의 감정풍경으로 보였기 때문이리라. (287)

한마디로 말하여 색채(色彩)였다. 눈이 번쩍할 만큼 선명한 진홍(眞紅) ― (…) 어미(語尾)가 올라간 서울말이다. 부드럽고 윤이 있고 애애하고―아니 구 구스러운 그런 것들을 제쳐 놓더라도 우선 귀에 설은 말이란 이유만으로, 나에 겐 소녀의 말이 무슨 음악이 나처럼 울렸던 것이다. (…) 인중이 몹시 짧아, 언제 나 가볍게 열린 아담한 입이 그녀가 한번 끌고 온 일이 있는 암염소의 젖꼭지처 럼 연한 분홍색이었다. 윤기가 없는 피부다. 낡아서 윤기가 가신 것이 아니고 윤 기가 흐를 만큼 채 자라지 못한, 솜털에 덮인 어린 피부인 것이다. 강파른 이마에 서 솜털같이 보드라운 머리털 아래의 얼굴에도 살이라곤 없었다. 그러면서 물같 이 연해 보인다. 뼈(骨) 자체가 보드라운 것인가. 잠잠히 있을 때와 움직일 때의 표정이 너무 다르다. 검은 자위가 꽉 찬 눈만 하더라도 샛별같이 총총한가 하면 이내 빛을 지워버린다. (279~280)

그의 고향에는 집안의 강제로 결혼했지만 처음부터 싫어했던 아내가 있 다. 이 소설의 남성 서술자는 아내와 여학교에 다니는 소녀의 외양을 자세 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혼자서 물건을 떼어다 가게를 꾸리며 아 이들을 키우는 억척스러운 촌부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거친 사투리를 쓰 고 불결하며 뼈마디가 장골처럼 억센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아내는 ‘나’와 달리 강한 모성애와 생활력을 가진 여인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서울에서 겪은 ‘나’의 좌절과 불만은 현실에서 자기모멸감으로 이어지고 아내에게 투 사되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의 삶이 황폐해질수록 소녀는 그에 게 거의 도취에 가까운 “생명이 황홀하게 중절(中絶)되는”(280) 경험으로 다가온다. 소녀가 입은 진홍빛 스웨터에 대한 매혹은 과거 명문가의 자제 S에게 매혹되었던 그의 계급적 선망 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소녀가 쓰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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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서울말, 앳되고 부드러운 얼굴, 그녀가 읽는 시집과 부잣집 여학생이 라는 신분은 그녀가 속한 계급과 그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결국 ‘나’는 “그 리움을 묻고 간 요정(妖精)”(291)을 잊지 못하고 소녀의 집으로 찾아가게 된다.

이 소설에서 아내와 소녀에 관한 묘사에 열거된 말투와 복장, 몸가짐 등 은 여성의 육체에 새겨진 계급적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서사 양식은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육체를 기호화한다. 피터 브룩스에 따르면, 육체 는 서사물의 중심 기호이자 서술적 의미들을 연결시켜주는 중심 고리로 작 용하며 개인의 육체에 대한 구별은 광범위한 문화적 고려의 대상이다.13) 육체에 부여된 정체성의 표지들은 개별 여성들을 계급적으로 문화적으로 구별하는 방식이다. 「천사」는 남성 서술자의 시선으로 여성 인물의 육체를 무식한 하층민 아내와 천사이자 뮤즈로서의 소녀로 형상화하고 있다. 지식 인 남성이 바라보는 이 여성 인물들은 각각 비천하고 모성애 강한 하층민 과 교양 있는 여학생으로 유형화되고 있다.

「천사」가 계급적이고 문화적 선망의 대상으로서 여성 인물을 그렸다면,

「그대로의 잠을」은 하층민 여성의 모성애와 생명력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누이의 노력으로 규수와 약혼도 했고 남들이 부러워하 는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지만, 누이의 완벽에 가까운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부자유한 얼간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그가 살인자가 될 것 임을 암시하는 미신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인격에서 주체성을 박탈한 최초 의 속박이자 미망(迷妄)이 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반장을 맡은 그는 수 재(秀才)라는 이름에 갇혀 친구들에게 소외당하고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모조리 빼앗겨버렸다고 생각한다. 철저한 불교 신자인 그의 누이는 내세울 집안이 아님에도 가문 타령을 하며 조실부모한 처지에 남동생을 훌륭하게 성장시켜야겠다는 사명으로 그의 미국 유학을 추진했다. 그는 자신이 주체

13) 피터 브룩스, 이봉지·한애경 옮김, 육체와 예술, 문학과지성사, 2000, 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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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닌 객체로서의 삶을 살아왔고, 누이와 주위 사람들에 의해 스스로 선 택하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소설에서 그가 삶의 의미를 느끼는 유일한 인물은 그에게 눈 먼 아이의 진료를 맡기는 어 린 어머니이다. 그녀는 가난하고 야윈 모습으로 사창굴 움막에서 몸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하층민 여성이다.

모성애 ― 처음 그 산부인과 병원에 눈먼 아이를 안고 온 그녀가 그토록 애처 롭게 보인 것은, 또 그 굴 속 같은 움막에서 오히려 경건(敬虔)이랄까, 무언지 삼가는 마음을 갖게끔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렇다! 확실히 그것은 존재(存在) 의 영점(零點)에 서서, 아직 끓고 있는 강한 모성애였던 것이다. (305)

있는 대로의 시대(時代)의 슬픔과 괴로움이 덮쳐 있는, 그녀는 그런 대로 무 척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명랑성에는 처음 적이 놀랐다.

그야말로 다 죽어가는 중환자가 일어서서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 나가는 것을 본 것 같은 놀라움, 그것이었다. 그것은 삶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분명 「살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 그릇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런 대로 피가 엉킨 삶을 볼 때 돌이 켜지는 것이 있었다. 여지껏 살아온 것이 아니고 끌려 왔다는 느낌이었다. 너무 나 안이하고 평탄한 삶, 스스로 책임져 행동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 이고 이 여인의 그것처럼 숙명이 되는 일은 없었고, 그저 간단히 기입된 경력(經 歷)의 책장이 수월하게 넘겨졌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눈먼 이 아이는 어쩌면 병들고 가난한 어린 어머니에게 있어 장질부사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 그 장질부사는 죽어야만 완치될 수 있 는 질병이었다. 그토록 아이에 대한 그의 정성은 극진한 것이었던 것이다. (307)

서술자는 가난 때문에 성매매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서 명랑성 과 삶의 활력을 본다. 그녀는 괴로움을 참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 있는 건강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삶은 이끌리듯 수동적으로 살아온 그와 다 른 삶이었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안이하고 평탄한 삶을 자각하게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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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 하층민 여성의 건강성은 그녀의 극진한 모성애로 표출된다. 의사 인 ‘나’의 관점에서 그녀의 모성애는 장질부사처럼 “죽어야만 완치될 수 있 는 질병” 같은 것으로 비춰지지만 ‘존재의 영점(零點)에 서서, 아직 끓고 있 는 강한 모성애’는 비천한 신분인 그녀에게 느끼는 경건함의 근거이다. 그 녀에게 아이에 대한 사랑은 숙명이고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는 “동 정이라기보다 인간의 괴로움에의 공감”(307)을 느끼며, 정작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애착을 갖는다.

그는 약혼녀와 미국행을 앞두고 벌인 송별회에서 친구들의 외면을 받고 소외감과 분노를 느낀 직후 그녀의 움막으로 찾아간다. 특별한 목적이 없이 이뤄진 그의 방문은 외부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살아온 그에게는 자신의 감 정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밤늦게 찾아온 그를 손님으로 온 것으로 오해한 그녀는 완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고 그는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녀가 “선상님 같은 분이…… 선상님 같은 분이”라며 놀라 피하자 그는 “욕정과 동떨어진 횡포한 충동”(310)에 사로잡힌다. 그 말이 그에게는 자신을 또 다른 영어(囹圄) 속에 가두는 의도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에게라기보다 그녀의 거절이 연상시킨 모든 것에 대한 살의(殺 意)”(313)로 저지른 살인은 늘 인생으로부터 거절당해 왔다고 믿는 그가 감 행한 유일한 행위가 되고 있다.

「천사」와 「그대로의 잠을」에서 남성 서술자는 지식인 남성으로서 자신 의 열등감과 낙오감, 분노를 하층민 여성에게 폭력적으로 투사하는 방식으 로 그들을 재현한다. 여성의 육체는 계급적으로 구별되는 기호를 통해 가시 화되고 하층민 여성은 모성애와 경건함을 갖춘 존재로 등장한다. 근대 문학 에서 하층민 여성은 근대 지식인 남성의 성적 욕망이 투사 대상이었고, 그 들은 애초에 욕망을 규제하고 관리할 만한 도덕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존 재로 인식되었다.14)한무숙의 소설에서 하층민 여성의 존재는 강한 모성애

14) 이혜령, 「식민주의의 내면화와 내부 식민지 : 1920~1930년대 소설의 섹슈얼리티·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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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생활력으로 표출되면서도 「천사」에서는 소녀와 대조적으로 열등하고 비천한 몸으로, 「그대로의 잠을」에서는 모성애의 경건함과 명랑성으로 표 현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설들에서도 여학생인 소녀와 하층민 여성은 그 계급적 차이에도 남성 인물에게 도덕적 각성의 계기를 제공하면 서 인간 삶의 윤리라는 주제를 추동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들의 결말을 살펴보자. 「천사」에서 ‘나’는 소녀가 사는 과수원집 을 찾아가지만 자신이 소녀에게 준 대학 시절의 소중한 원고들이 사과 봉 지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경악과 굴욕, 절망을 느낀다. 사랑의 열정이 사라지고 비로소 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겸허한 기쁨’을 느낀다. 그 것은 강물이 흐르듯 “지극히 평범하고 무의미한 삶”(293)으로서 영원성에 참가하고 있다는 실감과 영원하고 완전한 허무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 다. 폭풍이 가라앉은 뒤의 안도감과 같은 주인공의 급격한 감정 변화는 삶 의 덧없음과 운명에 대한 순응의 자세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로의 잠을」의 주인공은 움막이 불에 타는 바람에 살인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 음에도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 자수하여 미결수가 된다. 남들은 자살 행 위라고 펄펄 뛰었지만 그는 자살한다는 것도 “자신으로서의 행위”(313)라 고 믿으며 속죄(贖罪)의 삶을 선택한다. 출생과 관련된 미신은 현실이 되었 고, 살인은 역설적으로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한 선택에 책임질 기 회가 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삽입된 미신 이야기와 남성 서술자의 운명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 인물들은 여성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좌절과 실패를 겪는다. 남성 서술자가 묘사하는 여성은 계급적으로 구분되며 하층민 여성의 모성애는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만, 이 소설들에서도 주인공은 좌절과 실패 끝에 결말 에 가서 자기 각성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천사」와 「그대로의 잠을」에서 그들의 태도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속죄(贖罪)를 통한 주체적 삶이라는 정

계급」,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전망과 현황, 소명출판, 2008, 200~2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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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가치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남성 서술자의 의미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에 수록된 한무숙의 소설들에서 활용되는 삽입 서사 는 이중의 서사 구조를 형성하면서 인물과 주제에 대한 암시와 의미를 보 충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면서 도 결말 부분은 자기 각성과 삶의 윤리를 표현하는 남성 서술자의 진술들 로 채워져 있다. 한무숙의 소설에서 삽입 서사와 남성 서술자가 서사에 미 치는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돌」과 「그대로의 잠을」에서처럼 삽입 서사 의 내용 자체가 주인공의 운명이 되기도 하며, 「감정이 있는 심연」에서처럼 주인공의 급격한 심경 변화의 촉매가 되기 때문이다. 이 삽입 서사들은 이 야기의 결말과 인물의 심리에 관여하면서 소설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 내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삽입 서사는 소설에서 구현되는 선과 악, 본능 과 도덕, 죄와 속죄라는 인간 보편의 윤리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사적 특징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 인물들은 그 사회적 지위와 계급적 성격의 다양성에도 사랑과 결혼, 가족 경험으로 고통 받으며, 가난 과 가부장제의 억압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감정이 있는 심연」에서 제시된 가족 단위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 가부장적 사회의 불 가해한 타자로 보여지는 여성은 현실에 대한 선명한 문제 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한무숙의 소설이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여성이 처한 현실적이 고 사회적인 조건들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전집의 수록작 중 유일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고 있는 「유수암」도 그러한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1960년대 잔존하고 있는 퇴 색한 전통의 상징으로서 기생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절개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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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 혈육의 정이라는 대체로 전통적 여성의 속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면모 를 보여주지만 결혼과 가정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여성들 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이들이 사랑과 배신, 혼외 출산 등으로 고통 받는 존재들이며, 그들의 불행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가난 때문이 라는 것을 곳곳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양길에 접어든 요정 ‘유수암’의 주인 진경은 중년의 기생으로 운영난과 연인 정진수의 옥바라지로 큰 빚을 졌음 에도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유수암을 처분하지 못한다. 진경의 믿음과 달리 이들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진수는 이미 석방되었음에도 정치인으로서 세간의 이목과 본부인의 감시 때문에 그녀를 찾지 않는 것으 로 나오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화려했던 유수암의 수각(水閣)에서 중년의 기생들이 태평가(太平歌)를 부르는 동안, 독자들은 유수암이 이미 경매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수암」의 기생은 전통적인 여성상 의 잔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변화되어 있고 정서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여성 표상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한무숙의 다른 소설에 나 타난 여성 인물들과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15)

그렇다면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일인칭 남성 서술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앞서 설명한대로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에 포함된 한무 숙의 작품들은 「유수암」을 제외하고 남성 서술자를 채택하고 있다. 일인칭 남성 서술자는 여성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가 됨으로써 여성이 놓인 사회적 현실을 고려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런 경향의 작품을 실 은 것은 남성 서술자가 발휘하는 서사적 효과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5) 예를 들어 한무숙의 또 다른 대표작 「축제와 운명의 장소」의 전옥희 여사는 말기 암으 로 병원의 무료환자로 홀로 삶을 마감한다. 첫사랑이었던 독립운동가 청년이 옥사하고 그의 아이를 사산(死産)했던 경험은 그녀의 운명이 되어 ‘허식과 굴욕과 멸시와 궁핍’에 찬 삶을 살게 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명옥이」에서 명옥은 ‘베아트리체’처럼 정신적 인 사랑을 하고 싶어하지만 육중하고 추한 외모로 불행하고 가망 없는 사랑을 거듭하다 가 점점 타락과 추문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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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여성 인물의 시점보다 남성 주인공의 시점이 여성의 삶과 그들이 겪는 억압과 문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균형 감각과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무숙의 소설에서 서사를 주도하는 남성 인물이 식 견 있는 남성이나 믿을 수 있는 서술자로서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관찰 자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한무숙의 소설에서 결말은 남성의 자아 의식과 그의 윤리적, 도덕 적 각성에 맞춰져 있다. 소설에서 남성 인물들은 예외 없이 여성을 통해 사 랑을 경험하고 좌절하면서 인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 결말이 운명 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허무를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체의 경험 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남성 서술자의 몫인 것이다. 반면 여성 인물들은 소 설에서 그만한 위상을 부여받지 못하고 남성 인물들과 비대칭적 관계에 보 여주고 있다. 소설에 나타난 여성의 공간은 옥수암(「돌」), 정신병원(「감정 이 있는 심연」), 사창굴 천막촌(「그대로의 잠을」), 유수암(「유수암」) 등 도 시나 마을과 같은 생활의 영역에서 동떨어져 있거나 격리되어 있으며 몰락 이 예견된 자리에 있다. 여성 인물의 주변화는 이런 공간의 설정과 무관하 지 않다.

한무숙의 소설은 여성의 삶에 가해지는 억압과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심 을 갖지만 소설의 결말은 대부분 ‘동양의 지성’인 ‘오성(悟性)’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허무주의로 처리되고 있다. 소설에 인용된 삽 입 서사가 인간 삶에 대한 도덕적 알레고리로 기능하는 경우, 결말 부분의 계몽적 성격은 더욱 강조된다. 이 소설들이 보여주는 체념과 관조의 자세는 모순을 걸러내고 외화(外化)하는 작용으로 행위에 채찍질하는 서구적 이성 이 아니라 ‘동양적 오성’의 원리, 즉 자기 모순을 항상 간직하고 수정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의식(意識)을 고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16)한무숙의 소설에서 자기 의식을 고치고, 자신을 각성하는 주체는 남성이다. 일인칭

16) 임헌영, 「한무숙작품해설」, 한국대표문학전집 8, 삼중당, 1971, 79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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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서술자는 가부장제의 억압성과 가난 등 현실이 어떻게 여성의 삶을 제한하고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해 충실한 전달자가 되지만, 소설은 남성 인 물의 삶에 대한 통찰과 자기 의식을 각성하는 정신적 승화로 나아간다. 이 러한 패턴은 뺷한국여류문학전집뺸에 수록된 한무숙의 대표 소설에서 반복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간 보편의 윤리를 다뤄온 그의 소설이 남성 주체의 자기 승화로 추동되는 서사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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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issue of dual-structured narratives and male narrators

-Focus on short novels by Musuk Han

17)Kim, Eun-seok*

This paper studies short novels by Musuk Han published in Korean Women’s Literature Collection and contemplates the significance of the male narrator, as well as the dual-structured narratives that appear repeatedly in these novels. Musuk Han’s novels highlight the theme or foreshadow the ending by using embedded narratives that structurally fortify the main plot. Musuk Han’s embedded narratives, usually comprised of legends of the past, myths, or hearsays, indirectly indicate the derailment of the main character’s desire and his resignation, but they are also connected with the theme of the novel in the sense that they convey social norms and life lessons. The embedded narratives that are used in these novels carry educational and implied messages, so that they are able to supplement and fortify the main theme of the novels, particularly, the moral awakening of the male characters.

Most novels by Han, except <Yusu-am>, use a first-person male narrator and have a love story as the foreground. Female characters are reconstructe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male character. In this case, the male narrator becomes the observer of the female characters, who convey the social conditions to which the female characters are subjected, in a relatively objective manner. This male narrator is characterized by a failed relationship with a woman and his subsequent transformation into a moral subject through his resignation to life and self-realization.

However, the female presence in the novel becomes isolated or disappears, and the role of finding the meaning of life through moral

* Dongguk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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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phany falls into the hands of the male character. In Musuk Han's novels, female characters are often described as beings that suffer from male-dominant rules and oppression, which are related to the family experience in Korean society. This novel is meaningful as an opportunity to portray women as incomprehensive outsiders to a male-dominant society, but the female characters tend to be marginalized in the process of the subjectification of the male character who leads the narration. This indicates that Musuk Han's short novels with male narrators use narrations that are driven by male desires.

Key Words : male narrator, embedded narratives, female representation, family experience, body symbolization

<필자 소개>

이름 : 김은석 소속 : 동국대학교

전자우편 : aimhere@naver.com

논문투고일: 2017년 7월 31일 심사완료일: 2017년 8월 13일 게재확정일: 2017년 8월 22일

참조

관련 문서